도시에서 속도감과 경쟁 속에서 투쟁하듯 살아가다 보면 여백이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서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운전대를 잡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군산을 지나 새만금 방조제를 거쳐 부안으로 우회하여 김제 고향땅을 가는 코스를 밟는다.
혼자 하는 여행이라 무료할 듯도 하지만 향수를 돋구어주는 경음악이나 7080노래를 들으며 가는 기분은 넉넉함 그대로다. 어쩌다가 서녘 하늘에 노을이 붉게 물들어가는 정경이 펼쳐지기라도 하면 나는 어김없이 추억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초등학교 3학년 초봄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를 부르셨다. 넓은 마당 한쪽 구석에 매어놓은 암소한테 나를 데리고 가셨다. 그 암소는 우리 집 재산1호였다. 봄 가을이면 아버지는 새벽에 이 소를 끌고 나가 논갈이하고 해질 무렵에 돌아오셨다. 당시 논 한 필지(1,200평)를 갈면 나락이 한 가마였는데 논갈이 선수이신 아버지는 하루에 두 필지를 갈아서 그 소득으로 우리 7남매 학비를 대고 생계를 유지하셨다. 거기다가 2년마다 겨울이면 귀여운 송아지를 한 마리씩 낳았으니 이 암소는 우리 집 재산1호가 분명했다.
9살 겁쟁이 소년에게 이 덩치 큰 암소는 가까이 가기에는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아버지는 “영만아, 너 이 큰 소를 쉽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줄테니 이 아버지가 하는 것을 잘 보아라.” 하시더니 소 콧속을 뚫어서 걸어놓은 코뚜레를 붙잡고선 “이놈, 얌전히 있어. 오늘부터는 영만이 말도 잘 들어야 해. 알았지?”하면서 흔드는 것이었다. 암소는 아버지 코뚜레를 잡은 손길에 따라 꼼짝 못하고 끌려 다니면서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는 소 고삐를 놓더니 말씀하셨다. “영만아, 이 소는 덩치가 커도 나와 오래 함께 지내서 내 말을 잘 알아들어. 너도 내 아들이니까 말 잘 듣겠다고 약속했어. 혹시 말 안 들으려고 하면 이 코뚜레를 잡고 큰 소리로 혼내봐. 그러면 금방 잘 듣게 될거야. 자, 그럼 한 번 해볼까?” 하시며 나의 왼손에 코뚜레를 잡게 해주셨다.
나는 겁이 잔뜩 났지만 ‘옆에 아버지가 계시니 괜찮겠지’하는 믿음으로 코뚜레를 단단히 잡았다. 소에게서 점점 멀어지시던 아버지가 내 뒤에서 지시하셨다.“네 오른손으로 뺨을 세게 때려봐. 그리고 ‘내 말 잘 들을거지?’ 하고 외쳐봐.”나는 겁먹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놀랍게도 소는 눈을 꿈뻑꿈뻑하며 기죽은 듯이 서 있었다.
그후 3일 동안 아버지는 학교 갔다온 나를 불러내서 소 목에 걸린 줄을 잡고 앞에서 끌게도 하고, 뒤에서 따르게도 하고 코뚜레를 잡고 호통치게도 하는 등 연습을 시키셨다.
다음날 아버지는 암소를 끌고 나를 따르게 한 다음 집 뒤 뚝방 길로 나가셨다. 광활 땅은 바다를 막아 육지로 만든 개간지라서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수로가 잘 연결된 농촌이다. 정읍 칠보댐으로부터 수로를 내서 농사철이 되면 물이 철렁철렁 흘러서 어린 나에게는 강처럼 느껴지는 대수로였다. 4월이라 아직 본격 농사철이 아니라서 물은 바닥에만 얕게 흐르고 있었다. 우리집은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1답구였다. 개간지가 아닌 성덕면 가실까지는 약 3km가 되는데 일직선으로 뚝방길이 펼쳐져 있다. 당시에는 농약을 별로 사용하지 않을 때라서 뚝방 양 기슭에는 토끼풀, 강아지풀, 야생 잔디, 피 등 갖가지 풀들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뚝방 길에 들어서자나자 소는 진수성찬 밥상을 만난 듯 풀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한 시간 반 쯤 지났을까 소는 배가 불렀는지 풀 뜯기를 게을리 하며 다른 곳을 쳐다보곤 했다. 아버지는 “이제 배가 찼구나.” 하시며 집쪽으로 방향을 돌려 오다가 뚝 아래로 내려가 소에게 물을 먹게 했다. 나는 그 물 마시는 소를 보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소는 대식가였다. 벌컥벌컥 마시는데 주변물이 빠른 속도로 빨려 들아갔고 그 시간이 1분은 넉넉히 더 되는 것 같았다. 물 마시기를 마친 후 마당으로 와서 말뚝에 끈을 매신 후 나를 다시 부르셨다.
소 왼쪽 옆구리를 가리키며 “영만아, 소는 쉬지 않고 먹기만 하잖아? 소는 먹을 때 먹기만 하고 한가히 쉴 때 먹은 걸 다사 꺼내 씹어서 소화시키는거야. 그래서 먹을 때 계속 담아두기만 하는데 그 저장하는 위가 바로 여기에 있어. 이곳이 배 고플 때 쏙 들어가 있다가 배 부르면 이렇게 빵빵해지는 거란다.”
나는 오늘 내가 보고 경험한 일이 재미있고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 암소에 대해 많은 것을 안 것 같은 뿌듯함도 느껴졌다. 다음날
아버지는 “영만아,이제 너는 이 소와 친구가 되었어. 이 소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겁내지 않아도 되고 너를 잘 따를거야. 어제 내가 한 것처럼 저 뚝방에 가서 풀 먹이고 올 수 있겠어? 너 혼자?”
며칠간 소를 다루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연습도 한지라 나는 망설이지 않고 “네, 할 수 있어요.” 씩씩하게 대답했다. 요즘 같았으면 아들 혹사시키는 아버지라 이웃집에서 신고 들어가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TV도, 게임기도, 장난감도, 학원도 없었던 그 때 소년기를 보냈던 게 새삼 감사하게 느껴진다.
내가 4학년 초에 김제 읍내로 전학을 가게 되었으니까 그 해 가을까지 6개월 정도를 나는 해질녘에 우리 암소와 동행하며 나날을 보냈던 것 같다.
나는 소에에 풀을 뜯기며 생각했다. ‘소는 참 착하구나. 꾀를 부리거나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이렇게 겁쟁이인 조그만 사람인데도 아버지 아들임을 알고 무시하지 않고.....’
소가 풀을 먹는 건 수학 공식 같았다. 집에서 나서면 어제 먹던 곳까지 규칙적인 보행을 하게 된다. 어제 마지막 장소에 오게 되면 어김없이 쉼 없는 풀 뜯기가 시작된다. 뚝방에 선채로 아래로 풀을 먹기에 폭이120cm정도로만 먹고 그 아래는 가지 않는다. 100여m정도 먹고 나면 꼭 해찰을 하게 된다.
풀 먹는 속도나 방법은 늘 공식이었다. 그 해찰이 나에게는 ‘이제 배 불렀어. 그만 집에 가자.’하는 사인으로 느껴졌다.
나는 매일 만화책을 두 권씩 들고 가서 소 줄을 놓아두고 30m 쯤 앞에 가서 보다가 가까이 오면 앞으로 이동하며 읽곤 했다. 평생에 독서를 제일 규칙적으로 했던 시절인 것 같다.
한번은 소 풀 뜯기가 끝났는데 만화책에 몰두하느라 그걸 느끼지 못했다. 암소는 이미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달려갔는데 웬걸 내가 달려오는 것을 느낀 소도 뛰기 시작하는거다. 놀래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뛰었지만 원래 나는 달리기에 소질이 없었던 데다가 그 힘센 암소와 속도 경쟁이 불가능했다.
한참을 늦게 헐떡이며 달려가니 그 암소는 뚝 아래애서 물을 실컷 들이키고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안도감이 들고 다행이다 싶었지만 나는 코뚜레를 힘껏 잡고 좌우로 흔들면서 세차게 뺨을 세대 내리쳤다. ‘임마. 나랑 같이 와야지 너 그렇게 뛰어 오면 어떡해? 다음부턴 나랑 같이 오는거야. 알았지?“ 암소는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다란 눈을 껌뻑거렸다.
다음날 풀 뜯기가 끝났을 때 어제 일이 즐겁게 떠올랐다. 장난기기 발동했다. 나는 줄을 놓고 암소에게 소리쳤다. “자. 우리 어제처럼 뛰자. 출발!!!”
그날부터 집에 돌아오는 길은 달리기 경주시간이 되었다. 물론 내가 백전 백패였지만.....
소와 함께 집에 오는 길은 너무 뿌듯하고 헹복했다. 광활은 야산도 전혀 없는 평야지대다. 집에 돌아오 는 길 그 끝은 지평선이다. 해가 하루의 수고를 다하고 뉘였뉘였 지는 석양의 모습은 소년의 눈에도 늘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 길 끄트머리 저 너머엔 희미하게 야산이 보이고 그 뒤엔 늘 하얀 연기가 하늘 높이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희미한 야산은 서해의 섬이었고 연기는 장항제련소 높은 굴뚝과 연기였다. 어린 마음에도 이런 생각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참 아름답다. 황홀하다. 그리고 나는 매일매일 행복하다. 먼 훗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도 이 기억이 다 남아 있을까.......’
마당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아버지가 흐뭇한 모습으로 맞아주신다. 줄을 받아 말뚝에 매어놓고 암소 왼쪽 옆구리를 톡톡 두드리시며 “이놈. 오늘도 아주 배부르게 먹었구나. 우리 아들 정말 대단하다. 오늘도 고생했어.”사랑이 가득한 모습으로 칭잔해 주시는거다. 나는 아버지의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 내일을 기다리는 9살 소년이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큼 나도 나이를 먹었다. 여리고 겁 많던 3학년 아들에게 그 소중한 경험을 하게 하신 아버지의 의도와 마음이 나이 먹을수록 가슴깊이 다가온다.
그립다.
고향이 그립다.
서녘하늘 노을과 제련소 연기가 그립다.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