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사지(萬福寺址)를 지나며
장 석 민
열차가 도착했다. 남원역이다.
수십 년을 오가고 있는 고향 역에 또 왔다.
일 년에 두어 번 혹은 서너 번 오는 곳인데도 올 때마다 설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객차 문이 열리고 승객들이 하나, 둘 플랫폼으로 내리고 있다.
플랫폼을 천천히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본다.
세월이 흘러도 그다지 변할 것도, 변하는 것도 없는 농촌의 기차역이다.
예전보다 등산객이나 관광객이 줄어들어 일요일인데도 역 광장이 한산하다.
저만큼에 교룡산성(蛟龍山城)이 보인다.
교룡산성은 삼국시대 말기 이 지역이 백제에 속해 있을 때 축성되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승병장 처영(處英) 등이 성을 보수하고 수축하여 남원읍성과 함께 지키고자 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정유재란 때 백성들이 이곳을 남원성과 함께 지키고자 항전하였으나 결국은 전멸했다고 하는 원한이 사무친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그 때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고 그냥 한 군데에 묻어 주었다고 하는데 후세 사람들이 “만인의총(萬人義塚)”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지금은 사적(史蹟)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기차역을 빠져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기차역 앞 도로 한쪽에 있는 택시 승강장에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빈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한 때는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많이 오갔는데 그 때는 택시 사업이 잘 되었다고 하나 점점 관광객과 등산객이 줄어들고 인구도 줄어들고 있는데 택시는 늘어났는지 택시가 너무 많이 보인다.
고향에 오가면서 가능하면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기차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다 보면 넓은 공터가 보이는데 이곳은 ‘만복사지(萬福寺址)’라고 하는 절터다.
안타깝게도 만복사지 한 가운데를 도로가 관통하고 있어 보기에 그다지 좋지는 않다.
만복사지라는 것을 모르고 도로를 건설했거나 도로용지 수용이 용이하여 그렇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복사에 대하여 일설에는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하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문헌에는 고려 문종 때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던 큰 절이었으나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금은 절터와 유물 몇 가지만 남아서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때 한문소설의 효시인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은 만복사를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라는 한문소설을 남겨 놓았다.
저포(樗蒲)라는 것은 저(樗)가죽나무저 포(蒲)부들포 가죽나무와 부들의 열매로 주사위를 만들어 놀이를 하였던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며, 저포라는 주사위로 저포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매 번 고향에 오갈 때면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만복사저포기가 생각나서 얼마 전에는 다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를 찾아 읽어 보았다.
남원 고을에 양생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부모를 여의고 장가도 가지 못한 채 만복사 동쪽 방에 혼자 기거하고 있었다.
배필을 얻지 못함을 슬퍼하며 시를 읊던 그는 허공에서 ‘절실하게 배필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이루어지지 않겠느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
만복사에서 복을 비는 행사가 있는 날, 양생은 불상 앞에서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여 이기고 난 후 부처님께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축원한다.
그런 후 불상 아래서 배필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부처님이 소원을 들어주셨는지 정말로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부처님께 배필을 찾게 해달라고 축원문을 올리고 있는 양생을 보자 그날로 인연을 맺게 된다.
한밤중에 여인의 시녀가 찾아와서 두 사람의 수발을 들고 정원에 술자리를 차려 즐겁게 놀게 된다. 이튿날 여인을 따라 여인의 집으로 가게 된 양생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사흘간을 지낸다.
양생은 여기가 이승이 아니라고 여겨지지만 여인의 정성에 마음이 끌려 다른 생각은 잊게 된다. 때가 되어 이별해야 할 시간이 되어서 여인의 동무들과 함께 잔치를 열고 헤어지게 된다.
이별의 순간 여인이 은주발을 주면서 보련사로 가는 길가에 서 있다가 자신의 부모님을 만나 인사를 드리라고 부탁한다.
다음날 양생은 여인이 시킨 대로 길가에 서 있다가 여인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양생은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왜란 때 왜구들에게 죽임을 당한 처녀의 환생임을 알게 된다. 부모의 부탁을 받고 양생은 여인과 함께 보련사에 올라가지만 그 여인은 오직 양생의 눈에만 보일 뿐이다. 양생은 여인과 함께 다시 하룻밤을 보낸다.
이튿날 그는 여인을 위한 재를 올리고 두 사람은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양생과 여인의 부모는 같이 슬퍼한다. 여인의 부모는 양생에게 여인 몫의 재산을 나누어 준다. 양생은 그 재산을 팔아 여인을 위해 불공을 드린다. 그러자 꿈에 여인이 나타나 자신은 좋은 곳으로 갔다고 하면서 양생도 착한 업을 닦아 속세에서 벗어나라고 하면서 사라진다.
여인이 떠나간 후 양생은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혼자 살았다. 그가 언제 어디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대략 이런 내용으로써 애틋하면서도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만복사는 없어지고 텅 빈 절터만 남아서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고 있는데 만복사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시 복원해야할 문화유산이지만 만복사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황량하게 비어 있는 공터로 보일 뿐이다.
만복사지를 지날 때마다 아주 오래 전 어린 시절에 만났던 만복사지 옆 마을에 살던 여학생이 떠오른다.
치자꽃처럼 곱던 그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 한 곳에 남아 있다.
사춘기 때 만났던 치자꽃 닮은 그 여학생은 지금쯤 중년여인이 되어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 혹은 누군가의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양생은 장가를 가지 않은 총각이었으므로 부처님께 배필을 만나게 해 달라고 축원이라도 했지만 나는 그럴 수도 없는 처지이니 기억 속에서 떠올려보고 그 풋풋했던 시절을 회상해 볼 수밖에 없다.
갈래머리와 하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보면 괜히 가슴이 쿵쾅거리던 그 사춘기 시절 어느 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고 있는데 골목길 앞쪽에 갈래머리와 햐얀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보인다.
발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조심 그러나 빠른 속도로 그 여학생을 따라 간다.
잠시 후 어느 집으로 들어갔고 대문 밖에서 그 집안을 살펴보니 치자꽃이 예쁘게 피어서 향기를 내뿜고 있다.
그 여학생을 보려고 그 골목길을 수 없이 오가면서, 이름과 학교, 학년 등 그 여학생에 대한 많은 것을 알아냈다.
그 후 깊은 밤 편지를 썼다가 찢고, 다시 쓰고 수 없이 반복하다가 편지 한 통을 써서 골목에 서 있다가 그 여학생에게 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돌아 나왔다.
한편으로는 떨리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왠지 창피하기도 하여 얼굴이 석양 빛으로 변하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골목길을 뛰어 나왔다.
답장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었는데 뜻밖에도 며칠 후 그 여학생으로부터 답장이 왔고, 휴일에 광한루원과 요천수 하천가에서 몇 번 만났는데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음악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고 동갑인데도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누나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광한루원을 천천히 걸으면서 이몽룡과 성춘향을 떠올려 보기도 하였는데 이몽룡과 성춘향이 만났던 때의 나이쯤 되었을 것이다.
오작교를 건너며 할머니가 해주시던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도 생각해 본다.
같이 걷고 있는 여학생이 성춘향이 되었다가 직녀가 되기도 하는데 환하게 웃는 옆모습은 그 집 뜰에 피어 있는 치자꽃이 그대로 옮겨온 듯하였다.
요천수 하천가를 거닐 때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도 좋고 주변 풍경도 좋아 한여름엔 물놀이 하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여름이 끝나가는 계절엔 물속을 오가며 먹이를 찾고 있는 백로만 보이는데 그 여학생도 백로인 듯 고고(孤高)한 모습이다.
그렇게 몇 번의 만남은 꿈처럼 지나갔고, 견우와 직녀도 되지 못했고, 이몽룡과 성춘향도 되지 못한 채 헤어지게 되었다.
그 여학생네 가족이 갑자기 도회지로 이사를 가게 되어 짧은 만남은 추억으로만 남게 되었다.
만복사지를 지나면 그 때가 떠오를 수밖에 없고, 치자꽃을 보면 그 여학생이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깊게 새겨진 기억이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세월이 훌쩍 지나 사십년도 더 지났다.
만복사지를 스쳐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에 아주 오래된 기억이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은 그만큼 뚜렷한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만복사지를 지나서 시내로 들어와 버스를 갈아타려고 시장입구에서 내리는데 노인들만 몇 사람 보이고 시내가 한산하다.
장날만 사람들이 그나마 많이 보인다고 한다.
우리나라 농촌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곳도 급속하게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시내를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다보니 어느 집 담장 옆에 치자꽃이 피어 있다.
치자꽃 닮은 여학생이 있을까 하고 고개를 쑥 빼고 차창 밖을 본다.
치자꽃 닮은 여학생은 보이지 않고 퇴색한 건물 벽에 담쟁이덩굴이 벽을 오르며 손을 흔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