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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정치시민넷 종교시설로 보는 익산근대문화유산 3차 투어기
좋은정치시민넷 종교시설로 보는 익산근대문화유산 3차 투어가 14일에 있었습니다. 이번 투어는 익산의 최남단인 오산 남전교회를 시작으로 원불교 총부 성지, 성당면 두동교회, 익산의 최북단인 망성 나바위 성당까지 가는 일정으로 익산을 종단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어를 준비하면서 날씨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였습니다. 전날까지 비가 내려 행사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을 하였는데 다행히 빗방울이 조금 있었지만 행사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오후 2시에 시작한 투어는 바삐 속도를 재촉 하였지만 지난번 투어와 마찬가지로 어둠이 짙게 내린 후에나 끝났습니다. 4곳의 종교시설만 방문하였는데도 그곳에서 있었던 목사님과 해설사의 설명이 너무 열정이 넘쳐 중간에 끊지 못하였습니다. 토요일 오후 쉬어야 할 시간에 많지 않은 수의 방문객을 위해 시설을 개방하고, 책자도 내어주시고 설명까지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전에도 언급한바 있지만 익산은 역사자원이 참으로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대역사, 근대역사, 종교역사까지 그 분야도 다양합니다. 종교의 역사도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가톨릭, 원불교, 불교까지 대부분 종교의 역사자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익산은 종교역사 자원이 많을까요. 종교가 대부분 국내에서 발생하여 성장한 것이 아니라 외국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바다에 가깝고 만경강과 금강을 끼고 있는 익산에 일찍 다양한 종교가 전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뭔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던 지역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오산 남전교회는 익산 최초의 교회입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지정한 제1호 유적교회입니다. 군산 구암교회, 전주 서문교회와 더불어 전킨 선교사 일행에 의해 복음이 전파되어 설립된 교회이고, 지금도 멀리서 관광버스를 타고, 삼삼오오, 십여 명 이상 규모로 탐방객들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남전교회는 1919년 익산 4·4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 교회이기도 합니다. 4.4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문용기 열사를 비롯하여 박도현, 장경춘, 박영문 열사가 이 교회 출신입니다.
교회 역사에 대해 직접 나오셔서 설명을 해주신 김연태 목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가 설립된 지 올해로 118년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소실되었다. ‘ㄱ’자 교회도 있었는데 소실되었다. 앞으로 복원을 하려고 한다. 복원을 해서 교육관이나 교회센터로 사용할 계획이다.”
“문용기 열사의 손자가 살아 있다. 미국에 살고 계신다. 손자는 할아버지에 대해 ‘어느 독립운동 열사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지방에 묻혀 있다 보니까 등한시하고 소외되어 있는 것 같다.’고 주장하신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익산노회에서 4·4만세운동 기념 예배를 매년 드리고 있다. 올해 96주년 예배를 드렸다.“
“독립만세운동을 하면서 순국하신 열사의 옷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문용기 열사의 혈의다. 현재는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전시된 것은 당시에 3,500만원 주고 제작한 모조품이고 진품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문 열사 사모님이 가지고 있던 것을 며느리에게 주어 보관되어 오다가 국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원불교 총부 성지, 1924년 원불교 전신인 불법연구회 본부가 자리를 잡은 곳이다. 원불교 총부에는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지은 초기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현재는 8개동의 건축물이 등록문화재 제179호 지어 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원불교 총부에 들어섰을 때 들었던 느낌은 자연경관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입니다. 비오는 날 오후 붉고 노란 늦가을 단풍과 어우러진 총부는 어는 산사에 깊이 들어온 느낌이었습니다. 당시 심었던 소나무 숲과 느티나무, 한옥건물은 투어단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두동교회 구 본당은 김제 금산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ㄱ’자형 교회입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도 있듯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는 남녀가 한자리에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전통문화에서 남녀가 한 곳에서 예배를 볼 수 있게 지은 교회가 ‘ㄱ’자형 교회입니다. ㄱ자형 교회는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많이 없어지고 유일하게 두 곳만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두동교회 구 본당은 ㄱ자 모서리에 설교를 위한 강대상이 있고 좌우로 남녀가 구분하여 앉게 되어 있습니다. 금산교회는 남자자리보다 여자자리가 작았지만 두동교회는 똑 같이 지었다고 합니다. 금산교회를 지은 구한말(1908년)시기와 15년 뒤인 두동교회 건축시기(1923년)를 비교하면 여성에 대한 인식이 많이 변했던 것 같다. 그래도 목사님이 설교할 때 여신도들이 앉은 쪽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휘장을 쳤다고 합니다.
두동교회 구 본당 건축자재는 안면도 소나무라고 합니다. 당시 안면도 소나무는 궁궐용으로 사용된 건축자재였다고 합니다. 안면도에서 벌목된 소나무가 바닷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조류를 타고 좁은 성당 수로로 이곳 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렇게 흘러온 안면도 소나무를 값싸게 구입하여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나바위 성당이 있는 성지는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여 첫발을 디딘 곳입니다. 이곳에 세워진 성당이 나바위 성당입니다. 나바위 성당이 있는 곳의 지명은 화산리입니다. 송시열이 강경에서 산을 바라봤는데 너무 절경이어서 화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성당 이름을 산 이름을 따 화산 성당이라고 불렀다가 완주군 화산면과 혼동되는 것을 피하고자 1989년부터 ‘나바위 성당’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합니다. 나바위는 너럭바위가 화산 정상에서 강가를 따라 널려있어 생긴 마을이름입니다.
나바위 성당은 처음에는 한옥으로 지어졌다가 이후에 벽돌로 개조한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종이 들어오면서 한옥구조의 건축물에 첨탑구조 고딕양식이 합쳐진 것입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하고 목수일은 중국인이 맡았다고 합니다. 한옥과 고딕양식이 합쳐진 건축물은 전국 어디에도 없다고 하니까 매우 의미 있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시설로 보는 익산근대문화유산 3차 투어를 끝으로 단체에서 계획한 익산근대문화유산 투어는 마칩니다. 이제는 투어를 통해 찾아봤던 유산을 어떻게 지역의 자원으로 활용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소중한 역사자원을 시민들을 위한 교육 자료로 만들고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대책을 연구해야 합니다.
남전교회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소재
[교회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김연태 목사님]
남전교회(당시 남차문교회)는 1897년 설립된 익산 최초의 교회이며,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 지정한 제1호 유적교회다. 남전교회는 1919년 익산 4.4 익산만세운동의 진원지이다. 또한 만세 운동의 현장에서 순국한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열사를 낳은 교회이기도 하다. 애국지사 김인전 목사, 박연세 목사의 모교회인 남전교회는 6.25 전쟁의 시련을 고스란히 겪은 교회이며, 1970년대 기독교 인권운동의 중심에 섰던 교회, 80년대 반부패 운동에 당당하게 나섰던 교회이다.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입국한 전킨 선교사(한국명 전위렴)는 1893년 9월 육로를 이용해 전주를 답사한 후 서울로 올라갔다. 1894년 레이놀즈 선교사(한국명 이눌서)는 해로를 이용, 군산에 도착해 전주로 들어갔다. 선교사들은 오가는 길, 또는 장터에서 복음을 전했다.
이 과정에서 1897년 익산에 사는 사람 몇 명이 복음을 들었다. 이들 중 7명이 복음을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이들 7명은 주일을 지키기 위해 50리 나 떨어진 군산의 전킨 선교사 집을 드나들었다. 동네에서는 이윤국의 집에 모였다. 전북 익산시 오산면 남전리 남전교회의 시작이었다.
남전교회는 익산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4월4일 남전교회 최대진 목사를 비롯하여, 김만순, 김필례, 장경춘, 군산영명학교 교사 문용기(문정관으로도 불린다.)와 학생 박영문, 박도현 등은 솜리 장날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흰 두루마기를 입은 시위대는 솜리 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대가 긴급 출동, 시위를 강제 진압했다.
그 날 문용기는 일본 경찰이 칼로 오른 팔을 내려치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들어 계속 만세를 불렀고 다시 왼손까지 내려치자 땅에 뒹굴면서 마지막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순국하였다. 이 때 박영문 장경춘 등이 함께 현장에서 희생됐다. * 자료출처 : 한국 기독교회사
원불교 총부
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 소태산 박중빈의 대각에 의하여 창립된 종교다. 원불교의 교명은 우주의 궁극적 진리를 상징한 ‘원’과 깨닫는다는 ‘불’과 가르친다는 ‘교’로써, 우주의 근본진리를 깨달아 실천하도록 가르치는 의미를 지닌다.
원불교란 교명은 처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다. 제2대 종법사 정산 송규가 교명을 원불교라 바꾸고, 1947년 4월 재단법인 원불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원불교가 초기 교단의 기초를 다진 시기는 1916~18년으로 아홉 명의 제자를 뽑아 이들과 함께 교단의 기초를 만들었다.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상당한 기금을 조성하였고, 이 자금으로 1918년부터 1년간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 앞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드는 간척 사업을 하여 2만 6천 평의 농토를 마련하여 원불교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다졌다.
1920년 소태산 박중빈은 부안군 변산에 들어가 4년 동안 교리 초안을 완성하고 사방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1924년 5월 초순 전주 완산동 전음광의 집에서 불법연구회 창립 발기인 모림을 하고 회관 건설 장소를 이리 근방으로 결정한다. 이리로 정한 이유는 이리 부근이 토지가 광활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무산자의 생활이며 각처 회원의 내왕이 편리하다는 점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원불교 총부 성지 이허정 해설사께서 설명을 해주고 있다.]
불법연구회는 1924년 6월 1일 익산군 이리읍 근교 마동 농림학교 시녀방죽 건너 죽산에 있는 새 절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당시 이리에 있는 절은 보광사와 관음사 2개가 있었다. 당시 총회에서 박중빈을 총재로 추대하고 회장으로는 서중안, 평의원으로 8명을 선출한다.
1924년 4월 소태산은 불법연구회 본부를 익산군 북일면(신룡동)의 현 총부 위치로 옮겨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9월 29일자로 신룡리 땅을 3,495평을 매입하여 12월 본관으로 초가집 두 채를 완공한다. 이 최초의 회관을 도치원이라 이름 하였다.
소태산은 모여든 제자들과 함께 낮에는 6만여 평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산업 활동을 장려하였으며, 밤에는 종교이념에 바탕 하여 도덕과 윤리로서 정신훈련을 시켰다.
1943년 소태산에 의해 원불교의 기본경전인 「불교정전」을 완성한다. 소태산은 1943년 6월 1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뒤를 이어 정산종사가 2대 종법사로 취임, 소태산의 유시에 의하여 교명을 「원불교」로 개명, 1947년 4월 재단법인 원불교가 정부의 인가가 난다.
원불교 총부에 있는 공회당, 구정원, 금강원, 대각전, 정신원, 청하원, 본원실, 종법실) 건물들은 익산시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자료 출처 : 익산문화원「익산의 근대문화유산」 2010, 신룡벌 도덕공동체 터전의 확립 원불교 초기교단사 3권 박용덕 2003
두동교회 구 본당
익산시 성당면 두동리 소재,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79호, 1929년 건축, 지상1층/한식목조
두동교회는 1923년 선교사 해리슨의 전도로 처음 설립되었으나 1929년 무렵 “ㄱ자형 교회”를 새로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ㄱ자형 교회는”는 토착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개신교와 전통이 결합하면서 나타난 한국교회건축의 독특한 유형이다. 남녀유별의 유교적 전통이 무너져가는 1920년대에 “ㄱ자형 교회” 건립으로 남녀유별의 전통을 보여주면서 남녀 모두에게 신앙을 전파하려 하였다.
2002년 4월 6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179호로 지정된 두동교회는 “ㄱ자형”평면의 한옥교회로 함석지붕에 홑처마 우진각형
태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금산교회(전북문화재자료 제136호)“와 함께 유일한 ㄱ자형 교회 건물이다.
[두동교회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원로 장로님]
나바위 성당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소재, 사적 제318호, 1907년 건축, 지상2층/벽돌, 한식목조
화산천주교회가 위치한 주변은 나바위 성지로 헌종 11년(1845) 10월 12일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상륙한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중국 마카오에 유학하여 6년간의 신학수업을 마치고 상해부근 금가항에서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을 받고, 같은 해 8월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조선교인 현석문, 이재용 등 11명이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항(현재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그후 다시 군산항을 거쳐 강경부근에 도착하였으나 당시 당국의 감시가 심하여 배를 접안하지 못하고 야음을 이용하여 나바위(당시 황산포)에 상륙하니 상해를 출발한지 42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이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는 강경, 공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가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같은 해 9월 6일 새남터에서 참수 처형되었다.
1925년 로마 베드로 성당에서 복자로 시복되었고,1985년 5월 5일 한국에 교황이 방문하였을 때 천주교 성인에 시성되었다.
[나부위성당 건축양식에 대해 설명하는 김홍균 교수]
[나바위성당 역사에 대해 설명을 해주고 계시는 김택영 사목회장]
화산리의 금강 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천주교회가 생긴 것은 1897년 장약실 신부가 부임하고 부터다. 이후 1906년에는 현재의 성당이 세워졌는데 건축 당시에는 순수한 한옥 목조건축물 이었다.
1916년에는 성당 종각을 증축하였으며 목조로 되어 있던 성당 건문 벽을 벽돌로 개조하였고, 퇴칸은 마루를 없애고 회랑으로 변형하였다. 1922년에는 기둥 아랫부분을 석주로 개수하였으며, 1982년에 종각내부를 수리했다.
이 성당은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교회 신축 건물로써 그 보존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으로 한국 천주교회에서 성지로 지정한 곳에 있는 교회이기에 특히 뜻이 깊다.
나바위 성당은 순례객들이 많이 들 찾아온다. 일주일이면 수백명의 순례객이 찾아올 만큼 인기가 높은 가톨릭 성지다. 특히, 나바위 성지는 강경역 가까이에 있어 기차를 이용한 도보 순례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글 정리 : 손문선 대표/ 사진 : 윤대윤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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