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촌현과 산성과의 관계
정읍천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고비리국과 초산도비리국은 경쟁하였으나 고비리국이 압도했을 것이다. 고비리국의 중심은 지금의 영원면과 고부면 일대였고 두승산을 중심으로 정읍천 유역인 오늘날의 덕천면과 이평면, 농소동, 소성면 구역을 관장했을 것이다. 고비리국은 풍부한 농업생산력과 해상을 통한 물자의 교류 등으로 구축한 경제력과 인구를 바탕으로 초산도비리국을 압도하였을 것이다. 연지동 대실마을 뒷산인 죽지봉의 죽지리 산성은 내성과 외성을 두고 있어 백제 또는 후백제 시대에 관아가 자리한 치소성일 가능성이 있다. 죽지리 산성은 정읍천과 천원천 양쪽으로 연결되는 삼각점에 위치한다.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를 점하는 곳으로 두승산을 중심으로 한 고부문화권과 마주하는 첨단에 자리하고 있다. 초산은 죽지봉과 함께 삼국시대의 산성이 있는 곳으로 내장산에서 죽지봉까지 연결되는 산줄기의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다.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지이며, 이러한 교통의 관문에 산성을 쌓고 지역을 보위한 것이다. 서해안 내륙의 남북을 잇는 관문인 갈재와 새재 사이의 입암산성에 거대한 산성을 쌓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이다. 입암산에는 백제시대에 규모가 크지 않은 성이 처음 축조되었을 것이다. 백제시대에 지금의 정읍지역을 놓고 보면 고사부리군, 대시산군, 정촌현, 빈굴현 등 4개의 군현이 자리했다. 고사부리군과 대시산군은 규모가 큰 고을로 군(郡)이고 정촌현은 빈굴현과 함게 상재적으로 규모가 작은 현(縣)이다. 고사부리군은 마한의 고비리국 또는 구소국을 이어 나갔고, 정촌현은 초산도비리국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대시산군과 빈굴현이 설치되기 이전에 그 지역에 마한 소국이 자리했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분구묘가 발굴된 적이 없으나 대형 옹관편 등이 발굴된 사례가 있는 옹동면 산성마을과 칠보면 백암리 등이 주목된다. 옹동면과 산외면에서 삼국시대의 고분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고, 산내면 사승마을 근처 산자락에 30여 기의 백제고분이 있어 백제의 남방경략의 전진기지인 대시산군의 섬진강루트와의 연결을 시사한다. 고사부리군의 치소는 은선리토성, 백제중방성의 치소는 금사동산성이 회자되었으나 근래 고부 성황산의 산성이 고사부리성으로서 백제 중방성으로 확인되었다. 전선배미나 언축, 사급평, 대포를 지키는 수성, 고분군의 대규모 집적 등에서 은선리토성과 금사동산성을 중심으로 한 은선리 일대가 중방고사성일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대시산군의 치소는 무성리산성이나 그 아래 원촌마을에 자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빈굴현의 경우에는 신태인읍과 감곡면 사이에 자리한 백산에 산성이 있고 남쪽 산골짜기에 관아지가 전해온다. 이 관아지가 고려시대 인의현의 것인지, 백제 빈굴현 때의 관아지인지는 조사된 바가 없다. 정촌현의 관아지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다. 구 정해마을에 관아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게 평가되어 왔으나 산성이 떨어져 있는 것이 문제다.
* 대시산군: 동진강과 섬진강을 연결하는 백제의 남방경략을 위한 전진기지, 호남정맥이 저지선 겸 관문. 산내면에 고분 30여기. * 정촌현: 동진강과 영산강을 연결하는 백제의 남방경략을 위한 전진기지, 입암산과 방장산이 저지선 겸 관문. 신정동과 입암면에 마한과 백제의 고분군.
4. 초산, 샘바다(정해), 정촌의 지명 고찰
1936년 출간된『정읍군지』에는 초산군이 신라시대에 있었고 그 읍지는 정주읍 시기리 남초산봉상이라고 했다. 남초산봉상이라 한 것은 초산의 남쪽 봉우리에 관아터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곳은 초산산성이 있는 곳이다. 초산군은 초산현으로 신라 때라 했다. 전해오기로 초산산성은 후백제의 견훤이 중요하게 여긴 산성이라고 한다.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은 초기철기문화를 배경으로 성립하였으며, 독자적인 지배 세력과 지배 기구를 토대로 성장을 지속하다가 4세기 중엽을 전후하여 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삼국지』의 마한 소국에 대한 기록 순서로 보아, 초산도비리국은 지금의 전라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관우(千寬宇)는 도산현(徒山縣)이었던 지금의 진도군 군내면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병도(李丙燾)는 백제의 정촌현(井村縣)이었던 정읍(井邑)을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초산(楚山)이라고도 하였으므로,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에 비정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초산봉은 사료에 초산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지도서』(정읍), 『호남읍지』, 『읍지』 등에 "초산고성(楚山古城)은 관아의 남쪽 초산 아래에 있다. 민간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옛 읍의 터라고 한다."는 관련 기록이 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정읍) 등에 의하면 초산은 정읍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1872년 지방지도』에 읍치 남쪽에 초산이 표기되어 있으며 산 아래로 '고읍기(古邑基)'라고 기재되어 있다. 1936년 『정읍군지』에는 남초산봉상에 읍치가 있다고 하였는데 『1872년 지방지도』에는 산 아래에 옛 읍터가 있다고 한 것이 다르다. 정조 10년(1786년)에 작성된『호구총수(戶口總數)』에 남일면 초산리(楚山里)가 있다. 초산 서쪽에 있는 구계마을과 낙포리(洛蒲里) 중간에 위치한 마을인 월암리(月岩里)를 속칭 초생이라고 하는데 이는 초산리의 관습음이다. 시기3동을 초산동으로 명칭을 변경했는데 이는 근래 붙인 명칭이고, 지금의 상교동 구계마을에 속하게 된 초산리가 조선시대에 따로 있었던 것이다. 초산리는 인근 낙포리, 고안리 등과 함께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 이름이라 하겠으나 현재는 공식적인 행정마을이 아니다. 초산산성에 신라 때 초산현의 관아가 있었다면 그 이전 백제의 정촌현은 어디에 있었고 그에 앞선 초산도비리국의 국읍은 어디에 있었을까? 마한의 주거지가 대거 발굴된 입암면 마석리와 신정동 금구마을, 그 중간쯤에 위치한 신면리에서 분구묘 8기가 발굴되었고 환두대도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신면리를 중심으로 초산도비리국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설에는 연지동(대실마을 뒷산인 죽지봉에 죽지리 산성이 있고 내‧외성이 있음)에 초산도비리국이 있었다고 한다. 정읍의 대표적인 우물은 정해마을 우물과 덕천 가정마을 우물, 그리고 덕천 천곡약수와 산외 선녀약수이다. 우물 정자를 쓰는 마을은 정해, 가정, 칠정, 한정, 대정이 있으며 샘 천자를 쓰는 마을은 천곡, 표천, 명천, 영천이 있고 옥천과 다천은 절에 있는 샘이다. 두승산 북쪽 황토현 옆에 자리한 덕천면 가정마을 우물물은 사시사철 솟아나 우물郭 너머로 흘러넘친다. 가정(佳井)마을에서는 마한시대의 정호(井戶)유적 2기가 발굴된 바 있다. 정읍에서 가장 오래된 우물터인 것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안산리에도 정해마을이 있다. 샘바다는 마을 안쪽에 샘이 하나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샘물이 마르지 않는다.’라고 해서 바닷물과 연결되었다는 말을 하여 ‘샘바다’라고 하고 ‘샘밭’이라고 불렀으며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정해(井海)라고 하였다. 문경시에 있는 운암사 초입의 마을 이름인 불정(佛井, 부처샘)은 약수로 인해 생겨 났다. 우물 정(井)자를 쓰지만 우물이 아닌 샘이라고 읽어 불정을 부처샘이라고 한다.
정(井)자는 상형자로, 우물을 위에서 보았을 때 네 개의 난간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본떴다. ‘천(泉)’의 고문자형은 샘물이 흘러나오는 형상을 본뜬 것이다.
망제동에 있는 천곡(泉谷)은 속칭 샘실이니 천곡약수로 유명한 곳이다. 샘실이란 동명은 약수로 말미암아 생긴 호칭이다. 음 5월 5일 단오날이면 원근의 남녀노유들이 모여 들었다. 예로부터 고부고을에는 유명한 원천이 7개소가 있었는데 천곡약수는 7원천의 하나이다. 영주지에 의하면 「망제봉 석벽 하에서 흘러 샘을 이루니 세칭 약수라 하여 해마다 단오날이면 마시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다」 천곡약수는 오랜 옛날부터 유명했던 것이다.
고부 7원천: (영원면) 풍월리 경산庚山, (덕천면) 가정리 가정佳井, (망제동) 천곡泉谷, (고부면) 영안리 예천醴泉, (소성면) 원천리 원천源川, (입암면 봉양리) 정동鼎洞
고부고을에는 예로부터 유명한 샘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동명이 있었다. 천곡에는 약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유명한 천곡사지칠층석탑이 있으니 이곳에는 옛날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부군 「佛宇條」에 보이는 등계사의 유적지로 추측된다.(최현식, 정주시지(井州市誌), 향토사료연구소, 1985년) 정해마을의 정(井)과 천곡마을의 천(泉)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이 솟아나서 고이고 그 고인 물 위에 난간을 해놓은 모양이 정(井)이다. 천은 물이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모양이다. 천곡마을의 천곡약수는 약천암이라는 암자에 있다. 산중턱에 자리하고 있으며 석간수이다. 정해마을의 우물물은 남쪽에 호남정맥의 산인 내장산과 오봉산, 삼성산, 입암산 등이 있어 수량이 풍부하다. 정해는 우리말로 샘바다, 시암바다이다. 한자로 井海라 쓰지만 우물바다로 읽지 않고 샘바다라고 읽는다. 그에 비해 泉谷은 샘골이라 하지 않고 샘실, 시암실이라 부른다. 정읍사람들은 샘을 시암이라고 하는 걸 알 수 있다. 백제 정촌현이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정하면서 정읍현이라 하였다. 정촌은 ‘샘동네’이지만 정읍은 ‘샘고을’로 줄여서 ‘샘골’이라 한다. 백제는 왜 정촌현이라는 지명을 붙이게 되었을까? 초산도비리국을 점령하고 백제 영토에 편입시키면서 의도적으로 초산도비리국이 있던 곳에 읍치를 두지 않고 정해마을 일대에 새로운 행정도시를 만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신면유적은 마한계와 백제계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어 금구마을에 백제식 석실분이 축조된 것은 이 일대가 백제 정촌현의 치소였음을 보여준다. 죽지봉이나 초산 아래 언덕지대에서 분구묘나 횡혈식 석실분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혹시 땅 속에 묻혀 있는데 우리가 모르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아예 없었거나…. 흥미로운 것은 정읍역 서쪽 대한여객 차고지 뒤편에 속칭 ‘말무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저평한 평야지대로 상평동, 공평동, 하평리, 삼보평야 등의 지명이 말해주듯이 논농사 구역이다. 정읍천과 가까운 곳이고 하천구역인데 말무덤이라니 혹시 원래는 낮은 언덕이 있었던 건 아닐까? 고사부리군과 빈굴현이 감조하천을 끼고 바다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데 비해 대시산군과 정촌현은 갈령(葛嶺: 오늘날의 호남정맥)을 끼고 산악지대의 관문을 장악하는 위치에 자리잡은 것이 특징이다. 대시산군은 섬진강 세력을 염두에 두고 가야와 신라에 대응했고, 정촌현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근초고왕의 남진 정책이 대시산군과 정촌현을 성립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정촌현의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백제 사비시대에는 정촌현이 백제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고사부리성의 영현에 속했고, 신라 경덕왕 때에는 태산군의 영현이었다가 고려시대에는 고부에 소속되어 감무를 두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현감으로 고쳤으며 고종 32년(1895년)에 군으로 고치고 군수를 두었다는 것이다. 대체로 지역의 지배적인 위치에서 한 단계 낮았음을 알 수 있다. 정해마을이 정촌현 고을터(읍치)가 아니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므로 정해마을을 중심으로 한 정촌현 복원사업은 잘못되었다는 의견이다. 그렇다면 정촌현의 유지는 어디인가? 첫째는 샘바다로 불리는 정해마을이다. 두 번째는 초산이다. 마한시대에 초산도비리국이 정읍천과 초산의 접경지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초산에는 성지가 있다. 정해마을 주변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는 마을이 다수 분포하고, 방사선연구센터를 건립하면서 백제시대의 정교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은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의 금강저지선을 돌파하여 김제와 부안, 정읍의 풍요한 땅을 차지하고 나서, 갈재저지선(백제시대의 갈령도)을 뚫고 나주를 기반으로 한 남방의 마한세력을 공략하고자 한 거점으로 삼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곳에는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의 이르는 동안에 제작된 석불과 석탑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내장산의 사찰과 함께 연지동 대실마을에 있는 사찰은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정읍(정촌현~초산현~정읍현)의 정신적 중심이었을 것이다. 정읍지역에 있는 고려시대의 주요 사찰이 백제의 지방 거점에 자리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제 정촌현이 정해마을에 있었다면 사찰이 자리할 수 있는 곳은 초산이어야 하나 초산에는 불적이 없고 근접한 대실마을에 고려시대의 불상을 보유한 정혜사가 있다. 삼국시대의 불적은 정촌현에서 확인되지 않으나 고려시대부터 정읍현의 중심이었던 장명동에는 서산 보원사지와 북면 탑성마을의 당간지주와 견줄 수 있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커다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리고 초산의 건너편인 칠보산(시내권으로 상동) 미륵사에 거석불인 석불좌상이 현존하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옛 정읍현은 초산에서 칠보산에 이르는 지역에 주요 불적이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있어서 불교사찰은 지배층의 관할이라 할 것이므로 이들 불적의 존재는 비보적 차원을 감안한 지배전략안에 들어가 있다고 할 것이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청동기시대를 살펴보면 그 당시의 유적인 고인돌이 정읍천과 노령산맥 권역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 붕래마을과 송산동, 내장산 이쪽, 월령 서쪽의 신월마을, 부사치 서쪽의 구암마을과 반암마을 등지에 고인돌이 연이어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들의 위치에서 벗어난 지점에 치소가 자리하고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아마도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면 전 시기의 지배세력이 주도했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을터를 잡는 관점에서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인돌을 축조했던 세력이 근거를 두었던 주요 시대와 석불석탑이 서있는 시대의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한시대의 초산도비리국이 성읍국가였다고 할 때에 그 위치는 정읍천을 앞에 둔 초산이었다고 보며, 백제 정촌현은 남방경략을 위한 전진기지로서 갈재에 가까운 정해마을과 금구마을 등지에 세운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 후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초산과 칠보산에 이르는 지역에 큰 사찰을 짓고 석불석탑을 조성하여 문화적 지배기지로 삼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을 명칭에 촌(村)자가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고려시대의 촌은 조선시대의 면과 비슷한 단위였을 것이다. 고부면 남복리에서 발굴된 고려시대의 청동금고에 새겨진 지명인 답내촌은 고부군 답내면의 전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답내촌이 성장하여 조선시대에 답내면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궁동면과 합쳐져 이평면이 만들어지면서 면사무소가 답내면 구역에 건립되었다. 고려시대에 제주도에는 신촌현(新村縣)이 있었다. 지금의 조천읍 구역으로 현촌으로는 신촌현(新村縣)과 함덕현(咸德縣)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목의 동면이나 좌면에 속했다가 18세기 말에는 신좌면(新左面)에 속했다. 1914년에 제주군 신좌면이라 했다. 1935년 신좌면을 조천면(朝天面)으로 개칭했다. 1946년 도제(道制)를 실시하면서 제주도 북제주군 조천면이라 했다. 1985년에는 조천읍으로 승격되었다. 읍 소재지인 조천리를 비롯하여 신촌리 · 신흥리 등 10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증보탐라지』(제주)에는 '좌면(左面)'을 네 개의 소면(小面)으로 나누었는데, 신촌면(新村面)과 조천관면(朝天館面)이 조천읍 지역에 있었다. 『호구총수』에는 신촌면(新村面) 소속으로 되어 있고, 『제주읍지』에는 좌면(左面) 소속으로 되어 있다. 신촌현, 신촌면, 신촌리로 행정구역의 변경에 따른 변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경북 점촌은 본래 상주군 영순면의 지역으로서 그릇점이 있었으므로 점촌 또는 점마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교통의 요지였는데 1926년경 일본인이 불정리(佛井里) 탄전(炭田)을 위시한 인근 지역을 개발하자 인구 집중이 이루어지고 1949년 문경군의 군청 소재지가 문경면 하리에서 호서남면의 점촌리로 이전해오자, 이 지역의 발전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1956년에 호서남면이 그대로 점촌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1월 1일 문경군 호계면(虎溪面) 별암리(鱉巖里) 일부를 편입하여 점촌시로 승격되었다. 점촌시는 1995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당시 6개 동, 인구는 약 4만 9000명으로, 문경군과 통합되어 문경시가 되었다. 지금은 점촌동이란 명칭이 남아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촌현 외에도 백제 신촌현(新村縣)에 촌(村)자가 들어 있다. 충남 보령시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만로국,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결기군 신촌현, 통일신라시대에는 웅주도독부 산하 결성군 신읍현이었다. 정촌현이 정읍현으로 개칭된 것과 비슷하게 신라 경덕왕 때에 신촌현을 신읍현으로 고을 명칭을 바꾼 것이다. 백제의 행정구역체계는 웅진기에는 22담로(檐魯)가 있었고, 사비기에 이르러 지방에 오방(五方)과 군현 혹은 군성을 두었다. 고사부리성은 오방성 중의 중방성이었고, 정촌현에는 도사(道使) 또는 성주(城主)가 임명되었을 것이다.
표 6. 백제 정촌현과 신촌현의 시대적 명칭 변화
정촌현은 마한의 초산도비리국에 이어 등장하였다. 백제의 현이 사비기에 등장했다고 보면 정촌현도 사비기에 등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촌현이 신라 때 신읍현으로, 정촌현이 정읍현으로 명칭을 바꾼 것에서 백제의 ‘촌’이 읍에 준하는 수준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시암바다를 중심으로 정촌이 있었고, 이 정촌이 정읍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앞서 초산도비리국은 하천변의 낮은 구릉지에 성책을 두르고 국읍으로 삼았을 것이다. 초산의 좌우로 한쪽은 정읍천이 흐르고 한쪽은 천원천이 흐른다. 두 하천 사이가 초산도비리국이 입지할 수 있는 적지였다고 추정된다. 초산의 북쪽 하북동 오정마을과 용흥마을, 북면 이문마을에서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초산도비리국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초산의 남쪽인 금구마을과 서쪽인 마석리에서 원삼국시대의 주거지가 다수 발굴되었고, 마한계와 백제계의 고분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지금의 입암면과 신정동 구역이 초산도비리국과 백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게 한다. 입암산 북쪽 입암면과 신정동 일대는 고인돌이 고르게 분포하고 분구묘와 횡혈식 석실묘가 발견되었으며 고대의 주거지가 발굴되어 이곳이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했던 곳임을 짐작케 한다. 마한의 54개 소국 중 초산도비리국이 초산을 중심으로 건국되어 발전하다가 백제에 편입되었으며, 백제시대에 그 중심지는 정촌, 우리말로 시암바다라 불리는 지금의 정해마을 일대였다. 이곳은 서쪽으로 천원천, 동쪽으로 용산천이 흐르며, 동쪽으로 산을 넘으면 정읍천이 흐른다. 이들 하천은 백제 정촌현의 역사지리적 원천(源泉)으로 작용했다. 이들 하천의 중심에는 초산이 있고 이 초산을 중심으로 정읍의 치소는 소속 국가의 변동에 따라 여러 차례 변천을 거듭했다. 정읍현의 치소는 신정동(용산동), 연지동, 초산동, 장명동을 주로 오갔으며 지금의 농소동 구역 중에서 옛 소정면 구역과 덕천면 구역 중에서 옛 우덕면 구역은 고부군에 속했지 정읍현에 속하지 않았다. 덕천면 천곡마을이 결코 백제 정촌현의 치소가 될 수 없음은 이러한 여러 정황을 통해 볼 때 타당성이 전혀 없는 주장이다. 천곡마을은 고려 때 큰 절이 들어서면서 부각된 측면이 있고, 그 이전 백제시대에는 천곡마을 보다는 우덕리 산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덕리 산성은 백제 오방성 중의 하나인 중방고사성의 동쪽 외곽을 지키는 방어시설로 백제 초기 성책 형태를 지니고 있다. 천곡마을 일대에서 발견된 고대 주거지와 분묘 유적으로는 신월리 유적이 유일하다. 천곡마을과 정읍천을 사이에 두고 자리한 오정리와 이문리, 용흥리에서 고대의 유적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들 지역은 백제 정촌현의 북쪽에 위치한 취락과 소지역세력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이곳은 백제 고사부리군과 빈굴현, 대시산군으로 이동이 수월한 관문으로서 지금의 북면, 하북동 일대는 백제 정촌현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을 지녔다. 천곡마을 주민들이 이들 지역민과 잦은 교류를 했을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백제 정촌현의 천곡마을 존립설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정읍현 치소에 망부석이 있을 이유는 없다. 정읍현 치소 북쪽 십리 지점에 망부석이 있다고 하였지(『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의 치소가 있는 마을에 망부석이 있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읍통문 홈페이지 이진우 샘 글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