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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평론OT강좌 2차시>
비평쓰기의 문턱에 서서
박양근(문학평론가)
다시 열면서
최초의 근대적 문학비평은 19세기 중반 프랑스 비평가 샤를 어거스틴 생트뵈브와 히폴리트 아돌프 텐에 의해 시작되었다. 생트뵈브는 문학비평은 정신의 박물관학이라 말했다. 이것은 작가, 작품, 독자 사회에 대한 총제적이고 분석적인 해석과 이해로 이루어지는 문학비평은 작가에게 도움이 될 조언을 진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가의 궁극적인 소임은 작가가 창작한 작품을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있다. 독자는 비평을 통해서 미처 깨닫지 못한 작품의 가치를 터득하고, 접하지 못한 새로운 정보를 얻는다. 말하자면 비평가란 작가와 독자 사이에 낀 심미적 중개자이다.
좋은 비평은 작가에겐 공정하고 독자에겐 친절해야 한다. 모든 글이 쉽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하듯 비평도 어려운 글이어서는 곤란하다. 비평도 하나의 창작이라는 문학관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창의적인 안목을 높이 사고자 하는 것이지 난해한 잡문을 하나 더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평가들은 지신의 비평이 일회성의 글이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한다. 좋은 비평은 좋은 작품을 배경으로 하므로 작품을 고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작가를 찾아 나서는 첫 탐험가인 비평가는 산더미처럼 쌓인 작품에서 옥석을 가리는 전문 독서가들이다. 그러므로 책더미 속에 묻힌 옥작(玉作)을 찾는 탐색의 눈길이 비평의 알파이고 오메가이다.
본론 1. 비평가를 위한 조언
현대 비평가의 임무가 무엇임을 말해준 여러 선대의 동서양 비평가들이 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비평가의 재능보다는 자질을, 명성보다는 명예를 존중할 것을 부탁한다. 조선 후기의 명망 있는 문한가 출신인 홍만종을 소개한다. 그는 세속 출세를 위한 경서 공부보다는 도선과 시평을 비롯해 골계, 역사, 시가 등 시평에 큰 관심을 보였고 학문이 근대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문헌을 역사의 실체라고 믿고 엄격한 체제를 갖추고 확실한 사실을 전하려는 집념으로 고증에 철저했다. 그런 비평 방향을 제시한 시평집이 《소화시평》이다.
홍만종은 십 대 시절부터 시학을 공부하여 바평의 안목을 키웠노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만큼 비평에 남다른 열정과 전문성을 갖추었던 그는 첫 번째 저술에서부터 비평가가 갖추어야 할 자격을 제시하였다. 그가 내세운 조건은 세 가지다.
첫째는 시를 정밀하게 읽고 평하려면 방대한 자료의 수집과 독서가 필요하다. 《소화시평》 서문에서 “위로는 태사(太師, 기자箕子)로부터 아래로는 최근의 시에 이르기까지 무릇 우리나라에서 시라고 칭해지는 것이면 널리 구하고 광범위하게 모았다. 시장에서 사들이고, 다른 사람에게 빌리는 일을 많은 세월에 걸쳐 하고 보니 책이 모두 내 서가의 물건이 되었다(원문생략))라고 문헌 확보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두 번째로는 시의 텍스트를 엄밀하게 고증하는 문제를 중시하였다. 그는 텍스트 비평의 충실한 기초 위에서 비평하는 자세를 강조하였다. 신뢰할 만한 텍스트를 제시하고 고증을 치밀하게 한 자세는 서구의 신비평론과 같다.
세 번째로 비평가에게 높은 수준의 안목과 엄정한 태도를 요구한다. 그는 문장을 다루는 직업은 “마음이 거칠고 덤벙대는 사람이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화총림》 「증정」 제9칙) 말하고, 《순오지》에서는 비평가는 식견(識見)과 학력(學力)과 공정(公定)이라는 세 가지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스승으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식견을 가질 수 없고, 옛것에 해박하지 않으면 학력을 얻을 수 없으며, 부단히 익히지 않으면 공정을 지닐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비평의 어려움과 비평가의 자격에서 그는 누구보다 단호하였다.
‘문학의 교황’으로 불리는 독일의 폴란드계 유대인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1920~2013)가 있다. 그는 독일 문학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독일어와 독일문학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남달랐다. 그의 평론은 개인적인 취미에 머물지 않고 대중에게 문학을 알렸는데 이것이 ‘문학의 교황’이 된 이유이다. 그는 “문학이 있어야 비평이 생기는 것이므로 문학에 조금이라도 기여한 작가들에게 비평가가 빚지고 있는 점을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하고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며 자신이 전달하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도록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면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고 하였다.
여기에 보태어 영화 <아메리칸 쉐프>에서 패브로는 음식 평론가와 언쟁할 때 이렇게 말한다. “아프다고. 니가 그런 글 쓰면 내가 상처받는다고. 이 망할 사장, 문 닫을까 봐 굽신대는 것 봐. 너 뭐 하는 놈인데? 앉아서 처먹고 단어 몇 글자로 토악질만 하는 놈이!“
본론 2. 비평을 위한 네 가지 질문
작가는 “기억의 심부름꾼”이라고 칠레 국민시인인 파블로 네루다는 말했다. 필자는 이것을 창작과 비평에 연결해 ‘비평가는 작가 기억의 배달꾼’이라고 말하려 한다. 우편배달부가 갖가지 우편물을 집집마다 전달한다면 비평가는 작가가 부탁한 글을 독자에게 배달하는 사람이다. 우편물 배달부는 하루빨리 정확하게 배달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글 가방을 멘 비평가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들꽃을 만나면 잠시 쉬어가는 감수성, 나무 그늘을 만나면 책을 읽은 진지성, 하수구에 버려진 녹슨 깡통에서 전쟁의 참극을 떠올리는 시대적 상상력, 교회나 성당을 지나치면 그곳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신과 대화하는 경건함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 모든 것이 비평에 필요한 자세이고 조건이다. 나아가 이러한 현현을 강렬하고 인상 깊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문학은 장르를 불문하고 체화, 의미화, 형상화, 일반화하는 건축 공정이다. 체화는 나의 스토리텔링을, 의미화는 인문학적 해석을, 형상화는 언어 이미지를, 일반화는 시대적 공감을 각각 지향한다.
음악이 선율로, 미술이 색채로 표현하는 예술이라면 문학은 입상진의(立像盡意)로 설명된다. 입상진의는 형상으로 뜻을 전달한다는 의미로서 표현과 내용을 지칭한다. 문학용어로 말하면 시학과 미학의 관계이다.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눈앞에 세우는 다중(多重) 다층(多層) 다감(多感)이라는 방법을 구사하면 형식에서는 미적 구조가, 내용에서는 영적 구조가 가능해진다. 비평가는 작품을 대할 때 작가가 자신의 글을 쓸 때 했듯이 네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노드롭 프라이어는 《문학의 구조와 상상력》에서 상상을 “인간의 경험을 토대로 있음 직한 본보기(model)를 구성하는 힘”이라고 정의하였다. 베이컨은 “사실들을 변형시켜 더 아름답게, 더 좋게, 더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고 영국 수필가인 조셉 애디슨은 평론 <상상의 즐거움>에서 “상상은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도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하는 능력”이라 하였다. 이들의 말을 요약하면 상상은 사물과 언어를 결합하여 없던 것을 창조하는 힘이다.
문학은 언어를 매체로 한다. 작가는 떨어지는 낙엽 하나를 보면 “살아오느라 수고했다.”는 작가적 상상을 작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바슐라르 이론은 기본적으로 상상은 대상, 우주 전체, 인간계의 본질을 밝히지만, 또 하나의 상상과 질문이 필요하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을 설정해주는 좌표적 질문이다. 상상이라는 자문자답이 내향적, 외향적, 횡단적, 좌표적 방향성을 가지면 각각 의미망, 생태망, 관계망, 존재망이 언어망(言語網)과 결속되어 5개의 망이 짜인다. 이런 망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독자를 매료시키고 작가에 대한 신뢰를 높여준다.
이성선의 <하늘 악보>를 음미하여보자.
길을 가다가 바라본다
나뭇잎이 어제는 저기 떨어지고 오늘은 여기 흩어져 앉는다
어느 것은 일찍 지고 어느 것은 늦게 진다
가을 가득한
이 삶의 소리
( 이하 생략)
이성선은 숫자가 아니라 낙엽으로 생사의 자유스러움을 말한다. 이런 비유는 낙엽이 무엇이며, 바람과 겨울이 무슨 관계이며 사람에겐 무슨 의미이며 작가 자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거론한다. 작가는 상상을 통해 잎이라는 사물에 우주의 법칙을 숨기고 비평가는 그가 숨긴 관계를 해독해낸다. 창작과 비평은 인문학적 로고스와 감수성이 바탕에 된 상상과 바슐라르가 말한 몽상을 합친 것에서 동일하다. 작가가 이루는 상상적 질문의 방식은 네 가지다.
첫째는 대상의 근원에 대한 내향적 질문이다. 이를테면 사물의 본질을 묻는 “무엇인가?”이다. 사랑, 미움, 아름다움, 갈등, 죽음 등 ‘무엇’을 부단하게 추적해간다. “새(鳥)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날개와 둥지, 부력, 계절에 따른 이동 경로 외에 ‘자유, 고독, 유랑, 전령’이라는 개념에 다다른다. 민들레가 ‘무엇인가’ 하면 씨앗, 꽃, 줄기, 뿌리, 홑씨에서 시작하지만 ‘고독, 한해살이, 해탈, 방랑’ 등의 본질도 거론한다. 도형으로 그려보면 깔때기를 세운 듯 질문과 답변이 심화하는데 궁극적인 중심과 정점(頂點)은 생사(生死)와 코스모스와 카오스이다. 탄생의 근원, 죽음의 근원, 사랑의 근원, 고독의 근원 등을 찾다 보면 ‘무엇’이 의미망을 이룬다. 이런 내재적 질문을 계속할수록 글의 집중력은 높아진다.
두 번째인 외향적 질문은 ‘어떻게’라는 것으로 제재가 외부 화소들과 엮이고 모든 것은 우주의 일부라는 의미에 다다른다. 제재를 외적으로 확장하면 부채 모양의 방사형인 생태망을 만든다. 가령 촛불을 선택하면 밤낮, 빛과 어둠, 발산과 소멸, 등대와 가로등뿐만 아니라 태양과 꽃망울까지 연결되어 바슐라르가 말한 불의 물질적 상상력이 구현된다. 연못에 핀 하얀 수련에 외향적 질문을 가하면 우주의 소리를 듣는 마이크로 입상진의하고 물로 이루어지는 생태계를 감지할 수 있다. 하나의 사물로써 모든 사물을 끌어내는 점에서 우주적이고 종교적이다.
세 번째는 인간계로 건너오는 횡단적 질문이다. “그렇다면”이라는 부사로써 사물과 인간과의 관계를 거론하다 보면 대상과 인간이 동일 선상에 놓이는 인문학적 고리가 맺어진다. 산, 눈보라, 차의 핸들, 테니스 코트 등이 고행, 시련, 심적 조절, 거리감이라는 관계망을 만든다. 사물에 대한 내향적, 외향적 질문이 이루어지더라도 인간의 삶과 연결하는 통로를 찾지 못한다면 수필평론은 제 모습을 찾기 어렵다.
네 번째는 작가가 처한 상황을 살피는 좌표적 질문이다. 대상과 우주와 인간을 결속시킬 때 그 작가가 어떤 시공과 환경에 처해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를 이야기할 때 작가가 목수인가, 정원사인가, 벌목공인가, 도시에 사는가 산촌에 사는가, 거주자인가 여행자이냐는 정체성을 파악하여야 개성을 바탕으로 한 존재망을 만들 수 있다. “언제 어디에서?”하는 질문에 따라 현재적 공간애(topophilia), 과거적 노스텔지어, 미래적 노마드라는 아우라도 뽑아낼 수 있다.
작가의 상상은 물리적, 심리적, 심미적, 영적으로 진전한다. 무엇이, 어떻게, 그렇다면, 언제 어디서라는 거듭된 질문이 언어와 작가와 대상과 인간과 우주를 잇는 미적 망사(網紗)을 단단하게 만든다. 작가에게 상상이 필수적이라면 비평가가 작가적 상상을 갖지 못한다면 어찌 작가의 작품과 비평대상으로서 텍스트를 이해할 건가.
본문 3. 기본 비평 담론
1) 수필의 서사
수필은 소설처럼 서사가 기본 구조이다. 서사는 인물, 사건,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주인공 인물이 일정한 시공 안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갈등을 맺고 풀어가는 과정이 서사다. 수필 서사의 화자와 주인공과 서술자는 대개 수필 작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축적된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의 일부를 다듬어 주제를 예증하고 내용을 펼쳐낸다. 글쓰기의 초심자들은 경험을 글로 녹여내는 데 어려움을 겪지만 작가는 경험을 적절하게 끌어들여 알맞은 효과를 낸다. 글을 쓰면서 주제와 관련된 인생 사건을 알맞게 인용하고 말이 살아있도록 유연하게 펼친다. 이처럼 서사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면 공감을 불러일으키므로 비평가는 텍스트에 담긴 서사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수필 서사와 소설 서사에 차이가 있다. 첫째 인물의 차이로서 하나는 실존하고 다른 하나는 실존하지 않는다. 둘째, 사건으로서 수필과 소설 모두 지나간 일을 어느 시점에서 회상하는 방식이지만, 수필은 기억 속의 실제 사건을 다루고 소설은 작가가 허구적으로 만들어낸 사건을 다룬다. 셋째, 배경에서 수필의 배경은 세월이 지나 형태는 달라졌을지라도 작가의 기억 속에 실재하고 있고 현실 세계에 엄연히 존재했던 시간과 장소이다.
2) 작품과 텍스트
데리다는 문자화된 활자 곁의 행간과 여백 안에 다른 사고가 숨 쉬고 있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작품과 텍스트의 차이가 생긴다. 작품은 저자의 생각과 의미추구의 모든 내용이 담긴 집에 해당한다. 바르트는 <작품에서 텍스트에로>라는 논문에서 작품은 도서관 공간의 일부를 차지한 것이며 책방과 시험과목 속에서나 만나는 것이라 했다. 작품은 작가를 향하며, 작가는 작품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고 문학사와 전기의 대상으로 되고 잡지 인터뷰 페이지를 지배하며, 고전적 문학 연구자의 의식을 지배해 왔다. 이 인물이 작품과 함께 죽음을 선언당한 작자이다.
텍스트의 어원은 ‘직물’(texture)이다. 직물은 가로실(橫絲)과 세로실(縱絲)이 교차하면서 복잡한 무늬와 질감을 만들어내며 종사와 횡사의 차이가 텍스트의 다원성과 복수성(複數性)을 보증한다. 동시대 것의 인용과 이질적인 것과의 조우, 대화를 통한 교감, 코드의 교환과 충돌은 상호텍스트성, 타자성(他者性), 다성(多性)을 만들어낸다. 데리다는 여백 속에 담겨있지만 보이지 않는 사물을 중시한 비평가다. 텍스트에는 불안전한 의미만이 존재하며 상호작용의 다양성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여기는 해체주의자들은 책 속에 담긴 기존의 개념을 파기할 때 텍스트가 이해된다고 믿는다. 그 유목민적 사유가 비평 생산행위의 경험이 된다.
문학비평 글쓰기의 대상은 작품이 아니라 텍스트다. 작품이 작자의 것이라면 텍스트는 독자의 것이다. 비평 글쓰기가 동일 텍스트에서도 비평 주체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것은 상호텍스트성 때문이다. 이 대화주의를 이해한다면, 문학비평 글쓰기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은 ‘문학 텍스트의 가치 평가를 객관성 있게 하는 맛보기(taste)라 하겠다.
3. 랑거와 파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사회적 측면과 개인적 측면의 결합으로 보았다. 랑그는 사회적인 체계를, 파롤은 개인적인 발화를 가리킨다. 간단하게 언어(랑그)와 말(파롤)로 줄이기도 한다. 랑그는 문법처럼 규칙들의 체계 전체를 지칭하므로 공적이고, 변하지 않는다. 파롤은 말하는 사람의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되는 일회적 발언으로 사적이고 가변적이다. 랑그가 없으면 파롤도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므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에 존재하는 고정적인 원칙이 랑그이다. 반면에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파롤이다. 사람들이 '살다'라는 낱말을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랑그 때문이고 대화할 때 상황에 따라 '살다'가 다른 뉘앙스를 띄는 것이 파롤의 용례들이다.
랑그(언어)가 사회가 약속한 규칙(code)이라면 개인의 언어활동에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는 발화가 파롤이다. 그러므로 랑그는 개념을 세울 때 사용하는 어휘, 구문, 문법, 음운 등의 총합적 체계이다. 소쉬르는 랑그를 “우리의 두뇌에 자리 잡고 있는 특정 현실‘이라고 규정했다. 특정 현실이란 어느 지역의 특정 시대의 인간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체계를 말한다. 이 의미체계로 인해 어휘, 구문, 문법, 음운 등을 합친 말이 생긴다. 랑거라는 체계가 없다면 무엇에 대해 사유할 수도 없고, 개념 지을 수도 없고 유의미한 발화도 존재할 수 없다.
4. 기호
기호학은 기호가 어떠한 법칙에 통제받는가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언어 체계 내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최소 단위인 기호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형태를 가져야 한다. 사진, 소리, 화면, 음정, 제스처, 의상 등은 모두 기호의 일종이다. 신형 외제 자동차는 소유자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다. 명성과 경제적 성공과 화려함을 외제차에 섞어 놓음으로써 성공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보이기 위하여 차를 사고 평범한 사람들로 자동차를 성공의 기표로 여긴다. 이것이 자동차가 지닌 기호성이다.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명저 《일반언어학 강의》(1916년)에서 재제안 되었다. 기호학은 언어의 구조와 그 의미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언어학 분야와 맞닿아 있지만, 비언어 기호 체계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이 있는 곳, 철학이 있는 곳, 예술이 있는 곳은 어디든 기호와 기호학이 있다. 인간은 기호로서 소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의미체계를 통괄하는 기호는 과학적인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비평가는 의미작용의 기호와 의사소통의 기호를 파악하는데 관심을 가져야한다.
본론 4. 비평의 종류
1) 전기비평
작가의 삶과 작품이 어떤 관련성을 맺는가, 한 작가의 작품이 다른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작품과 작가의 세계관 인생관 정치관 문학관, 좁게는 그의 교육, 생활수준, 독서, 가족 상황, 교우 애정을 다루되 작품과 직접 관련된 부분에 주의를 기울인다. 문학작품을 지나치게 조사하면 과거성에 치우쳐 문학 가치에 소홀할 수 있다.
2) 윤리ㆍ철학적 비평
윤리적 비평은 과거의 체험을 복구하기보다는 오늘의 독자와 관련하여 현재적 가치와 윤리에 초점을 맞춘다. 문학에 반영된 도덕과 철학 문제를 중시하고 집중적으로 밝힌다. 윤리적 비평을 대표하는 담론은 공자가 『시경』에서 말한 사무사(思無邪), 불교의 탐진치, 기독교의 십계명, 권선징악, 플라톤의 현실 모방론 등이다, 작품이 요구하는 ‘고도의 성실함’은 미학적 아름다움에 대한 고찰보다는 도덕적 철학적 교훈을 더 중시한다.
3) 형식주의 비평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자체의 우위성을 인정하고 문학작품을 독립된 의식구조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은 유기체로서 생명원리를 지닌다고 하여 문학의 역동적 상상력을 확립하였다. 작품의 외적 요소인 전기, 시대상 등을 무시하며 작품이 지닌 배경, 주제, 이미지, 상징을 주로 다룬다.
4) 심리분석비평
심리분석비평은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산물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창작 과정과 독자의 수용과정을 심리학적 측면에서 고찰한다. 프로이트 학설을 바탕으로 주인공, 작가, 독자의 심리를 쾌락원리(id), 현실원리(ego), 초자아인 도덕원리(superego)로 분석하지만 문학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한계가 있다.
5) 신화․원형 비평
문학을 신화체계로 바라보는 비평으로서 신화적 요소를 분석하고 원형이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밝힌다. 현대신화비평가인 N. 프라이어는 문학 속의 원형을 고대 의식이나 성서, 신화에서 찾았다. 원형의 구체적인 예로서는 물은 탄생, 풍요, 속죄이며, 태양은 창조, 지혜이다. 영혼불멸은 낙원 복귀와 죽음과 연관되며 영웅의 원형은 탐색 영웅, 입문 영웅, 속죄양으로 나뉜다. 장르로서의 원형은 희극은 봄을, 로맨스는 여름을, 비극은 가을을, 겨울은 아이러니로 나타낸다. 인류문학사적인 입장에서 텍스트에 나타난 원형의 상징을 해석한다.
6) 구조주의 비평과 탈구조주의비평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따라 문학을 분석하는 방법을 말한다.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역사적 혹은 문화적 상황과 관계없이 '구조'가 항상성을 유지한다고 믿는다. 구조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인간을 구조의 산물로 보고 실존 너머에 있는 더 큰 주체를 조망하려는 것이다. 구조주의자 소쉬르는 인간의 언어는 물론 사회구조, 정신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구조가 존재하므로 개개인은 이 구조에 일정하게 맞춰야만 존재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구조가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주장하는 '보편적인 구조'를 해체하려는 일련의 흐름을 총칭한다,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서구 역사를 지배해 온 '보편적 이성'과 '절대적 진리'를 전체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면서 그 자리에 개별성, 우연, 해체, 차이라는 개념들로 채운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불린다. 푸코의 탈중심화 개념, 데리다의 해체주의,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를 중시하는 철학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7) 여성주의 비평
1960년대의 여성해방운동을 바탕으로 남성 지배구조 대신에 여성의 가치 체계를 재정립하려는 문학비평이다. 여성주의 비평은 문학을 비롯한 다른 문화적 생산물들이 어떻게 여성에 대한 경제, 정치, 사회, 심리적 억압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지를 점검하는 방법론이다. 여성주의는 사회적인 약자로서 사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규정되는 여타 약자를 포함한다. 길들여진 여성과 길들이는 남성,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는 가부장제에 갇힌 언어가 아니라 여성을 주체로 보는 새로운 언어와 ‘여성적 글쓰기’를 제안한다. 여성적 글쓰기는 주체적 존재로서 여성을 인식하고, 기존의 언어 규칙과 논리에 저항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8) 사회학적 비평
1930년대 작가들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믿고 문학은 사회발전과 변천을 규명하는 논쟁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효용을 두었다.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실현을 밑바탕으로 하고 노동계급을 능동적이고 역사적 주체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문학이다. 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하고 구성과 결말이 낙관적 틀에 짜여있다는 약점이 있다.
9) 문체론적 비평
1950년대에 인상주의 비평을 대체하자는 제안으로 텍스트 내에 사용된 어휘, 문법 등에 대한 과학적인 문체 분석이다. 언어학이 통사론과 문법에 관한 연구라면 문체론은 작가가 선택한 언어유형과 스타일에 관한 연구이다. 세익스피어 문체, 바이론 문체라고 말하듯이 문체론적 비평은 문학작품을 미학적 감상보다는 전달을 위해 개인의 특유의 구조화된 도구로 여긴다.
10) 독자반응비평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비평으로 텍스트를 읽는 독자의 반응에 관심을 기울인다. 독자의 경험에 관심을 기울여 독서행위라는 수용의 과정을 통해 작품 비평을 한다고 주장하였다. 텍스트에는 많은 틈(gaps)과 불확정성의 요소가 존재하므로 독자가 텍스트 읽기에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해석이 재구성된다고 여긴다. 전기비평이나 신비평과 달리 독자의 반응에 전적으로 관심을 기울인다.
11) 생태주의 비평
환경오염, 환경파괴로 인하여 생태계와 지구에 종말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 생태주의문학과 생태주의비평이 나타났다. ‘집’을 의미하는 “생태”(eco))라는 뜻처럼 생태문제는 생명체의 생존에 관한 문제이므로 생태계의 지식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믿는다. 전통적인 자연문학, 전원문학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생태 문학의 실태와 방향, 생태문학의 원형, 신화세계와 자연, 생태문학의 서사구조, 생태적 감수성과 자연의 긍정을 추구한다.
12) 탈 식민지문학비평
탈식민주의 비평은 과거 식민지 문화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핵심 과제로 삼는다. 제국주의의 지배와 그 영향이 문학에 얼마나 코드화되어 있는가를 분석한다. 식민지 이후의 상황에서 개인의 삶에 수반되는 해방감과 갈등과 모순을 테마로 삼는다. 이 비평은 제국주의 문학과 차별화를 선언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와 정체성을 다룬다.
마무리/워크숍
“사공―. 강 건너주시오.”
건너편 강 언덕 위에 뱃사공의 오두막집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노랗게 식은 햇살에 동그마니 드러난 외딴집, 지붕 위로 하얀 연기가 저녁 강바람에 산란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오두막집 삽짝 앞에 능수버드나무가 맨몸뚱이로 비스듬히 서 있었다. 둥치에 비해서 가지가 부실한 것으로 보아서 고목인 듯싶었다. 나루터의 세월이 느껴졌다.
강심만 남기고 강은 얼어붙어 있었고, 해가 넘어가는 쪽 컴컴한 산기슭에는 적설이 하얗게 번쩍거렸다. 나루터의 마른 갈대는 ‘서걱서걱’ 아픈 소리를 내면서 언 몸을 회오리바람에 부대끼고 있었다. 마침내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고 갈대는 더 아픈 소리를 신음처럼 질렀다.
나룻배는 건너오지 않았다. 나는 뱃사공이 나오나 하고 추워서 발을 동동거리며 사공네 오두막집 삽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팔짱을 끼고 부동의 자세로 사공 집 삽짝 앞의 버드나무 둥치처럼 꿈쩍도 않으셨다. ‘사공―. 강 건너주시오.’
나는 아버지가 그 소리를 한 번 더 질러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다. 그걸 아버지는 치사(恥事)로 여기신 것일까. 사공은 분명히 따뜻한 방안에서 방문의 쪽유리를 통해서 건너편 나루터에 우리 부자가 하얗게 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선의 효율성과 사공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나루터에 선객이 더 모일 때를 기다렸지 싶다. 그게 사공의 도선 방침일지는 모르지만 엄동설한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옳은 처사는 아니다. 이 점이 아버지는 못마땅하셨으리라. 힘겨운 시대를 견뎌 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이념적 대치였다.
아버지는 주루막을 지고 계셨다. 주루막 안에는 정성들여 한지에 싼 육적(肉炙)과 술항아리에 용수를 질러서 뜬, 제주(祭酒)로 쓸 술이 한 병이 들어 있었다. 작은증조부께 올릴 세의(歲儀)다.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세의를 지고 꿋꿋하게 계시던 분의 모습이 보인다.
-목성균, 「세한도(歲寒圖)」 전문
목성균의 <세한도(歲寒圖)>는 서경수필의 백미이다. 컴컴한 산기슭, 하얗게 번쩍거리는 적설, 서걱거리는 마른 갈대, 맨몸뚱이로 서 있는 능수버들 고목, 외딴집 지붕 위의 하얀 연기... 막 그려져서 화랑에 걸린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겨울 강나루 터에 아버지와 방안에서 뻗대는 뱃사공과 그 둘을 지켜보는 작가가 등장인물이다
“사공―. 강 건너주시오.”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가장으로서 자식 앞에서 체통을 지키고 싶은 꼿꼿한 모습이 드러난다. 가장의 권위가 추락하고 남성의 위상이 흔들리는 현대에, 아버지의 모습은 부동의 석상처럼 보인다. 작가는 어린 시절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에 질렸을테지만 지금은 그 기립상이 그립다.
목성균은 서경수필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수필을 빚어는 작가이다. 신변화되는 현재의 수필계에서 그만큼 한국의 서정성을 지켜가는 사람은 없다. “사공... 강 건너 주시오”라는 아버지의 말은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대치를 말하고 있다. .
1) 주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표현하였는가?
2) 작가는 어떤 입장에 있는가?
3) 작품의 아버지는 작가 목성균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4) 이 작품에서 대조를 이루는 장면은? (공간적으로, 상황적으로, 인물 기능적으로, 이념적으로, )
5) 이 작품의 세한도와 추사의 세한도는 어떤 점이 같고 다른가?
6) 이 텍스트에 족용이 가능한 비평잣대는 무엇일까.
실제비평을 위한 세 자료
태국의 어느 부족은 가마우지로 물고기 사냥을 해서 살아가고 있었다. 매사냥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니까 가마우지 사냥이라고 신기할 것이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방법의 비정함을 알고 나면 생각이 바뀔 것이다.
어부들은 길들인 가마우지 몇 마리를 긴 장대에 앉혀 어깨에 메고 바다로 나간다. 배를 타고 적당한 지점에 이르면 가마우지 목에 손가락 하나쯤 들어갈 만큼 느슨하게 리본을 맨다. 나는 그것이 장식이거나 자기 소유라는 표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물 위에 놓인 가마우지가 자맥질하더니 손바닥만 한 물고기 한 마리를 물고 나오면서 끼룩거리며 삼키려 하지만 리본이 목을 조여 넘어가지를 않는 것이다. 가마우지는 그제야 자기의 임무를 깨달은 듯 뱃전으로 돌아가 그것을 주인에게 바치는 게 아닌가. 몇 번이고 그런 노역을 되풀이하다가 지쳐 돌아온 가마우지에게 주인은 선심 쓰듯 리본을 풀고 잡고기 토막을 던져 준다. 그러나 노역의 대가로는 턱없이 초라한 그 먹이에 감격하여 가마우지들은 다음 날도 또 바다로 나간다.
<가마우지> 일부/강호형
가끔 수탉이 ‘꾹 꾹’거리고 주의를 발령했다. 그러면 암탉이 병아리를 품고 엎드렸다. 수탉은 두 다리와 상체가 일직선이 되도록 직립 자세로 마당에 의연하게 서 있었다. 하늘에 독수리가 한 마리 날고 있었다. 독수리의 그림자가 마당을 지나가면 수탉이 주의를 발령해서 암탉과 병아리를 엄폐시키고, 정작 저는 일전을 불사할 의연한 자세로 마당에 표적처럼 버티고 서있는 것이었다.
수탉의 독수리와 대치 자세는 같은 수컷으로서 존경스럽기 그지없었다. 차라리 무모하다는 말이 더 적절할지 모르는 그 태도를 영장류인 나는 생각이 깊어서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쭉 펴면 1m가 넘는 날개로 유유히 활공하다가 급강하해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사냥에 퇴화하여서 날지도 못하는 가금(家禽)의 날개와 발톱으로 어찌 해보겠다고 저리 높은 정신으로 의연하게 버티고 서있는 것인지, 돌연한 야성 본능이 존경의 염을 넘어서 그저 경이로울 뿐이었다.
<수탉> 일부/목성균
은행잎이 흩날리는 날이었을 게다. 사람의 후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냄새가 스멀스멀 고개를 넘어왔다. 수캐를 미치게 하는 냄새에 이끌려 마초는 고개를 넘어갔다. 냄새의 진원지는 지난가을 유전자의 부름에 충실하게 반응했던 적이 있는 암컷이 살고 있는 수리재였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암캐 옆에 자기와 판박이인 청소년이 있었다. 대물림된 유전자가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었을까. 서방도 없이 홀로 새끼를 낳아 키운 암컷에 대해 애틋함도 보태졌을 거다. 마초는 개코원숭이를 닮은 암놈이 수태를 갈망하는 시기가 끝났음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길로 수리재 식객으로 들어앉은 셈이다.
선배는 못생긴 여자에게 홀려 가출한 마초가 섭섭하다고 했다. 못생겼기에 마초의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며 선배 말고 개 역성을 들었다. 부성을 불신하는 선배는 씨만 슬어놓고 제 새끼를 건사하지 않는 사람보다 마초가 백 배 낫다 두둔하면서 마음을 달랬다.
그 남자 마초/송혜영
질문 1.
위 세편의 은유대상은 각각 무엇이며 그 상징의 대상은 누구인가
질문 2.
만일 비유대상이 가장이라면 어떤 역할이 제시되며 햐대남성의 무엇을 풍자하는가 질문 3“
상기 작품에 각각 적용할 수 있는 비평잣대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