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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마을>에는,
<남원양씨 대룡문중 문양공파 진성단> 이 있으며,
그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순절하신 <양조한 공 손자> 분의 고고한 이야기가 같이 전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양씨 종가집의 우물맛은 물맛이 좋기로 유명하였다고 전해오며,
1619년 39세의 젊은 청년 <양부하 공이> 이 곳에 정착 하였으며,
이 곳은 그 이후로 한동안 <남원 양씨의 집성촌> 이었다,,
<동래(東莱)에 양부하(梁敷河)란 사람>이 있는데,
만력(萬曆)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에 왜(倭)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만력 신사년(辛巳年, 1581년 선조 14년)에 태어나 95세가 되었지만 다니면서 지팡이를 짚지 아니하고 술을
마시면서 찌꺼기도 남기지 아니하였다.
다른 사람을 대하여 자신을 말할 적이면 조금씩 일본말을 하여 잠깐 귀머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 지역에 태어나서 바다건너 (일본 땅에서) 자라면서,
생사(生死)의 험악한 틈바구니에서 떠돌며 지낸 것이 저절로 기이하고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내가 글자를 몰라 차례를 정하지 못한다.” 하고, 또 말하기를, “누가 글을 잘하는 분이오?” 하기에,
내가 그의 나이가 많음을 가련하게 여기고 그의 뜻을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서문을 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梁)은 바로 본부(本府)의 양가(良家)이며, 조부(祖父)의 이름은 조한(朝漢)인데 선비로 벼슬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조부의) 아우 양통한(梁通漢)도 제생(諸生)이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 4월 12일,
왜가 부산(釜山)을 함락시키고 15일에 동래(東萊)를 함락시키자 양조한과 양통한은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전사하였다.
지금 송공(宋公)의 비(碑)에 통한은 언급이 되고 그의 조부는 기록되지 않았다.
<제생 양조한>,
문덕겸과 함께 향교의 제생으로 노개방 교수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있던 양조한(梁潮漢)은,
임진란 때 순절하였음에도 그 사적이 오래도록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사적을 밝혀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한 이유이며,
또한 잘못되어 그 동생되는 양통한(梁通漢)의 사적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양조한사시말(梁潮漢事始末)>에 의해 살펴보면,
본래 부곡리(釜谷里)에 살던 양조한은 임진란이 일어나자 문덕겸과 의논하여 향교의 위패들을 더럽히지 않겠다며
땅을 가려 묻고, 오직 선성(先聖)과 오현(五賢)의 위패만을 모시고 성내 정원루로 옮겼는데,
적탄에 맞아 노개방, 문덕겸 등과 같이 전사하였다.
그 아들 양홍(梁鴻)도 동시에 전사하였으며,
그 때 겨우 13세된 손자 부하(敷河)는 시체 밑에 깔려 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부하는 일본으로 가서 풍신수길을 만나 보고 일본말을 배워서 그 곳에 살다가,
31세 때 고국으로 돌아올 기회를 얻어서 이윽고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양통한>은,
그가 형 양조한의 손자임을 확인하고 형의 재산과 노비를 돌려주고 장가를 보내서 살게 하였다.
부하는 항상 자기 할아버지의 사절한 사실을 감격한 마음으로 평생 말했다.
그는 신장이 8척에 힘이 대단하였으며, 두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살았다.
춘 3월과 추 9월에는 소를 잡고 일문과 이웃을 모아 포식하였는데,
옛일을 늘 비분강개하였으며,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송시열(宋時烈)이, 남문비기(南門碑記)를 쓴 것은 임진란 후 77년 되는 해(戊申年)이고,
그 비를 세운 것은 경술(庚戌) 즉 1670년인데 부하가 91세 때의 일이다.
그 비문에 양조한의 이름대신 양통한의 이름을 썼기 때문에 이것이 불씨가 되어 양조한의 후손과 양통한의 후손
사이에 소송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사정으로는 송시열이 쓴 비문을 감히 고치지 못했다.
그 결과 양조한은 사절한 사람이 안되고 대신 살아있었던 동생 양통한이 사절공신(死節功臣)이 되었던 것이다.
뒤에 양통한은 난후(亂後)의 호적에 보이고, 또 ≪화왕수성록(火旺守城錄)≫에도 이름이 보이므로 사절한 사람은
형인 양조한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양통한은 비문에 실리고,
공신녹권(功臣錄券)에 실려 있고, 또 의병에 가담하여 창녕 화왕성(火旺城)에서 곽재우 장군과 같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으므로, 결국 두 사람을 다 증직하고 표창하도록 결론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양조한은 향교에서 훈도를 하였기 때문에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증직하고,
양통한은 호조좌랑을 증직하였다.
<양부하>의,
나이 12살에 왜(倭)가 사로잡아 그가 양인(良人)임을 알고 대마도(對馬島)로 실어 보냈는데,
그 배는 매우 빨랐으며 바람이 반대로 불어도 노를 저어 도달하였다.
선창의 꼭대기에 나무를 세우고 쓰기를, ‘조선의 양가(良家) 자제를 붙잡아 관백(關白)에게 바칩니다.’ 하였는데,
도주(島主)가 처음에는 도망하는 군사인 줄 의심하였다가 그 글을 보는데 이르러서는 역(驛)을 통해서 또 다른
섬으로 전달하게 하고, 그 섬에서는 즉시 받아 또 다른 섬으로 전달하는 것이었다.
당시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이 섬에 와서 기거하면서 성(城)을 쌓고 궁전을 수리하며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보내어 노략질하게 하고, 인해서 포로로 잡아온 자들을 살펴보다가 양부하가 온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오게 하여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말하기를, “조선의 아이는 일본의 아이와 같구나.” 하였다. 양부하가 머리를 떨군 채 눈물을
흘리며 묻는 말에 번번이 대답하지 않자,
풍신수길이 부하인 통역하는 왜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이 아이의 스승이 되어 일본말을 가르치되 완료하지
못하면 너의 목을 베겠다.” 하니, 통역을 맡은 자가 황공(惶恐)하게 여기며 촛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양부하를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네가 정말로 힘써 배우지 않으면 나와 네가 함께 죽을 것이다.” 하였다. 이튿날 풍신수길이
양부하를 불러다 시험하였는데, 양부하가 대답을 잘하니, 풍신수길이 매우 기뻐하면서 더욱 잘 가르치게 하였으며,
석 달 동안 배워 그 말을 모두 깨쳤다.풍신수길을 보면 삼층(三層)의 병풍을 뒤에다 쳐놓고 방석(方席)의 높이는
한 자 남짓하고 방망이 모양의 상투를 하고 거만하게 걸터앉았는데,
왼쪽에는 포(炮)와 칼을, 오른쪽에는 활과 화살을 두었으며 위에는 창(槍)과 극(戟)의 종류를 달아 두었다.
당시 군대를 일으키느라 역사가 번거로웠으나 풍신수길은 일하는 바가 없었고 곁에는 가까이 모시는 신하 다섯
사람이 있었는데, 한가하면 옛날 일을 이야기하면서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였다. 풍신수길에게는 다섯 명의
희첩(姬妾)이 있었으나 자식이 없었는데, 군사를 일으키던 해에 한 아들을 얻어 이름을 수뢰(秀賴)라 하였다.
강항(姜沆)의 ≪간양록(看羊錄)≫에 이르기를, ‘풍신수길의 폐신(嬖臣)이 희첩과 간통하여 낳았다.’ 고 하였다.
풍신수길이 양부하가 천인(賤人)이 아니고 용모가 고운 것을 알고 가까이하며 아꼈고 항상 좌우에 두고서
은의(恩義)가 매우 후하였다.양부하가 조선의 사신이나 중국의 사신이 왔다는 소문을 들으면 풍신수길에게
청원하여 다행으로 만나보기도 하였으니, 중국 사신이란 대체로 심유경(沈維敬)이었다. 왜(倭)가 사신을
객관(客館)에다 가두고 군사들이 매우 엄하게 지켰다.
얼마 지나 중국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데 이르러서야 풍신수길에게 가서 보고하니,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일 만나보겠다.” 하고, 곧장 객관에서 궁전에 이르기까지 음실(蔭室)을 만들고 사신을 맞아들여 만나
보았는데, 중국 사신이 풍신수길이 있는 좌석에서 한 개의 환약(丸藥)을 먹었으며 두 번째 뵐 때도
그와 같이 하였는데, 풍신수길이 이상히 여겨 묻기를, “그대가 무슨 약을 만날 때마다 먹는가?”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만리나 되는 바다를 건너느라 습기에 손상되어 병이 들까 걱정하여 항상 이 약을 먹는데,
기운이 솟아나고 몸이 가벼워집니다.” 하였다.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그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감히 못합니다.” 하니,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섬에서 돌아왔더니 몹시 기운이 줄어든 것을 깨달았는데, 나도 먹을 수 있겠는가?” 하자,
사신이 말하기를, “가합니다.” 하고는 즉시 주머니 속을 뒤져 보이니,
풍신수길이 양부하를 시켜 가져오게 하고는 손바닥에 두고서 유심히 구경하였는데,
환약에 ‘서(署)’ 자가 있었다.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글자가 어찌 이렇게 미세한가? 일본에서 큰 글자 쓰기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인해서 지니고 있던 이쑤시개를 꺼내어 그 절반을 잘라서 사신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함께 맛보려고 한다.” 하자, 사신이 받아서 삼키니 풍신수길이 사신을 살펴보기를 한참 동안 하였는데,
사신이 목을 움츠리고 팔을 펴면서 태연한 모습을 펼쳐 보이니,
풍신수길이 그제야 기꺼이 입에 넣고 물을 달라고 하여 마셨다.
이튿날 아침에 사신을 보고서 또 한 개를 달라고 하여 나누어 먹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대체로 그 약은 대단한 독약으로 사람을 몰래 갉아먹는 약이었다.
중국 사신은 객관으로 돌아가 반드시 다른 약을 마셔 내려가게 하고 다시 먹고 또 내려가게 하였지만 풍신수길은 알지
못하였다.풍신수길이 이로부터 온몸이 윤기가 없어지고 더욱 오래 되자 점점 말라 의원을 찾았으나 효과가 없고 침(針)을 놓아도 피가 나지 않으니, 풍신수길이 이상히 여겨 말하기를,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인데 피가 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뜸을 떠볼 것이다.” 하고, 드디어 내실(內室)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희첩에게 쑥을 주문하게 하였다가 갑자기
돌아누우며 웃기에 희첩이 말하기를, “감히 여쭙니다.” 하니,
풍신수길이 말하기를, “나는 일어나지 못한다. 외부에다 영(令)을 내려 말총 몇 다발과 깨끗한 물 한 동이를 들여오게
하였다가, (내가) 죽거든 비밀히 하여 죽었다고 말하지 말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어 오장 육부를 씻은 뒤 말총으로 꿰매고 시체를 술동이에다 잠기도록 하라.
” 하였는데, 여러 희첩이 그대로 따랐다. 그의 신하가 병에 대하여 묻는 자가 있으면 단지 “조금 효과가 있다.”고
말하였고, 일이 있으면 여러 희첩이 함께 결정하였다. 몇 달이 되자 냄새가 심하게 밖에 알려지므로, 여러 희첩이
“어찌 끝까지 숨기겠는가?” 하고,
마침내 곡(哭)을 하자, 그의 신하들이 크게 놀랐다.
풍신수길이 내실에 거처하면서부터 양부하가 모실 수 없었으며 이는 그의 내시에게서 들은 것이다.수뢰는 바야흐로
일곱 살이었으며, 풍신수길에게는 좌정승ㆍ우정승 같은 대신(大臣)이 있었으니 하나는 동(東)이라 하고 하나는
서(西)라 하였는데, ≪간양록≫에서 이른바 가강(家康)과 휘원(輝元)이었다.
이 두 사람이 수뢰를 떠받들며 왜국(倭國) 66주(州)를 함께 다스리다가 동서 각 33주로 나누어 가강은 동쪽을
주관하고 휘원은 서쪽을 주관하여, 그 나라를 두 쪽으로 하여 다스렸다.
그리고는 그들의 소굴로 돌아가면서 약속하기를, “어려운 일이 있으면 관백(關伯)의 궁전에 와서 논의한다.” 하였다.
양부하는 풍신수길의 하인으로 역시 휘원의 서쪽에 소속되었다. 휘원에게는 모사꾼인 중이 있었는데 이름은
안국(安國)이라 하였다.
휘원에게 유세하기를, “천하의 만국(萬國)에는 두 임금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무기를 사용하여 이기는 사람은 임금이 되고 지는 사람은 신하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니,
휘원이 처음에는 듣지 않다가 유세한 지 7일 만에 그대로 따라 드디어 가강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약속한 대로
의논할 일을 청원하오?” 하자,
가강이 회답하기를, “그대가 먼저 일을 논의하기를 바라니, 무엇을 하려고 하오, 장차 33주의 군사를 거느리고
모이겠오.” 하므로, 휘원도 그의 군사를 모두 징발하여 관백의 궁전에서 가강과 만나기로 하고 안국의 말과 같이
알리자, 가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두 사람이 물러나 그들의 군대를
정돈하자 나라 안이 공포에 떨었다.
휘원에게 한 부곡(部曲)이 있었는데 용맹스럽고 사나우며 싸움을 잘하여 여러 왜가 꺼려하였음을
≪간양록≫으로 알 수 있었으니, 이른바 살마주(薩摩主) 의홍(義弘)이었다.10월 14일 이른 아침에 싸우기로
약속하고 13일 달밤에 가강이 편지를 보내어 의홍을 꾀기를,
“그대가 만약 안에서 호응하면 5도(道)를 더 봉하여 주기로 약속하겠으니, 그 진(陣)에서 화살을 쏘라.” 하니,
의홍이 말하기를, “큰 일을 편지만으로는 불가하고, 맹세를 한다면 원하는 대로 따르겠소.” 하였는데,
가강이 그의 부모로써 맹세하자,
의홍이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내가 뒤에서 공격할 터이니, 군(君)은 포(砲) 소리를 듣고 진격하시오.” 하였다.
전투가 벌어짐에 이르러 양쪽의 군대가 포로써 대응하니,
포에서 뿜어내는 연기가 사방에 자욱하여 군사들이 모두 그 흐릿함에 묻혀 구토질을 하였다.
가강이 말하기를, “양쪽의 군사가 날래어 사상자가 많을 터이니, 포는 멈추고 활을 쓰도록 원하오?” 하니,
휘원이 그대로 따랐으나 전투는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의홍이 그 뒤에서 포를 쏘자 가강이 군사를 독려하여
진격하도록 하므로, 휘원의 군대가 크게 놀라자 휘원이 아끼던 장수와 안국이 전략을 함께 모의하다가
두 사람이 ‘가강이 그들의 등뒤에서 에워싸고 나온다’고 여겨,
말에 채찍질하며 먼저 도망하자 휘원이 마침내 패배하였다.
가강이 세 사람을 모두 사로잡아 뜰 아래 나란히 앉혔는데 양부하 역시 칼을 받들고 따랐다.
가강이 범죄 행위를 일일이 들어 책망하기를, “틈을 만들어 난을 일으킨 우두머리는 이 두 사람이다.” 하고,
얼굴에 석회를 바르고 옷을 벗겨 소 한 마리가 끄는 한 대의 수레에다 싣고 군중(軍中)에 조리돌리며 큰소리로 죄를
자복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기가 죽어 말을 잘못하자 가강이 그들의 젓을 찌르도록 명하니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죄를 자복하자 마침내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휘원을 용서하여 윗자리에 앉히고 말하기를, “그대는 실제로 죄가 없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는 이미
처벌되었소.
이제 그대의 한 주(州)와 나의 2주를 더 줄 터이니, 그대에게 이 3주면 충분할 것이오.” 하자, 휘원이 겁을 내며
사례하였다.이로부터 휘원은 그의 영토를 모두 잃어버리고 식읍(食邑) 3주뿐이었다. 양부하가 가끔 휘원에게
서쪽으로 돌아가기를 유세하며 청원하니,
휘원이 말하기를, “나의 영토는 깍이고 먹을 것이 적으니, 많은 군사를 기를 수 없다.” 하면서 허락하였다.
그리고 또 노첩(路帖, 통행증)을 구하여 주므로, 양부하가 권도를 써서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포로가 된 남녀 82명을 찾아 배 한 척을 세를 내어 대마도로 와서 정박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공이 배를 빼내어
도망쳐서 돌아가 버렸으므로,
양부하가 대마도주에게 나아가 달래자 도주가 여장을 꾸려 부산(釜山)으로 보내 주었는데,
당시 양부하의 나이 39세였으며 만력 기미년(己未年, 1619년 광해군 11년)이었다.
양부하가 처음에는 풍신수길을 섬기다가 나중에는 휘원을 섬겼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19년이었다.
풍속과 전쟁을 모두 섭렵하고 목격(目擊)하였지만 스스로 두려워할 수도 없었으며 두려워했어도 또한
비루하였을 것이다.그리고 또 세월과 지명ㆍ인명이 상세하지 않고, 모두 왜어(倭語)를 사용하여 번역할 수 없었다.
글은 ≪간양록≫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강항(姜沆)이 3년 동안 갇혀 있다가 돌아와 억지로 한 책을 만들어 지금까지 전해지며 보는 것처럼 환하니,
글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양부하가 외롭게 어렸을 때에 잡혀가 무기가 난무하고 일족이 몰살되는 나머지에서 벗어나,
이국 땅[異域]에서 기구하게 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생존하였다가 마침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또한 장수하는 대열에 올랐으며 아내도 있고 자손도 있으며 우리나라의 곡식을 먹은 지 57년이나 되었으니,
이것 또한 귀중하다고 할 만하다.
<노포동>은,
1740년 편찬한《동래부지》의 기록에 의하면, 북면 작장리(鵲掌里)와 소산리(蘇山里)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1937년에 편찬된 《동래군지》에는 작장리와 소산리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 노포리로 등장하고 있다.
1910년 일제 강점으로 다시 동래부에 속하였고, 1914년 일제의 부ㆍ군 통폐합에 따라 동래군 북면 노포리로 되었으며,
1963년 부산시로 편입되었다가, 1966년 리제(里制) 폐지에 따라 노포동이란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되었다.노포동은
노포ㆍ작장ㆍ대룡ㆍ녹동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작장마을이 대표 마을이었으나 울산지역으로 도로가 열리면서 노포마을이 중심마을로 대두되었다.
지금은 울산과 양산방면으로 가는 지방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그리고 지하철 시발지인 차랑 기지창이 위치하고 있어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서편에는 완만한 개발제한지역이고, 동편은 약간의 평지가 있어 쌀 중심의 농업과 과수원이 있고 양어장이 있다.
노포란 농사를 잘짓는 농부, 또 농사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으로 늙은 농부를 뜻하는데,
노포동이란 농사가 잘 되는 마을, 다른 곳에 비해 농토가 풍부한 마을이라는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1984년에 발굴된 노포동 고분군(古墳群)은, 부산지방의 고분군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적으로 노포동은
어떤 지역보다 앞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혹자는 노포동을 말 그대로 오래된 채밭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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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당제』부산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05).
<대룡(大龍) 마을>은,
노포동에 있었던 자연마을로, 지금의 노포동 10통 일대에 있던 마을이다.
계명봉으로부터 마을 뒷산에 큰 용이 내려와 앉은 형상을 하고 있어서 마을 이름을 대룡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앞산의 용줄기를 일제강점기 때,
신작로(부산∼양산간, 현재는 도로가 확장되어 있음)가 개설될 때 용맥을 끓어 버림에 따라,
마을 불란이 많고 인물도 없고 희망이 없는 마을이 되어 갔다.
이후 2010년 KTX경부고속철도 금정터널 부설로 지하 용맥 이어 대룡 마을이 살아났다고 주민들은 좋아하고 있다.
<마을 구성>은, 계명봉 기슭에 웃각단(웃마을)과,
1077번 국도 아랫쪽에 아래각단(아래마을)로 되어 있으며 남원 양(梁)씨 집성촌이다.
<마을 가구 수>는, 50여 호(216명)이며 이 중 양씨가 10여 호(30명)이다.
계명봉 기슭에 절피골(절이 있는 골짜기)에 아주 큰 사찰이 있었는데,
빈대가 많아 절이 폐사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웃각단에 대한 조계종 혜일암(慧日庵)이 있다.
임진왜란 때 동래읍성 전투에서,
양조한(梁朝漢)의 손자 양부하(梁敷河, 1580∼1676)는 숨진 할아버지의 도포 속에 숨어 있다가 왜군에게
발각되어 포로가 되었다.
양부하는 사로잡혀 대마도로 실려 가자 배에 목창(木槍)을 세우고 그 끝에 쓰기를,
‘나는 조선 양반의 자제지만 관백에게 헌신하겠다’고 하였다.
일본에 가서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모의해 수괴 풍신수길을 독살하는데 모의하여 일조하였다.
<양부하>는,
일본에 끌려간 지 27년만인 1619년(39세)에 모리휘원이 거느리던 조선인 100여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거쳐
동래 감만포로 돌아와, 동래 북면 대룡 마을에 정착하였다.
이에 대룡 마을은 남원 양씨 집성촌이 되었다(양부하의 행적을 KBS 부산방송국에서 보도하기도 했음).
양씨 종가집(노포동 608-1번지)의 우물 물맛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1년 농사를 지으면 4촌․6촌 중 한 사람은 장가보낸다는 말이 있는 명당지이다.
지금은 주류도매상으로 양씨가 살고 있지 않다.
대룡 마을(노포동 87-1번지)에는, 「남원양씨 대룡문중 문양공파 진성단(盡城壇)」이 있다.
이 재실에는 남원양씨 17대∼32대의 선조를 모신 진성단으로 매년 10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를 올린다.
진성단 위쪽에 「의사남원양공부하묘」가 있다.
대룡석관묘(노포동 산77, 81-4번지 일원)는 대룡마을 뒷산이다.
이 유적 중 석관묘가 확인된 곳은 해발 125∼140m의 구릉 능선부로서 산 82번지이다.
석관묘는 묘광이 길이가 97㎝, 너비가 42㎝이며, 석곽 내부는 길이가 85㎝, 너비가 15㎝이다.
양쪽 단벽의 벽석은 없어졌지만 남북의 장벽은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 석관묘는 유․유아용(幼․乳兒用) 또는 굴장(屈葬)이나 이차장(二次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청동기시대의 석관묘나 지석묘의 하부구조에서 간혹 이러한 형태가 확인되기도 한다.
<대룡당산>은, 대룡 마을 회관에서 서북쪽 300m 가량의 거리에 있는 묘지군 뒤쪽에 있다.
제당은 대지 14.6평에 건평은 1.5평이다. 제의는 음력 정월 14일 밤 10시 경이며 일 년에 한 번이다.
제의 과정은 산신제를 지내고 그 다음 당산제를 지낸다.
대룡당산 제당은 기와 맞배지붕이며 왼쪽과 뒤쪽 벽이 허물어졌으나 보수도 하지 않고,
2000년부터 대룡 마을에서는 제의를 지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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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암문중 재희회 양희용입니다
대룡문중 카페을 축하 합니다 청모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