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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눈으로 근∙현대사 바라보기 1
김태균(ktg0948@hanmail.net)
1. 역사 학습의 의미
1) 역사
- 과거의 객관적덕 사실과 사건 - 다양한 형태로 존재 - 인식의 대상
- 과거의 객관적 사실을 재구성한 결과물 - 글, 책 등 - 인식의 결과
2) 한국의 역사 교육
-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로 단일한 입장으로 재구성된 결과물을 가지고 교육, 이데올로기(Ideologie)적 효과
3) 역사를 바라보는(재구성 하는 원칙)
- 가장 우선적으로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
- 역사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적으로 변화발전함을 인식하는 것.
- 역사의 변화발전의 원동력을 자유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노동(투쟁)의 역사
(무계급 사회 : 인간 - 노동 / 계급사회 : 피지배 계급 - 지배계급)
4) 역사 학습을 왜 하는 것인가?
- 소수의 역사, 착취자의 역사, 승자의 왜곡된 역사에서 다수의 역사, 피 착취자의 역사, 객관적 역사를 학습하기 위하여
-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관통되어지는 과학적 발전 법칙을 학습하기 위하여
- 감각을 통한 사물의 분석 방법 학습
5) 역사발전의 과학적 발전 법칙
- 과학적 철학을 바탕으로 :
관념론 <-> 유물론
독립과 불변 <-> 연관과 변화
인간사 또한 자연사 -> 사적 유물론
- 역사 발전 법칙 : 자유, 노동 그리고 투쟁.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의 법칙(모순)
양질 전환의 법칙
부정의 부정의 법칙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2. 노동자가 바라보는 근∙현대사
**** 농민 항쟁
- 1811년 평안도 농민 전쟁 -> 1862년 농민항쟁 ->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1) 1811-1812 : 평안도 농민 전쟁 (홍경래의 난)
- 봉건사회의 전면적 해체
① 농업기술의 발달로 불필요한 농민 노동력이 축출됨 : 무토불농지민(無土不農之民)
② 무토불농지민은 상업에 종사 또는 광산 노동자, 농업 노동자로 전화
③ 농업 자본가의 형성
③ 19세기 외거, 내거 노비가 도망 등을 통한 신분해방.
- 이에 대한 지배 계급의 대응 체제
① 노론 단일 독재 체제 구축
② 대토지 소유자 및 특권 상인층과 계급간 연대 연합을 통한 노론 단일 독재 체제 구축
③ 노론의 유화 정책으로 1801년 공노비 해방 정책 실시 : 다 도망가서 실질적 의미 무
- 1810년대 극심한 흉년과 노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 고조 - 신분제 불만
- 소위 홍경래의 난이라 불리는 1811년(순조11년) 12월부터 1812년 4월까지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농민항쟁.
- 이 농민 전쟁은 봉전제도의 위기 심화 및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촉진을 이루어 냄.
2) 1862년 농민항쟁
- 1862년(철종 13년) 진주에서 시작되어 제주를 비롯해 전국 71곳에서 농민항쟁이 전개됨.
- 당시 조선은 안동김씨 집안의 세도 정치에 의해 좌지우지
- 조세의 기본이 되는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해져 있는 상태.
- 1861년 신임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학정 : 백골징포 등
- 1862년 2월 농민 수만 명이 참여하는 진주 무력 봉기 발생, 곧 바로 조선 정권에 의해 무력봉기 지도자들 체포, 처형
- 이후 3월 27일 익산 3천명 농민 민란
- 4월 16일 함평 민란, 5월 충청 민란
- 9월 제주 민란 등 전국적으로 농민 항쟁이 확산됨.
3) 1894년 동학 농민 전쟁.
- 1894년 일어난 농민 전쟁으로 1894년 음력 1월 고부 1차 봉기, 음력 4월 전주성 2차 봉기 및 음력 9월 전주, 광주 봉기 등으로 구분함.
- 1882년 이후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한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직접적 계기가 되어 농민 전쟁이 발발.
-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 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 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안중근이도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함.
4) 1905~1909년 의병 항쟁
-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영국과 일본의 동맹을 맺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입지를 영국이 인정함(1902)
- 1904년부터 05년까지 러일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의 승리 이후 러시아는 조선에서 후퇴.
-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략하면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
-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이에 반대하는 민족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전개됨.
- 울사조약 이전부터 경기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권에서 의병활동이 전개되었고 을사조약 이후에는 전국 곳곳에서 일본군과 무력 전투를 전개함.
5) 1919년 3.1운동
- 고종의 독살설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 한반도 전역에서 1여 년 동안 전개된 대규모 독립운동
- 3월1일부터 4월 30일까지 총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음.
- 3.1운동의 폭력적 진압
①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일시: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장소: 천안 아우내 장터
경과: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은 천안 병천 시장에 있던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른 사건으로 일제 경찰은 총검을 이용하여 강력한 제지를 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성공회 병천 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15] 교사 김구응이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은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김구응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그의 두개골을 박살냈다. 비보를 듣고 온 그의 모친 최 씨가 자식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일제의 강제 진압으로 현장에서 죽은 사람은 19명이며, 유관순을 포함한 많은 참가자들이 부상, 투옥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② 평남 강서군 사천장터 시위
일시: 1919년 3월 4일
장소: 평안남도 대동군, 강서군
경과: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약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여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의 사천시장 방면으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때 사천시장 부근에 있던 사천헌병대에 이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던 기독교 계열의 인사들이 사전 적발되어 구금되어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천헌병주재소의 일본인 소장 사토 지쓰고로(일본어: 佐藤實五郞)와 조선인 헌병보조원 강병일, 김성규, 박요섭 등은 미리 매복해 있다가 행진하는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참가자 수십 명을 살상했다. 이들은 돌을 던지며 맞선 시위대에게 그 자리에서 함께 살해당했다.[19] 이 사건은 3·1 운동 최초의 사망자가 3월 1일 평안북도 선천과 안주에서 발생한 이래 가장 규모가 큰 유혈 사태였다.
관련자: 조진탁 (사형), 고지형, 지석용 등
③삼진 의거
일시: 1919년 3월 28일, 4월 3일
장소: 경상남도 창원
경과: 제1차와 제2차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삼진의거는 창원 일대의 연합 대 시위였다. 서울에서 시위에 참가한 뒤 연고지에 돌아온 변상태가 진전, 진북, 진동면의 3개면에서 동조하는 인사들을 모아 모의했다. 단일 시위로는 마산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시위였으며, 전국적으로도 규모가 큰 연합시위로 기록되었다.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한 주모자들이 태극기를 제작해 제2차 삼진 의거(4·3 삼진의거)를 재차 계획했으며,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서 약 3천여 명의 비무장 시위대가 일본 헌병대와 유혈 충돌하여 5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관련자: 변상태, 변갑섭(사살), 변상복(사살) 등
④ 제암리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4월 15일
장소: 경기도 수원 향남면 제암리
경과: 3월 말 또는 4월 초에 수원 향남면 제암리(지금의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던 일본 육군이 4월 15일 제암리의 제암리교회에 성인 남자들을 모아놓고 불을 질러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⑤ 곽산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3월 6일
장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
경과: 곽산 그리스도교회를 중심으로 봉기하여 점차 수천 명이 시위에 동참하자, 일제는 독립운동가 박지협(朴志協)을 주동 혐의로 체포 직후 타살(打殺)하고, 체포한 시위군중 100여 명 중 50여명이 잔인한 고문으로 사망했다. 일제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군중에 대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으며, 광견(狂犬)을 죽이는 데 사용하던 쇠갈고리로 시위군중 수천 명을 참살했다. 일명 곽산의 참살(郭山一慘殺)이라고도 불린다.
관련자:박지협(타살)
⑥ 사천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3월 3일
장소: 평안남도 사천
경과: 개신교 목사 한예헌(韓禮憲)과 천도교 교구장(敎區長)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의 주도로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헌병대는 시위 군중에 대한 무차별 총격으로 73명을 학살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학살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계속하여 헌병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헌병 2명을 타살(打殺)했다.
관련자: 한예헌(韓禮憲), 이진식(李鎭植), 최승택(崔承澤), 김병주(金炳疇) 등
⑦ 화수리 학살 사건
일시: 1919년 4월 11일
장소: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경과: 4월 3일 시위군중이 화수리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일본 순사 1명을 타살하자 11일 새벽에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민가에 불을 지르고 뛰쳐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쏘거나 칼로 찔러 마을 주민 수십여 명을 학살했다. 40가구가 모여 살던 화수리는 사건 이후 모두 불타 18가구만 남았으며, 사건 이전까지는 비교적 부촌(富村)이었으나 이후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맹산 학살 사건[편집]평안남도 맹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사건 며칠 후 일본군이 기독교인 지도자 한사람을 체포하여 헌병분견소에 가두고 고문을 하자 군중들이 몰려와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자 일본 헌병이 이들을 분견소 안마당에 끌어들인 뒤 문을 잠그고 60여명을 총살한 사건이다.
⑧ 대구 학살 사건
대구에서 2만 3천 명이 시위를 벌여 일본군에게 113명이 총살되었고, 87명이 부상당하였다. 김용해의 아버지가 이 시위의 주모자로 독립선언을 낭독했는데, 김용해는 체포하러온 일본군과 맨손으로 대항하다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부자가 투옥되어 며칠 후 사망하였다.
⑨ 합천 학살 사건
3월 16일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서 주민들과 해인사의 승려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는데, 그 참가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3월 18일 합천군 강양면의 시장에서 시위가 있었다. 일본 군인과 경찰이 쇠몽둥이나 장검으로 해산시키려 했으나 어려워지자 발포하여 3명이 죽고 다수가 부상했다. 3월 19일에는 합천군 대정면에서 지역 유지와 노동자들이 고현시장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시위를 벌여 주모자 5명이 체포되어 진주로 압송되었다. 3월 22일에는 상백, 백산, 가회, 삼가 등 다섯 면의 주민 3만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질서 있는 평화시위를 벌였음에도 일본군이 무차별 발포하여 42명이 사망하고 100여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같은 날 초계면에서도 유림과 학생의 주도로 8천여 명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자 역시 일본군이 발포하여 5명이 죽고 수십 명의 부상자를 냈다.
⑩ 남원 학살 사건
남원군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가 관청 행사였던 식수 기념식이 예정되어 있던 4월 3일을 기해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19개 면에 격문과 참가 취지서를 보냈다. 나무 심기를 핑계로 군중 800여명을 모아 식수기념식이 끝나자 19개 면장 등이 만세를 선창하고 군중들이 호응하여 남원-전주 간 도로를 행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 소식은 곧 남원군 전체에 퍼졌으며, 다음날인 남원읍 장날에 장터에서 또다시 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장날 오후에는 광한루 앞 광장에서 군중 1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자 수천여명의 주민들이 다시 합세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져 읍내 전체가 시위 군중으로 가득했다. 일본군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해 이 과정에서 방진형(房鎭炯), 방명숙(房明淑) 등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황일환(黃日換), 이성기(李成器), 형갑수(邢甲洙) 등 20여명이 체포되었다.
⑪ 익산 이리장날 만세운동
기독교인이었던 군산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가 1919년 4월 4일 이리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을 주동하였다. 당시 일본군 보병중대가 주둔하여 검문검색이 심해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그는 박도현과 장경춘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4월 4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12시 쯤 이리 장터에는 기독교인 등 300여 군중이 모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의해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군중의 수가 점차 늘어 1천여 명이 되고, 그에 따라 기세가 오르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였다. 일제는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곤봉·쇠갈고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했다. 시위 군중이 이에 대항하여 계속 만세운동을 진행하자 급기야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 때 문용기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자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어 태극기와 함께 땅에 떨어뜨렸다.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하자 이번에는 왼팔마저 베어버리니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계속 만세를 외쳤다. 이에 격분한 일본 헌병은 끝내 추격하여 사정없이 난자하였고, 그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끝내 순국하였다.
⑫ 군산 3·5 만세운동
전북 군산에서 영명학교 졸업생 김병수가 1919년 2월 26일 민족대표 33인중 한명이던 이갑성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200여장을 건네받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영명학교, 멜본딘여학교(현 군산영광여중·고교), 구암교회 교인, 시민 등 500여명이 3월 5일 시위에 참가하였다. 윌리엄 린튼은 군산의 만세운동을 지도하였는데, 시위는 이후에도 28차례에 걸쳐 계속되어 시민 3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시위 당시 일제의 폭력진압으로 인해 53명이 사망하고, 72명이 실종되었으며, 195명이 부상을 당해 만세운동으로 인한 사상자로서는 전라북도 내에서 가장 많은 규모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한강 이남 지역에서 최초로 벌어진 만세운동으로 그 의미가 크다.
⑬ 만주 용정 만세운동
만주지역에서의 대표적인 만세시위는 3월 13일 용정에서 3만여 명이 참가한 시위였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시가행진을 하지 중국군대가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일제는 3·1 운동의 영향을 차단하기 위하여 심양에서 조선인회를 열었다. 조선인회에 참석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의 차별 철폐를 요구하였다.
- 만세꾼 : 3·1운동은 시위에 앞장섰던 학생들이 3월 5일에 대거 검거되면서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9일부터 서울 시내 상인들이 항일투쟁에 나섰고, 20일부터는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항일시위는 지방과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농민 시위는 주로 장날에 일어났는데, 이때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을 ‘만세꾼’이라 불렀다. 시위에 참가한 군중을 일컫는 경우도 있으나 대개 시위를 주도하고 만세를 선창하는 사람을 지칭했다. 이들은 장날을 쫓아다니며 마을마다 통문을 돌리거나 벽보를 부착해 시위를 알리고 태극기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했다. 이들은 농민 출신이 다수였지만 학생이나 의병 출신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6) 1945년 해방, 46년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
- 배경
① 1946년 6월 정판사 위조지폐 조작사건을 통해 미군정의 좌익계열 탄압 노골화.
② 1946년 토지개혁 논쟁 가속화(이북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 / 이남에서는 유상몰수, 유상분대)
③ 1946영 9월 조선인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대 진보신문 강제 폐쇄.
④ 일제 시 80%에 해당했던 일본 자본가들이 대대적으로 철수하자 극심한 경제적 침체와 혼란 발생
⑤ 일본 자본가들의 철수 이후 친일 자본가 중심으로 공장폐쇄와 사보타지를 통해 공장 가동 중단
⑥ 공장이 멈추고 심각한 물자부족 및 물가 폭등으로 노동 대중의 생활수준인 심각한 상태
⑦ 이 과정에서 비어있는 공장을 노동자가 접수하는 자주관리운동 전개
⑧ 해방 후 전국 각지에서 산업별로 노조나 공장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조직건설의 성과를 모아 1945년 11월 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건설.
⑨ 전평 중심으로 “야근철폐, 8시간 노동제 실시, 차별배급 철폐” 등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 전개
⑩ 이러한 투쟁과 더불어 자본가가 없는 공장에 노동자가 직접 공장을 가동하고 생산을 통제하는 자주관리운동 전개
* 경성방직의 경우 김연직 한국인 사장이 공장 문을 닫고 투쟁지도부 5인을 해고했지만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 지도하에 조업을 계속했고 오히려 생산액을 증가시킴.
- 1946년 9월 24일 4만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
① 9월 23일 부산지역 7천여 노동자들의 총파업
② 곧 이어 전국적으로 4만여 철도 노동자 총파업
③ 금속, 화학 등 전국적으로 15만 노동자 총파업
④ 9월 27일 서울의 중학교와 전문학교 학생 1만5천여 명 학원의 자유,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등을 요구로 걸고 거리 투쟁 전개.
⑤ 남조선 국방 경비대(현재 육군), 해상경비재(현재 해군) 일부도 파업 투쟁을 전개하고 미군내 미군 수십 명이 “조선에서 미군을 철퇴하라”라는 구호를 외치고 시위 전개
- 미군정 운수부의 25% 감원 방침에 반대하는 투쟁
- 철도노조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
- 파업 투쟁의 요구
① 쌀을 달라!
② 물가인상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③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④ 공장폐쇄․해고 절대반대!
⑤ 민주주의운동 지도자에 대한 체포령 철회와 즉각 석방!
⑥ 언론․출판․결사․시위․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⑦ ≪해방일보≫ 등 탄압받고 있는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직원들을 석방하라!”
- 전평투쟁의 의미
-> 전평의 공장자주관리운동은 노조원, 비노조원, 숙련공, 비숙련공 등의 차이를 넘어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의 단결 협력 할 것을 주장함.
-> 노동시간 단축, 인력 확충, 실업방지, 실업노동자에게 일자리 보장을 요구
-> 전평의 전성기 실절 55만의 조합원 중 절반 이상이 실업 노동자.
- 진압
① 9월 30일 총파업 투쟁의 거점인 서울 철도 파업 단에 탱크와 기관총으로 무장된 경관 2천명을 투입하고 대한노조(현 한국노총) 청년단 및 김두한의 대한민청등이 필두로 총파업 자제 거리 시위 등을 전개하면서 진압 - 총 1700여명 연행
② 대구 총파업 투쟁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함에 분노하여 10월 대구지역 민중항쟁으로 전개됨.
7) 1946년 10월 인민항쟁
- 전개 과정
① 46년 9월 총파업이 전개될 때 대구의 경우 9월 23일 총파업을 돌입함. 10월1일까지 파업과 시위가 계속되었고 10월 1일 대구지역 메이데이 행사를 진행하고 저녁 대구시청 앞에서 기아대책 마련 시위 도중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2명이 사망하는 사건 발생.
② 다음날인 10월 2일 사망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은 노동자 및 학생들이 대구 시내에 1만여 명이 집결하여 대구 경찰서를 무장해제 하고 대구경찰서장이 유치장을 열고 정치범들을 석방함.
③ 이 와중에 경찰의 총포 사격이 또 발생하여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사태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경찰 무기고를 털어 시위대가 총기로 무장
④ 미군정은 10월 2일 오후 7시 대구지역의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정과 노동자 학생 시위대간의 무장 투쟁이 대구를 넘어 전국적으로 전개되면서 1946년도 말까지 진행이 되었음.
- 19-20세기 우리의 근∙현대사는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바탕으로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항쟁과 투쟁의 역사가 쉼 없이 전개되었다.
- 지주제와 신분제의 모순에서 파생된 삼정의 수탈이 직접적인 계기로 인해 발생한 농민들의 투쟁이 19세기 내내 지속되었고 1862년 한해만 해도 72개 군현에서 항쟁이 발생되었다.
- 개항이후 갑신정변, 갑오개혁, 광무개혁, 문화계몽 등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투쟁 즉 1894년 농민 전쟁, 활빈당 투쟁, 항일의병 전쟁 등 민중의 투쟁은 끊임없이 전개 되었다.
- 1910년 일제하 조선의 계급 및 민족 모순의 심화 확대 되어 가면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은 1919년 3∙1운동으로 확대 되었고 이러한 3∙1 운동은 한국 사회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1945년 해방 이후 1948 8월 15일 대한민국과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인 미군정 시대에서 전평 중심으로 한 한반도 노동자들의 투쟁은 9월 총파업과 곧 이어 전개된 10월 인민항쟁 투쟁으로 그 투쟁의 역사를 펼쳤다.
수고하셨습니다.
1968년 이승복 사건의 진실
1998년 8월, 나는 서울신문으로 옮겼는데 그 무렵 ‘이승복 사건’ 오보 논쟁이 한창이었다. ‘보도지침’ 폭로로 널리 알려진 기자협회장 출신의 김주언 전 언론개혁시민연대(언개연) 사무총장이 ‘언론계 50대 허위·왜곡보도’를 선정하면서 1968년 12월 11일자 <조선일보>의 ‘이승복 사건’ 보도를 대표적인 작문 기사로 발표했던 것. 김 전 총장은 앞서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편집국장(현 팟캐스트 ‘시사통’ 진행자)이 1992년 한국기자협회 발행 계간지 <저널리즘> 가을호에서 조선일보의 ‘이승복 사건’ 보도가 조작이라는 의혹을 제기한 것을 근거로 이 같은 주장을 폈다.
먼저 ‘이승복 사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자. 이 사건은 1968년 12월 9일 강원도 울진·삼척 지구에 침투했던 북한의 남파공작원(당시는 ‘무장공비’라고 부름) 5명이 강원도 평창군의 한 시골 오지마을에 숨어 들어가 일가족 4명을 집단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피해자는 어머니 주대하(당시 33세), 차남 승복(당시 10세), 3남 승수(당시 7세), 4녀 승녀(당시 4세) 등 4명이었으며, 아버지 이석우(당시 35세)씨와 장남 승권(당시 15세, 호적상 이름은 ‘학관’) 군 등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조선일보는 1968년 12월 11일 3면(사회면) 머릿기사로 <공비, 일가 4명을 참살/“공산당이 싫어요” 어린 항거 입 찢어> 제하의 기사에서 이 사건의 전모를 소개하면서 남파 공작원에게 살해당한 승복 군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유일하게 항거하다가 죽임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작문 논란을 빚은 문제의 조선일보 '공산당이 싫어요' 기사(1968.12.11)
당시 조선일보의 관련 대목을 인용해보면, “장남 승원 군에 의하면 강냉이를 먹은 공비들은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다음 북괴의 선전을 했다. 열 살 난 2남 승복 어린이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얼굴을 찡그리자 그 중 1명이 승복 군을 끌고 밖으로 나갔으며 계속해서 주 여인을 비롯한 나머지 세 자녀를 모두 끌고 나가 10여m 떨어진 퇴비더미까지 갔다. 공비들은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벽돌만한 돌멩이로 어머니 주 여인의 머리를 여러 차례 내리쳐 현장에서 숨지게 했으며 승복 어린이에게는 ‘입버릇을 고쳐 주겠다’면서 양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 그러나 증언자들에 따르면,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한 것은 사건 발생 다음날인 10일 낮쯤이었다고 한다. 승복 군 등 4명의 시신은 현장에 출동한 군·경에 의해 수습된 뒤였다. 또 승복의 아버지와 형(승관) 등 2명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으로 실려 간 상태였다고 한다. 따라서 당시 기자들은 군·경과 인근 주민들의 증언 및 참사현장 등을 토대로 기사를 작성했다. 김종배 전 미디어오늘 국장은 92년 당시 사건의 유일한 현장 목격자인 장남 승권 씨(승복 형) 증언을 토대로 “(사건 발생 직후) 조선일보 기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내용의 인터뷰 기사를 <저널리즘> 가을호에 기고했다. 승권 씨는 동생 승복이 살해된 뒤 자신이 원주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이 사건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 김 전 국장은 이밖에도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승복의 형의 이름을 잘못 기록했다는 점(승권 군을 ‘승원 군’으로 오기), 승복의 집이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어 소리를 듣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승복의 시신이 입이 찢어져 있지 않았다는 주민의 증언 등을 인용해 조선일보의 ‘이승복 사건’ 보도의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자사 특종기사가 작문 논란에 휩싸이자 조선일보는 그해(98년) 9월 28일부터 본지와 <월간조선>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반박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두 달 뒤인 11월 이 사안에 대해 처음으로 의혹을 제기한 김 전 국장과 이를 토대로 ‘오보 전시회’를 주도한 김 전 총장을 상대로 명예훼손에 따른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다.
2002년 9월 형사 1심 재판부는 피고인 이들 2명에게 각각 징역 6월(김주언)과 10월(김종배)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승복의 발언에 대한 진위는 관계인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진술하고 있어 이제는 더 이상 따질 수 없는 문제가 됐고, 조선일보 기자가 현장 취재를 했는지 여부는 조선일보에서 제출한 당시 현장 사진들에 취재기자의 모습이 등장하는 점 등에 비춰 두 피고인의 혐의는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2004년 10월 항소심에서는 김 전 총장에게 징역6월에 집행유예 2년, 김 전 편집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앞서 2004년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25부는 조선일보가 이들 두 사람에게 제기한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민사 재판부는 “이승복 사건은 진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고 당시 조선일보 기자였던 강인원과 노형옥이 현장취재를 한 것은 사실로 인정된다”면서도 “하지만 이승복 사건이 의혹조차 제기할 수 없는 절대적 대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언론의 표현의 자유, 즉 의혹 제기를 타당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2006년 대법원은 원심을 확정해 김주언 전 총장에게 징역6월에 집행유예 2년, 그리고 조선일보에 5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김 전 편집국장에게는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았다. 김 전 국장이 의혹 제기를 위해 취재 노력을 많이 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이 사건을 둘러싼 법정논쟁은 막을 내렸다. ‘이승복 사건’ 개요와 그간의 법정논쟁 경과 등을 쓰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는데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무장공비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 일가 4명의 시신 모습
1998년 8월 서울신문으로 옮긴 나는 처음엔 특집기획부에서 ‘친일파 군상’ 연재를 하다가 이듬해 문화부로 옮겨 학술담당, 출판담당을 하게 됐다. 그 무렵 프레스센터 앞에서 우연히 정 선배를 만나 건물 지하 전통찻집으로 가서 차 한 잔을 나누게 됐다. 당시 정 선배는 중앙일보에서 은퇴한 후 집에서 쉬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일거리로 원고 교열 일을 보고 있다며 혹시 일거리가 있으면 소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몇몇 아는 출판사를 통해 한두 차례 교열 일감을 소개해드린 적이 있다. 자리가 파할 무렵 무슨 말끝에 정 선배는 ‘이승복 사건’ 오보논쟁 얘기를 하면서 “언젠가 진실을 말해주겠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자신이 현장취재를 했노라고 했다. 나는 그 때까지는 정 선배가 ‘이승복 사건’을 취재한 기자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뒤 중앙일보 기사를 검색해봤더니 정 선배는 당시 삼척 주재기자로 활동하면서 강원도 일대에 출몰한 무장공비 사건을 여러 차례 취재해 보도했다. 1968년 12월 9일 발생한 ‘이승복 사건’ 때도 정 선배는 현장에 취재를 갔으며, 11일자 중앙일보에 그 내용이 상세히 실려 있다.)
정연복 선배가 삼척 주재기자 시절에 쓴 무장공비 관련 기사 (1969. 6.19)
그리고 얼마 뒤 정 선배를 다시 만나게 됐다. 다짜고짜 나는 ‘이승복 사건’ 취재 건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러나 정 선배는 매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소송이 진행 중인 사안이어서 말하기가 좀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 일을 메모를 해서 기록으로 남길 테니 좀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후로도 정 선배와 몇 번 더 만났다. 그러나 번번이 말을 아끼면서 소문내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만 했다. 그래서 요점만이라도 말해 달라고 했더니 “조선일보 기사는 엉터리”라고 잘라 말했다. 즉, 이승복이 죽기 전에 공비들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조선일보 기사는 작문이라고 했다. 대충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런 말을 들으니 놀라웠다. 그래서 내가 그 이유와 근거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자 정 선배는 “이승복 일가 4명이 무장공비들 손에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자들이 도착한 것은 이튿날이었는데 조선일보 기자는 기자들 중에서도 제일 늦게 도착했다”고 말했다. 당시 현장에서 살아남은 승복의 형 승관(호적명은 학관)은 공비들에게 대검으로 여섯 차례나 찔린 후 퇴비더미에 처박힌 채 의식을 잃었다. 11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승관은 공비들이 사라진 후 30분 만에 의식을 차린 후 피투성이가 된 채 약 50미터 떨어진 이웃집으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는 다시 기절했다고 한다. 다음은 중앙일보 ‘현지취재반’의 12월 11일자 기사 전문이다. 피투성이 長男 必死의 申告 一家 4명 죽인 共匪들 發惡 【강릉=현지취재반】 9일 밤 平昌郡 ○○面 ○○里 李錫雨 씨(32) 집에서 빚어진 공비의 4명 참살사건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비들의 만행이 무차별하고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날 밤 8시30분쯤 아랫마을에서 이삿짐을 날라주고 싸릿문을 들어선 李씨는 집안 퇴비더미 뒤에서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이 그림자는 李씨에게 달려들어 칼로 李씨의 엉덩이를 찌르자 李씨는 비명을 지르며 『왜들 이러시오, 소라도 줄 테니 좋게 얘기합시다』고 애원했으나 공비들은 『소는 필요 없다』면서 총부리를 들이대고 『안방으로 가자』고 했다. 李씨는 안방으로 가는 체 하다가 공비들이 한 눈 파는 틈을 타서 부엌을 거쳐 담을 넘고 집 뒤에 있는 20미터 높이의 계곡을 뒹굴어 졸도했다. 이 때 아버지 李씨의 비명과 괴상한 소리에 놀란 장남 學官 군(14)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공비들은 『이 새끼는 뭐냐?』하며 대검
공비들은 이어 안방에 침입, 놀고 있던 2남 承福 군(9)을 죽이자 옆방에서 메주를 쑤다가 달려온 李씨의 처 朱文河 여인(32)이 장녀 承淑(7), 2녀 承女 양을 껴안고 애들만이라도 살려줄 것을 애걸하자 이들 3명까지 찔러 죽인 후 닭 3마리와 옥수수 가마를 강탈, 도망쳤다. 공비들이 사라진 뒤 30분 만에 퇴비더미 속에서 의식을 회복한 장남 學官 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약 50미터 떨어진 崔大吉 씨 집으로 기어가서 『공비가 우리집 가족을 다 죽었다』고 알린 후 기절해버렸다. 崔씨는 李군의 말을 듣고 곧 1킬로쯤 떨어져 있는 경찰·예비군 초소에 「릴레이」 신고, 군·경·예비군 수색대가 즉시 현장에 출두, 뒷산에서 2명을 사살했다. 중앙일보 기사는 조선일보 기사와 큰 차이가 있다. 중앙일보 기사는 사건 발생 정황을 사실관계에 입각해 ‘기록’하였다. 반면 조선일보 기사는 당시 상황을 마치 현장에서 목격이라도 한 듯이 상세하게 ‘묘사’했다. 승복이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며 얼굴을 찡그렸다거나 공비들이 승복의 ‘입버릇을 고쳐 주겠다’며 양손가락을 입속에 넣어 찢은 다음 돌로 내리쳐 죽였다고 한 대목 등이 그렇다. 조선일보 ‘이승복 기사’에 대한 작문 논쟁이 조선일보의 고소로 법정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그러자 재판 과정에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각사 기자들이 여럿 증인으로 출석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문제의 기사를 쓴 조선일보 취재기자 강인원과 사진기자 노형옥,
이승복 사건'을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1968.12.11) 경향신문의 취재기자 강한필과 사진기자 이봉섭, 당시 사건 현장을 수습했던 하일 주임, 한국일보 강릉 주재기자 박주환 등이 그들이다. 2002년 9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자 김주언, 김종배 두 피고인은 ‘법원 판결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통해 판결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들은 “재판과정에서 채택된 증거나 증언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결과라고 판단한다.”며 “3년1개월여의 재판과정 동안 이뤄진 여러 증인의 증언과 사진 감정결과를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한 예로, 당시 취재현장을 기록한 사진(아래) 속의 주인공은 조선일보의 주장과 달리 조선일보 기자(강인원)가 아니라 경향신문 기자(강한필)인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강한필 기자는 이승복 사건 다음날인 12월 10일 사건 현장에 가서 취재를 했으나 조선일보 기자는 만난 적이 없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현장에 동행했던 이봉섭 사진기자에 의해서도 확인됐다.
또 증언내용이 서로 엇갈림에도 이를 무시하고 판결한 것도 문제로 지적됐다. 예를 들어 한국일보 강릉 주재 박주환 기자는 당시 조선일보 강릉 주재기자였던 송종헌 기자가 자신에게 ‘조선일보 기사는 작문기사’라고 말한 바가 있다고 증언했다. 문제의 조선일보 기사는 강인원·송종헌 두 기자가 작성한 것으로 나와 있다. 더구나 박주환 기자가 김종배 씨에게 ‘조선일보 기사는 만들어낸 것’이라는 취지의 증언을 한 녹음테이프와 녹취록까지 증거물로 제출됐다. 물론 박주환 기자는 김종배와의 인터뷰 당시 이같이 증언했다가 검찰에 출두해 입장을 번복해 나중에는 검찰 측 증인으로 채택됐다.
조선일보의 주장과 달리 사진속의 인물은 조선일보 기자가 아니라 경향신문 기자로 확인됨
그런데 의아한 것은 당시 중앙일보의 현장취재 기자였던 정 선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점이다. 그 무렵 정 선배도 이 사건이 법정다툼으로 비화된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정 선배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증언대에 서지 않았다. 애초 내게 ‘증언’할 생각도 있었고 또 ‘기록’을 남기겠다고 했던 정 선배였다. 이 사건은 대법원 판결까지 난 상황이어서 사법적 판단은 이미 끝이 났다. 그러나 법원 판결만으로 이 사건의 진실이 전부 밝혀졌다고 보긴 어렵다. 특히 김주언, 김종배 두 사람의 주장처럼 재판과정에서 핵심 증언과 증거자료가 제대로 검토, 반영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진실이 묻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쩌면 고 정연복 선배가 ‘이승복 사건’ 보도를 둘러싼 작문 논쟁의 결정적 증언자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정 선배가 증언하지 않은 점은 유감스런 일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좀 더 강하게 정 선배에게 증언할 것을 강권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승복 기사 오보 논쟁은 이걸로 역사속에 묻히고 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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