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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궁구린 먹먹한 말들
-김금란 시집 《짧은 만남도 오랜 슬픔일 때가 있다》중심
박철영(시인, 문학평론가)
먹먹한 하늘이 생각날 때는 바다가 필시 그리워질 때다. 스물셋에 보았던 바다는 그렇게 추억 속에서 내 생애 동안 썰물 진 바다로 존재했다. 그런 바다가 있는 보령에 아는 시인이 살고 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러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이 2001년도니까. 깊은 바다 속에서 작은 집게발로 세상이 궁금해 기어 나온 뻘게처럼 스스로 세상으로 걸어 나와 시를 찾아다녔던 무모한 시절 이야기다. 그런 인연으로 끊어질 듯 이어온 질긴 인연은 가끔 만남으로 이뤄졌고 어렵사리 단절을 면할 수 있었다.그처럼 얼굴 보기도 어려웠을 뿐더러도통 보여주질 않던 시인의 몸통 같은 시편이 사연으로 건너왔다. 강원도 깊숙한 곳 어딘가에 있다는 시인의 고향 무릉 골처럼 물어물어 찾아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귀한 시 몇 편이지만, 시인의 내밀한 삶 속으로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시인이 누군가를 찾아간다는 것은 귀소歸巢의 또 다른 모습이다. 우리는 모태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끝없이 누군가를 찾아가는 그리움을 꿈꾸며 산다. 그렇지만 시인은 의외로 사람에 대한 애틋함을 만남이 아닌 ‘분리’를 통해 속내를 내보인다.
또 하나의 오늘이 어제가 되어버린 아침
벌써 몇 년 째 꽃이 피지 않는 화분을
기어이 내 삶에서 분리하기로 했다.
-<나는 아직 분리되지 못하였다> 부분
어차피 사유는 삶의 개별성에서 오는 의지고 자유다. 그런 사유와 인식에 이르게 된 계기가 슬슬 궁금해졌다. 시인은 베란다에 핀 블루베리 꽃을 평소처럼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꽃을 보며 시인을 낳아준 엄마를 상상하게 된다. 강원도 무릉 골이 고향이라니 오지 같은 풍경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부모 곁이나 고향을 다들 떠나기는 쉬워도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이 인지상정이다. 여자이기에 결혼하면 떨어져 사는 것이 당연하고 살다 보면 죄스러움은 커져간다. 나이 들어가며 떨어져 있음이 오히려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를 인식한다. 어쩔 수 없이 부모 곁에서 분리되어 불편해진 삶의 모퉁이에 “또 하나의 오늘이 어제가 되어버린 아침/벌써 몇 년 째 꽃이 피지 않는 화분을/기어이 내 삶에서 분리하기로 했다.”며 고백한다. 화분 속 나무가 꽃을 피워내지 못한 아픔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든 역할이나 기능이 있는 것처럼 응당 꽃을 피워야 꽃나무라고 불러준다. 그 꽃나무를 통해 폐경에 이른 여자가 되어버린 엄마임을 떠올린다. 시인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당연하게 유년 속의 엄마여야 했다. 그런 엄마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알아챈 것이다. 이어 수없이 봐왔던 “어두운 밤을 가르며 별”이 떨어지던 고향의 밤하늘을 기억 속에서 찾아낸다. 그 별로 표상되는 주체의 하강은 단순하지 않는다. 별은는 하강을 통해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대상과 혹독한 고통을 감내하며 ‘분리’하기 때문이다. 그 분리는 엄마와 별개의 구도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분리됨으로써 더 소중한 엄마의 이미지에 답지踏地하는 시적 주체로 다가가게 된다. 시인은 대상을 통해 짧은 시간이지만,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되묻는 사유를 끝없이 이어간다. “길가에 흥건하게 분리된 꽃잎들 위로/무심히 내리는 봄비,”를 보며 외부의 힘에 의한 완전한 해체에 이르는 꽃을 본다. 그 분리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태생적 가역성으로 분리되지만, 아직도 ‘엄마’라는 존재 속에서 분리되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시간이라는 세월이 더께처럼 쌓여도 어쩔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 안에서 오롯하게 전유할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삶은 어차피 결핍과 충족을 오가는 생명선 위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시의 형식은 더욱이 소설과 달리 주체와 대상 간의 일체화된 언어 이전의 행위이고 사람의 존재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의미는 여성으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달병>은 인연으로 닿아있는 끈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분리’라는 또 다른 미정형의 언어로 다가오기에 놀랍지 않다.
보름이 가까운 가보다
달빛이 슬프도록 예쁘다
내 몸 깊숙한 어딘가에서
불쑥 느껴지는 통증
습관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누군가에게 길이 든다는 것은
또 얼마나 긴 기다림을 견뎌내야 하는지
한 달에 한 번 당신을 만나기 위해
시간에 시간을 덧씌우는 순간순간에도
끝없이 느껴지는 목마름
그 설레는 기다림의 시간을
-<달병> 부분
모든 상처는 통증을 유발한다. 달거리도 상처이고 온전한 통증이다. 여성은 그 상처를 통해 긴 기다림의 목마름을 쏟아내야 또 한 달을 살아갈 수 있다. 여성은 가느다란 현 위에 놓인 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것마저 이미 상처가 아닌 그리움으로 인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름이 지나면서부터 은근히 기다려지는 희망이 되었다. 그것은 태생으로 부여받은 숙명이어서 담담히 긍정한다. 그런 현실 인식은 단순한 생리 기능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통증’이나 ‘목마름’은 시詩에 내재한 또 다른 자아이고 자의식의 발현이다. 여기서 통증이나 목마름을 유발하는 대상은 또 다른 사람들로 ‘우리’가 되고 만다. 결국 사람 때문에 도지기 시작한 상처 같은 통증은 사는 동안 가슴 아파 아물지 않는 언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도 딱지처럼 굳어질 기미도 없다. 그래서 일상으로 수반되는 통증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정상까지 굴러 올린 바위 앞에서 순간의 희열을 맛보며 씨익 웃음을 띄는 시지프스의 운명과 너무도 닮았다. “이 슬픈 그림자 같은 사랑을/언젠가 아프게 밀봉해야 하는 그날/우리는 어떤 이유를/인장으로 걸어두어야 할까?” 라고 되묻는다. 어차피 살아가는 관계에서 훌훌 벗어던질 수 없는 목마름의 원형 같은 ‘통증’이다. 단단히 밀봉해버리고 싶어도 한 달 후면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무너져 내려야 하는 체념 같은 상처다. 하지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은 훼손된 심신을 치유해줄 천상의 몸짓이다. 통증도 빈번해지면 내성이 생겨 습관처럼 기다려지는 것인가. 기다림 같은 선으로 이어지다 순간 뚝 끊어져 버리는 면발, 그것마저도 눈을 쉽게 거두지 못하는 시인이다. 씨줄과 날줄처럼 이어진 관계가 아름다운 인연인 거라며 말을 담담히 이어간다.
끊을 수 없는 중독
저것의 시작과 끝이 늘 궁금했다
부풀수록
툭 툭 끊어져 버리던 낯선 단절
시도 사랑도 흩어진 문장들처럼
부풀지 못한 긴 불임의 시간
-<라면> 부분
시인은 왜 먹거리로 즐겨 먹는 라면을 끓이면서 하필 중독이란 말을 꺼내고 있을까. 오래전부터 우리의 삼시 세끼는 밥이었다. 조, 쌀, 보리, 옥수수로 만들어 고픈 뱃구리를 채워주는 밥이 되었다. 우린 통틀어 밥 때를 가리켜 끼니라고 했다. 어느 때부턴가 라면이 밥 대신 올라와 끼니를 메운 것이다. 라면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이차 산업의 먹거리고 유통구조를 통해서 팔리게 되면 삼차 산업의 서비스 영역까지 파고드는 괴물이다. 시인은 라면을 통해 자본주의의 괴물에 스스로 중독된 것을 알게 된다. 쌀밥은 개체가 찰기로 엉겨 붙어 덩어리로 존재한다. 하물며 찰기 없는 보리밥 알갱이마저 덩어리로 밥상에 올려졌다. 하지만 라면은 아무리 삶아도 밥처럼 엉켜 덩어리가 되지 못하고 개체 가락으로 존재하다 결국에는 뚝뚝 끊어져 버리고 만다. 시인은 라면을 통해 중독이란 추상적 의미와 정신적 단절까지 함의含意하고 있다. 끼니를 함께하는 가족 단위에서뿐 아니고 사회 구성원인 우리 속에서 일상화된 단절을 라면이란 대상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사회 문제에 대해 체념하거나 방관하지 않는다. 중독성은 해독할 처방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놓지 못하는 것도/어쩌면 저 단단하고 견고한 그리움 때문이다”고 속내에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리움은 심미안으로 감춰선 기다란 감정感情 선이다. 그 감정 선線은 누군가에 닿고 싶은 집요한 의지意志다. 궁극에 이르는 그리움은 원형圓形을 지향한다. “매번 동그란 것만 고집하는 나”를 더 이상 고집하지 않겠다며 다짐한다. “저것을 끓이며 알았다/부풀어 오른다는 건 그리움 이란 걸/휘휘 젓는 것은 마음을 젓는 것이 아니라/서로의 마음을 섞는 일이란 걸/모든 결속은 응집된 시간의 부피가/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양은 냄비에 물을 넣어 끓이는 행위가 단순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단절된 우리를 회복하려는 행위이고 간절함으로 다가가려는 것이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라면을 끓이면서도 삶의 지향하는 고뇌로 존재 변이를 모색한 그래서 더 빛나는 시다. 그것은 자본과 고도 산업사회의 시간 개념이 가져온 빠른 식문화 조리법을 갖춘 라면에 대한 인식과 핍진한 사유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긍정적인 내파와 재구로 접근한 시적 탐색으로 탄탄한 재인식을 이뤄내고 있다. 시인에게 라면은 하나의 층위에서 ‘중독’과 ‘단절’이라는 불온성을 상기시킨다. 두 가지의 모순을 담지 한 ‘라면’에 대해 오히려 그런 불온성을 은근히 즐기거나 가슴으로 연민의 시선을 보낸다. 단단하고 견고한 ‘그리움’의 주체는 대상과 합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 볼온성은 또 다른 존재 의미로 단절을 극복하고 그리움을 회복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눈으로 다가온 것들은 하찮게 지나치는 법이 없다. 바람에 드는 것마저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바람에도 향기가 있는 걸까
골짜기에 접어들자 낯익은 향기에
온몸의 세포들이 꿈틀거린다
자동차의 창문을 내리고 바람의 냄새를 느껴본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내 유년의 저 골짜기에는
엄나무 두릅나무 찔레꽃 엉겅퀴 같은
온통 가시나무 천지였다
무릎을 꿇어야만
씨앗 하나 허락하던 가파른 자갈밭은
만발한 쑥부쟁이 꽃보다
내 부모님 거친 숨소리가 더 휘몰아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는 모두
바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다
-<바람속에 들다> 전문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은 차가 점령한 지 오래다. 차도를 굴러가는 차들을 보면 차가 중심인 것 같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도로의 갓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사람이 중심임을 알게 된다. 달리던 차량이 속도를 늦추고 사람을 쳐다볼 때 바라보는 시선이 어디냐에 따라 관점이 확연히 달라진 것이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다 보이는 대상이 중심이 되고 자신 스스로는 주변이 되어주는 마음으로 차창 밖을 보고 있다. 인식의 대상은 무색무취한 바람한테도 가능해진다. 바람을 통해 자신을 되짚어가는 추론적 자아 인식은 여기서도 남다르다. 부는 바람마저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바람은 자신을 지금껏 성장시키고 존재하도록 한 혈연적 족적까지 꿰뚫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상에서 수시로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스쳐 간 바람을 무심코 지나쳐버렸지만, 이 순간에 차 창문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예사롭지가 않은 소중한 인연이었음을 알게 된다. 고향을 찾아가다 존재 의식을 일깨우는 한 점 바람도 삶이란 인식으로 다가온다. 코를 스치는 바람으로 인해 알지 못했던 몸의 문을 통과해 잠재한 의식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바람은 신령한 바람이 된다. 신령스런 바람으로 마법처럼 유년의 추억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그 유년의 추억은 곧바로 어머니의 거친 삶을 떠올린다. “내 유년의 저 골짜기에는/엄나무 두릅나무 찔레꽃 엉겅퀴 같은/온통 가시나무 투성이었다/무릎을 꿇어야만 씨앗 하나 허락하던 가파른 자갈밭엔/만발한 쑥부쟁이 꽃보다/내 부모님 거친 숨소리가 더 휘몰아쳤었다”고 상기한다. 바람 속에 묻혀온 유년 속 부모님의 추억은 안타깝도록 고통스러운 삶이 전부였다. 세월에 묵혀서야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어머니의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자신에게 수없이 불어왔던 바람이었음을 알았다. “무릎을 꿇어야만 씨앗 하나 허락하던 가파른 자갈 밭”을 휘돌아 불어오던 정선 아리랑 같던 바람 소리다. 비탈진 밭에서 아슬아슬한 생을 부쳐 살아낸 부모님의 거친 숨소리가 바람을 통해 전해왔다는 것이다. 바람의 근원은 다름 아닌 자신을 존재하게 한 부모님뿐만이 아닌 세상 모든 것들과 통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일상에서 이는 순간이 바람이라는 것이며 그것을 통해 힘든 생에 대한 인내와 자각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바람은 자연조건에서 생성된 것이 아닌 사람의 생 안에서 생성되고 소멸한다는 인식에 스스럼없이 다가간다. 그러면서 아슴한 추억을 하나씩 꺼내면서 분리된 기억을 맞춰본다. 흩어진 기억을 통해 주변에 머물러 있던 시인의 관점은 서서히 중심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지나온 세월 동안 휘둘렸던 과거의 쓰리도록 아픈 기억에서 조금씩 담담해질 수 있다.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존재적 의미를 재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너와 나도/처음엔 그렇게 만났으리라/아주 낯선 곳에서/아주 낯선 얼굴로 스치듯 지나다/어느 순간/바람처럼 그렇게 서로에게 스며든 것이리라.” <스미다> 전문이다. 한마디 말 같은 문장이면서 매끄러운 여섯 행의 시가 의미론적 단절의 결을 단단히 메우고 있다. 너와 나로 단단한 시의 뼈대를 단번에 일으켜 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내 포획된 개체가 되었다가 하나가 되어버리는 수미상관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바람은 시적 의미 이상으로 존재하며 ‘너와 나’라는 틈을 결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거침없이 자임하고 나선다. 그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닌 이질적 요소를 동화시켜주는 질료가 된다. 그래서일까 시인은 유달리 바람에 대한 집착을 놓지 않는다. 따라서 <스미다>의 바람은 시적 언어로 형상화된 주체적 언어일 뿐만 아니라 무한 사유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시인이 바라보는 대상이 한 방향으로만 무모할 정도로 몰입하지 않는다.
동그란 꽃눈을 쓰다듬듯 조심스러운
여자의 작은 손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
햇살이 눈부시다
거리엔 어느새 국화 향이 가득하고
김광석의 목소리가 낙엽처럼 내려앉는다.
“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어느 인디언 부족은 십일월을
온전한 것 하나쯤은 남아있는 달이라고 했다
-<국화꽃이 피었다> 부분
시제詩題로 내민 국화꽃이 범상치 않게 다가온다. 왜 그럴까. 사회의 단단한 층위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린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에게도 물러설 수 없는 줏대가 있고 삶의 자부심은 있다. 시인은 시장 터 모퉁이를 돌아가다 눈에 띤 풍경에 걸음을 멈춘다. 누군가를 기다린 듯 거리에서 홀로 핀 꽃. 그렇다고 꽃은 땅에서만 피고 지는 것은 아니다. 가슴이 추운 사람들이 피워내는 거리의 꽃에는 향기보다 더 가슴을 에는 추억의 노랫가락이 꽃무늬처럼 서려 핀다. “국화꽃 한 다발을 사 들고 돌아오는 길”처럼 이상적 자아를 꿈꾸면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서정이다. 사람 꽃을 닮은 국화빵을 사랑스런 아내가 굽고 있다. 저 작은 손으로 곱던 시절을 절망하지 않고 험한 세월을 건너왔을 삶 같은 국화빵이다. 그렇기에 향기 그윽한 포장마차 안이 화원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한 다발씩 사 들고 가는 국화꽃. 허기 같은 침묵 속 끼니가 되었거나 또 다른 사람의 끼니가 되어주기도 했을 오랜 풍경 속에 핀 십일 월의 국화꽃 향기 그윽하다. 언제나 시간이 딱 그만큼 지나야 노릇노릇 익어가던 국화빵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딱 그만큼 만 사랑하는 “김광석의 목소리가 낙엽처럼 내려앉는다/그리운 그대 아름다운 모습으로/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의 포장마차 안이 노래 가락이다. 종종 사는 것이 체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앞서지만, 부부 스스로 인내해온 생이다. 이미 십일 월 들어 노랗게 핀 국화라면 기어이 누군가에게 건네주어야 할 것들 하나 둘쯤 읊조리며 기다려볼 일이다. 하루를 국화빵으로 바꿔야 살아갈 수 있는 고단한 일상이어도 물신주의에 물들지 않는 내면의 발화發話가 아름답다. 어차피 꽃은 고단한 사람에게 더 많은 위로와 위안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눈빛이 꽃을 닮았다. <길냥이들의 꿈 2>을 바라보는 눈빛이 꼭 그랬다. 버려진 것과 잃어버린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니 닮았다는 데 이른다.
아파트 주차장 차가운 자동차 바퀴 옆에서
온몸을 말고 있던 너
우리는 아마도 나비가 되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애초부터 날개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았었다
---중략---
웅크린 등과 불안한 눈빛
너를 알아본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지금은 서로의 등을 맞대고 누워 있지만
여전히 웅크리고 자는 우리
이쯤에서 한번쯤 기지개를 켜보면 어떨까?
-<길냥이들의 꿈 2> 부분
시인의 눈빛은 작고 낮은 곳을 지향하고 있다. 시인이 지금껏 가지려고 했던 것이나 가질 수 있던 것은 알고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남들 보기에 너무나 하찮은 작은 것들이다. 길고양이를 보았을 때도 하찮게 지나치지 못한다. 시적 발현에 이르는 진정성이 있다. <길냥이들의 꿈 1>에서 “버려진 것을 찾아 헤매는 것들의 눈빛은/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눈빛과 서로 닮았다/그들은 똑같이 버려진 곳들만 찾아다닌다/버려지는 곳을 찾아다니는 건/잃어버린 것들도 그곳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먹먹할 수밖에 없다. 시 속에 눈물이 없어도 슬픔 같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의 눈빛을 통해 과거 한때 절망스럽고 절박했던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고양이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지 모른다. 저토록 버려져 잃어버린 것들을 절박하도록 찾아 헤매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고양이의 눈빛을 빌어 절박했던 시절의 소심한 인식에서 벗어나고자 다짐한다. 아쉽게도 쉽사리 벗어날 수가 없다. 벗어나야 할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나비가 되는/같은 꿈”을 꾸고 있기에 한 번쯤은 꼭 이루어야 할 자의식을 회복하자는 다짐이다. 그 꿈은 나비가 되어 세상을 훨훨 날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잠시나마 고단함을 떨쳐버리고 싶은 소소小小한 욕망으로 족해도 좋다. 어떠한 상징도 배제된 직유의 <길냥이들의 꿈 2>은 곧 우리가 쉽게 외면하는 사회의 그늘진 곳을 가리키고 있다. “그냥 내 고개 하나 묻을 수 있는 무릎의 깊이/딱 그만큼의 마음 하나 갖는 거”라면 간단히 치유되고 말 것이다. 곰곰이 곱씹어본다면 자기 삶의 저항 의지 지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양보하고 내민 마지막 패는 하나뿐이다.
쓸쓸한 곡선의 시간 너머 까마득한 직각의 짧았던 봄
그날의 기억을 되짚어 가는 일은
생의 안쪽 깊숙이 숨겨둔
음지의 시간마저 불러와야 하는 쓸쓸한 일일 게다
낡은 그의 냄비 위로
불러오지 못한 붉은 그리움 부글대며 끓어오른다
벽 한 귀퉁이 빼곡하게 걸려있는 액자엔
그의 눈빛을 닮은 빛바랜 얼굴들
희미하게 웃고 있다.
-<쪽방에서 길을 잃다> 부분
티브에 비친‘쪽 방’안을 무심히 보았다. 이후 시인은 쪽방 앞을 지나칠 때마다 불편한 마음이 많아졌다. 눈에 밟힌 쪽방 촌 속 둥글게 말린 할머니의 허리 모습 때문이다. 쪽방이라는 정처定處에 발목이 잡힌 시 한 편이다. 누구나 사람은 동그란 모태에서 생명을 시작하고 마칠 때도 동그란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긴 여정이다. 결국, 커다란 원 하나를 그리다 한 생애를 마치고 만다. 그런 마지막 생으로 담담히 걸어 들어가는 쪽방촌의 할머니를 보면서 통증처럼 아파오는 시선이다. 누구나 저녁을 먹고 난 뒤에는 여유롭게 휴식을 즐길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때마침 티브이 리모컨이 가리킨 곳 “사각의 뜨거운 모니터가 숨이 차다/둥글게 말린 허리 퉁퉁 부은 다리/꼬깃꼬깃 구겨진 삶 하나/검은 비닐봉지를 움켜쥐고/비좁은 쪽방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며 ‘쪽방’을 보게 된다. 그곳까지 밀려오면서 저항의 삿대질이라도 제대로 한번 해보았는지 안타깝다. 왜 힘없는 사람들의 허리는 스스로 굽어지다 기어이 둥글게 말려져야 하나. 그들도 우리처럼 하루 세 끼를 먹어야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해 주듯 고달픈 저녁 식사를 준비하나 보다.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 같은 사람들의 하루 끝마무리가 저 라면 한 그릇으로 메워질 때 자본의 비릿한 배는 오늘도 더 불려 질 것이다. 고달픈 이면을 편안하게 베고 누운 사람들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여지없이 분리된 삶이다. 그곳에 갇힌 오랜 의식들마저 흐릿해진 날 “어둡고 캄캄한 공간 속에/구불구불 웅크리고 있던 또 하나의 삶이/낡은 냄비 속에서 조금씩 웅크렸던 몸을 푼다./쓸쓸한 곡선의 시간 너머/까마득한 직각의 짧았던 봄, 그날의 기억을 되 집어 가는 일은/생의 안쪽 깊숙이 숨겨둔/음지의 시간마저 불러와야 하는 쓸쓸”한 저 사람들. 티눈처럼 박혀 가시가 된 “벽 한 귀퉁이 빼곡하게 걸려있는 액자엔/그의 눈빛을 닮은 빛바랜 얼굴들 희미하게 웃고 있다/낡은 냄비 위로/불러오지 못한 붉은 그리움이 부글부글 끌어 넘”치지만, 쪽방을 벗어날 수 없어 이내 갇혀버리고 만다. 그나마 쪽방 속 ‘일회용 가스렌지’마저 꺼져버리면 ‘낡은 냄비’처럼 금방 식혀질 저들 삶이 너무나 냉엄한 자본주의를 닮았다. 자본주의라는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얼마나 더 많아져야 끝이 날것인가 시인은 불안한 것이다.
벼랑 끝에 서본 적이 있다
바람도 잠시 멈추어 서는 곳
그 경계의 거리에서 나도
갈대처럼 두려움에 떨었던 적이 있다
사방이 죄다 흩어진 것들뿐인 그곳에서
등 뒤에 멈춰선 바람을 세워두고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어느 늦은 가을날.
-<벼랑 끝에 서다> 전문
왜 이런 생각을 시인은 하고 있을까. 시는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傳記다. 자신도 “벼랑 끝에 서본 적이 있다”고 고백한다. 어찌 보면 자기 삶에 대한 진솔한 고백의 시다. 진부하지만 진부하지 않다. 자신만이 간직한 고통을 당당히 극복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힘들어질 때가 있다. 너무 힘들어서 생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라면 설 곳이 없다. 그런 때에 사람들은 소름 끼치는 벼랑 끝에 서 있음을 안다. 벼랑 끝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의지는 삶에 대한 포기 이전에 자신에게 밀어닥친 격렬한 도전이다. 그것은 죽음이거나 치열한 반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바람에 수없이 흔들려도 다시 살아나는 갈대는 단순한 갈대가 아니다. 수없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꺾여버린 순간이 곧 죽음이고 그 순간마다 벼랑 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대는 시인의 과거이고 현재이다. 연약한 갈대가 아닌 죽음에서 당당한 삶으로 변주되는 침묵이다. 알게 모르게 다가왔던 험난한 순간들을 극복하고 당당히 세상에 맞서겠다는 자기 의지의 선언이다.
얼마를 돌아 내게 온 걸까
모서리마다 테이프를 덧바른 누런 박스 속에
봉지마다 묻어있는 흙 부스러기
무딘 손끝으로 몇 번을 풀었다 다시 묶였을
저 꼼꼼한 매듭들
내게 오던 시간 내내 가슴 졸인 얼룩진 땀의 흔적들
분명, 새벽녘에 들로 나가셨을 터
이슬 내린 밭두렁을 또 얼마나 헤매셨을까
아! 이 흙 내음
-<소포>부분
살가운 풍경이 눈앞에 고스란히 배달되어왔다. 바로 눈으로만 봐도 알 것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소포를 받은 것이다. 시인의 가슴에 요동치고 있는 시의 원천이 바로 이런 것에서 배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소한 것에도 사소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분들의 사소한 것마저 놓치지 않고 꼼꼼히 챙겨내는 마음 씀씀이가 사랑이다. 하나하나 매듭을 풀어내며 눈으로 읽어내는 그분들의 노고까지도 향기로 옮겨 담는 “보고만 있어도 가슴에 금방 풀물이 들 것 같은/고만고만한 호박이며 깻잎, 붉은 고추까지/당신의 가슴팍을 땀으로 다 적시고서야/내게로 왔을 그리운 당신의 향기”를 보며 시인이 생각한 ‘분리’는 온전한 합일의 변용일 거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그곳에 가면> “그만 되었다고 금방 다시 올 거라는 내 말에도/흙 묻은 어머니의 손 더디게 자꾸만 뭔가를 챙기신다./양손 가득 짐을 들고 마당을 나서는데/까만 봉지 위로 흙도 채 마르지 않은 굵은 감자가/자꾸만 빠져나왔다.” 여느 시골 마을 어머니들의 모습이 이랬다. 하나라도 더 싸서 보내려는 부모 심정이 이만큼 절절할 수가 없다. <엄마의 봄> “신호음이 끊긴 수화기 앞에서 나는/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항상 당신의 몸 아픈 것은 돌보지도 않으면서 딸의 안부를 묻었다. 그런 수화기 너머 엄마의 물음에 차마 되묻지 못한 시인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그만큼 딸도 세상 물정을 알아먹는 나이가 되었다. 누구나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그런 엄마의 건강이 예사롭지가 않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무겁다. <움트는 날> “어깨를 흔들어/그렇게 깨우는 거다//잠들어 있던 의식/머리채 흔들어/그렇게 깨우는 거다//누군가는/사는 것이/죽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지만 /깨어나는 기쁨만큼 행복한 삶은 없다//땅을 짚고/그렇게 일어서는 거다.” 삶이 비록 힘들다 해도 우리가 삶을 쉽게 포기하거나 낭비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부모의 마음이 그토록 절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사랑은 소비하는 것이지 절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봄날의 이름들
아니 한때는 내 하루의 향기였던 이름들
잊은 척 기억의 뒤쪽에 세워두는 일은
여전히 힘겹고 아프다
목이 느슨해진 니트 티셔츠 위로
빼곡히 돋아있는 보푸라기 같은 그리움
손톱 끝에 자꾸만 걸려드는
마흔 이후의 가을은
오도 가도 못 하는 그리움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쓸쓸한 오후 네 시 같다
삶에서 무엇을 놓아버릴 때는
그 몇 곱의 그리움을 견뎌내야 하는 일일 게다.
-<그리움은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야 하는 일이다> 부분
김금란 시인의 시는 소란하지 않고 고요하다. 낮 동안의 왁자한 시간 속 이야기가 아닌 저녁을 물리고 난 뒤 이야기여야 맞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잉태되는 그리움은 그래서 건강한 그리움이고 고즈넉한 시간으로 되돌아오는 일상이다. 그것이 우리가 시를 써야 하는 이유이고 서정인지 모른다. 그렇기에 시속에서 관통하고 있는 애틋한 서정의 균질성은 더 더욱 외면해선 안 된다. 오래된 옷을 정리하며 의도하지 않았는데 전화번호부에서 소중했던 이름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단지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의 이유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라 사람과 오래된 관계가 이유였다. 사람의 관계가 어떤 이유였던 시간과 비례하며 삭막하게 잊혀져 간다는 것이 시인을 안타깝게 한다. 누구나 기억 속에서 쉽게 떠나고 지워지는 데 익숙한 세상이라지만, 남아있는 사람은 아직 그럴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마흔 이후의 가을은/오도 가도 못 하는 그리움만/덩그러니 남아있는/쓸쓸한 오후 네 시 같다/삶에서 무엇을 놓아버릴 때는/그 몇 곱의 그리움을 견뎌내야 하는 일일 게다.” 보통의 사람들에게 오후 네 시는 결코 쓸쓸하지 않은 시간이다. 오히려 여유 있는 저녁이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고 가족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 힘든 하루를 마무리할 마음으로 바빠질 시간이다. 그런데 시인은 쓸쓸하다고 했다. 보통 사람들과 다른 이야기다. 그것은 이미 자신의 주변에 있어 줘야 할 사랑하여 소중했던 사람들이 떠나고 빈자리만 덩그러니 남았기 때문이다. 그 떠나간 빈자리를 다른 사람들로 채워가는 데 익숙하지 못한 시인에겐 이것도 돌이켜보면 필연이다. 인연이 된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데 더 익숙해져 있고, 기억을 지워가며 잉태하는 삶이 무관심이거나 증오가 아닌 또 하나의 먹먹한 그리움이 되었다. 지금껏 간직해온 그리움마저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지금보단 몇 곱절 더 환하게 찾아올 그리움을 생각해야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