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지성 이어령 교수 췌장암으로 별세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知性) 이어령(李御寜) 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2022년 2월 26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췌장암(膵臟癌) 투병 중 세상을 떠났다. 영결식은 문화체육관광부장(葬)으로 3월 2일 서울 서초구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엄수됐다. 영결식에 앞서 운구차는 발인이 치러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떠나 이어령 전 장관 부부가 설립한 평창동 영인문학관과 엣 문화부 청사 자리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거쳐 영결식장으로 향했다.
영결식 장소를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정한 것은 “문인으로서 평생을 집필 활동에 몰두하고 문화부 장관 재임 시 도서관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고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문체부는 설명했다. 이날 역사박물관 외벽 영상에는 고인을 기리는 ‘대한민국의 큰 스승 이어령 전 장관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라는 추모 문구와 함께 ‘인간이 선하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 마음을 나누어 가지며 여러분과 작별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등 고인의 생전 메시지가 등장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라틴어 경구(警句)는 고인의 평생 좌우명(座右銘)이며, 그의 마지막 저작(著作)의 제목도 <메멘토 모리>이다. 고인은 지난해 12월 영인문학관에서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사자를, 저 괴물을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가 은총일 수도 있다는 예기도 했다.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살다가 처음 ‘격리’를 경험하면서 넘쳐나는 시간과 마주하게 된 일상을 예로 들었다.
고인은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으며, 아호는 밤을 넘어선다는 뜻의 능소(凌宵)이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1956년)한 후 서울대 대학원에서 국문학석사(1960) 그리고 단국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1987)를 취득했다. 1966년 이화여대 문리대 교수로 부임했으며, 1990년 노태우 정부 때 문화공보부가 공보처와 문화부로 분리되면서 출범한 문화부 초대 장관을 역임하면서 학교를 떠났다가 1995년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로 강단에 복귀했다. 이어령 교수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문단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등장한 그는 문학이 저항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저항의 문학’을 기치로 한 전후 세대의 이론적 기수가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파격적으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된 이래, 1972년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을 맡을 때까지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며 우리 시대의 논객으로 활약했다.
그는 시대를 꿰뚫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논객으로만 활약한 게 아니라 88서울올림픽 때는 개회 및 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문화 기획자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1980년에는 동경대학 객원교수로,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시대를 읽는 특별한 안목을 가진 그는 우리에게 선사하는 새로운 사명으로 디지로그(Digilog) 시대의 개척자이자 전도사가 되었다.
그의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무선 공유기, 프린터 등 각종 디지털 장비가 자리한다. 그는 7대의 컴퓨터를 직접 네트워킹하며, 직접 자료를 모으고, 검색하고, 정리하고, 자신의 지적 회로망에 연결하여, 그가 선창하는 디지로그 세상에 살았다. 저서로는 <디지로그(Digilog)>, <지성의 오솔길>, <오늘을 사는 세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차 한 잔의 사상>, <저항의 문학>, <축소지향의 일본인>, <둥지 속의 날개>, <마지막 수업> 등이 있다.
과거 그는 무신론자(無神論者)였으나, 위암 투병 중 하늘나라로 떠난 딸 이민아(1959-2012) 목사가 인생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에 감명 받아 회심하여 2007년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뒤 다양한 교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신앙 여정을 나눴다.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는 지식인 이어령이 아닌 기독교 신자 이어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영성(靈性)에 관한 참회론적 메시지와 함께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어령 교수는 2021년 10월 한국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문체부 전임 장관 등 문화계 인사 250여 명이 참석한 영결식에서 고인이 설립을 주도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은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1845-1924)의 ‘엘레지(Elegie)’와 국악 조창(弔唱) ‘이 땅의 흙을 빚어 문화의 도자기를 만드신 분이여’를 연주하며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유해는 충남 천안공원묘원에서 영면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