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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하루간의 바람(남도여행기)
이종남
무엇을 위해 떠나는가
혼자 열흘이 넘도록 남도를 떠돌다 돌아왔다. 생을 3막으로 나눈다면 이쯤에서 2막을 정리해두고 싶었다. 아니, 3막은 생에 대한 해답을 좀 더 명료하게 찾아 시작하고 싶었다. 여행 중 혹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무수한 나와의 만남과 몇 줄금의 눈물 속에도 뾰족한 답은 없었다. 그래서 되레 확연해졌다.
“돌아가서 열심히 살아라.”
“아지매, 뭐할라 시간 낭비하고 댕기요? 보고자픈 곳이 있으마 승용차타고 후딱 가서 언능 보고와서 일하재. 워매, 아낙 혼자 집 나와 돌아댕기고……. 그라도 참 대단하긴 대단하요.”
남도를 다니는 동안 여러 차례 들은 말이다. 하긴 길에 돌아다니는 강아지라도 붙잡아 일을 시킬 판국인 그들에겐 내가 바람 잔뜩 든 여자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도 길 위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하다는 말과 함께 부러움을 표시했다. 여자 혼자 여행을 다니는 일이 대단한 일이긴 한가? 막상 떠나보면 그리 어려울 것도 대단할 것도 없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바람으로만 품고 있으니 그리 말할 만도 하다. 내게도 혼자만의 여행은 오랜 로망이었으니까.
여행 중 만약의 불상사를 대비해 메모 몇 줄을 남겼다. “유진아 보아라. 통장비번은 ㅇㅇ이고 보험 증권은 한 곳에 모아 두었다. 사랑한다! 다녀오마. 여행 도중 어떤 경우가 생기더라도 강행할 생각이었다. 쉰 넘게 살았으면 아쉽긴 하지만 원통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해보고 싶은 것은 해보리라.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 알면 피식 웃을 일이지만 내겐 이번 여행이 그만큼 절실하고도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왜 나는, 사람들은 그토록 떠나고 싶어 하는 걸까? 일상을 탈피해보는 일, 여행 중 많은 것을 배우리라는 기대, 새로운 사람들과의 달콤한 인연, 다양한 체험을 통한 자기 확대 등등 여행의 이유가 어디 한 두 가지겠는가. 혹자는 현실 부적응 자들이 여행을 떠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철저히 신봉하고 사는 현실로부터 변화를 모색하고픈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아무튼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가보면 알게 될 일이다. 용산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탔다. 내일 새벽이면 목포에 도착할 것이다.
낯선 곳의 밤엔 두려움과 설렘이 묻어있다
새벽 3시쯤 도착한 목포는 검푸른 하늘에 황금빛 하현달을 덩그마니 올려놓고 쥐죽은 듯 적요했다. 쏟아질듯 한 별과 유난히 영롱한 달빛이 두견이 울음을 껴입고 싸한 공기 속을 서성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의 밤은 야릇한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다. 여행 내내 밤은 안전한 잠자리에 대한 걱정 때문에 온전히 그 낭만을 즐기기가 어려웠다. 제주에서, 하동에서, 구례에서, 뱀사골에서……. TV를 낑낑거리며 출입구 쪽으로 옮겨놓고 이불이며 선풍기며 배낭이며 짐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입구 쪽으로 옮겨 놓고도 좀체 잠이 오지 않았다. 물론 아무 일 없이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밤은 매번 이런 식이다. 건강한 일반 남자들에겐 참 미안한 일이지만 여자에겐 그게 참 그렇다. 경비를 최대한 절약하다보면 찜질방만한 잠자리도 없다. 그러나 그것도 남자들만 서넛이 큰대자로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은 죽을 맛이다. 한창 젊은 것도 아니고 누가 탐낼 만큼 멋지게 생긴 것도 아닌데 무슨 주책없는 걱정이냐고 하겠지만 어디 사고가 상식 안에서만 일어나는가? 아무튼 여행 내내 이러저런 이유로 밤은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여자로서 극복해야할 하나의 관문인 셈이다.
욕심을 버리러 갔으나 거기서 또한
극한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염부들의 현장을 보고 싶어 첫 행선지를 비금도로 정했다. 목포에서 비금도행 첫 배를 타고 섬에 도착했을 땐 정오 가까이라서 타는 듯한 햇살과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섬 입구를 지킬 뿐 소금을 퍼 올리는 현장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섬 가득 잔잔히 펼쳐져 있는 염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힘겨움이 전해질 만큼 설렜다. 바닷물은 소금밭 가득 제 몸의 수분을 하늘로 퍼 올리며 하얀 결정들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 비금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염전을 만든 곳으로 한 때는 소금 값이 금값이어서 금이 날아다닌다는 뜻의 비금도로도 쓰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수입소금 때문에 예전의 영화를 누리지는 못한다고 한 염전 주인이 일러 주었다. 저녁 늦게야 예의 그 염부들의 소금 수확현장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머무를 수는 없어 아무도 없는 염전에 들려 소금 한 줌을 비닐봉지에 퍼 담고는 그곳을 빠져나와 제주로 향했다. 다른 필요 없는 짐들은 집으로 택배로 부치면서도 무슨 일인지 허락 없이 퍼온 소금은 여행 내내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다녔다.
애초 올레길 전 코스를 다 돌지는 못하더라도 1코스부터 되는대로 걸어보리라 생각했었는데 버스와 택시 기사가 7코스부터 걸어보라고 권유해서 7코스 근처인 외돌개 부근에 여장을 풀었다. 이곳은 올레길 코스 중에서도 가장 경관이 수려해 1박 코스 여행객들이 주로 걷는 길이라고 했다. 햇볕이 따가운지라 서둘러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했다. 탁 트인 푸른 바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그 사이로 울울창창 서있는 나무들, 벼랑을 떠받치고 서 있는 바위들, 이 위대한 신의 창작물 위에 인간의 표현을 덧칠한다면 그건 분명 군더더기가 될 것이다. 몇 차례 다녀간 곳이긴 하지만 혼자 한가하게 하는 여행에서 맞이하는 풍경은 그 감흥이 사뭇 다르다. 해변을 끼고 그야말로 하염없이 걸었다. 처음엔 주변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감탄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뙤약볕 아래 아스팔트길을, 모래밭을, 자갈언덕을, 때론 가파른 산길을…….
걷는 일은 생각만큼 만만치가 않았다. 때론 시골 아무 곳에서나 만날 수 있는 길도 있고. 때론 군사 훈련시킬 때나 걸을만한 험난한 길도 있다. 나중엔 풍광이고 뭐고 오로지 걷기 위해 걷는 고행이 수반되는데 그럴 땐 도대체 이런 길들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걷고 또 동경하는지 슬며시 회의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인간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하라는 그곳 말대로 하루 한 코스 정도 시간적 여유를 두고 걸으면 걸을만한 거리를 하루 10시간씩, 또는 8~9시간씩 강행군을 했으니 힘겨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 고행 중에도 중간 중간 길 위에서 만나는 여행객과 어울리는 일, 오이 한 조각이라도 나누는 재미는 힘든 여정 중에도 신선한 휴식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비슷한 이유로 올레길을 걷고 있다는 반가움이 큰 위안이 되었다. 혼자 아주 힘든 코스를 헤매고 있을 때 여행객을 만나는 일은 눈물겹도록 반가운 일이다. 사람이 이리도 반가운 존재였든가? 새삼스런 발견이다. 제주 해변의 풍경은 어딜 가도 이국적인 특색을 갖추고 있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외돌개에서 모슬포까지 네 코스를 걷는 동안 극한의 고통을 느낄 만큼 힘겹기도 했지만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여행 중 가장 큰 혜택을 이야기 하라면 아마도 자신과의 깊은 만남일 것이다. 특히 혼자 걷는 동안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어 지나온 날들을 반추하며 현재를 점검하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일들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제주 올레길 긴 코스의 묘미가 여기 있지 않나 싶다.
뜻밖의 횡재를 만나다
네 구간의 올레길 트래킹을 마치고 저녁 늦게 녹동행 배를 탔다. 휴일이라 그런지 배 안이 온통 북새통이다. 대부분 아랫녘 사람인지라 끼리끼리의 대화들은 마치 소음의 화약고와도 같다. 그 틈바구니에 끼여서 떡과 과일들을 실컷 얻어먹었다. 다음날 소록도를 방문하며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이 먼 곳까가지 아픈 몸을 끌고 와야했을 때 그들은 생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찾기 전부터 온통 가슴이 저려왔다. 건강하다는 자체만도 얼마나 큰 행복인가. 꼬막의 고장 벌교를 거쳐 보성 녹차 밭을 들렸다. TV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이 녹차 밭은 연인들의 천국인 듯 했다. 쌍쌍이 또는 무리지어 찾아온 젊은이들이 꽃처럼 나비처럼 카메라 렌즈를 터뜨리며 웃음소리를 녹차 밭 가득 채워 넣고 있었다. 이 농원을 처음 구상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놀라울 따름이다. 험준한 산비탈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밭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저 무사안일주의로 허심심 살아온 지난 행로가 확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다시 순천만을 거쳐 광양으로 향했다. 섬진강을 따라 수려하게 펼쳐진 전원의 모습은 한 폭 수채화가 따로 없다. 광양매화마을에 들어섰을 땐 해가 거의 질 무렵이었다. 시골은 어디나 버스가 자주 있질 않아 애를 먹곤 하는데 택시로 이동하려 해도 요금이 1만 원쯤 나오는 거리가 대부분이어서 입장이 난처했다. 광양 매화마을에 들려 우리나라 제1호 매화 명인인 홍쌍리 여사네 농원을 둘러보는데 혀를 내두를 정도다. 매스컴을 통해 그간의 사연을 듣기는 했지만 여자가 이 일대를 매실 농원으로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을까 생각하니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난다. 매화꽃 필 무렵이면 꼭 한번 들려보고 싶은 곳이었으나 거리도 멀고 밀려서 고생 할게 뻔하다는 이유로 매번 미루고만 있었던 곳이다. 매화꽃이 피면 언덕아래 펼쳐진 섬진강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해는 지고 막차는 갔다고 하고, 택시로 이동하자니 너무 비싸고 하동으로 되 가서 숙소를 정하자니 걷는데도 시간이 걸리겠고 이래저래 막막해서 한없이 외로워지는데 한 중년 남자가 거나하니 취해 마을 앞에 앉아 있다. 화개 장터로 가려면 어찌 가면 되느냐고 물으니 “그마 막차가 가뿌렸을 낀데, 아지매 어디서 왔오?” 한다. 이런 저런 사정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그의 부인이 “고마 우리 집서 자소. 저 양반은 하우서 자고 나 혼자 자는디 고마 같이 자입시다.” 한다. 그만 반가움과 고마움에 모르는 사람을 덥석 안아버렸다. 남편은 누추해서 어찌하느냐고 쑥스러워하는데 내겐 그게 오히려 더 큰 횡재로 느껴졌다. 소설에나 등장함직한 집은 여기 저기 헐어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60~70년대 유년의 마을 어디쯤 와 있는 것 같아 나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순박하고 사람 좋은 그 집 명숙 씨와 밤 1시까지 정담을 나누며 매실 열매를 쪼개곤 잠이 들었다. 나그네라고 친히 대접해주는 인심이 너무 고마워 일정의 보답차원으로 매실을 따주기로 했다. 때가 지나면 매실 열매가 떨어져 따는 대로 돈이 되는 형편인지라 누구라도 일만 해준다면 고마울 지경이었다. 몸빼 바지와 흰 고무신을 빌려 신고 나니 영낙없이 촌부 그대로였다. 몇 몇 낯선 일꾼들과 한나절을 매실을 따는데 몸에 익지 않은 일이 어디 수월하겠는가? 하룻밤 숙박비를 호되게 치렀다. 그러나 여행 도중 삶의 현장 체험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행 중 아주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내 자신과 오롯이 만나다
토지에 나오는 최 참판 댁 들을 거쳐 화개 장터에 들렸다. 노랫말에 나오는 대로 전라도와 경상도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함께 어울린다는 의미 외엔 별반 크게 볼거리가 없었다. 그러나 하동과 광양, 구례를 지나 곡성까지 이어지는 섬진강 줄기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특히 하동에서 시작되는 지리산 자락은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듯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했다. 그곳 쌍계사에서의 오후는 여행 중 나를 깊이 끌어들이는 첫 지점이 되었다. 불일폭포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오후 햇살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1시간을 가만히 앉아있었다.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인가? 나는 정말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진지한 물음들이 나를 깊이 파고들었다. 어디서나 그렇듯이 별 뾰족한 답은 없었다. 그러나 이 한가한 시간에 낯선 곳에 앉아 무수한 나와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얼마나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생의 의미를 짚었을까. 그만 여기 어디쯤에서 수행자로 남은 여생을 보내도 좋을 듯싶었다.
일곱째 날 오랜 시간을 기다려 구례행 버스를 타고 지리산 자락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 6시에 화엄사를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비수기철 혼자 하는 여행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이다. 대부분의 길을 혼자 걷게 되는데 거기서 오는 두려움과 설렘과 자기 집중은 아주 묘한 감동을 주어서 어딜 가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천년고찰인 화엄사에서의 순간은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꾸미지 않은 순결함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가슴 저 밑바닥부터 차오르는 감동 때문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화엄사의 전경은 티 없이 맑고 우아했다. 다른 사찰과 달리 퇴색한 그대로 덧칠하지 않은 단청은 묘한 기운과 함께 고고한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이 그대로 그 곳에 녹아 있는 듯한 반가움을 느꼈다. 사람들의 치장이 한낱 거추장스러운 군더더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껏 무슨 요삽을 떨며 속되게 살아온 걸까? 아마 덕을 쌓았다면 후생에 이런 곳에서 생활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쌓은 덕이 없으니 그런 일은 천부당만부당일 터다. 아침의 적막함과 산사의 고요함이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잡다한 슬픔의 부스러기들이 함께 빠져나가고 근원적인 존재만 오롯이 남아있는 있는 것 같아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혔다. 그 때 나는 순간 신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에 나만 혼자 덩그마니 놓여있는 것 같은 절대 고독, 그러나 그 고독은 너무나도 영롱해 그 고독을 통해 생의 모든 문제들이 보이는 듯 했다. 나무들이 꽃들이 풀잎들이 신선하게 살아있는 소리를 내며 나와 동일한 이유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의 순환 속에 작지만 온전한 존재로 함께 있다는, 그래서 절대 혼자이나 혼자가 아니라는 이 위로감,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이 엄청난 위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평생 화두일 수밖에 없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나 할까? 이런 감정은 여행 내내 지속되었는데 이번 여행 중 가장 크게 얻은 소득이기도 하다.
구례 화성암을 가는 길에 지구를 스무 바퀴 돌았다는 비구니스님을 만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영혼이 탁 트인 귀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귀가 솔깃해 흠모하는 마음까지 들참인데 호기심 잔뜩 어린 내게 자기 차가 지구의 스무 배 거리를 주행했으니 지구를 스무 바퀴 돈 게 아니냐고 한다. 우선 크게 실망한 뒤 그 위트에 배를 잡고 웃었는데 생각해보니 세상사 다 생각하기 나름이 아닌가?
노고단을 오르는 길은 햇살과 바람과 설렘만이 함께 해주었다. 혹시 반달곰이 불쑥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순간순간 긴장하기도 했지만 그 두려움 속을 헤쳐 나가는 묘미가 여간 근사한 게 아니다. 입구에 들어서서 푸른 잎사귀들의 환영을 받는데 내가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에 스쳐 지나는 바람, 발길에 피어오로는 미세한 먼지조차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주 맑게 외로워져서 가장 그리운 친구에게(소니아)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터져 나오는 나의 상황을 그는 이미 공감하고 있었다. 그가 전화 속으로 그윽한 말을 건네왔다.
“축하해!”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뱀사골을 오르며 고정희 시인의 삶을 생각해 봤다. 시대의 불의에 대해 맹렬히 퍼붓던 그는 왜 여기 와서 생을 마감한 걸까. 곧고 진실했던 한 여인의 삶을 이 계곡은 왜 아래로 끌어내린 걸까. 작품으로만 만났던 그를 이 낯설고도 축축한 계곡에서 영적으로 다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뻐근했다. 뱀사골은 순전히 고정희 시인 때문에 여행 일정에 넣은 것이다. 두 시간여 동안 계곡을 혼자 오르내리며 그의 시들을 떠올리는 동안 나는 내내 시인의 영혼에 대해 생각했었다.
유년으로 돌아가다
창녕 우포늪에서 나는 그만 나도 모르게 “엄~마~”하고 부를 뻔 했다. 천지만상을 품고 따분하기 짝이 없이, 바람에 미동도 없이, 꿋꿋하고 질기게 천년을 버티고 있는, 어린 시절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애를 태우던 유년의 시골 마을이, 깊고 깊은 늪이 그곳에 있었다. 그 때는 그토록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언젠가는 저 생을 넘어서 훨훨 날아가리라 들뜬 열망으로 질시하며 바라보기도 했던, 내 삶의 영화와 오욕을 한꺼번에 끌어안고 묵묵히 지켜봐주던, 더없이 그리워 눈물이 날 것 같은 어머니가 수십 년 세월을 넘어 그곳에 누워있었다. 환장하게 내리쬐는 햇볕이며, 나를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만 같은 기우뚱한 미루나무며, 푸스스푸스스 하루를 답답하게 조여오던 흙먼지며, 그래도 아늑하게 달래주던 유년의 길목들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품고 있는 것 같은 거대한 우주의 자궁 곁에서 생생이 숨 쉬고 있었다. 1억 4천만 년 전에 생성된 세계 최대의 습지인 그 곳에서 왜 나는 어머니를 떠올렸을까? 자전거를 빌려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도록 먼지투성이가 되도록 뚝 길을 달려 엄마!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잠잠했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어린 날의 애잔한 감상과 낭만과 달뜬 열망과 반세기를 지고 온 추억들은, 무엇보다도 나를 눈물로 키워주던 어머니는 어디로…….
낯선 곳을 떠돌다 대전에 도착했을 땐 밤의 두려움도 혼자라는 외로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들 녀석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존재만으로도 이렇게 큰 위로가 되다니. 간만에 잠을 편안히 자고 오랜 글벗을 만나 만찬도 대접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꽃피우는 호사도 누렸다.
마지막 날엔 고향의 푸른 잔디를 밟기로 했다. 몇 해 전에 폐교된 유년시절의 초등학교로 들어가 세월무상의 극치를 둘러보았다. 700여명이 득실거리던 대 운동장에서 고래고래 웅변을 하던 잔상들이 오랜 세월을 흘러 다시 그곳에 펼쳐졌으나 듣는 이도 지켜보는 이도 없었다. 다만 두근거리던 어린 날의 심장만이 다시 그곳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건물은 헐렸거나 이미 다른 것으로 바뀌고 그때의 프라타나스나무만이 덩그마니 목이 잘린 채 군데 군데 서 있었다.
10여리 논둑길로 재잘거리며 다녔던 등굣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이미 농지 정리가 되어 많이 바뀐 상태지만 형태는 남아있어 추억을 되새겨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학교 근처엔 코흘리개 돈으로 눈깔사탕을 맛나게 사먹던 가게가 아직도 낡은 채 남아있었다. 그나마 큰 위로가 되었다. 오는 길에 동창을 만나 옛 시절을 더듬어보기도 했다. 그도 나만큼 늙어 있었다.
모든 것은 순환한다. 자연도 우주도…….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상실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굳이 무엇을 얻었는지 따질 필요는 없지만 신과 대면했던 시간들, 절대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점, 사는 동안의 최선책은 순간에 집중해 열심히 사는 일 뿐이라는 깨달음 등은 아주 소중한 재산으로 남아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에는 언제나 밖이 존재하고 바깥 또한 안을 담고 있다. 다만 우리가 나름대로의 한계를 긋고 안과 밖을 따질 뿐이다.
언젠가 가슴 답답하게 한계가 느껴질 때면 나는 또 홀연히 여행을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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