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알 수 있는 것
어렸을 적 다녔던 초등학교엔 버려진 도서관이 있었다. 공간을 지키는 사서도 없고, 문을 지키는 자물쇠도 없이, 철거를 기다리던 도서관. 나는 그곳에 있었다.
도서관 출입문엔 누구의 출입도 막지 못하는 고장난 걸쇠가 매달려 있었다. 관리되지 않은 도서관의 처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당시엔,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그때의 나는 버려진 공간이란 들여다본 적이 없어서 차마 도서관이 버려졌다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냥 조금 어둡고, 조금 눅눅하고, 조금 사람이 없는, 책의 방이라고 여겼다.
도서관에서 하는 일은 딱히 없었다. 항상 앉는 소파에 누워 만화책을 봤고 그러다 그 만화책을 배고 선잠에 들었고, 챙겨온 간식을 먹으며 가지 않는 시계를 들여다봤다. 일정이랄 것도 딱히 없는 지루한 시간이었지만, 아무도 없는 텅 빈 집보다야 도서관이 안락하다고 믿었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다. 케케묵은 먼지가 내 몸짓에 따라 공중을 뛰노는 모습을 들여다보고, 언제 펼쳐 본지도 모르는 오래된 책을 아무거나 골라 베개로 삼고, 주머니에 넣어온 색색의 볼펜들로 책장의 구석에 낙서를 새기고. 오로지 혼자 한 일들이었다. 오롯이 존재했던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언젠가 그때의 나날이 혹시 한여름 밤의 꿈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도서관에서 보냈던 날은 대략 2개월 남짓. 본관의 새 도서관은 이르게 완공 준비를 마쳤고 버려진 도서관은 남아있던 마지막 책들이 옮겨진 후 완전히 철거되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 혹시나 물었던 도서관의 행방엔 오히려 그런 곳이 있었냐는 물음을 되받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 도서관. 지워진 공간을 지워내지 못하는 나. 어렴풋하게 남은 어린 시절의 기억. 어느 날부턴 그때의 일이 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기가 붙들어 있는 시멘트 벽, 낙서가 새겨진 오래된 나무 책상, 먼지 쌓인 책장과 그 안에 잠들었던 책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안락했던 가을의 오후. 꿈이었을까. 나는 아직도 그때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확신하지 못한다. 너무 어렸고 너무 기발한 편이었기에, 그래 어쩌면, 어쩌면 그 도서관은 내 상상의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건, 기억한다는 것, 그때 그곳에 있었던 나를, 선명하게 생각한다는 것, 도서관의 먼지를 뒤덮은 나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도서관이 존재했다는 것.
나는
알
수
있는
것
.
/
엄청 추상적인 글이죠…? 사실 이건 문득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일부인데요. 정확히는 기억의 파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조각입니다. 9살 즈음의 기억이라 추측 중이고 어쩌면 기억이 아니라 상상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8~10살 즈음의 기억이 가끔 진짜 기억인지 아니면 꾸었던 꿈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어릴 때부터 잠이 아주 많았고, 신기할 정도로 기발했고, 상상을 하며 가만 앉아있는 게 놀이라고 생각하며 자랐거든요. 그래서 도서관에서 보낸 시간이 사실 어린 시절의 제가 지어낸 환상일 수도 있지만, 그냥 저는 제가 그때 거기 있었다고 느껴요. 너무 추상적인 감정이라서 어떻게 공유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뭉게뭉게 구름 같은 감각이랄까요…. 그래서 글도 그런 감각을 떠올리며 직관적이지 않게 두루뭉술하게 썼습니다. 그냥 큰 고민도 없이 재미 삼아 쓴 글이라 여기에도 편하게 올려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지 공상이나 망상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소설이라고도, 수필이라고도 정의하기가 힘드네요. 무튼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는지 묻고 싶었음……. 이상 긴 주저리 들어주셔서 무한 감사드려요.
첫댓글 우와...말 그대로 꿈 같은 기억, 꿈 같은 글이다
글만 보면 감촉까지 자세히 기억하는 듯 하지만 결국 꿈인지 기억인지 헷갈리는게 참 재밌당. 그 생생한 감촉조차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일 수 있다는 거니까. 사실여부를 떠나서 묘사된 공간이 너무 아늑해보여서 나도 가보고 싶어짐..
생각해보니 나도 그런 기억이 꽤 있는 편인데 아무도 모르는 기억이니까 누구와도 얘기를 나눌 수도 없다는 게 한편으론 조금 답답하고(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했으니) 한편으로는 선명하지 못한 장소가 역설적으로 오래도록 선명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서 신기한 것 같습니당
굉장히 몽환적인 분위기의 글이구만.. 잔뜩 탁한 것 같기도, 한껏 옅은 것 같기도 하고. 먼지 쌓인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햇볕을 담은 느낌이다. 분위기가 너무 차분하고 포근하고 좋아!!!!
나는 어릴 적부터 데자뷔를 많이 겪는 편이었어. 분명 처음 와보는 길이고, 낯선 이름의 골목인데 자꾸 익숙한 느낌이더라구. 그래서 아빠한테 내가 여기 와본적 있냐 물으면 아빠는 늘 내가 여길 올 일이 뭐가 있냐면서 없다고 했었어. 그 골목을 꿈에서 갔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어. 완벽히 일치하는 풍경은 아니지만 그렇게 엇비슷한 골목을, 기억을 몇차례나 반복했었어. 이제는 이런 경험과는 멀리 떨어졌지만 여전히 나는 그때가 신기하더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