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할퀴고 간 바닷길을 걸었다. 아직도 하늘엔 먹색 구름이 덕지덕지 세를 넓이고 화를 남긴 파도는 모래톱을 들이받는다. 무엇에 저리도 화가 났을까. 밤을 너무 밝혀서, 별들이 빛을 잃어감이 마땅치 않음인가? 아님 도를 넘는 화려함이 우리네 삶을 지배하는 시간 속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앗아감이 화를 불러왔음인가?
몇 날을 윙윙 그리던 바람 소리가 힘을 잃은 듯하다. 달갑지 않은 얘기들만 들려온다. 코로나도, 태풍도, 무얼 위해 저리도 잔인한지, 인간들의 지혜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 하나 자연의 거대함 앞에서는 힘없이 뭉개지고 만다.
아름답고 화려했던 광안리 해변이 쓰레기장으로 변했다. 썰물 이 빠져나간 모래톱은 발자국을 남기기에 조심스러울 만큼 더럽혀있다. 음료수가 절반은 남아있는 페트병, 반쯤 베어먹다 만 과일, 한발 비켜나면 트레킹화, 또 한발 물러서면 짝 잃은 슬리퍼. 맥주 캔, 먹다 남긴 일회용 도시락에 야구공까지 나열하기가 부끄럽다. 봉긋이 솟아있는 모래 위로 파도가 밀어 올린 쓰레기들과 함께 조가비며 고동들이 즐비하게 너부러져 있다. 간물을 먹지 못해 혀를 길게 빼고는 숨을 할딱거리는 해산물들이다. 부지런히 비닐봉지에 걷어 담는 부인네들이 눈에 들어온다.
내 앞으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엄마와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이 비닐봉지를 들고 바닥을 세심히 살피며 걷는다. 엄마는 유리 조각을, 아들은 더럽혀진 비닐 조각들을 챙기고 있다. 이 혼탁한 세상에 저렇게 자식에게 현장교육을 올곧게 시키는 젊은 엄마가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이 아직은 존재하고 있음이다. 나는 엄마에게 눈인사를 건네며 아들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나,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매우 공손하다.
시간이 지나니 조금은 느긋해진 파도에 밀려 미동도 하지 않는 백합 조개며 어린 소라들이 모래 위에 지쳐버린 몸을 던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들도 생명인 것을. 살아남고자 혼신의 힘을 기우렸을 터인데, 태풍이, 파도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아직은 성숙지 못한 예쁜 가리비들이 바다로 돌아가기를 간구하고 있다. 저 멀리 양식장에서 떨어져 나온 생명이 분명하다. 아직 살아있는 것들을 골라 힘껏 바닷속으로 던져주며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 간곡했다.
기세가 좀은 숙어 드는가 하였더니 쏴아 쓰르륵 잔인하게 밀어버렸던 자리에 밀물이 모래톱을 점령한다. 파도가 하얗게 소리칠 때마다 쓸려오는 오물들에서, 버려진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이 뒤엉켜 구른다. 아직도 비를 머금은 구름이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의 인식이 좀 바뀌었으면 한다. 버려지는 것들이 도를 넘는다. 휴대용화장지를 반이나 남기고는 앞뒤 살피지 않고 던져버린다. 모래 위에 자리를 깔고 누워 노래를 부르던 젊은이들이 마시던 술병이며 안주들이 즐비하게 자리 위에 나열된 채로 버려두고 오롯이 몸만 가져가는 모습들은 예사롭게 보이는 이즈음이다. 몇 걸음 건너 분리수거함이 있건만 개의치 않는다.
바람이 한번 모래 위를 쓸고 가면 온갖 오물들이 바닷속으로 떠밀려간다. 그것들은 언젠가는 해변으로 밀려온다. 오늘도 내일도 사람들은 그냥 밟으며 지나갈 것이다. 과자를 먹든 어린이가 봉지를 모래 위에 던져도 엄마는 나무라지 않는다. 올곧게 살기가 참으로 힘든 세상이다. 어른들의 방임을 울타리로 삼아 자라는 저 아이들의 세대가 되면 이곳은 또 어떠한 형상으로 남게 될까?
쓰레기 더미를 헤쳐 종이컵들과 플라스틱병들, 버렸는지 잃었는지 모를, 카드로 배가 땡땡한 지갑까지 분리하여 수거함에 넣고 돌아서니 자원봉사자들이 인사를 건넨다. 바닷물에 잠시 손을 담그니 오물들이 씻겨나가고 더럽혀졌던 손이 말갛게 제 모습을 찾았다.
왠지 가을바람 같은 쓸쓸함이 파도에 살짝 젖은 치맛자락에 매달린다. 먹구름을 헤집고 얼굴을 내민 석양이 바다에 꽃일 때쯤 되어서야, 파도가 제풀에 지쳐 모래 위에 납작 엎드린다. 조약돌 틈에 숨어있던 어린 게가 툭 튀어나온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먹잇감을 찾는다. 자신의 살을 어린 게들에게 먹이로 내어주고 속이 텅 비어있는 소라껍질 몇 개를 들고 바다를 뒤로했다.
태풍 탓에 꼭꼭 잠겨있던 창문을 열었다. 창문 밖으로 예쁜 분홍빛을 자랑하며 조롱조롱 피어있던 배롱나무꽃이 파란 하늘색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나의 눈을 즐겁게 하더니, 태풍에 꽃잎이 떨어져 나간 가지들이 모두 베어지고, 기름을 바른 듯 윤이 나던 동백 열매도 바닥에 구른다. 태풍의 광란이 나의 작은 사각의 행복마저 앗아가 버렸다.
태풍이, 파도가, 사람들의 못된 버릇들을 해감 시키려 그렇게도 소리치며 울었나 보다. 집까지 동행한 소라 껍데기 꽁무니에 입을 대고 불어본다. 부우 ~ 웅 하고 어설픈 뱃고동 소리에 가슴이 시려온다.
첫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