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수많은 사실 중 하나는 막내에게 ‘가문의 비밀’을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막내에게 그 눅진하고 발칙한 진실을 최초로 누설한 건 바로 나다. 모르긴 몰라도 막내는 아마 엄마의 큰 맘 먹은 고백 이후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을 거다.
나와 막내는 늦은 저녁 선착장에 앉아서 배들이 각자의 파도에 넘실대는 것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때 큰언니가 더 이상 스스로에게 칼을 대지 않고 다닐 수 있는 대안 학교를 물색하기 위해 가족 단위로 전국 일주 중이었고, 엄마는 우리와 산책하기에 너무 지쳐버렸기 때문에 엄마의 껌딱지 같았던 막내가 나와 둘이서 있을 수 있던 거다. 나는 아마도 그때의 나른한 풍경과 진득한 비린내가 이 즉흥적 고백에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윤아 사실 큰언니랑 작은 언니는 너랑 엄마가 달라”
한편 이 뜬금없는 고백에 막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그 애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애초에 나는 막내가 알아듣지 못할 걸 알고 고백했지만, 사실 한편으로는 그 고백을 통해 막내가 뭔가를 알아주길 바랐던 것도 같다. 나는 왜 엄마를 떠올릴 때 꽉 쥐면 쥘수록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마음이 드는지, 그리고 왜 엄마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너의 뒷모습을 볼 때면 자꾸 콱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를.
나만큼 동생의 죽음을 염원했던 언니가 있을까. 막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가 아빠와 대형 마트에 가서 작고 보드라운 아기 옷과 가재 손수건 등을 대량 구매해오거나 <내 아이 잘 키우기>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법전 같은 두께의 책을 가져오는 날이면 진심으로 아기가 돌연 없어져버리길 바랐다. 할머니와 연속극을 자주 챙겨보던 나는 그 말이 “애를 지우라”는 말로 쉽게 치환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그 말을 자주 엄마에게 내뱉었다. 기껏해야 9살쯤 됐던 그 당시, 애를 지운다는 개념은 내게 스케치북에 그린 밑그림을 지우개로 지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과정이라 나는 의도치 않게 엄마에게 이 잔인한 주문을 자주 남발했다. 그러나 9살짜리 교사범의 염원과는 달리 엄마의 배는 하루하루 불러왔다. 한창 내 차지였던 엄마의 무릎에 더는 앉을 수 없게 되자 나는 막무가내로 엄마 무릎을 파고들어 등으로 둔덕 같은 엄마의 배를 짓눌렀다. 사실 이건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에게 들어보니 그 시절의 난 아기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던 듯하다. 그때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태어난지 9년만에 의도치 않게 자기 몫이 된 아이가 자신의 첫 임신이 처절하게 실패하기를 기대하는 모습을 봤을 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다소간 경악스러웠을 거다. 하지만 당시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아기는 태어났고, 그냥 싫어해버리기에는 지나치게 귀여웠다. 하도 빽빽 울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알몸의 인삼 같았던 아기는 예민했지만 정말 귀엽기도 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면 엄마가 일러준 대로 손을 빡빡 씻고 나서 손가락으로 아기를 여기저기 건드리며 냄새를 맡기 위해 킁킁댔다. 부드러운 아기용 세제 냄새와 달콤한 분 냄새, 약간 시큼한 땀냄새가 났다. 막내의 꼭 쥔 주먹에 내 검지 하나를 밀어넣으며 나는 자주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얘한테 끝내주는 언니가 돼야지. 비록 나는 언니에게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얻어 터졌지만 얘는 내가 꼭 사랑으로 지켜줘야지. 가족에 대한 사랑은 막내에 대한 내 사랑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을 만큼 나는 진심으로 막내를 사랑했다. 14살, 갑작스러운 중학교 자퇴 이후 기숙사 학교에 들어갈 때도 나는 막내가 유치원에서 찍은 사진만 들고 입소했고, 열기가 가시지 않는 동남아의 한 나라에서 4개월간 혼자 지낼 때도 막내의 냄새가 남아있는 작은 보라색의 겨울용 털장갑을 들고 가서 냄새를 맡으며 엉엉 울었다. 언니와 나는 부모로부터 자주 맞으며 자랐지만 만약 막내가 똑같은 체벌을 받는다면 나는 내 부모를 직접 경찰에 신고할 용의도 있었다. 그 어릴 때부터 막내를 떠올리면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고, ‘대신 죽어준다’는 말이 사랑을 의미하는 유일한 말인 줄로 이해할 때 내가 기꺼이 막내를 대신해 그러고 싶다고 생각하던 날들을 돌이켜보면 그건 아마도 자매간 우애에 더해 부모의 사랑 같은 것도 다소 껴들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만큼 막내를 여러모로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 이면에는 지독한 질투도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엄마의 기운이 넘쳐나서 나와 막내, 언니를 골고루 사랑했으면 좋으련만 엄마는 애석하게도 특히 체력이 뒤처지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엄마는 아기밖에 돌볼 여력이 없었다.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 당장 내일 같이 등교할 친구가 없다는 절망을 엄마 품에 버려두고 엉엉 울고 싶을 때에도 엄마의 등은 이미 막내가 차지하고 있었을 때가 많았다. 예민한 아이를 업고 아파트 4층에서 11층까지 오르내리는 엄마의 얼굴이 어느덧 너무 늙어버린 걸 보며 나는 아기가 엄마를 좀먹고 있다고 생각했다. 흰 가죽 자켓과 기분 좋게 까슬거리던 멋진 민소매 등 세련된 옷들을 입던 ‘이모’는(지금 엄마가 재혼 전하기 전에 나는 엄마를 이렇게 불렀다) 임신과 동시에 동네 마트 앞에서 재고처리로 싸게 팔던 쥐색의 후줄근한 임부복만 입기 시작했다. 어떤 캐릭터의 짝퉁으로도 보이지 않을 만큼 조잡한 곰이 그려진 형광 분홍색과 노란색의 임부 원피스를 입은 엄마의 변화가 참을 수 없이 기괴했다. 엄마를 붙잡고 뭔가를 말하려 들 때면 엄마 피곤해,로 일관하고 돌아서던 뒷모습을 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크기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빈 공간에 차오르는 강렬한 감정도 있었다. 엄마를 다시 갖게 된지 2년도 안 된 시점에서 다시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허무함. 2년도 안된 그 짧은 시간조차 언니와 미친 듯이 경쟁하는 바람에 온전히 내가 가지지도 못했던 이 엄마라는 존재를 어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심히 빼앗아버린 아기에 대한 분노 같은 거였다.
엄마가 지켜야 할 자식에 나는 들어있지 않다고 느낀 날들이 많아졌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나와 엄마아빠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달았던 내 중학교 시절에 엄마는 집을 자주 비웠는데 그때 막내는 항상 엄마 옆에 있었다. 수학학원이 끝난 늦은 저녁 귀가해 차가운 백열등이 껌뻑이는 집에 들어올 때면 엄마와 막내는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대신 아빠 혼자서 험악한 인상을 쓴 채로 아무 말도 없이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빈번한 부부싸움에 아마도 엄마는 집안 분위기가 이럴 바에 애를 데리고 나가있자는 생각에서 자주 없어졌던 거겠지만 말하자면 그날들은 내게 어떤 암시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언제든 막내를 데리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엄마는 나와 언니를 차가운 거실과 무서운 아빠에게 남겨두고 자신의 딸인 막내만 데리고 나가버릴 거라고. 나는 엄마에게 또다시 버림 받을까 두려웠다. 나와 언니를 버리고 갈 엄마 옆에 막내는 변함 없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당도할 즈음에는 절망스러웠다. 그리고 가슴 한켠을 물려버린 것처럼 먹먹하도록 지독한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생각은 내가 스무살이 되어 집을 떠나기 전까지 나를 콱 물고는 놔주질 않았다. 엄마가 막내에게 하는 모든 좋은 행동은 ‘지 자식’이라서고, 나에게 하는 모든 안 좋은 것들은 ‘지 자식이 아니라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하필 엄마는 쉽게 지치고 짜증스럽고 딱히 세심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이 ‘지 자식’ 여부 필터가 덧씌워져 실제보다 몇 배는 악독하게 보였다.
그 시절의 내 나이를 이미 넘어버린 지금의 막내를 보며 나는 아직도 이따금 그 애가 되길 바란다. 나는 그냥... 그런 게 궁금한 거다. 엄마가 날 버릴 거라는 걱정 자체가 없는 상태가. 누군가의 ‘진짜 자식이 아니’라는 영원한 낙인 같은 걸 스스로에게 덧씌우지 않아도 되는 현실이. 그리고 존재 자체만으로 엄마한테 죽을 때까지 사랑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단 한 번도 진 적 없는 마음이. 막내는 아마 모를 거다. 나도 그 애가 영원히 그런 마음을 몰랐으면 좋겠다. 11년 전 목포의 바닷가 앞에서 막내에게 했던 내 고백처럼.
첫댓글 울컥울컥 울었네 1/3 지점부터 계속 울기 시작했음
눈물셀카 ㄱㄱ
안아주고 싶다 오닝..
읽고 한참을 멍때려야 소화가 되는 글이 있네 무슨 댓글을 달아야 하지 생각하다가 두 번을 깊게 읽었는데 눈물 오르는 문단이 똑같네
이렇게 뜨거운 질투가 있구나.. 근데 질투는 사랑을 데려오는 거구나.. 아니 사랑이 질투를 데려오는 거구나.. 닭이 먼저일까 달걀이 먼저일까.. 하면서 읽었어
좋다고 말해서 미안하지만 좋아 어쩌겠어?
아아아아악!!!!!! 내내 일렁이고 소름 돋고.. 목포 바닷가 파도가 된 기분으로 읽었어. 질투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그걸 이렇게나 유려하고 아픈 문장으로 읽으니.. 그저 감탄과 눈물만 나옴; 오닝아 계속 글 써줘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