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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운길산(雲吉山) 산행 이야기 ☆
청랑의 벗, 중원(中園) 이기태(李起泰) 동행
송촌리→ 절상봉→ 운길산(정상)→ 수종사→ 송촌리
2021년 11월 15일 월요일
* [산행 코스] 운길산역(10:00)→ (제네시스)→ 송촌2리→ 한음 이덕형 선생 별서→ 돌탑→ 능선길→ 수종사→ 절상봉-노거송→ 안부→ 운길산 정상(테크 전망대)→ 안부→ 수종사→ 송촌리→ 두물머리
[프롤로그] — 두물머리 이기태(李起泰)
오늘은, 공직 은퇴 후 양수리 팔당호반에 옮겨와 살고 있는 이기태(李起泰)와 단 둘이서 산행을 했다. 오래 전부터 서로 동행하기를 연연했던 산행이다. 중원 이기태는 나와 ‘같은 고등학교, 같은 과(科)’ 선후배이면서 고교시절 엘리트 모임인, ‘청랑회(靑浪會)’ 멤버로 나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의기(意氣)가 상통하는 친구다.
이기태는 퇴임 후 세미원(洗美苑)이 있는 양수리 ‘두물머리’에 물러 앉아, 인근에 유기농 텃밭을 가꾸고 포도농사를 지으면서 수석(水石)도 하고 서예(書藝)에도 정진하고 있다. … 무엇보다 이기태는 산(山)을 좋아한다. 그 동안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산에 올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키웠다. 우리나라 100대 명산을 비롯하여 이름 난 산은 거의 다 올랐다. 그는 산을 통하여 바르고 정직한 삶의 철학을 몸에 익혔다.
이기태는 무관답지 않게 은자의 풍류도 좋아한다. 그는 고려 말의 충신 길재(吉再)의 절조와 청빈의 풍류를 좋아했다. 그가 애송하는 길재의 시를 서예작품으로 써서 나(필자)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개울가 초가집에 홀로 한가로운데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이 넘치누나!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래산조어) 찾아오는 사람 없어 산새와 벗을 하고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대밭에 평상을 옮겨 누워서 책을 보네
—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시(詩)
이기태는 은연히 동양고전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일찍이 ‘允執厥中’(윤집궐중)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아호가 ‘중원(中園)’이다. ‘윤집궐중’은 중국 고대의 성군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며 신신당부한 말씀이다. 왕위에 올라 정사에 임할 때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말고 오로지 그 중심(中心)을 잡아 모든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사실 오늘날의 현실에서도 절실한 말씀이다. ‘세상의 인심은 위태롭고 사람의 도리는 미미하니 오직 정성을 다하고 오직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중심(中心)을 잡아라’(*人心惟危,道心惟微,惟精惟一,允執厥中) ― 귀한 가르침이다. ☞ *《서경書經》〈우서 대우모虞書大禹謨〉편에 나온다
이기태(李起泰)는 전주 이씨 효령대군(孝寧大君) 17대 후손으로, 일찍이 경찰에 투신하여, ‘경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총경(總警)에 올라 일관된 소신으로 공직을 수행하고 영예롭게 정년퇴임했다. — 이기태의 어린 시절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그는 그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자수성가하여 총경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기태 총경은 은평(2006), 일산(2008), 제천(2010), 김포 등 일선 경찰서장을 두루 역임하였다. 일찍이 청와대 경호실에 특채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그것은 생애의 자부심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정도필성(正道必成)’의 소신을 가지고 경찰 업무를 수행했다. ‘정도필성(正道必成)’은 (남과 다투어서 이기는 필승(必勝)이 아니라) ‘정도로써 자신의 뜻을 세워 꿈을 이룬다’는 뜻이다. 청렴하고 공정한 것, 이것이 공직자의 길에서 자신을 지켜온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부조리에 영합하지 않았다. 오직 관내의 치안(治安)과 대민(對民) 봉사(奉仕)를 최우선으로, 일선 경찰 업무 조직의 혁신을 꾀하고, 꿋꿋하게 공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그는 눈치 빠른 사람들보다 진급이 많이 늦었다. 그러나 그는 늘 당당했다. …
나는 수년 전 이기태 총경이 은평경찰서장에 재직하던 시절, 이정일, 이문규 등 고등학교 동문들과 도봉산 산행을 한 적이 있다. 작년 내가 낙동강 1300리를 종주하고 나서, 우리는 함께 산행하기를 서로 연연해 오다가 오늘 비로소 산행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의 산행지는 남양주시 조안면에 있는 운길산, 한북정맥의 마지막 봉우리 운길산에 올라, 유서 깊은 수종사와 그 높은 전망대에서 그가 살고 있는 두물머리 팔당호반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면서 선인들의 풍류와 삶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산행의 들머리]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2리
☆… 오전 10시 운길산역에 도착했다. 오늘따라 두물머리 한강 인근의 산천은 온통 안개로 자욱했다. 양수리에 사는 이기태가 은마(銀馬)를 몰고 역에 미리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우리는 오늘 산행의 출발지인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2리로 차를 몰았다. … 운길산 아래에 있는 이곳 송촌리는 옛날 ‘용진(龍津) 사제(沙堤)마을’로 명재상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별서(別墅)가 있던 마을이다. 별서(別墅)란 들이 있는 부근에 한적하게 따로 지은 집을 말한다. 별장과 비슷하나 농사를 짓는다는 점이 다르다.
송촌리, 한음 이덕형 별서(別墅) 터— 용진 사제마을
한음(漢陰) 이덕형(1561~1563)은 조선 역사 최연소인 31세에 대제학, 42세에 영의정에 오른 후, 45세 되던 1605년 부친을 모시고 용진(龍津) 사제촌(沙提村)의 한적하고 소박한 별서로 왔다. 집의 이름을 ‘대아당(大雅堂)’이라 불렀고 ‘읍수정(挹秀亭)’과 ‘이로정(怡老亭)’이라는 두 개의 정자를 지었다. ‘읍수(挹秀)’는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이곳에 가져온다는 의미이고, ‘이로(怡老)’는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즐긴다는 뜻이다. 서실 이름을 ‘애일당(愛日堂)’이라고 했는데 ‘애일(愛日)’은 ‘하루하루의 시간을 아끼고 사랑하여 어버이에게 효도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이곳 별서는 경관이 아름다워 한음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부친을 모시고 여생을 보내기 위해 마련했으며, 용진강(한강) 건너편 10리 쯤 되는 곳에 모친의 묘소가 있어 성묘하기 쉽도록 경치가 빼어난 운길산 아래 터를 잡았다. 한음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도 이곳 용진을 그리워하여 “아득한 천 리에서 용진의 달을, 한 해에 두 곳에서 나누어 보겠네!”라고 읊었다.
임진왜란 후, 1601년 한음 이덕형(42세)은 영의정이었다. 그는 영창대군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광포한 광해군은 그의 관직을 삭탈하자, 한음은 이곳 용진(龍津,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으로 물러났다. 한음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613년 53세에 별세했다. 그는 청빈한 재상이었다!
☆… 오늘, 옛날의 집터에는 400년의 풍상을 견디어온 은행나무 고목(古木) 두 그루만 빈터에 서 있었다. 은행나무는 당시 한음이 직접 심은 것이다. 지금은 2012년 11월에 복원한 읍수정(挹秀亭)이 있고, 한음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쓰던 하마석, 그 옆에 실물대의 말의 동상이 빈터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 한음 선생의 숨결이 머물던 곳, 지금은 쓸쓸한 빈터에 우수수 떨어진 은행잎만 수북이 쌓여 있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광해군 5))은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이민성(李民聖)이며, 어머니는 현령(縣令) 유예선(柳禮善)의 딸이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이다.
조선조 명종 16년(1561)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고 침착했으며, 문학에 통달해 어린 나이로 양사언(楊士彦)과 막역한 사이였다. 20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하고 28세에 임진왜란을 당하여 홀로 적진에 나아가 왜사(倭使) 겐소(玄蘇) 와 담판했으며, 32세에 명나라에 가서 지원군 파병을 성사시켜 평양성 탈환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 31세에 조선 역사상 최연소 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이 된 후, 병조판서, 우의정, 죄의정을 거쳐 33에 충청·전라·경상·강원 등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가 되어 전란 후 피폐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군대를 재정비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삼사에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가 모두 이덕형을 모함하며 처형을 주장했으나, 광해군이 관직을 삭탈해 이를 수습하였다. 이덕형(李德馨)은 이곳 사제마을로 물러나와 대아당(大雅堂)에서 나랏일에 상심한 나머지 병을 얻어 53세에 생애를 마쳤다. 때는 광해군 5년(1613년) 시월 초아레이다.
남인 출신으로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어, 남인과 북인의 중간노선을 지키다가 뒤에 남인에 가담하였다. 어렸을 때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기발한 장난을 잘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글씨에 뛰어났고, 포천의 용연서원(龍淵書院),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용진 사제촌(龍津沙堤村)의 이덕형
이덕형은 용진 사제촌(龍津沙堤村, 지금의 송촌리)을 사랑한 나머지 머나먼 이국에서조차 ‘꿈결에서 밟아보는 용진(龍津)의 길’이라는 시를 남겼다. 한음 이덕형은 정치·군사뿐만 아니라 문장(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250편의 한시를 남기고, 시조 3편을 지었다. … 별서(別墅)로 들어가는 길목에 한음 이덕형 선생 시비(漢陰李德馨先生詩碑)가 있다.
큰 잔(盞)에 가득 부어 취(醉)토록 머그며서
만고영웅(萬古) 영웅(英雄)을 손꼽아 허여 보니
아마도 유령(劉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이 시조는 진본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에 실려 있다. 시에서 ‘큰 잔’은 그의 마음의 잔인 동시에 한음의 높고 원대한 포부를 상징한다. ‘유령(劉伶)과 이백(李白)’은 세속을 초월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노래한 중국의 유명한 시인들이다. 이 시를 통해서 넓은 도량과 영웅을 추구하는 한음의 풍류가 잘 드러나 있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한음(漢陰) 이덕형은, 당대 이름난 시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와 절친하게 교유했다. (두 사람은 나이가 같다.) 이덕형이 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어 광주 이씨 시조(始祖)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던 중, 그 부근의 노계 박인로의 조부 산소에 참배하면서 노계를 만나게 되었다. 박인로는, 경상도 영천의 광주 이씨의 시조 산소가 있는 마을 사람이다. 두 가문의 친교는 이후 한음의 증손자 때까지 이어졌다.
노계(蘆溪) 박인로(1561년〜1642년(인조 20))는 조선 명종 16년(1561년)에 영천군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매우 총명하여 남이 글을 읽는 것을 들으면, 모두 기억하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시(詩)에 뛰어났다. 조선조 선조시대 임진왜란 때는 수군으로 종군하여 많은 공적을 남긴 무인(武人)이다. 그리고 뛰어난 시인이다. 특히 그는 조선시대 가사문학(歌辭文學)의 대가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별시위가 되어 왜군을 무찔렀다. 이어 수군절도사 성윤문(成允文)에게 발탁되어 그 막하로 종군하였고, 1598년 왜군이 퇴각할 당시 사졸(士卒)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가사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이듬해인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선전관을 지내고 이어 조라포(助羅浦) ‘수군만호’로 부임하여 군사력 배양을 꾀하고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다.
그후 그는 임직에서 물러나와, 고향 영천에 은거하며 독서와 시작(詩作)에 전심하면서 많은 가사 작품을 남겼다. 박인로가 남긴 작품으로는 가사로는 〈태평사(太平詞)〉, 〈선상탄(船上歎)〉, 〈노계가(盧溪歌)〉, 〈독락당(獨樂堂)〉, 〈영남가(嶺南歌)〉, 〈누항사(陋巷詞)〉, 〈사제곡(沙堤曲)〉등 7편이다. 조선시대 가장 많은 가사작품을 남겼다.(정철은 네 편이다.)
박인로는 송강 정철에 버금가는 가사시인이다. 특히 그 시가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한자나 고사성어,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한 흠이 있으나, 수사나 조어(造語)가 매우 뛰어나다. 더욱이 초기의 작품은 풍부한 어휘에는 필자의 웅렬(雄烈)하고 무인다운 기상이 잘 드러나 있으며, 문장에는 신선한 기백이 넘친다. 박인로는 시가문학사상 정철,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시가인’으로 꼽힌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사제곡(沙堤曲)〉
노계(蘆溪)와 한음(漢陰)은 동갑의 나이로 절친하게 교유했다. — 한음의 별세 2년 전인 1611년 노계 박인로가 이곳 사제마을로 한음을 찾아왔다. 영천에서 천리 먼 길을 찾아온 노계(蘆溪)가 한음의 요청으로〈사제곡(沙堤曲)〉을 지었다. 용진(龍津) 사제촌(沙堤村)의 빼어난 경관을 배경으로 당시 혼미했던 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음의 우국지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수(巨水, 한강)에 이렇거든 거산(居山)이라 우연하랴
산방에 추만(秋晩)커늘 유회(幽懷)를 둘 데 없어
운길산(雲吉山) 돌길에 막대 집고 쉬어 올라
임의 소요(逍遙)하며 원학(猿鶴)을 벗을 삼아
교송(喬松)을 비기어 사우(四隅)로 돌아 보니
천공(天公, 조물주)이 공교하여 묏빛을 꾸미는가
내 생각이 이러하여 멀리 물러나 살고 있으나
망극한 임금의 은총을 어느 땐들 잊을쏘냐?
신하의 작은 충성심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깊어진다.
가끔 머리 들어 임금 계신 북쪽을 바라보니,
남모르는 눈물이 소매를 적시는구나
— 박인로 〈사제곡(沙堤曲)〉 일부
박인로의 시가 〈사제곡〉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1611년(신해년) 봄에 한음대감 요청으로 이 노래를 지었는데, 사제(沙堤)라는 곳은 용진강 동쪽 5리 되는 거리에 있고 대감의 정자가 있는 곳이다.’(萬曆辛亥春 漢陰大監命作此曲 沙堤勝地名 在龍津江東距五里許 大監江亭所在處也) 그러나 이덕형이 지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시적 화자가 바로 이덕형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 용진(龍津)은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와 남양주시 조안면 진중리를 연결하는 북한강 나루터이다. 당시엔 아름다운 백사장(白沙場)으로 덮여 있었으나 지금은 팔당호에 잠겨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한음의 별서(別墅)는 현재 터만 남아있고 그 앞에 노계의 ‘사제곡 기념비’(사진)가 있다.
박인로의 〈조홍시가(早紅柹歌)〉
박인로가 지은 시조〈조홍시가(早紅柹歌)〉와 가사〈누항사(陋巷詞)〉도 이덕형이 박인로와 교유하는 가운데 지어진 것이다. 임란 후, 이덕형이 경상도 도체찰사 되어 영천에 있는 광주 이씨 시조(始祖)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던 중, 박인로를 만났다. 다음은 〈조홍시가〉 4수 중의 첫 수(首)이다.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柚子(유자) 아니라도 품음 직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기리 업슬 새 글노 설워하나이다
이덕형(李德馨)이 도체찰사로서 영천에 갔을 때, 박인로가 잘 익은 홍시(紅柿)를 내어 놓은 것을 보고 그 자리에서 박인로에게 이미 그가 지은 이 시조(時調, 위의 시조)에 단가 3수를 더 짓도록 하였는데 어머니를 생각하는 지성에서 나온 작품이다. 진본 청구영언(靑丘永言) 주서(注書)에 「漢陰見盤中早紅 使朴仁老命作三章 蓋出於思親至誠」라고 적혀 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효성(孝誠)이며, 중국 삼국시대에 육적(陸績)의 회귤(懷橘) 고사를 연상하고 지은 것이다. 원본을 손으로 베껴쓴 고사본(古寫本)에는 “盤中(반중)에 노흰 早紅(조홍) 두려움도 두려울사 / 비록 橘(귤)이 아니나 품엄즉하다만은 / 품어도 듸릴 데 업사이 글로 셜워하노라.”로 되어 있어 이것이 우리가 아는 위 작품보다 더 원작에 가깝다. 여기서 두려움은 홍시가 먹음직스럽지만 부모보다 먼저 입에 대선 안 된다는 두려움이다.
* [육적회귤(陸績懷橘) 고사(故事)] ☞ 이 이야기는 육적이 어머니께 드리기 위해 귤을 품에 넣은 고사이다. … ‘육적(陸績)이 여섯 살 때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만났는데, 원술이 귤(橘)을 주자 그중 3개를 품에 넣고 작별 인사를 하다가 귤을 떨어뜨렸다. 원술이 “육랑(육적)은 손님으로 와서 왜 귤을 품에 넣었는가?”라고 물었다. 육적은 무릎을 꿇고 대답했다. “돌아가 모친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원술은 이를 기특하게 여기었다.’(績年六歲, 於九江見袁術. 術出橘, 績懷三枚, 去, 拜辭墮地. 術謂曰, 陸郞作賓客而懷橘乎. 績跪答曰, 欲歸遺母. 術大奇之.)」《삼국지(三國志) · 오서(吳書) 〈육적전(陸績傳)〉》
박인로의 누항사(陋巷詞)
〈누항사(陋巷詞)〉는 영천 박인로의 청빈한 생활을 노래한 가사이다. 박인로의 나이 51세 때 이덕형이 찾아와 ‘누항(陋巷) 즉 산속에서 곤궁하게 살아가는 생활’을 물었을 때 박인로가 답한 작품이다.
자연을 벗 삼아 살리라는 한 꿈 꾼 지도 오래더니
먹고 사는 일 걱정 되어 이때까지 잊었노라
저 물가 바라보니 푸른 대나무 많기도 많구나
교양 있는 선비들아 낚싯대 하나 빌려쓰자구나
갈대꽃 깊은 곳 밝은 달과 맑은 바람 벗이 되어
임자 없는 자연 속에 절로절로 늙으리라
무심한 갈매기야 오라하며 오지 말라 하랴
다툴 이 없는 곳 다만 이 뿐인가 여기노라
— 박인로 〈누항사(陋巷詞)〉 일부
가난하지만 원망하지 않으며,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다. 〈사제곡(沙堤曲)〉이 용진 사제마을의 풍취와 한음 이덕형의 우국지정을 읊은 것이라면 〈누항사(陋巷詞)〉는 영천의 박인로가 빈한한 농촌생활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삶을 노래한 것이다.
한음(漢陰)과 노계(蘆溪), 대(代)를 이은 교류
〈사제곡〉〈누항사〉는 노계 박인로가 한음 이덕형의 은거지인 용진 사제마을(경기도 남양주시 송촌리)을 찾아와 머물면서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1613년 한음 별세 후, 한음의 큰아들 여규(如圭)는 경상도 상주목사, 셋째 아들 여황(如璜)은 선산부사가 되어, 이웃 마을 영천에 계시는 아버지의 친구 박인로를 가끔 초대해 대접했는데, 이때 박인로는 큰아들에게는 ‘상사곡(相思曲)’을 셋째 아들에게는 ‘권주가(勸酒歌)’를 지어주었다. 노계의 많은 작품이 한음(漢陰) 부자(父子)에게 지어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황(如璜)의 손자 윤문(允文)이 1690년 영천군수로 부임하자 박인로의 손자 박진선(朴進善)을 불러 ‘노계시문집’ 중에서 한음 부자에게 지어준 부분만 따로 골라 판각하여 《永陽歷贈》(영양역증)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그 초간본이 2004년 경북 구미의 인동 장씨 문중에서 발견되어 경북문화재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만추(晩秋)의 운길산(雲吉山) 산행
― 이기태(李起泰)가 풀어놓은 인생 이야기 ―
☆…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남양주군 조안면 송촌2리(옛 용진 사제마을)이다. 한음 이덕형 선생의 별서 터를 둘러보며 시대의 아픔을 한 몸에 않은 선인(先人)의 삶을 회고하며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마을 길목에서 만난 광주 이씨 한음의 10대손이라는 분이 산으로 오르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400여 년 전, 한음이 사제마을에서 수종사에 오르던 바로 그 길이다.
낙엽 쌓인 산길의 돌탑을 지나며
☆… 오전 10시 40분, 산길로 접어들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한강과 팔당호에서 올라온 짙은 안개가 끼어 온 세상이 오리무중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산록에는 갈잎을 벗어버린 나무들이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 추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완만한 산길을 올랐다. 11시 경 돌탑이 있는 길가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는 각자 소망의 돌을 집어 탑 위에 올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 이기태(李起泰)가 자신이 지나온 인생의 이야기를 선선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① — 상주의 오지 무릉리에서 문고 광산과
이기태는 6·25동란 중 경상북도 상주군 은척면 무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효령대군 후손인 아버지 이용의(李龍儀) 공과 어머니 풍양 조씨(趙氏) 부인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릉리(武陵里)는 그 이름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게 하듯이 깊은 산골마을이다. 마을의 뒤쪽에는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동쪽으로 뻗어온 산줄기가 솟아 올린 작약산(774m)이 있다. 작약산의 북쪽에는 청화산에서 발원한 영강의 상류 쌍룡계곡이 있고, 산의 남쪽에는 속리산 형제봉에서 발원한 이안천이 멀리서 흐른다. 무릉리 산곡은 이안천의 지천인 지평천이 발원하는 곳이다.
그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시절, 집안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한학을 하신 아버지는 옛날의 법도를 중요시 여기는 시골선비였다. 위로 형이 둘이 있다. 이기태 어린 시절의 가계(家計)는 얼마 되지 않은 농사를 지으며 겨우 연명을 하는 실정이었다. 정말 배가 고팠다. 그는 형들과 함께 허리띠를 졸라매고 무릉초등학교(은척초등학교 무릉분교)를 다녔다. 전후, 미국의 구호물자인 강냉이 가루를 받아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형편이 어려워 감히 진학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중학교는 집에서 수십 리 떨어진 상주나 함창에 있었다. 아버지는 집에서 농사를 지으며 한학(漢學)을 공부하라고 하셨다.
어린 이기태는 어머니를 졸라 학비가 들지 않은 고등공민학교(은척)에 들어갔다. (고등공민학교는 정식 중학교가 아니므로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고입검정고시를 보아야 한다.) 집에서 산길로 6km를 걸어서 다녔다. 1년 뒤 그는 과감하게 대처(?) 함창으로 나아갔다. 당시 함창성당에서 운영하는 함창고등공민학교로 옮긴 것이다. 집에서 약 10km 떨어진 거리를 걸어서 다녔다. 당시 성당에는 인자한 독일인 신부가 계셨는데 헐벗은 아이들을 정성으로 가르치고 보살펴주셨다. 간식도 주고 학용품도 제공해 주었다. … 당시 스테파노 신부는 특히 어린 이기태에게 용기를 주고 세상에 눈을 뜨게 했다. 신부님은 그의 은인이다. 그는 졸업할 때 신부님의 감화를 받아 ‘예레니모’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공민학교를 졸업하고 고입검정고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위의 형들도 집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당시 취직이 잘 된다는 광산과가 있는 점촌의 문경종합고등학교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다행히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게 되어 학비걱정은 덜었다. 그리고 다행히 점촌의 동양연탄공장 박희복 사장 집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이생길 담임선생님의 추천으로 ‘5·16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고교시절 두 개의 장학금을 받았다.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그는 5·16장학금은 고스란히 집에 보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당시 호황을 누리던 광산의 ‘감독직’을 꿈꾸며 광산과에 들어왔지만 현장에 실습을 나가보니 자신이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대학진학 공부를 시작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학을 가리라고 결심하고 나서 그는 죽어라고 공부했다. 초저녁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공부하다 쓰러져 병원에 입원까지 한 적도 있었다. —
☆… 우리는 앞서가니 뒤서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누런 은행잎이 수북히 떨어진 수종사 500년 거목 앞에 이르렀다. 산길의 돌탑에서 수종사에 이르기까지 이기태는 무릉리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의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중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내 나의 소년기의 역경이 떠올랐다.
*— 나의 인생 이야기
나[필자]의 어린 시절도 가난했다. 나는 누님 일곱에 이은 막내,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들 하나 보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인 어머니가 마흔 셋에 낳은 아들이었다.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가산이 기울어 재산이라고는 논 네 마지기밖에 없었다. 그것으로는 일 년 양식도 되지 못했다. 산양의 벽촌인 옥산(玉山)에서 태어나, 6살 때 5일장이 서는 산양면소재지인 불암리(佛岩里)로 이사를 와서 거기서 산양초등학교(1955~1960)를 다녔다. 분유 등 미국구호품을 받으면서 배고픔을 달랬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집에서 6km 떨어진 점촌의 문경중학교(1961~1963년)에 들어갔다. 3년간 걸어서 다녔다. 아버지는 착한 농부였고 문장을 쓸 줄 아시는 어머니는 매우 현숙한 분이셨다. 딸 일곱을 낳고 만득자로 얻은 나를 위하여 지극 정성을 다했다. 나는 중학교 3년간 우등상을 받았다. 어머니는 가정 살림과 나의 뒷바라지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셨다. 한여름에는 뙈약볕 장날에 좌판을 벌이고 장사를 했고, 겨울에는 밤을 새워 한과(韓菓)를 만들어 그것을 머리에 이고 팔러 다녔다. 어머니는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시름시름 아프시다가 내 중학교 3학년 때인 1963년 겨울에 세상을 떠나셨다.
남은 가족으로는 연세 많은 아버지와 다섯 살 위의 누나가 있었다. 나는 우등상을 받으며 중학교를 마치고도 고등학교를 다닐 처지가 되지 못했다. 1960년대는 산림녹화 정책으로 모든 가정에서 연탄을 사용하게 되어, 당시 문경은 석탄광산이 많아 호황을 누렸다. 시대에 부응하여 몇 년 전, 지역의 고등학교에 광산과가 개설되었다. 광산과를 나오면 취직이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일단 시험을 보았다. … 1964년 나는 문경종합고등학교 광산과에 다행히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분기별 기성회비 500원만 내고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고등학교 3년간도 나는 왕복 12km를 걸어서 다녔다. 그 동안 다섯 살 위의 누님이 편물을 하며 나를 뒷바라지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집에서 2km 떨어진 용궁정미소 김동준 사장 집에서 가정교사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남매를 가르치고 나서, 밤늦게 공부하고 이른 아침에 집에 와서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갔다.
그런데, 광산(鑛山)에 실습을 나가보니 ‘막장처럼’ 나의 앞길이 캄캄했다. 이런저런 고심 끝에, 학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가기로 작정하고 공부를 했다. 국어·영어·수학 과목 시간이 적은 실업계 학교에서 진학준비를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한여름 온 몸에 땀띠가 나서 고생을 하면서 죽어라고 공부를 했다. 한 마디로 고군분투였다. 이 가난과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오직 공부 밖에 없었다. 사관학교 진학을 꿈꾸는 광산과 3총사 중, 은성광업소 광부의 아들 이종호는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했고, 용궁면장의 아들인 이보우는 육군삼사관학교에 진학했지만, 나는 아버지와 누님의 극렬한 반대로, 대구병무청에서 받아온 ‘육사 지원서’를 두 분 앞에서 찢어야만 했다. 절망이었다. … 방황과 고심,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사는 큰누님과 연락이 되어 상경했다. 그리고 서울교육대학에 시험을 보고 다행히 합격을 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가정교사를 했다. — 이기태는 나의 고등학교 광산과 3년 후배이다. 이렇게 보면, 서로 상황은 다르지만, 이기태와 나는 지독한 가난과 궁핍한 환경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수종사 은행나무 앞에 이르다
한음 선생과 수종사 덕인 스님의 교유
☆… 오전 11시45분, 수종사(水鐘寺)에 도착했다. 우리가 인생사를 풀면서 올라온 ‘송촌리에서 수종사에 이르는 산길’은 400여년 전, 한음 선생이 수종사 주지 덕인스님과 교유하면서 왕래하던 길이다. 거대한 은행나무 앞, 길목에 스텐레스 시판(詩板)이 있다. 한음(漢陰) 선생이 지은 두 편의 시(詩)다. 하나는, 어느 해 겨울, 덕인스님이 수종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사제촌으로 한음 선생을 찾아 문안 왔을 때 지은 시다.
僧從西崦扣柴關 승종서엄구시관 운길산 스님이 사립문을 두드리데
凍合前溪雪萬山 동합전계설만산 앞개울 얼어붙고 온 산을 백설인데
萬疊靑螺雙練帶 만첩청라쌍련대 만첩청산에 쌍련대 매었네
不妨分占暮年閑 불방분점모년한 늘그막의 한가로움 누리고 있다오
* ‘萬疊靑螺雙練帶’에서 ‘靑螺’(청라)는 설산 허리에 있는 푸른 소나무를 말하고,
‘雙練帶’(쌍연대)는 양수리의 두 물줄기가 흰 비단처럼 둘러 있는 것을 비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 * 練(연) : 흰 비단.
그리고 또 한 편의 시는 봄날이 다 지나간 어느 날 한음 선생이 수종사에 올라와 덕인스님과 함께 차를 나누며, 읊은 것이다.
風輕雲淡雨晴時 픙경운담우청시 산들바람 불고 옅은 구름비 개었건만
起向柴門步更遲 기향시문보갱지 사립문 향하는 걸음걸이 다시금 더디구나
九十日春愁裏過 구십일춘수리과 춘삼월 좋은 봄날 시름 속에 보내고
又孤西崦賞花期 우고서엄상화기 운길산 꽃구경은 시기를 또 놓쳤구려!
한음(漢陰) 선생은 7년 간의 임진왜란을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극심한 정쟁에서 오는 국정의 혼미에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북한강(龍津) ‘사제(沙提)마을’에 물러 나 있었다. 하 좋은 봄날을 나라 걱정으로 보내면서 하릴없이 지내고 있는 심경을 토로한 것이다.
수종사에서 절상봉까지
☆… 여기, 수종사(水鍾寺)는 하산 길에 자세히 탐방하기로 하고, 우리는 바로 산정으로 오르는 길로 접어들었다. 아침에 자욱하던 안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수종사에서 절상봉으로 올라가는 산길은 크고 작은 돌들이 많고 경사가 가팔랐다. 전체적으로 운길산은 토산이지만, 산의 고도가 높아가면서 흙 위에 돌출한 암석도 많고 정상 아래에는 바위 절벽도 있다. 경사가 급한 길은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② — 서울, 동아제약
☆…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 이기태의 인생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69년 겨울 서울에 올라와 고려대 법대에 시험을 봤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당시 용두동에서 자취하고 있는 고향 친구의 자취방에 신세를 졌다. 대학시험에 떨어졌지만 그냥 집으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기태는 그때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윤봉길 의사의 비장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서울에서 살 길을 모색했다. 어떻게든 대학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문제는 대학이 아니라 당장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는 결연히 용기를 내어 당시 용두동에 있는 ‘동아제약’을 찾아갔다. 당시 동아제약 강중희 사장은 이기태의 고향인 상주(은척) 출신으로 바닥부터 자수성가한 기업인이었다. 고향 출신의 그를 찾아가 취직을 호소할 생각이었다. (이기태는 강중희 사장이 서자로 자란 어린 시절과 서울에 올라와서 고생 끝에 동아제약 사장이 된 인생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동아제약 수위실에 가서 사장님을 뵈러왔다고 했더니, 사전에 약속이 없는 사람은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이기태는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 물러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날 이후 이기태는 매일 동아제약 정문에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위실 옆에서 기다렸다. 점심도 먹지 않고 그렇게 수위실 옆에서 기다렸다. 누렇게 뜬 얼굴로 간절하게 수위에게 사장님을 뵙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일주일이 지나면서 그를 안타깝게 여긴 수위가 그 사연을 묻더니 총무과에 전화를 해 주었다. 총무과를 통하여 ‘들여보내라’는 사장님이 언질을 받았다. 사장실에 들어가서 강중희 사장을 처음 뵈었다. 그는 고향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말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취직을 시켜달라’고 간청을 했다. 강중희 사장은 사정이 딱한 고향의 젊은이를 외면하지 않았다. 총무부장을 통하여 자리를 마련해 주라고 했다. 그래서 이기태는 동아제약 영업부에 취직되어, 일반 약국에 박카스 등 약품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일을 했다. 처음에는 무거운 약 상자를 실은 자전가가 넘어지기도 하고 엄청나게 고생을 했으나 이내 숙련이 되었다. 수입이 좋았다. 외근에 특별수당까지 받았다. 가끔 집으로 돈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일 년 동안 근무하면서 저녁에는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를 했다. 일 년 동안 돈을 벌어 대학에 진학할 꿈을 지니고 있었다. 대학 진학,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이기태에게 동아제약 강중희 회장은 생애 두 번째 생명의 은인이다. — 거기까지 이야기 하는 사이 우리는 ‘절상봉’ 산정에 이르렀다.
운길산 절상봉
☆… 오후 12시 10분, 우리는 돌부리가 채는 능선을 타고 올라가 절상봉(522m) 정상에 도착했다.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하늘과 세상이 훤하게 열렸다. 절상봉은 수종사를 품고 있는 주산(主山)이다. 운길산(雲吉山)은 건너편에 우뚝 솟아있다. 운길산은 절상봉에서 수종사로 내려가는 안부를 지나 다시 올라가야 한다.
☆… 절상봉 바로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 위에 시퍼런 거송(巨松) 한 그루가 푸른 하늘을 받치고 있었다. 노송 아래 자리를 잡고서 커피를 나누어 마시며 이기태는 다시 인생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③ — 건국대 법대 주경야독
동아제약에 입사하여 일 년 동안 성실하게 근무하면서 알뜰하게 저축하여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1971년 이기태는 드디어 대학에 들어갔다. 71학번이었다. 당시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학교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법학과는 아버지가 원하시던 것이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 낮에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저녁에는 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다. 열심히 일하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 무슨 일이든 마음이 절실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그는 힘들게 일하면서도 더욱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④ — 동아제약 휴직
저녁에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한 시간 일찍 회사를 나와야만 한다. 그렇게 일상이 계속되니까 이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상주고등학교를 나온 6살이 많은 상주 고향의 선배였다. 상주고등학교는 동아제약 강중희 사장이 고향에 설립한 사학으로서 매년 5~6명의 졸업생을 동아제약에 특채를 했다. 그 동료는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날이 갈수록 그는 비난과 압박을 가해왔다. 하루는 그를 조용히 불러내어 조용히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그는 이기태에 대한 이해는커녕 불만을 그대로 고수했다. 몇 차례 간곡하게 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이기태는 조용히 침묵하다가, 느닷없이 험악한 기세로 ‘한 차례 강한 펀치’를 가하면서 그의 기(氣)를 죽여 버렸다. 이러구러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오만을 사과하고 빌었다.
그런데 이튿날 회의 시간에 안○섭 과장이 ‘이기태’ 이름을 거론하면서 사원 폭력 운운하며 대놓고 질책하는 것이 아닌가. 그 친구가 과장에게 자기가 당한 일을 고자질한 것이었다. 이기태는 그렇게 된 원인을 무시하고 자신을 꾸짖는 과장이 야속했다. 어차피 터진 일, 순간 그냥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과장 면전에 나아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며 강하게 분노했다. 그러나 그는 상사였다. 그 일로 인해 이기태의 회사생활은 불편했다. 그래서 얼마 후 조용히 휴직계를 내고 군대에 갔다.
한북정맥 운길산 정상 — 강과 산이 어우러진 장엄한 풍경
☆… 오후 1시 13분 운길산(610m) 정상에 올랐다. 운길산 정상에서 정상석이 있고 그 앞에 아주 널찍한 나무테크 전망대가 있다. 아침에 자욱하던 안개가 모두 사라졌다. 전망대에서 동남쪽을 바라보면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아름다운 호반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환하게 열린 아름다움은 가히 압권이다.
두물머리는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춘천을 거쳐 약 317km를 흘러온 북한강 강물과 태백시 대덕산 검룡소에서 발원한여 정선-영월-단양- 충주를 경유하여 흘러온 남한강 강물이 만나는 한강이다. 그리고 두물머리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세 개의 큰 산줄기가 모이는 곳이다. 한북정맥 운악산-천마산-백봉산에서 내려온 천마지맥(남양주 운길산), 백두대간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분기해온 한강기맥(양평군 부용산)과,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북상하여 올라온 한남정맥의 한 지맥(하남시 금단산)이 그것이다. 이렇게 두물머리는 세 개의 큰 산맥과 두 줄기의 강이 만나는 곳이다. 그야말로 산수(山水)가 조화를 이루어 천하에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이다.
☆… 운길산(雲吉山)은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먼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운길산은 남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한 지맥이 한강을 만나 솟아오른 산이다. 한북정맥(漢北正脈)은 백두대간 백산(1,120m)에서 분기하여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장명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한북정맥의 산봉은 추가령(백산)에서 서남쪽으로 분기하여 온 백암산(白巖山)-양쌍령(兩雙嶺)-적근산(赤根山)-대성산-수피령(水皮嶺)-광덕산(廣德山)-백운산-국망봉(國望峰)-강씨봉-청계산(淸溪山)-운악산(雲嶽山)-죽엽산(竹葉山)-도봉산-노고산-현달산(峴達山)-고봉산-장명산 등이다. 운길산(雲吉山)은 한북정맥 포천 운악산(雲嶽山)에서 남쪽으로 갈라져 내려온 ‘천마산지맥’의 끝자락에 솟은 산봉이다. 팔당호 앞에서 큰명산-갑산-적갑산-예봉산과 함께 산군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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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길산 정상의 전망대 위에서 배낭 챙겨 매고 동서남북의 사방의 풍경을 조망한다. 깊어가는 가을, 둘이서 오붓하게 산을 오르면서 우리가 살아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가을은 사람을 성숙하게 한다.
운길산 정상의 ‘백중결의(柏中結義)’
☆… 나무테크 전망대 벤치에 자리를 잡고 식사를 했다. 식사하기 전, 내가 중국에 갔을 때 산동성 칭다오의 삼영전자 *김대호(金大浩) 사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71도 ‘小瑯高(샤이랑가오)’ 빠이주(白酒)를, 두 개의 백옥잔(白玉盞)에 따라서 건배를 했다. 서로 마음의 결의를 하며 축배를 들었다. 이른바 ‘운길산의 백중결의(柏中結義)’였다. ‘백(柏)’은 나의 아호 ‘백파(柏坡)’이고 ‘중(中)’은 이기태의 아호 ‘중원(中園)’이다. 두 사람의 의기가 투합하여 한마음을 이루는 결의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두 개의 삼각 김밥과 우유, 귤, 이기태가 준비한 고구마와 찐 계란 그리고 커피 등은 산정의 진수성찬이었다. 정상에서 식사를 하면서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 김대호(金大浩)는 나와 함께 문경종합고등학교 광산과 3년 동안을 함께 다닌 고향친구로, 현재 성남에 본사가 있는 (주)삼영전자 사장(CEO)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삼영전자 생산라인에 근무하면서 그 업무 능력과 성실성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과장-부장을 거쳐 상무가 되었고, 이어 중국 칭다오(靑道) 삼영전자 총경리(현지 사장)을 거쳐, 본사로 돌아와 전무를 거쳐 사장이 되었다. 그는 중국 칭다오 삼영전자 총경리로 있을 때 첨단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라인을 자동화하여 삼영전자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삼영전자를 국내 유수의 알찬 기업으로 성장시키고 세계적인 기업이 되게 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금도 전문경영인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⑤ — 고시공부 하다가 경찰에 입문하다
2년 6개월 간의 군대 생활을 마치고 이기태는 다시 회사에 복직했다. 그런데, 문제의 안(安) 과장은 그 사이 회사의 인사를 담당하는 총무부장이 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옛일을 지우고 깍듯이 인사를 했다. 그런데 부장은 이기태를 멀리 ‘안양공장’으로 발령을 냈다. 안양에서는 퇴근하고 서울 도심(낙원동)에 있는 대학에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수도권 전철(1호선)이 생기기 전이었다. 도저히 대학에 다닐 수 없었다. 강중희 사장에게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가장 어려울 때 취직을 시켜준 분에게 다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이기태는 그 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쪽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법고시 공부를 했다. 대학도 졸업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같이 공부하던 친구로부터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이 있다는 정보를 들었다. 생각 끝에 ‘경찰간부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합격을 했다. 그때부터 이기태는 대한민국의 ‘간부 경찰’에 된 것이다. 그는 경위(警尉)에서 총경(總警)이 이르기까지, 공직생활을 하면서 어릴 때 효령대군 후손인 아버지로부터 훈육 받은 ‘선비정신’을 마음에 지니고, 공직자로서 정도(正道)를 걸으며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나갔다.
이기태의 인생 이야기 ⑥ — 청와대 경호실 근무 그리고 총경이 되다
1978년 이기태는 근무성적 우수자로 청와대에 특채되어 대통령 경호실(警護室)에 근무하게 되었다. 대통령을 측근에서 경호하는 임무도 중차대하지만, 청와대 근무라는 후광이 생애의 큰 자부심이 되었다. 이기태는 그 동안 아프고 힘들었던 고난의 역정(歷程)을 보상 받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기태는 총경(總警)이 되어 일선 경찰서장으로 복무하면서 경찰의 조직이나 대민 관계에서 깨끗하게 처신하고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 그는 원래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강직(剛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총경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윗자리의 눈치나 이런저런 부조리에 엮이지 않았고 자기 소신(所信)을 유지해 나갔다. 때로는 동료나 상사까지 그를 어렵게 생각하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승진이 늦었다. 다른 사람보다 늦게 총경이 되었다. 그는 일선 경찰행정을 혁신하고 부조리를 척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 그리고 관내의 치안과 대민 봉사를 성실히 수행하고 2015년 영예롭게 퇴임했다.
이기태의 고향 무릉리 마을입구에 두 번의 ‘플랜카드’가 내걸렸다. 한번 ‘청와대 경호실 복무 축하’하는 것이고, 한번을 ‘총경 승진 축하’의 걸개였다. 누구보다도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셨다. 이기태는 극도로 궁핍한 상황 속에서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하고 정도입성(正道必成)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 산(山)을 오르면서 그가 풀어놓은 인생의 이야기는 하나의 파란만장한 드라마와 같았다. 나름 최선을 다한 삶이었기에 지금도 스스로 공직생활을 ‘보람과 자부심’으로 말할 수 있다.
운길산 정상에서 수종사로 내려오다
☆… 운길산 정상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정상 아래의 바위능선은 운길산의 성깔을 보여주듯 날카롭고 위엄이 있었다. 겨울에도 시퍼렇게 살아있는 소나무가 뿌리내린 암릉 길에서 우리 인생에서도 지녀야 할 어떤 신념 같은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 안부에서 수종사로 내려오는 산길은 낙엽이 쌓여 푹푹 빠지는 길목이었다. 낙엽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어 ‘땅 한 자락을 사기’도 했다. 지그재그의 산길을 내려와 수종사로 들어가는 불이문(不二門) 앞에 섰다. 불이문 문안의 벽면에는 사천왕상이 그려져 있다. 속인은 사천왕상 앞에서 ‘생사불이(生死不二)’ ‘성속불이(聖俗不二)’의 경내에 들기 위해서는 속진(俗塵)을 씻어야 한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간다. 정교하게 돌로 쌓은 축대를 따라 완만하고 긴 돌계단을 올라갔다. 해탈문(解脫門)을 지나 수종사 경내로 들어섰다.
운길산 수종사
1890년(고종 27)에 지은 〈수종사중수기〉에 ‘雲吉山’(운길산)이란 이름이 처음 나오나, 예로부터 ‘조곡산(早谷山)’으로 알려진 산이다. 기록에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6권 경기(京畿) 광주목(廣州牧) 편에는 "수종사는 조곡산 에 있다.(水鍾寺在早谷山)"고 적혀 있다.
1458년, 세조(世祖)가 금강산에서 오대산을 들려 환궁하다 운길산 아래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달빛 괴괴한 새벽을 깨우는 ‘종소리’에 잠 설친 세조는 종소리 난 곳을 찾아보도록 했다. 신하들이 운길산 자락을 수색하다 발견한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소리가 공명하여 종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세조는 그 굴속에서 ‘18나한상’을 발견하고 이듬해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종사(水鍾寺)’라 했다.
수종사 ‘세존사리탑’과 ‘팔각오층석탑’
왕실의 원찰이 된 수종사 대웅전 옆에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과 ‘팔각오층석탑(八角五層石塔)’이 있다. ‘세존사리탑’ 안의 은제도금 육각 사리함엔 “태종 이방원과 의빈 권 씨의 고명딸인 정혜옹주가 요절하자 딸의 극락왕생을 위해 부처님의 사리탑을 문화 류씨와 금성대군이 세종 21년(1439) 10월에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봉안됐다. 이 사리장엄은 보물 제259호로 지정되어 있다.
‘팔각오층석탑’ 속엔 금동부처님이 가득 모셔져 있었는데 탑신석의 금동불함 속에서 석가모니불, 반가사유미륵보살, 지장보살 등 금동삼존불이 발견됐다. 그리고 성종(成宗)의 수명장수와 자식들이 복락을 누리길 바라는 명빈 김씨(施主 明嬪 金氏) 명문이 있고, 복장 안에는 성종의 후궁들인 숙용 홍씨, 숙용 정씨, 숙원 김씨가 1493년에 발원한 복장발원문도 나왔다.
수종사 삼정헌(三鼎軒) — 차(茶)와 시(詩)와 선(禪)의 향기가 넘치는
수종사 요사체 맞은편에 ‘삼정헌(三鼎軒)’이 있다. 평소 정오엔 차를 무료 보시한다. 요즘은 코로나로 인해 문을 열지 않고 있다. 수종사 석간수(石間水)로 빚은 차는 향과 맛이 그윽하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 명사들이 애호했다. 다산 정약용, ‘동다송(東茶頌)’을 짓게 한 정조의 부마 홍현주, 차의 신선 초의선사가 수종사를 자주 찾아와서 차를 마셨던 곳이다.
삼정헌은 [시詩-선禪-차茶]가 하나로 어우러진 절의 내력에서 비롯되었는데, 다산(茶山)은 57세가 되던 해 1818년 8월 강진의 오랜 귀양살이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추사 김정희(당시 나이 33세)와 초의선사와 함께 두물머리 한강을 바라보며, 이곳의 샘물로 차를 끓여 마시며 시문을 주고받던 곳이다. 수종사는 이들 세분이 차를 마시던 곳을 기념하여 삼정헌(三鼎軒)을 지었다.
삼정헌(三鼎軒)에서 조망하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일대의 경치는 그야말로 장대한 한 폭의 산수화(山水畵)이다. 계절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이 더없이 아름답다. 특히 두물머리는 금강산의 정기를 받은 ‘북한강’과 강원도 백두대간 금대봉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남한강’의 정기가 합쳐지는 장소로, 그 산수의 풍경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그래서 조선시대 초기의 시인이며 대문장가인 서거정(徐居正)은 수종사를 ‘동방에서 제일의 전망을 가진 사찰’이라 극찬했고, 초의선사 등 수많은 명사들이 찾아와서 차를 음미하며 아름다운 풍광을 시로 표현했다.
두물머리의 장관 — 수종사에 남긴 명사들의 시문(詩文)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
한북정맥이 남서로 내려오다가 불쑥 한 번 파도를 치면서 빚어놓은, 상서로운 기운이 듬뿍 서린 운길산(雲吉山)은 그다지 웅장한 맛은 없지만 그윽한 정취가 감도는 명산이다. 그 운길산 정상 가까이에 자리 잡은 수종사(水鍾寺) 절 마당에 들어서면 일단 전망이 빼어나다. 시선을 멀리 던져보면 높고 낮은 산봉들이 봉긋봉긋 솟아 있고, 다시 그 앞으로 수굿이 눈길을 내려 보면 한강으로 합류하기 직전의 북한강이 장관이다. 드넓은 수면이 바람 따라 꿈틀대며 은빛으로 찬란하고 산그림자는 그대로 맑은 호수면에 잠겨 일렁거린다. 조선 초기 대학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조곡산(早谷山)의 아름다운 경치를 읊은 두 편의 시가 남겼다.
秋來雲物易悽悽 추래운물역처처 가을이 오매 경치가 구슬퍼지기 쉬운데
宿雨連朝水拍堤 숙우연조수박제 묵은 밤비가 아침까지 계속하니 물이 언덕을 치네
下界烟塵無地避 하계연진무지피 하계(下界)에서는 연기와 티끌을 피할 곳이 없건만
上方樓閣與天齊 상방누각여천제 상방(上方, 절) 누각은 하늘과 가지런하네
白雲歷歷誰堪贈 백운역역수감증 흰구름은 자욱한데 뉘게 줄꺼나
黃葉飛飛路欲迷 황엽비비로욕미 누런 잎이 휘날리니 길이 아득하네
我擬往參東院話 아의왕삼동원화 내 동원(東院)에 가서 참선이야기 하려 하니 * 擬 헤아리다
莫敎明月怪禽啼 막교명월괴금제 밝은 달밤에 괴이한 새 울게 하지 말아라
서거정은 ‘구슬퍼지기 쉬운’ 가을비 정경 속에서 이 시를 지었지만,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치는 사계절의 장관이다. 수종사는 올라가는 길부터가 산수화같이 아름답고 서정이 물씬하다. 수종사의 처연한 가을 정경으로 시작되는 이 시는, 누구에게도 흰 구름을 나눠 줄 수 없는 고적감으로 나아갔다가, 결국 선(禪)을 얘기하겠다는 도저함으로 마무리 된다.
이어서 서거정의 유창한 또 한 수의 시(詩)가 있으니 ―
龍江山上古伽藍 용강산상고가람 *용진강(龍津江) 위 옛 절을 찾으니
細徑崎嶇入翠杉 세경기구입취삼 구불구불 돌길이 푸른 삼(杉)나무 숲으로 들어갔네
憶昔屢邀靈運過 억석루요령운과 옛날 자주 *사영운(謝靈運)의 지난 일이 생각되고
至今猶阻遠公談 지금유조원공담 지금 *원공(遠公)의 말을 못 들은 지 오래로세
溪邊呪鉢龍應伏 계변주발룡응복 시냇가에서 바릿대[鉢]에 주문 외우니 용이 응당 엎드릴 것이요,
石上繙經虎更參 석상번경호갱삼 돌 위에서 불경을 설(說)하니 호랑이 또한 참여하여 듣네.
白襪靑鞋吾亦在 백말청혜오역재 흰 버선과 푸른 짚신 신고 내 또한 있으니
相逢一笑虎溪南 상봉일소호계남 호계(虎溪) 남쪽에서 서로 만나 한 바탕 웃어보세
* 용진강(龍津江)은 양수리 북한강을 말한다
* 사영운(謝靈運, 385년~433년) 은 중국 동진·송(宋)의 산수시인이다.
* 원공(遠公) 진(晉)의 고승(高僧)인 혜원(慧遠)을 말한다. ‘遠公不用過溪水 自有山人迎送人’(원공은 시냇물을 건널 것 없으니, 절로 맞이하고 보내는 산 사람[山水自然]이 있지 않은가.) <박춘령(朴椿齡) 대원사전주(大原寺全州)>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그리고 수종사 인근, 마재(강변마을)에 생가가 있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일생을 통해 수종사에서 지낸 즐거움을 ‘군자의 삼락(三樂)’에 빗대어 표현했다. 정약용이 말하는 ‘수종사의 세 가지 즐거움’이란 ‘동남쪽 봉우리에 석양이 붉게 물드는 것’이요, ‘강 위 햇빛이 반짝이며 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것’이며, ‘한밤 중 달이 대낮처럼 밝아 그 주변을 보는 즐거움’이라고 했다. — 다산(茶山)의 고향인 이곳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의 조곡산(早谷山) 수종사에서 공부하면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다음의 시(詩)는 다산 정약용(丁若鏞) 의 ‘수종사에 노닐며[游水鐘寺]’이다.
垂蘿夾危磴 수나협위등 담쟁이 험한 비탈 끼고 우거져
不辨曹溪路 불변조계로 절간으로 드는 길 분명찮은데
陰岡滯古雪 음강체고설 응달에는 묵은 눈 쌓여 있고
晴洲散朝霧 청주산조무 물가엔 아침 안개 떨어지누나
地漿湧嵌穴 지장용감혈 샘물은 돌구멍에 솟아오르고
鍾響出深樹 종향출심수 종소리 숲 속에서 울려퍼지네
游歷玆自遍 유역자자편 유람길 예서부터 두루 밟지만
幽期寧再誤 유기영재오 유기를 어찌 다시 그르칠 수야
여기서 유기(幽期)는 밀회(密會)의 약속으로, 곧 다시 만나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한 것을 뜻한다. 다산이 집을 떠나 객지에 있는 생활이 수종사에서부터 시작되어 장차 수없이 돌아다닐 것이지만 이곳 수종사에 다시 찾아와 지내겠다는 마음속의 다짐은 결코 저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겸재 정선(鄭敾)
이외에도 많은 시인묵객들이 이곳의 풍광을 시·서·화로 남겼으며, 특히 회화로는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중 ‘독백탄(獨栢灘)’이 현재의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의 모습과 현재의 운길산, 수종사의 경관을 보여주는 고서화이다. 또 조선후기의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券)》 중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경기도 광주시 미호 전경(현 행정구역 광주시 남종면)도 그 시대의 명승지 경관을 잘 보여준다.
수종사 은행나무
수종사에는 수령이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 은행잎이 그 눈부신 자태를 드러낸다. 가을이 깊은 오늘은 그 아름다운 잎을 지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노랑 은행잎이 지고 있는 것이다. 가을이 지고 있었다. 이 은행나무는 수종사를 창건할 때 세조의 명으로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최고령 은행나무는 양평군 용문사 은행나무로 수령이 무려 1,100년이 넘는다. 나무의 높이는 62m이며 천연기념물 30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산길] 수종사에서 송촌리까지 — 이기태의 가족 이야기
☆… 수종사 탐방을 마치고, 우리는 올라올 때의 길(한음 선생이 예던 길)을 따라 내려왔다. 이기태의 가족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기태 부인은 약사이다. 처음 친구의 소개로 만났는데 첫눈에 마음이 열렸다. 대전 출신으로 약대를 나왔다. 이기태의 부친께서 시골에서 한약재를 다루셨는데 정식 한의사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 약대 출신의 며느리를 원하셨다고 한다. 이기태는 아내 강신화(姜信和)와 결혼하여 처음 옥인동에서 동네 약국으로 시작하였는데, 후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대형약국을 경영했다. 지금은 양수리의 5층의 자가 건물 1층에서, ‘자연애(自然愛) 천수약국’을 경영하고 있다. —
이기태는 슬하에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자기 분야에 능력을 발휘하여 있다. 맏아들 강원(康源)은 외국 유학 중에 만난 재원(才媛)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금은 국민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맏며느리 김나정 교수는 대학에서 유망한 교수로 꼽힌다. 이기태는, 그 며느리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현직 대학의 교수인데도, 집안에서는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다정다감하여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했다. 전문 분야에 활동하는 둘째 아들 강일(康溢)은 아직 미혼이다.
석양의 팔당호반 — 양수리 강변집
☆… 송촌리에서 은마(銀馬)를 몰고 우리는 두물머리 팔당호 호반으로 향했다. 오늘 산행의 뒤풀이를 하기 위해 양수리 호반의 ‘강변집’으로 갔다. 이기태가 자랑하는 양수리 맛집의 2층, 환하게 열린 창으로 호수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산(西山)으로 넘어가는 가을 해, 저녁 햇살이 강물에 어리어 팔당호 수면이 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 신선한 ‘미나리부침’ 맛이 고소했다. 시원한 ‘지평’ 막걸리가 더운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리고 깊은 가을에 맛보는 ‘메기매운탕’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저녁 식탁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70개 성상의 세월에 실린 인생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해서일 것이다.
☆… 생각해 보면, 이기태와 나는 3년 선·후배 사이지만, 공통점이 많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지독히 궁핍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세상에 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며 고군분투했다는 점, 특히 (3년 시차가 있지만) 같은 고등학교, 같은 과를 다니고, 같은 클럽 ‘청랑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경찰에 투신하여 총경(總警)이 되었고 나는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각 나름의 사회적 역할을 하며 생애를 살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