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회 단상(斷想)
2015년 12월 12일(토) 19시 40분에 양재역에 있는 부페 식당에서 송년회를 가졌습니다.
1964년도에 입학한 동기들이며 졸업은 대부분 68년도에 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군에 입대하는 친구들도 있으므로 각자의 사정상 졸업 년도가 다르기도 합니다. 입학 당시에는 60명이 정원이었으며 그 이외의 복학생이나 타 대학에서 전학을 온 학생도 60여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지 모두 동기생들인바 현재 연락이 가능한 인원은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70년대 초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동기들도 20여명이나 됩니다. 연락이 되든지 아니든지 각자의 위치에서 성대 약대 12회 동기로서 약사로서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하리라고 봅니다.이날 송년회에 참석한 인원은 아홉명에 불과하지만 참석 못한 동기들도 마음만은 우리와 함께 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지금은 모두 고희를 넘긴 전공노(電空老:전철을 공짜로 타는 노인)가 되어 국가에서 보조를 받는 위치에 섰습니다. 아직도 대부분은 약국을 경영하는 최일선에서 국민 건강의 파수꾼의 역할을 든든하게 하고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은퇴하여 손주 녀석들의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제약 업계의 CEO로도 명성을 갖고 있는 친구도 있습니다. 대학 동기 녀석들을 만나면 언제나 학창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곤 합니다. 우리 나라의 대학 입시제도는 한마디로 수시로 바뀌는 변화무쌍 단어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0년대 초 우리들 세대의 입시제도는 대학 입학 학력 고사(대학 입학 예비 고사)를 먼저 치러야 했습니다. 일정한 점수 이상의 커트라인을 통과한 수험생만이 대학 본고사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되었습니다. 그런 결과는 수 많은 대학들이 정원 미달 사태를 초래하여 커트 라인을 두번 씩이나 하향 조정해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코메디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기와 후기의 두번만의 입시 시험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요즘 대학 입시 요강을 보면 수능시험에다 내신 성적, 논술, 면접,수시, 정시, 가나다군 그리고 대학마다 입시 요강이 천차만별이니 선택하기가 정말로 어지럽다고 하겠습니다. 입시 기간도 11월 초에 시작으로 2개월 이상이 소요되며 대학 입학하기까지는 4개월 정도의 안타끼운 시간을 덧없이 버려야합니다. 성균관 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 시험을 보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5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 내 기억에는 수험 번호가 433번으로 13대1의 경쟁율을 보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재수까지를 한 나에게 예상 외로 높은 경쟁율은 전기 대학에서 맛 보았던 쓰디쓴 낙방의 추억이 나를 움츠러들게 했습니다. 연이은 고배에 아픔은 상상을 초월하였으며 꿈 많은 나에겐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살아야 할 이유도 상실했습니다. " S대 공대보다는 성균관 대학교 약대가 더 유명하고 좋은 대학이다 " 하면서 용기를 주었던 누님의 하소연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부모님도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합격자 발표 날에는 어머님이 함께 했습니다. 그날 따라 진눈깨비가 발목까지 빠지는 궂은 날씨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느라 여기 저기서 환호성과 탄성이 터져나오고 있었습니다. 하얀 백지에 쭈욱 가로로 합격자 번호를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433번 내 수험 번호를 확인하신 내 어머님의 그토록 환한 미소를 난생 처음 보았습니다. " 고생했다.이젠 됐으니 집에 가자, 네 아버지가 기다릴게다 "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으시던 어머님의 그 말씀이 아직도 내 가슴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잡아 본 어머님의 손이 그렇게 편안한 느낌으로 닥아 온 것도 처음인 것 같습니다.
명륜동 캠퍼스에 들어서면 샛노오란 은행 잎이 걸음 걸음 발길에 깔리고, 심장 박동 소리는 젊음의 꿈과 희망과 낭만을 노래 하게 했습니다. 날으는 새도 부럽지 않는 하늘을 찌를듯한 겁 없음과 욕망으로 하많은 밤을 하얗게 설치는 날도 많았습니다. 아직도 약대 실험실의 같은 plate 여학생의 예리한 눈망울이 플라스크와 비이커에 서려 있습니다. 1964년도는 굴욕적인 한일 협정 비준 반대의 데모가 대학가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법대생을 앞세우고 6.3 데모에 같이 합류하자면서 실험실문을 박차고 들어 갔을 때 강의 중이시던 교수님의 어이없어 하던 모습과 동기생들의 놀라던 얼굴이 떠오릅니다. 모든 대학이 폐쇄 되고 통금 시간이 저녁 여덟시가 되는 비상 계엄이 전국에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졸지에 서대문 형무소의 푸른 수의를 입은 범법자 아닌 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며칠 후에 출소하여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야단 대신에 " 학생 때 젊은 혈기로 겪은 교육으로 알고 다시는 그런 일에 나서지 말아라 " 눈물을 글썽이며 하시던 아버님의 애틋한 음성이 지금도 귓전을 때립니다. 아들의 행방을 찾아 파출소로 경찰서로 쫒아 다니시며 아들 이름을 되뇌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모르겠다는 퉁명스런 한 마디였답니다.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밤새껏 몸부림 치며 아들 이름을 부르셨다는 얘기를 누나들로 듣고는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맨손으로 여섯 식구를 데리고 1.4 후퇴 때 피난을 나온 처지는 하루 하루 연명하기에도 힘겨운 나날이었습니다. 이런 급박한 생활 환경 속에서도 자식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을 보내야겠다는 일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때로는 2만원 남짓의 등록금이 없어서 여기 저기 친척집 문을 두드리며 구걸하듯이 마련해 주신 등록금이었다는 것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야 알았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실험에 임하지 않고 더 많은 노력으로 학업에 충실하지 않은 것이 아직도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으로 돌아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도 무기약공의 덫에 걸려 재시험을 보느라고 머리를 싸매던 친구들의 모습도 그립기만합니다. 본의 아니게 유급 아닌 유급을 하게된 일곱 명 같은 클럽의 한 녀석이 한달 남짓 공부를 하여 서울의 명문 사립 의대에 입학하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오히려 전화위복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방 병원에서 환자들을 접하며 의사로서의 히포크라테스 정신을 이어 가고 있는 행운아이기도 합니다. 소주 한잔에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철학을 밤을 지새우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무(無)에서 유(有)를 찾으려 머나 먼 이국 땅 미국에서 자존심 하나로 버티며 약사 면허를 가슴에 안은 동기들도 꽤 있습니다. 전공과는 거리가 있는 부동산 업계로 또는 컴퓨터 기술자가 되어 그럴듯한 위치에 오른 친구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대학을 나와서 여타 국가의 전도사 역할을 천직으로 살던 여자 동기도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만의 직분에 충실히 꿈을 펼치던 친구들이 언제부터인가 하나 둘 소리 없이 저 세상으로 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내 몸 안에서 자라고 있는 독버섯의 그림자를 눈치 채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허망한 삶의 종착역으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 정남아! 지금은 네가 미국까지 왔는데 만날 수 없어서 미안하다, 내가 병이 완치가 되면 한국에 나가서 꼭 만나자, 그런데 내 뜻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이 오려는지는 모르겠구나, 하여간 미안하다, 미안해" 몇년 전 미국에 갔을 때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그 친구의 절절한 음성이 가슴을 저밉니다. 암과 투병하며 삶의 끈을 포기하지 않으며 꿋꿋한 모습을 보여 주었던 친구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빌어봅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아직도 병마와 싸우고 있는 동기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이런 친구들과 활짝 웃는 건강한 모습으로 오늘과 같은 송년회에서 권주가를 부를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하루 빨리 털고 일어 나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해 봅니다. 세월은 잠시도 인간을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지만 세월의 노예가 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동기생 여러분 !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마음에 새겨둔 못 다 한 것 지금 시작해 봅시다.
참석 동기 차낙규 차기봉 조홍구 신충웅 최헌두 김병욱 정낙소 박병구 최정남 이상 9명
2015년 12월 23일 새벽부터 을씨년스런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서울 청원약국에서 성대 약대 12회 동기생 무 무 최 정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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