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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칠판에 근의 공식을 적고 있는 동안 벌써 두 번째 구겨진 종이쪽지가 내 앞으로 떨어졌다. 내용이 뻔한 그 쪽지를 일부러 펴보지 않고 무시했다. ‘야, 쟤 뻔뻔한 거 봐.’ 하며 애들이 웃는 소리가 났다. 대체 누가 뻔뻔한 건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냥 못들은 척 했다. 그 애들에게는 차라리 무응답으로 일관하는 것이 낫다. 마음 같아서는 그 애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상욕이라도 실컷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사실 후폭풍이 두렵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이 학교에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 나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학년이 시작하고 첫 중간고사 무렵에 나는 연애를 했었다. 점심시간에는 다른 반이었던 그 애와 팔짱을 끼고 운동장을 뱅뱅 돌기도 했고 수업이 끝나면 종종 집에 함께 걸어갔다. 타이를 깜빡하고 착용하지 않았던 어느 아침에는 선도부였던 아이가 내 이름을 적는 척 하고 몰래 봐준 적도 있었다. 그 날 집에 가는 길에 맥도날드에서 그 애에게 초코콘을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평범했다. 둘 다 여자라는 것만 빼면.
누가 우리를 봤다고 했다. 주번이었던 날에 맨 마지막까지 교실에 남았다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서 아주 잠깐 동안 입술을 맞댄 게 화근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더 치사하게 났다. ‘김여시랑 배수지랑 사귄 다더라.’ ‘김여시랑 배수지랑 뽀뽀하다가 들켰대.’ 라는 말들로 시작한 소문이 ‘김여시랑 배수지랑 교실에서 하는 거 누가 봤대.’ 로 과장되는 데는 만 하루가 걸렸다. 정작 나랑 그 애가 긍정하지 않는데 그 소문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모두가 나를 피했다. 그 애도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아는 체 한 번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다른 애들이 나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있었는데 그 애마저 나를 모르는 척 하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그 때 쯤에 소문은 다시 그 모습을 바꿨다. ‘그거 배수지가 싫다고 했는데 김여시가 억지로 한 거래. 둘이 그건 안했는데 김여시는 그 전에도 계속 여자 사귀고 그랬대.’ 그리고 그 소문의 근원은 웃기게도 그 애였다. ‘배수지한테 직접 들은 거야.’ 라고 말하며 나를 툭 치고 지나가던 옆 반 애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 이후로 그 애에게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 혼자 그렇게 당하는 게 억울하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어차피 그렇게 돼버린 거 굳이 같이 당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걔가 내 손을 먼저 놓아버린 이상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거라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애들이 욕하고 괴롭히는 것도 금방 적응이 되었다. 어차피 이번 학기만 마치면 졸업이고 대학은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면 그만이었다.
전학생이 올 거라고 했다. 박경리. 다른 학교에서 엄청 유명한 애라서 우리학교에도 금방 소문이 퍼졌다. 나도 그 애를 오락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걔 친구들이 담배를 피면서 온갖 폼을 잡고 있는 동안 걔는 그 뒤에 서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나쁜 짓을 직접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애의 똘마니들이 고약한 걸로 보아 그들의 머리인 박경리는 더 교활하고 악랄한 애 일 것이 분명했다.
그 애는 도통 남 일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보통은 애들 중 몇 명이 주축이 되어 나한테 빈정대면 다른 애들도 쿡쿡 웃으며 내 쪽을 쳐다보는데 걔는 그럴 때마다 그냥 엎드려 잤다. 나랑 자리가 가까워서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못 들었을 리도 없었다. 애들이 나한테 그러는 이유가 꽤나 자극적일 텐데도 걔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그 무관심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 애가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나한테 무관심했으면 했다.
나를 괴롭히는 애들은 박경리랑 친해지고 싶어 했다. 일부러 그 애의 곁을 맴돌면서 관심을 끄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아빠가 유명한 경찰이라던가, 그래서 걔랑 다니면 나쁜 짓을 해도 징계 같은 건 받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애는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애들이 옆에서 말을 걸건 말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계속 그 주위를 얼쩡거리며 살갑게 굴던 애들이 나중에는 재수 없다고 대놓고 욕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박경리는 똑같이 그 애들을 무시했다.
내가 따돌림 당하는 걸 그냥 애들 다툼정도로 생각하는 담임은 이번 청소 조를 정할 때 나를 그 애들과 같이 화장실청소로 배정했다. 자꾸 부딪히면 알아서 화해할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보다 더 지독하다. 애들은 화장실 쓰레기를 맨손으로 치우게 하고 변기가 막혀 물이 넘쳤던 날에는 빗자루로 쓰는 척 하면서 나한테 그 물을 튀겼다.
교복에 더러운 물이 다 튀어서 하는 수 없이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래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옷을 갈아입고 종례시간에 앉아있는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아래에서 뭔가 쑥 빠지는 느낌이 났다. 나는 곧바로 일어나서 화장실로 달려갔다. 씨발, 예정일보다 일주일이나 빨리 생리가 시작했다. 차라리 더 앉아 있다가 다 나가면 일어날걸. 이미 체육복 바지에 피가 선연히 번졌다. 칸 안에 기대고 서서 종례가 끝나길 기다리는데 애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걔 레즈인거 고치려고 요즘 남자 만난다며?”
“나 어제 김여시 김지훈이랑 있는 거 봤는데.”
“걔꺼 존나 크다던데? 그래서 피 쏟은 거 아니야?”
“야, 걔가 처녀냐? 처녀막 터지게?”
“손가락만 받아봤으면 처녀막 아직 안 터졌을지도 모르지.”
도저히 그냥 듣고 있기 힘든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피 묻은 체육복을 입은 채로 문을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다가 그 애들이 가고 나서도 한참동안 화장실 안에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질질 짜는 단계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났다. 오히려 배수지가 같이 거론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름을 듣는 건 아직도 너무. 버거운 일이다.
텅 빈 교실 문을 드르륵 열었다. 콜택시를 부르고 교문까지 가방으로 가리고 가서 바로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택시회사의 번호를 찾으면서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아직 안 가고 남아있는 애가 있었다. 박경리였다.
걔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 걔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다 큰 여학생이 자신의 생리혈을 온 동네방네 들켜버리는 일은 ‘걸레’라는 말을 처음 듣던 날처럼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어붙은 듯이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 있는 나를 빤히 쳐다보던 그 애가 나한테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제 가디건을 나한테 툭 던졌다.
사실 괴롭힘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동정이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친절은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든다. 그나마 다른 애들보다 박경리가 낫다고 생각한 건 그 애의 무관심 때문이었는데. 나는 내 발 밑으로 떨어진 가디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 애의 얼굴을 봤다. 그리고 ‘됐어’라고 말 하려는 순간 박경리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걸로 가리고 가.”
박경리가 전학 오고 나서 그 애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내가 그걸 집어 돌려주려는 순간에 교실에 누가 들어왔다. 나를 가장 많이 괴롭히는 애들 중에 그나마 목소리가 작은 애였다. 그 애는 슬금슬금 박경리 눈치를 보다가 제 책상 위에 놓인 이어폰을 가지고 나갔다. 그리고 잡을 새도 없이 박경리 역시 그냥 나가버렸다.
그 날 이후로 학교에는 또 다른 소문이 돌았다.
‘아, 나 박경리 남자랑 있는 꼴을 못 봤는데 그래서 그런 거야?’
‘김여시 정말 대단하네.’
박경리는 그런 소문이 돌거나 말거나 똑같았다. 애들한테 뭐라고 욕을 한다던가, 그렇다고 나한테 친한 척을 한 다던가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소문에 동요하는 건 나였다. 자꾸 애들이 그런 말을 하니까 나까지 그 애가 이상하게 보였다. 걸레라고 소문이 난 뒤로 어떻게 한 번 해 보려고 접근하는 남자애들도 많았고 놀랍게도 다른 애들의 눈을 피해 내 번호를 알아내서 ‘나도 그 쪽이다’라며 나한테 연락하는 여자애도 있었다. 박경리도 그런 건가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더 그 애를 피했다. 사실 소문이라는 건 떼지 않은 굴뚝에서도 연기가 날 수 있는 걸 알지만 경계가 먼저인 것이 내가 상처받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루 중에 가장 싫은 시간은 점심시간이랑 석식시간이다. 10분간의 쉬는 시간이야 그냥 엎드려있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1시간이면 말이 달라진다. 걸레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면 밥을 먹다가도 토악질이 나온다. 그 애들이 나한테 잔반을 쏟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오늘도 저녁을 먹지 않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몇 달 새 7키로가 빠졌다. 학교에서는 거의 뭘 먹지 않았던 탓이다.
얼마 전에 고장이 나서 한쪽이 나오지도 않는 이어폰을 끼고 스탠드에 앉았다. 날씨가 선선해서 운동장에 깔아 둔 육상 레인을 따라 제법 많은 애들이 삼삼오오 팔짱을 끼고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가끔가다 따가운 시선도 느껴져서 내일부터는 운동장 말고 다른 곳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내 무릎 위로 뭔가 툭 하고 떨어진다. 난 또 그 애들 무리가 나한테 뭘 던졌나 싶었지만 내 앞에 떨어진 건 매점에서 파는 크림빵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박경리가 서 있다.
“너 뭐야?”
“나 몰라?”
“됐으니까 가져가.”
“누가 같이 먹쟤? 너 먹으라고. 방해 안할 테니까.”
방해 안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박경리가 학교건물 쪽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아이가 신고 있는 검정색 삼선 슬리퍼가 질질 끌리는 소리를 낸다. 누구한테 신세지는 건 딱 질색이다. 특히 요즘 애들 사이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는 쟤와 나한테 관련된 소문들 때문에 더더욱 박경리의 관심이 달갑지 않다. 굳이 말 섞기 싫어서 그 때 받은 가디건도 그냥 돌려주지 않았는데 뭘 또 받을 수는 없다. 크림빵을 다시 그 발치로 던져버릴까 하다가 그 애의 팔을 잡아서 돌렸다.
“나한테 왜 잘해줘?”
“내 맘이야.”
“난 여자 좋아하는데. 너도 그 취향이야?”
“뭐?”
이만하면 내가 기분이 나쁜 것도 어필하면서 박경리를 떨구어 내기에도 충분했다. 사실 아주 마음에 없는 말도 아니었다. 누가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면 이제 그런 의심부터 드니까. 질색 팔색을 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리거나, 한바탕 욕을 퍼부을 줄 알았던 박경리가 의외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더욱 부아가 치민다. 그래서 부러 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따먹고 싶다고 해. 그게 더 인간적이니까.”
그러고 있는데 멀리서 그 애들 무리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운동장 구석에 있는 테니스장으로 담배를 피우러 가는 것 같았다. 진짜 좆같은 타이밍이다. 물론 걔들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 나랑 박경리랑 운동장에 같이 있었다는 사실은 애들 사이에 공공연히 회자되겠지만 이런 식으로 들키는 건 정말 싫다. 딱히 걔랑 나랑 뭘 한 것도 아닌데 괜히 도마 위에 올려져 낱낱이 다져지게 되니까.
“어디서 걸레냄새 나나 했더니 여기네.”
아니나 다를까, 그 애들은 나랑 박경리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씨발 그러니까 이딴 빵은 뭣 하러 가지고 와서 사단을 내냐고. 지금이라도 제발 박경리가 그냥 가주길 바랐지만 박경리는 그 애들보다 더 사나운 투로 그랬다.
“좀 닥쳐라.”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무시를 했으면 했지 절대로 애들한테 어떤 반응을 보여주거나 하는 걸 못 봤는데 이번엔 달랐다. 애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자기들끼리 눈치를 주고받다가 짐짓 가늘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 박경리. 너 쟤 존나 걸레인거 몰라?”
“알아.”
뭐? 알아? 기가 막혔다. 얘네들은 지금 나를 완전히 투명인간 취급을 하고 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해도 기분이 나쁠 말을 내 앞에서 대놓고 하다니. 게다가 걸레인거 안다고. 니가 뭘 그렇게 잘 아느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찼지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박경리가 내 팔을 잡는다.
“그래서 김여시가 나 닦아주잖아.”
내 귀를 의심했다. 물론 이 애들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때 주위에서 듣고 있는 다른 모든 애들이 똑같이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혹시나 오해받을까 쉬이 나서지 못하는 것일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그런데 박경리는 너무나 적극적으로 그 애들에게서 나를 보호하고 있었다. 저에 대해서 어떤 소문이 돌던지. 하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박경리한테 붙을 수는 없었다. 이번에 느낀 건데 호의를 함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지금 박경리의 행동은 호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게 호의건 동정이던 간에 가까이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너무 비겁했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어차피 나는 걔한테 도와달라고 한 적 없으니까 상관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야자를 하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왜 그랬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도 솔직히 있었다. 나는 대각선 뒤에 앉은 박경리가 신경 쓰여서 미칠 것 같은데 시계를 보는 척 슬쩍 돌아볼 때마다 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게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내일부터 또 얼마나 많은 소문들이 우리 둘을 엮고 괴롭힐지도 막막했다. 아, ‘우리’라는 말도 웃기네. 나는 언제부터 박경리랑 나를 ‘우리’라고 정의한 걸까. 나한테 가디건을 줬을 때부터? 잘 모르겠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의미 없는 낙서로만 공책을 가득 채우며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교실 앞문을 열고 인원을 체크하는 감독선생님 때문에 깜짝 놀라서 펜을 떨어뜨렸다. 그 행동에 박경리가 야자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나를 봤다. 그런 식 으로 시선을 끌고 싶지는 않았는데.
재빨리 떨어뜨린 펜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 떨어지면서 뚜껑과 펜이 분리되는 바람에 펜 뚜껑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굴러갔다. 박경리의 실내화 옆까지 굴러간 펜 뚜껑을 가서 주워야 하나 말아야하나 생각하다가 주저앉은 채로 땅을 짚고 그 쪽으로 몸을 더 숙였다. 그리고 곧 욱씬한 통증이 손등에 느껴졌다.
“아, 미안. 너 있는지 모르고.”
그 애들 중 한 명이 내 손을 밟았다.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말 하면서도 발을 떼지 앉고 지근지근 비빈다. 밟혀있는 손을 휙 빼내다가 손가락 마디가 까져서 피가 난다. 씨발 진짜. 욕이 목 울대에서부터 입 안을 가득 메운다. 숙였던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몸이 다시 앞으로 기울여져 박경리 다리 사이로 얼굴이 들어갔다. 그 애가 이번엔 발로 내 등을 밀어서였다.
“아, 미안. 너도 그러고 싶을까봐.”
그러고서는 자기들끼리 배가 찢어지도록 웃는다. 그 때 박경리가 거칠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우당탕 나지 않았다면 참지 못하고 그 애들의 뺨을 걷어 올릴 수도 있었다.
“씨발. 존나 좆같네.”
그대로 일어나서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린 박경리는 야자가 끝날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애들은 박경리의 그런 행동에 꽤 놀랐는지, 아니면 겁이라도 먹은 건지 더 이상 나한테 무슨 말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야자가 끝나고, 애들이 다 나갈 때까지 계속 엎드려 있었다. 동정이든 뭐든 어떤 눈빛도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열시 반. 문방구 불빛도 꺼지는 시간. 수위아저씨가 빨리 나오라고 채근하지 않았다면 밤새도록도 거기에 엎드려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펑펑 울어버리고 싶은데 이제는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속상했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다는 게 속상한 건지, 그게 박경리 앞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왜 자꾸 내가 걔랑 나를 엮는 지도 모르겠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터덜터덜 교문으로 내려왔다. 너무 늦게 나왔나, 교문까지 이어 지는 길에 아무도 없는 건 좋았지만 약간 무섭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나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한 길에서 누가 나한테 두루마리 휴지 같은 걸 던진 적도 있었다. 그깟 휴지뭉치 좀 맞는다고 어디가 아픈 건 아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 대놓고 괴롭힘 당하는 건 몸 인데, 다치는 건 늘 한낱 유릿장 같은 마음이다. 교문을 지나면서 더더욱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그때 등 뒤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야.”
박경리가 벽에 기대고 서 있다. 손에 들린 흰 봉투. 눈이 마주치긴 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상대하지 말자. 그냥 무심히 지나치려는데 박경리가 내 손을 잡았다. 아야, 아까 다친 손가락이 찌릿하다. 내 미간이 훅 구겨지자 그 애는 내 손을 잡던 손을 내 손목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대로 나를 질질 끌어다 버스정류장에 앉히고 저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뿌리치려고 몇 번을 털어 내봐도 그 때마다 그 애는 손아귀에 더더욱 세게 힘을 줬다. 그 애는 손으로 말하고 있었다. 도망치지, 말라고.
박경리가 들고 있던 흰 봉투 속에는 과산화수소수와 마데카솔이 들어있었다. 박경리는 과산화수소수의 뚜껑을 열어 통째로 내 손에 부었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눈살이 다시금 찌푸려지고 상처에서는 거품이 보글보글 난다.
“조금만 참아.”
그리고 박경리는 함께 사온 소독용 면봉에 마데카솔을 찍어 내 손가락에 살살 발랐다.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저번만큼 기분이 상하진 않는다. 어쩌면 동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다.”
박경리가 사온 것들을 다시 봉투에 주섬주섬 넣고 내 손에 들려준 다음 일어나서 저벅저벅 걸어간다. 인사 한 마디도 없이. 나는 그 뒤통수에 대고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게 끝이야?”
“일부러 밴드는 안 샀어. 여름이라 덧날까봐.”
“그거 말고. 넌 나 안 더러워?”
“어.”
내가 더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1초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듯이 바로 튀어나온 그 애의 대답에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선을 그어야 했다. 내가 그 애랑 가까워지고 싶어 하기 전에 스스로 그래야 했다.
“나랑 다니면 너까지 걸레라고 소문...”
할 말이. 아니 정확히는 해야 할 말이 남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곧 내 입술에서 남은 말을 앗아간 박경리 때문에. 더 말을 잇기도 전에 내 입술에 그 애가 닿았다. 너무 순간적인 일이어서 나는 그 애를 밀어내지도 못했다.
제법 폼 나게 제 입술로 나를 품고서는 미동도 않고 가만히 있는 그 애는 서툴렀다. 움직이지 않고 그냥 닿아만 있는데도 그 부드러움이 다 전해졌다.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부드러움 때문에 박경리를 떨쳐내야 할 지, 그 애한테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지 망설여졌다.
그렇게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박경리는 내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그저 상처 난 내 손가락만 보며 말 할 뿐이었다.
“앞으로도 네가 다치면 오늘처럼 내가 약 발라줄게.”
이제 나한테 그 애를 밀어낼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이 다치면. 그것도 내가 다 안아줄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