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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의 교단 교파
우리나라 교회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교단교파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장로교이다.
거짓말 안 보태고 길을 가다가 100m 간격으로 볼 수 있는 교회의 교단교파가 "대한 예수교 장로회" 이다
장로교도 고신,합동,통합등 여러 교단교파로 나눠져 있는데 오늘은 어떻게 해서 이 교단교파가 형성되었고 특징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현재 우리나라의 장로교는 크게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와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로 나눠진다.
기장은 단 하나의 교단 교파로 이루어져 있고 예장은 합동 , 고신 , 통합등의 교단교파로 이루어져 있다.
그 분열의 시작은 김재준목사님(자유주의 신학) 박형룡목사님(근본주의 신학)신학적인 성향 차이에 따라서 였다.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을 따르는 목회자 및 신학자들이 모인 교단이 기장이 되어 예장과 갈라지게 되었다.
Ⅰ. 한국 장로교의 역사
한국 장로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개신교회의 시작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인인 서상륜 등은 비록 국외에서이긴 하지만 선교사가 입국을 하기 전에 먼저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쪽복음(한 개의 복음서 내용만 담은 성경책자)을 가지고 복음의 씨를 뿌려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1884년 우리나라 최초의 장로교인들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이자 개신교회는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에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 총신대학 양지 캠퍼스에는 소래교회를 복원하여 옛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고 느끼도록 하고 있다.
1884. 9. 22 미국 북장로교에서 의료 선교사 알렌(H.N.Alen)이 입국하여 의료 봉사로 복음 전도의 길을 열 고 선교 활동을 한 이후, 1885. 4. 5 부활절에 마침내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H.G.Underwood)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부임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압록강에서 32명에게 세례를 베풀기도 했는데, 이는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인이 많이 존재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에 설립된 장로교회들을 보면 소래교회, 서울의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 안동교회, 평 양의 장대현교회 등이다.
이후 이들 교회는 크게 부흥하여 인근 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1889년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인 선교사들이 들어와 경남 일대에서 선교 활동을 폈다.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893년에는 선교사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교회 설립이 본격화되고 교세가 증가하자 모든 장로교 선교사들이 <장로회 선교 공의회-Presbyterian Mission Council>를 조직하여 선교 정책과 활동 방향을 의논하 게 되었다.
1898년에는 캐나다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함경도와 간도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폈다.
1901년에 조선인 장로들도 참여하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공의회>로 재조직하였다.
1901. 5. 15에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렇듯 제각기 진출한 4개의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 장로교회의 창설을 위해 서로 긴밀한 협력을 위 하는 한편, 신학 교육, 문서 사업 등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를 조직하여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다가 마침내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 장로교신학교(평양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초창기로부터 보수주의 신학의 든든한 기초 위에서 성장해 왔다.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 였던 평양 신학교의 성격은 설립자인 마포 삼열(Marfet Samuel) 박사의 희년 기념 연설 가운데 "나 는 사도 바울이 결심하였던 바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이외는 다른 것은 전하지 않 기로 결심하였다"는 말속에 잘 드러나고 있다.
1903년부터 일기 시작한 부흥의 기운은 1907년에 그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놀라운 대부흥의 역사는 장로 교회가 그 중심이었다. 그 후 장로교회는 신앙뿐만 아니라 그 세력에 있어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1907. 9. 17에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당시 교세가 노회를 조직할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에 노회를 조직하고 독립된 노회라는 의미에서 <미국 장로회 조선 독노회(獨老會)>라고 불리우게 되었으니 당시 4개의 각기 다른 장로교파가 분할 선교한 조선 장로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성립되었던 것이다.
교세는 예배처 984개처, 세례교인 17,890명, 원입교인 21,482명이고 선교사를 포함한 목사 47명, 장로 53명(어떤 자료에는 33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36명의 한국인 장로) 이였다.
제1회 창립 노회에서는 서상륜의 동생인 서경조 , 한석진 , 이기풍 , 송린서 , 방기창 , 길선주 , 양 전백 등 평양 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에게 목사 안수를 하여 최초의 조선인 목사 7명을 배출했는 데 그 중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하여 조선인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 장로교회를 비롯한 교회들이 탄압을 받았다.
1911년 제 5회 노회에서 총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노회 산하의 각 대리 회(시찰회?)를 노회로 조직 편성하기 시작했다.
1911년 10월 8일부터 1912년 2월 15일 사이에 전라노회, 경기 충청노회, 황해노회, 함경노회, 경상노회, 남 평안노회, 북평안노회 등 7개 노회가 조직되었다.
7개 중 4개가 북반도 지역에 있으며 특히 평안도에 2개 노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은 북장로교가 먼저 들어와 열심히 선교활동을 한 결과이며, 그 중에도 평양 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평안도의 장로교 교세가 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에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울 정도였다.
한국 기독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와 초대 교회 사역자들의 열심, 그리고 한국인의 종 교적 심성과 국가 사회적 배경이 조화를 이루어 급속히 성장한 결과 독노회를 조직 한지 5년만인 1912년에 감격적인 총회의 조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2년 9년 1일 평양의 장로회 신학교에 전국 7개 노회 총대 목사 96(선교사 44, 한국인 목사 52), 장로 125 계 221명이 모여 <조선 예수교장로회 총회>를 조직하고 초대 총회장 으로 언더우드 목사를 선 출했다. 당시 교세는 교회수 2,054교회, 목사 128명, 장로 225명, 세레교인 53,008명, 교인 총수 127,228명이었다.
첫 총회는 중국 산동성에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등 3명을 선교사로 파송하기도 하였다.
1919년 특별히 억압받는 민족의 고통 속에서 교회의 민족적 의지를 고창한 3.1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장로교회는 더욱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나 이 운동이 있은 뒤에 조선인들이 기독교를 새롭게 이해하 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기독교는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니라 가장 애국적이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종교로 이해되었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사경회와 부흥의 물결이 다시 일었다. 요한계시록 강해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와 신유 의 기사를 행사하며 전국을 순회한 김익두 목사가 이 시기에 활약하였고 해외 선교와 국내 전도활 동, 농촌운동 등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해 왔다.
1924년에는 남선교회 전국 연합회와 청년회 전국 연합회의 전신인 <기독 청년 면려회 조선연합회 >가 창립 되었다.
1928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총회>가 조직되었다.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신학적인 갈등이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1932년부터 일기 시작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기독교 학교가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처음부터 보수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자라 왔으나, 점차 외국 의 새로운 신학 사상과 방법론에 눈뜨고 귀국한 신진 신학자들에 의해 도전 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하여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는 당시의 교계의 형편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한국 장로교회는 초기 50년 동안 정통 신학교의 고수에 성공하였으나 그 말단에 가서는 자유주의의 잠행적 운동의 침입을 면치 못했던 것이다. 다른 교파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되는 자유신학 운동에 발 맞추어 암암리에 정통신학 반대의 행동을 취하는 인사들이 장로교회 안에 생겼던 것이다. 당시 자유 주의 신학은 성경의 고등비평과 성경의 유오(有誤)를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 대속, 재림 등을 부인하는 것이다."
1934년에는 조선 예수교장로회 선교 50주년 희년 축하 예배를 거행하였다.
한편에서는 교회 안에서 여러 분파 운동이 나타났다. 이단 사이비도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신학 노 선의 갈등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1938. 9. 10 제27회 총회는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하기로 가결하니 진리를 수호하는 주의 신실한 종 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문을 닫았다.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목사 등은 검속되어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다가 주기철목사 등 많은 분 들이 순교하였으며 한상동, 주남선목사와 손명복, 조수옥전도사 등은 평양 형무소에서, 손양원목사는 청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뤘다.
1940. 4. 19 이러한 도전은 총회적으로는 신학적인 대립을 가져오게 되었고 여러 요소들과 함께 교회의 평화를 위협했다. 그 무렵 일제(日帝)의 신사참배 강요로 한국교회는 함께 어려운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는 데, 이 문제에 있어서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은 서로 다른 것이었다.
평양 신학교는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자진해서 무기 휴교에 들어간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사참 배 문제와 상관없이 서울 승동교회 안에 '조선 신학원'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조선 신학교는 해방 전후로 독무대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일제 말엽에 신사참배를 반대해서 옥에 갇혔던 목사들과 망명 중이던 교회 지도자들은 뜻을 같이하여 보수신학의 보루였던 평양 신학교의 전통을 이어서 보수 신학교를 새로 세워야 할 필요성 을 느끼게 되었다.
1943년에는 성경에서 구약과 요한계시록이 삭제되고 찬송가가 개편되었다. 그 해에 일제의 강압으로 교단명 을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7월에는 감리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와 함께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 으로 통합되었다.
1945. 8. 15 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투옥되었던 한상동 목사를 선두로 하는 경남 지역 인사들이 출옥한 후 신사참배를 한 인사들을 정죄하게 되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부산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이 교단 을 분리하여 순수한 개혁주의 보수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1946년 고려 신학교가 태동하였다.
1947년 조선 신학교 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얻은 이후에 장로교 총회를 재건하였으나 해방 이후 한반도는 38 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38선 이북의 장로교회들은 공산당의 지배 하에서 박해를 받았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6・25 전쟁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 이 늘어났다. 이 때 이북에 있던 적지 않은 교회와 노회도 월남해 왔다.
이를 계기로 오늘날까지 이북 노회라 불리 우는 피난한 노회가 존속되고 있다.
1948년 옥중 성도들이 부산의 '고려 신학교'를 중심으로 정식 교단을 창립하였으니 <대한 예수교 장로회 고 신 총회>가 되었다. 그 후 '고려 신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의 신학적 도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며 , 정통 신학을 보수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 신학교'를 설 립하였다. 조선 신학교(1940. 4. 19 개교)가 정규대학으로 인가를 받았다.
1949. 1월에 합동 찬송가를 발행하였다.
1949. 4. 19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모인 제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 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하였다.
이것은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보수신학의 승리였다.
이처럼 교리적 순수성을 지킨 총회는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와의 유 대 관계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다시한번 분립의 진통을 겪게 된다.
1951. 4. 조선신학교를 “한국신학대학”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1952. 9월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고 있던 때에 <대한 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조직, 분립하여 오늘의 예장 고신측이 되었다.
1953. 6. 10 다시 교파 분열이 시작되어 김재준목사를 비롯한 함경도 출신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선신학교 (한신대학)의 신신학이 문제가 되어 <대한 예수교장로회 호헌총회>를 조직, 분립하였으며 1954년 6 월 제 39회 총회에서 <한국 기독교 장로회>가 분립하였다.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대회에 대한 상이한 견해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속한 선 교사들에 대한 수용 찬반의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전쟁이 끝난 뒤 제44회 총회에서 WCC가 신학적으로 자유주의화 되었기 때문에 탈퇴를 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지 않다는 상반된 입장이 점점 가시화되면서 총회는 결국 WCC를 지지하는 총회와 반대 하는 총회로 갈라지게 된 것이다.
WCC를 지지하는 자들은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여 “통합총회”를 이룩했고 , 통합 측을 추종하 는 교수와 학생들은 신학교를 분립하기에 이르렀다.
1960. 12. 13 신학교 문제와 WCC 반대하는 자들은 “승동교회”에서 교단의 합동을 위하여 NAE(National Association Evangelism)와의 관련을 끊고 먼저 고신측 교단과 합동(合同)하여 <대한 예수교장로회 (합동) 제45회 총회>로 하였다.
기념 사업으로 고신측에서 편집하여 온 새찬송가를 생명의 말씀사에서 발행하여 함께 사용하였다.
1961년 평양신학교의 전신을 지키던 장로회 신학교 교수와 학생들은 총회의 결의에 의하여 고려신학교와 합 동하였다.
1961. 6. 21 대한예수교 성경장로회(현 대신측) 창립총회 개최. (발기인 김치선 박사 , 마두원 선교사) 초대 총회장에 김치선 박사 피선 , 1963. 9. 17 고신 측 7개노회(부산, 경남, 경북, 전라, 진주, 경동) 교 회 수 445, 목사 116명이 재 분립하여 나가서 제13회 고신총회를 회집하였다.
1965년 지금의 사당동(서울특별시 관악구 사당동 산 31-3번지)에 총회 직영 신학교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 었다.
1967년에는 1959년 통합 측의 이탈로 인하여 문교부로부터 학교법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1975 년 '총신대학'으로 1995년에는 '총신대학교'로 개명)로 설립인가를 받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장족 의 발전을 하여 소위 장자적 총회로서의 명분을 유지하였다.
1975년 총회 내에 교권주의자들의 횡포와 신학적 좌경화(모세모경의 편집 설 등)의 분위기가 싹트기 시작하 였고 이영수 목사를 비롯한 몇몇에 의한 교단이 사조직 화 되고 교단 신학교는 사유화되어 가는 문 제가 확산되자 이에 대한 개혁의 목소리가 일기 시작하였다.
1979년 9월 제45회 총회(대구 동신교회당)는 시작 전부터 총신대학교의 신학적 좌경화와 교권주의의 횡포에 대한 지적이 있어 왔기 때문에 이를 예감한 교권주의자들의 사전 소집과 교회당 정문 및 출입문 완 전 봉쇄로 입장하지 못한 채 자파 세력만으로 총회를 진행하여 임원 선거가 끝났다.
이렇게 해서 입장하지 못한 총대들이 개혁의 기치를 들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가 탄생 하고 방배동에서 총회 신학교를 별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1981년 박윤선 박사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이 끝까지 합동측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교권주의자들 의 횡포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분립하여 나와서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1983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보수) 총회와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는 신학과 신앙의 동질성을 인정하 고 연합하여 새롭게 <대한 예수교 장로회(개혁) 총회>를 구성하였다.
장로교 예장 안에 고신, 합동, 통합이 있는데 먼저 고신이 분리된 계기를 알아보자.
비교적 신앙인들이 잘 알고 있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의 문제를 계기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경남노 회 주축의 목사님들이 신사참배를 하였던 목사님과의 갈등에 의해 분열되어 만든 교단교파가 고신이다.
Ⅱ . 장로교의 통합과 합동의 분열
합동측(예장) 목사인 박형룡목사님이 wcc(세계교회협의회)에 반대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wcc가 자유주의적 신학을 지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wcc에 찬성하는 통합측과 반대하던 합동측은 결국 분리되고만 것이다.
이와 같이 합동과 고신은 소위 말하는 보수적 정통신학을 지향하고 있다.
통합은 합동과 고신에 비해 자유로와서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통합하여 적정하게 균형을 잡는 편이다.
그렇지만 예장의 자유주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크게는 이렇게 나누어진 장로교단을 보면서 안타깝기 그지없는 마음이 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스승은 분명히 하나님과 2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 한분뿐이심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사람의 생각과 계획으로 이렇게 분열되었으니 , 과정은 어찌되었던 간에 이렇게 분열된 것은 분명 하나님과 예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 일 것이다.
한국 장로교 신학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선교사들을 출신 신학교 별로 분류하여 보면, 대부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 뉴저지에 있는 프린스턴 신학교, 그리고 버지니아의 리취몬드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 출신들이다.
비록 한국 장로교 형성에 크게 공헌한 네 개의 장로회 선교회는 북장로교 선교회, 남장로교 선교회, 호주 장로교 선교회,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 선교회이지만, 선교 초기부터 한국 장로교는 북장로교 선교회(PCUSA)와 남장로교 선교회(PCUS)에서 파송 받은 매우 보수적인 개혁파 복음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형성, 발전되었다. 위 네 개의 장로교 선교회 중에서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선교회가, 맥코믹, 프린스턴, 그리고 유니온 신학교 등을 졸업한, 가장 보수적인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했다. 맥코믹 신학교는 마포삼열, 소안론, 그리고 곽안련 선교사를 배출했고, 유니온 신학교는 이눌서와 구례인 선교사와 같은 조직신학자를,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는 라부열, 어드만, 함일돈과 같은 선교사들을 배출했다. 이들 선교사들은 평양 장로회 신학교의 설립자들이었고, 한국에 보수주의 신학을 정착시키는데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이들 초기 개척자들의 신학적 입장은 청교도주의와 구학파 신학을 포함한 ‘정통 칼빈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은 개혁주의 전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충실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 성장과정에서, 그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성경의 초자연적 특성을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 개혁주의 선교사들은 하나님은 성경의 저자이며, 성경은 구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 또는 과학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어떤 방향에서도 잘못 인도하거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초창기 서양 장로교 선교사들은 흔히 “극단의 보수주의자 또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불리워졌고, 전혀 의심 없이 다섯 가지의 근본 교리들 - 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역사적 재림-을 확신했다.
그러나 성경과 정통 칼빈주의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세워진 한국장로교회에도 자유주의 신학이 침투해 왔다. 선교의 문이 열린 1884년부터 성경의 권위와 무오사상 위에 확고하게 세워졌던 한국교회가 서양 자유주의의 무서운 도전을 받은 것은 1920년대부터의 현상이다. 그러나 장로교 보수주의에 대한 현대주의 도전은 1930년대, 장로교회가 정통주의 성경관에 대한 여러 가지 강력한 자유주의 도전을 맞을 때 그 절정에 달했다. 이 시기 동안에 서양 현대주의와 자유주의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노출되었고, 그것은 특별히 한국 장로교내에서조차 널리 확산되었다.
성경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경험한 한국 장로교는 1934년과 1935년 사이에 두드러지게 성경의 권위와 정통신앙을 전투적으로 변호하는 반 현대주의와 반 자유주의운동으로 바뀌어 갔다.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의 변증적이고 수구적인 1930년대 신학 경향은 대체로 구 프린스턴 학파, 특별히 핫지-워필드-메이첸 전통에 굳게 서 있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 가운데서 찾아 볼 수 있다. 평양 신학교의 영향력 있는 교수인 박형룡(1897-1979)은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메이첸 아래서 신학교육을 받은 그는 성경관에 있어서 타협할 줄 모르는 장로교 보수주의자로 특징되며 성경의 고등비평을 악마, 그리고 자유주의와 현대주의를 반기독교 운동과 동일하게 취급하려고 했다. 마치 메이첸의『기독교와 자유주의』가 20세기 초 미국에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을 일으키는 데 절대적 공헌을 한 것처럼 박형룡의『현대신학 난제선평』은 반자유주의운동을 한국 장로교내에 발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형룡은 개신교 정통주의의 두 가지 근본적인 원리는 오직 성경만의 원리와 칭의 교리라 보고 이것을 회복하는 것이 정통주의 신학의 과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정통주의 신학의 특징은 성경을 영감된 그리고 “신앙과 본분에 대한 우리의 정확무오한 법칙”이라고 믿는 성경관이다. 프린스턴 정통주의 신학이 가장 훌륭한 성경적 신학체계이며 성경의 권위가 프린스턴 정통주의의 핵심이라고 믿었던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턴의 변증학적 방법으로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을 변호하는데 자신을 헌신했다.
장로교단이 원래 루터의 보수적 종교개혁과는 다른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에 반하여 보수적인, 즉 교리적으로 복음주의적 신학을 표방합니다. 그러나 "합동"측은 상당히 진보적 성향을 띄우는 교단입니다. 진보의 의미가 딱히 자유주의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존 교단과의 서로 교리적 이해의 틈을 메우지 못하고 분파되는 게 현실입니다. 대개의 교단의 분파(sect)의 원인은 교리적인 해석의 이해가 서로 상충되거나 사회적으로 그 원인이 내재합니다. 그러나 참혹하지만 교회 내의 알력에 의한 분파도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갔던 신앙의 선배(필그림 파더)들이 미국에서 시작한 장로교의 설립부터 분열의 역사를 연구한 저의 논문("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 : <그리스도와 복음에 입각한 기독교를 선포하기 위해서 필요한 교회는 이 세상의 분열에 초연해야 하고 지역적인 이해관계나 계급, 인종, 국가 등의 요구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전체의 공동이익과 아직 실현되지 못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교회이어야 한다. 교파주의적인 교회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관점이 아무리 넓다 해도, 이러한 일을 충분히 해낼 수 없다. 교회가 이러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으려면, 국가를 향한 교회의 충성심 때문에 교회의 국제적인 친교를 통한 통일이 침해를 당하지 않아야 한다> 이상 이덕휴의 신학포럼, 신학일반에 게제함)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교단 총회의 역사에서부터 현재까지 분파 된 교단, 그리고 교단별 학교를 정리함..
보다 더 정확한 조사는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파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초대교회 시절부터 올라가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특히 종교개혁 이후 엄청난 분파가 거듭되었고 지금도 분파를 위한 모의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 신학원, 신학교 또는 신학대학이라는 이름으로 교단에서 운영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학교와 교단의 분파가 열심히 분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설립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01년 시작된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모체로 1912년 창립되었습니다. 본 교단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주의 신학(Reformed Theology)을 근본 이념으로 하여 웨스트민스터 신도 개요서와 대소요리 문답을 교리적 표준으로 삼고, 장로교 헌법의 정치원리를 가지며 교회의 성례전적 전통과 권위 및 질서를 지켜오고있습니다.
(2) 교육기관
교육기관으로는 총신대학교 및 대학원을 비롯하여 전국에 대신대학교, 칼빈대학교, 광주신학교, 대전신학교, 부산신학교, 서울신학교, 수원신학교, 인천신학교, 전북신학교, 청주신학교 등이 있습니다(아래 참조).
* 총회인준 신학교
학 교 명 총(학)장 전화번호 주소
대신대학교 박영희 053-811-1181 경북 경산시 백천동 137
칼빈대학교 이주영 02-715-3006 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3가 134
광주신학교 백영규 062-232-6014 광주시 동구 동명1동 68-30
대전신학교 하정호 042-273-4111 대전시 동구 삼정동 98-61
부산신학교 임해식 051-415-2210 부산시 영도구 영선동 4가 186
서울신학교 이종일 02-885-9500 서울시 관악구 봉천3동 1004
수원신학교 이규왕 031-247-8963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286-3
인천신학교 김귀중 032-421-4004 인천시 남구 주안6동 913-17
전북신학교 문갑천 063-223-6802 전북 전주시 완산구 삼천동 3가 738-28
청주신학교 김준규 043-232-7232 충북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515-16
(3) 총회의 역사
1884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소래(송천.松川)교회가 황해도(1884년)에 세워지다.
1893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조직하다.
1901 장로교 신학교가 평양에 설립되다.
1907 9월 17일에는 38명의 각파 장로교 선교사와 40명의 한국인 장로들이 평양 장대현교회에 모여 한국장로교 첫 노회(독노회)인 조선노회를 창설하고 그 자리에서 신학교 졸업생 7인이 목사 안수를 받다.
1912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조직하다.
1917 소안련선교사에 의해 성경통신과 설립(현재 성경통신대학)하다.
1918 신학지남 창간하다.
1949 조선예수교장로회를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하다.
1959 WCC적 에큐메닉스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제44회 총회 비상 정회 후 (통합측 분립), WCC를 영구히 탈퇴하다.
1963 문교부에 본 총회 등록(사회단체등록증)하다.
(4) 교단과 분파(sect)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교단과 약어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래에는 약 100개의 교단이 명시되어 있지만 장로교의 교단은 전국적으로 약 300여 분파(sect)가 난립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개 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
개혁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교회)
개혁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선교)
개혁장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장신)
개혁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총회)
개혁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합동)
개혁합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합신)
계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신)
고 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
고려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
고려환원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환원)
고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고신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개혁)
고신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합동)
근 본 대한예수교장로회 (근본)
기독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독개혁)
남 북 대한예수교장로회 (남북)
대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대한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총회)
대 신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총회)
대 한 대한예수교장로회 (대한총회)
독 노 회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법 통 대한예수교장로회 (법통)
보 수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
보수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개혁)
보수정통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정통)
보 수 측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정통)
보수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통합)
보수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합동)
보수호헌 대한예수교장로회 (보수호헌)
복 음 대한예수교장로회 (복음)
로 고 스 대한예수교장로회 (로고스)
서울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고신)
선 교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
성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성경장로회)
성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성합)
순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순장)
여 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여목)
연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연장)
연합여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여목)
예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신)
예 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
예장공회 예수교장로회한국총공회
예장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총회)
예 정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정)
예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장합동)
장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장신)
재 건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
정 립 대한예수교장로회 (정립)
정 통 대한예수교장로회 (정통)
정통총연 대한예수교장로회 (정통총연)
중 앙 대한예수교장로회 (중앙)
통 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통합보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보수)
평 안 대한예수교장로회 (평안)
평 화 대한예수교장로회 (평화)
피 어 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피어선)
합 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합동개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신)
합동개혁A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합동개혁B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합동경성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경성)
합동경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경신)
합동동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동신)
합동보수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보수개혁)
합동보수진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보수진리)
합동복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복음)
합동선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교)
합동선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선목)
합동성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성회)
합동연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연합)
합동예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선)
합동장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장신)
합동정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신)
합동정통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합동중립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립)
합동중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
합동중립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립)
합동중앙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중앙)
합동진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진리)
합동총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신)
합동총신측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신측)
합동총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합동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통합)
합동환원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환원)
합 보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보)
합 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호 헌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
환 원 대한예수교장로회 (환원)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