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봄 탓이로다>
꽃몸뻬
챙 깊은 일모자들 줄지어 흔들린다
트럭의 짐칸에서 바닥 잡고 흔들린다
가솔들 짊어진 어깨 일 나가며 흔들린다
양파밭에 부려놓은 펑퍼짐 꽃몸뻬들
이랑을 타고 앉아 오늘을 심고 있다
노을을 톡톡 털면서 “흙먼지도 고맙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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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바람꽃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
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는다
눈두덩 스치는 감촉
눈을 감을 수밖에
꺾일 듯 연한 숨결 지쳐 잠든 아가야
긴긴밤 바라보는 눈물을 보았느냐
한 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
귀먹어도 좋으련만
바람도 때로는 가슴을 벤다는데
매섭고 차가운 세상 헤집고 올라오다
변산의 어느 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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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
혀 같은 새순 나와
톱니가 되기까지
한 생을 엎드린 채
푸른 별을 동경했다
서릿발
밀어 올리는
조선의 저 무명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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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탓이로다
- 혜원의 그림 ‘손목’을 감상하다
으슥한 후원 안에 붉은 꽃 다퉈 핀다
허물어진 담장 위로 잡풀이 적적한데
저, 저런!
덥석 잡는 손, 수염 아직 없구나
꿈틀하며 놀란 괴석 게슴츠레 치켜 뜬 눈
사방관 쓴 사내의 은근한 조바심에
엉덩이 잔뜩 뒤로 빼는 짚신 속의 저 여인
향기 푼 낮달이 살짝 걷은 구름자락
까무룩 몸을 떠는 나비의 날갯짓에
농익은 꽃잎 하나가
토옥! 하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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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맛보세요, 케밥이랑 미고랭 짜요*까지
저들의 땀방울이 스며드는 보도블록
부평동 깡통야시장 포장마차 줄을 선다
생업의 수레바퀴 깃발을 펄럭이며
어눌한 말씨에도 씨눈을 틔워보려
불빛이 야근을 한다, 대낮 같은 밤거리
* 케밥 : 터키의 전통 육류 요리, 미고랭 : 인도네시아 전통 면 요리,
짜요 : 베트남 튀김만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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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파가 다녀간 날
엄마의 옷고름에 내 손목 묶어 놓고
이 밤 자고나면 엄마 얼굴 못 볼까봐
“사립문 꼭 지켜야 돼”
끄덕이며 웃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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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벗다
담장 밑 길게 누운 투명한 빈집 한 채
머리에서 꼬리까지 계절을 벗어놓고
내면을 응시하는가
눈빛이 서늘하다
껍질을 벗는다면 오욕도 벗어날까
숨가쁜 오르막도 헛짚는 내리막도
날마다 똬리를 틀며 사족에 매달리던
별자리 사모하여 배밀이로 넘본 세상
분 냄새 짙게 피운 깜깜한 거울 앞에
난태생 부활을 꿈꾼다
어둠 훌훌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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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발지彈發指*
딸까닥 격발하는가, 손가락이 수상하다
나 몰래 잠복했던 적군이 움직이나
반란은 눈 깜짝할 새 온다
닳아진 지문사이
시뻘건 눈빛으로 키보드 두드린 죄
밝은 달 가리키며 함부로 손가락질한 죄
봉숭아 꽃물들이며
어르다가
달래다가
* 탄발지(彈發指) : 손가락 하나가 잘 펴지지 않는, 억지로 펴면 총을 격발할 때처럼 딸까닥 소리가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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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
1
호미 날에 몸통 잘려 파르르 튀는구나
축축한 땅속에도 꽃길은 있었겠지
밤마다 울음낭 열어 구도의 길 닦는데
반쪽의 분신 찾아 저리도 꿈틀대다
귀잠에 들려는가 몸짓이 잠잠하다
내 안의 얼룩 다발을 더께처럼 쌓는 날
2
묵정밭 갈아엎어 꽃향기 맡겠다고
잘 벼린 연장 들고 댕강 자른 꽃모가지
기어이 생피를 보네, 빈혈 앓는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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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달팽이
젖은 땅 혀로 핥으며 어둠을 더듬는다
세상을 떠돈다는 건 뿔 하나 세우는 일
나선형 등짐을 지고
천리 먼 길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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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는 남자
새벽별 보는 사내 인력시장 찾는다
막노동 삼십 년에 이력이 날만한 데
늘어난 이자만큼이나 졸아든 어깻죽지
팍팍한 건설현장 새파란 감독 앞에
헛딛지 않으려고 버팅기는 두 다리로
땡초를 화끈하게 푼
콧물까지 들이켠다
알바를 끝낸 자정 꼬불꼬불 끓인 속을
맵짠 생 후후 불며 희망 몇 올 건지려다
면발에 구르는 눈물 고명으로 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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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와 조금
별똥별 떨어지는 망망한 바다 한복판
텔레파시 보내는가 은하물이 출렁인다
내밀듯 끌어당기듯 볼 붉히는 달무리
단맛쓴맛 씹어보다 검푸르게 날뛰다가
홀쭉하게 빈 가슴 봉긋이 부풀도록
열꽃도 울음주머니도 풀어놓고 가는 물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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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꽃판
병풍을 밀쳐놓고 홑이불 걷어내자
어머니 머뭇머뭇 내생을 가고 있다
아직도 못 내린 짐 있어 반눈 뜨고 나를 본다
남루를 벗겨내고 골고루 닦는 몸에
이생이 지고 있다
달무리 피고 있다
젖꽃판, 갈비뼈 위에 낙화인을 찍는다
다섯 살 다 되도록 이 젖 물고 자랐다고
앞섶을 헤쳐보이며 빙그레 웃으시던
몽환 속 이어간 말씀,
꽃숭어리 벙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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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갠다는 것
“백혈병 내 딸아이 살려주이소, 선생님들!”
휠체어 탄 젊은 여자 절규하며 굴러간다
액정 속 기도문을 읽는가 고개 숙인 눈빛들
앞 못 보는 목소리가 더듬더듬 일어선다
“보이소! 거기 서 보소” 지폐 한 장 펄럭인다
“얼매나 힘드능기요” 따스한 손 포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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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이야기
고니는 굵은 갈필, 물떼새는 세모필로
사초를 쓰고 가는 모래톱 가장자리
예서체 발자국마다 생의 어록 담는다
콩게 달랑게가 지하 성전 짓고 있다
달빛을 걸어놓고 꺾으며 내지르며
파도의 수궁가 완창 유장하게 듣는다
누군가의 꿈을 위해 날마다 솟는 빌딩
그 속에 뼈를 묻어 십자가 지고 섰다
불길도 꾹 참아내는
된바람도 막아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