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변산바람꽃>
모지랑숟가락
여름엔 감자 등을
겨울엔 호박 속을
쓱쓱 긁다 제 살 깎아
껍데기만 남은 당신
한평생
닳은 손끝엔
반달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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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바람꽃
웃음을 가득 담은 솜털이 뽀송한 뺨
차마 손댈 수 없어 무릎 꿇고 맞는다
눈두덩 스치는 감촉
눈을 감을 수밖에
꺾일 듯 연한 숨결 지쳐 잠든 아가야
긴긴밤 바라보는 눈물을 보았느냐
한 삼년 널 품을 수 있다면
귀먹어도 좋으련만
바람도 때로는 가슴을 벤다는데
매섭고 차가운 세상 헤집고 올라오다
변산의 어느 골짜기 잔설을 녹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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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샘
자꾸만 헛보는 동공 눈물관이 역류한다
발꿈치 들고 서서 사방을 둘러봐도
막다른 바람벽인가 그렁그렁 앞을 막네
뜨겁게 녹이면서 뼛속까지 내려가면
어둠을 씻어내는 밝은 별 내게 올까
침침한 수정체 너머 마음으로 읽으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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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령구酒令具
천년을 가로질러 주사위가 굴러온다
파도타기 내림술에 춤추는 은빛 물결
둥근달 자맥질한다,
취기 자못 난만하다
던지는 물음표에 느낌표가 굴러간다
거푸 마신 석 잔이야 복불복이 아니더냐
러브샷, 팔을 건다는 건
외로움의 방편이지
도원이 가까웠나 가화가 지천이다
불나방 날아들듯 술잔에 빠진 혀들
엇박의 발자국소리
그림자가 꼬인다
* 주령구酒令具 : 경주 월지(안압지)에서 출토된 14면체의 주사위로, 주령구를 던져 나오는 면의 글자대로 따라하는 음주풍류를 위한 신라인의 놀이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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꾀꼬리
호륵 호륵
호로리요우
숲속의 초록 방언
분수가 솟구치듯
실로폰을 딛고 간다
온 산이
가슴을 푸는
탱탱한
오월 한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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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지 왕버들
몇 백 년 순례의 길 마침내 돌아와
바람에 먹을 갈아 물 위에 선시를 쓴다
뼛속을 텅 비운 소리,
새들도 잠잠하다
저렇듯 하늘 품어 몸통 내린 물속이다
손발이야 짓물러도 날마다 빗는 머리
한 세월 삭여낸 가슴 구멍마다 화엄이다
눈비도 달게 받고 달빛도 고이 받아
향기는 나비에게 뿌리는 버들치에게
마지막 남은 한 획에 물잠자리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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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속 사랑은 깊다
우물 속 여자에게 119는 너무 멀다
아래로 뻗던 그 남자 거꾸로 매달렸네
“괜찮아?”
“뭐땜시 들어왔수”
아흔 줄에 타는 눈빛
노을도 짙어지면 잉걸불로 다시 피네
쉼표도 마침표도 백지에 함께 그린
저 은발 동아줄 탄다, 퐁네프의 연인처럼
* 2013. 11. 4. 동아일보 기사, 우물에 빠진 할머니(84세)를 할아버지(91세)가 구하려다 미끄러져 우물 중간 돌 틈에 운동화가 끼어 거꾸로 2시간을 매달려 있다 구조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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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파가 다녀간 날
엄마의 옷고름에 내 손목 묶어 놓고
이 밤 자고나면 엄마 얼굴 못 볼까봐
“사립문 꼭 지켜야 돼”
끄덕이며 웃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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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비沃非는 딸입니다
용수 씌운 아버지를 포승줄이 끌고 갑니다
자는 봄 깨우려고 대청에 뚝뚝 지는 꽃
그 꽃잎 차마 밟을 수 없어 절며절며 갑니다
광야를 휘날리는 노래가 싹을 틔워
얼음장 감옥에도 청포도는 자랍니다
벼랑 끝 매운 계절이 무지개를 올리며
비옥하게 살지 말라 떨구어진 이름 하나
풀 먹인 무명옷에 날마다 살갗 베던
원촌리 하얀 옥비가 육우당에 섭니다
* 이옥비李沃非는 열일곱 번 옥살이를 한 육사의 무남독녀로 세 살 때 끌려가는 아버지를 지켜보았으며, 육사는 이듬해 1944년 1월 베이징 감옥에서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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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품 죽음이 싫다
노인이 먼 길 떠났다, 요양병원 침대에서
삼년간 튜브로 이은 목숨줄 아예 놓고
유품 속 빛바랜 봉서
덩그러니 남았다
정신줄 놓았다고 온 몸에 줄 달지마라
가는 길 훤히 보며 문지방 넘을란다
영정 속 깡마른 얼굴
조문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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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땀을 쥐다
- 단원의 씨름도
갓머리 벙거지에 상투에다 땋은 머리
폈던 다리 오그리며 응원소리 드높다
아자자!
들배지기에 받아치기 역습이다
싸움이 격렬해도 뒤돌아 엿을 치며
하루치 점을 보는 안다리를 걸고 있다
부채로 슬쩍 가린 속내 벌겋게 타는데
터질 듯한 시간너머 생의 반전 일어나는가
쏠리는 응원석으로 철퍼덕 내다꽂는 힘
꽹과리 절로 솟으며
당산나무도 덩더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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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귀꽃
너를 보면 젖이 돈다
찌르르 길을 낸다
서둘러 방울지는 옷섶을 풀어내면
솜털로
쫑긋 서는 귀
새끼노루 꽃잎 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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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판
브라와 청바지가 뒤엉켜 돌아간다
젖은 숫자 눌러놓고 하프를 켜는 여자
금간 손 엇박을 치며 빨래판을 긁는다
절은 때 씻는 하루 비벼대는 요철 속을
부르튼 물집들이 시나브로 터지는 밤
오그린 발칫잠에도 꿈속 길을 달린다
갸르릉 밭은 소리 리듬을 타다보면
헐거운 솔기 사이 얼핏 뵈는 푸른 하늘
옥탑방 바지랑대 세워
맑은 햇살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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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탐하다
제 멋대로 자라나도 때 되면 연지 찍는다
엉덩이와 엉덩이가 춘화를 그리는데
노린재 더듬어간다
발칙한 더듬이
도화살 뻗쳤는가 단내 폴폴 풍겨댄다
풋고추 약오르는 칠월 땡볕 열기 속
풍뎅이 헉헉거린다
속살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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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선이
광복동 대로변서 허리 접는 저 아재
뼈도 밸도 다 버리고 허파에 바람 실어
어정쩡 장승은 싫어 온 몸으로 유혹한다
팔푼이라 조롱하던 눈총을 뒤로 하고
꾀죄죄 절은 청춘 은하에 풍덩 던져
별똥별 건지려는가 웅덩이도 마다않네
꼬부랑 노래 맞춰 피에로는 춤을 춘다
풀무질 날로 해도 허느적 우는 달밤
아지매 생각하는가 허재비 우리 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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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
별들이 쏟아지는 천전리*의 밤이 깊다
모가지 길게 뽑아 하늘과 교신한다
휘파람 드높던 초원
알을 깨는 저 공룡
이 땅을 돌아서는 너울 치는 울음소리
걸음걸음 화인 찍어 눈물 담은 돌확마다
목 축인 노랑턱멧새 발바닥을 포갠다
끝 모를 몸집 불려 꽃이란 꽃 모두 지고
하늘 땅 뒤집히는 억년이 흘러간 후
다시 올 문명 있다면 오늘 인적人跡 읽을까
* 경남 울주군 천전리에 약 1억 년 전 공룡발자국 200여개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