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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통일교신도대책위원회 원문보기 글쓴이: 文輔 정해관
조선왕실 여성의 기강을 잡은 청주한씨의 자랑, 소혜왕후(昭惠王后=인수대비)
1. 소혜왕후
2. 소혜왕후의 집안, 청주 한씨 가문
3. 소혜왕후의 출생에서 대비가 되기까지
4. 여성 교훈서 내훈을 쓰다.
5.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 결국 며느리를 죽이다.
6. 손자 연산군과의 갈등, 불행한 노년
1. 소혜왕후(인수대비)
성종의 어머니이자 연산군의 할머니인 소혜왕후는 세조대와 성종대, 그리고 연산군대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 과정에서 친정식구들이 참여하는 것을 몸소 겪었던 세조의 큰 며느리이자, 세자였던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의 자리를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듦으로써 대비의 자리로 되찾았던 성종의 어머니이며, 부덕을 잃었다는 이유로 며느리 폐비윤씨(연산군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엄격한 시어머니였다.
그리고 그 결과 손자 연산군의 원망을 한 몸에 받으면서 불행한 노년을 보내야만 했던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정치사와 궁중사의 한 가운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왕실 여성들뿐만 아니라 사대부 여성들을 위한 교육서조차 제대로 없던 당시에 『내훈(內訓)』이라는 훈육서를 만듦으로써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유교적 훈육서를 만든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소혜왕후가 만든 내훈은 조선시대 여성상을 정립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내명부를 비롯한 양반여성들을 훈육하는 기본 윤리서의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서는 먼저 당대 최고의 가문을 자랑하던 청주 한씨 소혜왕후의 가문과 소혜왕후의 생애, 가족, 그녀가 내훈을 편찬하게 된 배경과 당시 궁중의 분위기 등등에 대해 얘기해 보고자 한다.
2. 소혜왕후의 집안, 청주 한씨 가문
소혜왕후는 세종 19년(1437)에 좌의정을 지낸 청주 한씨 서원부원군 한확(韓確)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 청주 한씨는 성종대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 의하면 당대 대표적인 거가대족(巨家大族)이었다.
한확의 가계는 한란(韓蘭)을 시조로 한다. 한란은 나말려초의 인물로 928년(태조11)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태위에 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청주 한씨는 고려 충렬왕대까지는 크게 떨치지 못하여 충선왕 즉위년에 공포된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 15가문에 들지 못하였다. 이후 한강(韓康)이 고려 충렬왕 때 판삼사사를 역임하면서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충렬왕 7년 6월에 지밀직사사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청주 한씨 가문이 중국왕조와 관련을 갖게 된 것이다. 한강의 아들 한사기(韓謝奇)는 벼슬이 간의대부에 이르렀고 아들로 영(永)과 악(渥)을 두었다. 한사기도 원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하였다. 또한 한사기의 아들이자 한확의 고조가 되는 한악은 수상인 중찬을 역임함으로써 가문의 지위를 더욱 높였다.
그는 당시 고려의 왕위를 노리고 있던 심양왕고(暠)가 충숙왕을 참소하자 뛰어난 지략으로 위기를 모면하게 함으로써 인정을 받았다. 이때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선력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상당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는 한어와 몽고어에 능하였다고 하는데 외교관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확의 증조이자 한백륜의 고조인 한방신(韓方信)은 고려 후기 무신으로 공민왕 초에 자주 승진하여 추밀원직학사로 나가 동북면병마사가 되고, 홍건적의 난에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책봉, 정당문학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아들 안(安)이 공민왕 시역(弑逆)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우왕이 보낸 이영(李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 인해 한확의 조부이자 소혜왕후의 증조부인 한녕(韓寧)은 불운한 생활 속에서 성장하였다. 따라서 한확의 아버지이자 소혜왕후의 할아버지인 영정(永叮) 역시 어려운 시절을 보낸 듯 생몰이 불분명하며 그의 관력 또한 명확하지 않고, 다만 지순창군사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영정은 아들 한확의 현달과 명황제의 후궁이 된 딸들의 후광으로 참판, 판서, 찬성, 서성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령의정부사(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에 증직되었다.
그는 확과 전, 질 등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명나라 성조(영락제)의 후궁 여비(麗妃)가 되어 황비가 죽은 후 중궁의 내정을 전담하였고, 차녀는 명나라 선덕제의 후궁이 되었다. 소혜왕후의 가문은 한안이 공민왕 시해 사건으로 사사됨으로써 한때 위축되었지만 고모 두 명이 명나라 공녀로 들어가 명황제의 후궁이 됨으로써 명황실과 사돈관계를 맺는 등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조정에서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올랐다.
한악의 아들 가운데 한공의(韓公義)와 한방신(韓方信)의 후손들이 조선 초기에 국구(國舅)가 되었다. 즉 한악의 아들 한공의는 딸들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낸 한명회의 증조가 되고, 한방신은 딸을 세조의 아들 덕종에게 시집보낸 한확의 증조이자 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낸 한백륜의 고조가 된다.
따라서 세조 ~성종대 세자빈 및 왕비를 배출한 청주한씨 가문 출신의 한확(1400~1456), 한명회(1415~1487), 한백륜(1427~1474)은 모두 한악을 공동 조상으로 하는 친인척들이 된다.
이들 3사람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확은 한악의 4대손이 되고, 한명회와 한백륜은 5대손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한악을 공동 조상으로 하며, 한확이 한명회나 한백륜에 비해 한 항렬이 앞선 인물이 된다. 한확과 한명회는 9촌간이 되고, 한확과 한백륜은 7촌간, 한명회와 한백륜은 10촌간이 된다.
청주한씨 가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소혜왕후의 아버지 한확과 한명회가 세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이를 주도하면서부터였다. 즉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나아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계승에 성공하자 이를 주도했던 한명회와 한확을 중심으로 청주한씨들이 대거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명회와 한백륜도 세조와 사돈이 됨으로써 왕실의 외척으로 성장 하였다.
3. 소혜왕후의 출생에서 대비가 되기까지
출생 : 소혜왕후는 세종 10년(1437)에 한확의 6째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집안이 명황실과 사돈관계를 맺고 최고의 지위와 부를 누리던 전성기였다. 그녀는 세조를 비롯한 조선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청주한씨 가문에서 태어나 유교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어려서부터 정치적 영향력과 권력의 힘을 경험하면서 성장하였다.
소혜왕후는 두 고모가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었고 아버지가 명나라에서 벼슬을 지내기도 했던 매우 특이하고도 지위가 높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어머니 홍씨가 소혜왕후가 13살 될 즈음에 죽음으로 인해 성장에 어려움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혼과 남편의 죽음 : 소혜왕후는 세조가 아직 수양대군의 신분으로 잠저에 있을 때인 문종 즉위년(1450)에 13살의 나이로 한살 아래인 수양대군의 맏아들 도원군(桃源君) 장(暲)(1438~1457)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수양 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남편 도원군은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粹嬪)이 되었다.
세조의 즉위에는 명 황실에 누이를 보낸 한확을 비롯하여 한명회 등 청주 한씨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그녀는 왕실 가족의 일원으로 정치의 한 가운데에서 계유정난, 단종의 폐위, 시아버지 세조의 즉위 등 정치와 권력의 힘을 직접 경험하며 살아남는 법을 배웠을 것으로 보인다.
세조는 2년 4월에 명나라에 고명ㆍ관복ㆍ채단의 흠사(欽賜)를 사례하고 세자 책봉을 주청하는 표문을 올리게 하였는데, 한확이 표문을 받들고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명나라에 가서 세자 책봉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그 해 세자의 고명을 들고 명나라에 들어갔던 한확이 9월에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이때 소혜왕후는 19살이었다.
그녀는 결혼 직후 연이어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세조 3년(1457) 7월에 둘째 아들이자 후에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두 달도 안 되어 9월에 남편 의경세자가 질병으로 20세의 나이로 죽자 그녀는 20세로 청상이 되었다. 아버지와 남편이 연이어 죽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더욱이 남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함으로써 왕비가 될 희망을 접어야 했다.
남편 의경세자가 죽자 차기 왕이 될 세자의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8살 난 세조의 둘째 아들인 해양대군 즉 예종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자식들을 데리고 궁 밖 사가(私家)로 물러나야 했다. 왕세자빈으로서의 지위는 불과 3년 정도에 불과하였다.
궁 밖 私家에서의 생활 : 20살의 청상과부로 설움을 안고 궁궐을 떠나온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지금은 덕수궁이 된 사가로 돌아왔다. 다시 궁궐로 들어가는 것은 거의 요원한 일이 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세조의 맏며느리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자식들의 교육과 자신의 학문 연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맏아들 월산대군은 평양군 박중선의 딸과 혼인시키고,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세조 13년(1467)에 당대 최고의 권력자이자 예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의 둘째 딸과 혼인시켰다.
한명회는 해양대군(예종)과 혼인하였던 자신의 딸이 죽자 또 다른 딸을 자을산군과 혼인시킴으로써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소혜왕후 역시 자신의 지위를 뒷받침해 줄 부모나 남편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과 아들들의 지위를 강화시켜 줄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이에 혈연적으로도 같은 청주한씨 가문의 먼 친척이 되는 한명회와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가문의 지위와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아들을 왕으로 만들다, 다시 궁궐로 : 소혜왕후의 시동생인 예종은 즉위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였다. 예종의 죽음으로 인해 왕의 자리가 비게 되는 비상시국이 전개되었다. 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1466~1525)은 불과 4살밖에 되지 않았다. 누가 주상자(主喪者), 즉 대통을 이을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소혜왕후 역시 이 문제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기다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를 신임하던 왕실의 가장 어른인 세조비 정희왕후는 예종이 죽던 날 한명회의 사위이자 소혜왕후의 둘째아들인 자을산군을 차기 왕으로 지명하였다. 이가 곧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이다.
이때 정희왕후는 신숙주ㆍ한명회ㆍ구치관 등 여러 대신들을 불러들인 뒤 제안대군이 아직 어리고 월산대군은 질병이 있는 반면 자을산군은 타고난 자질이 특별히 준수하고, 기상과 도량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며, 세조가 대단히 사랑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왕으로 지목하였다. 이어 신숙주는 성종이 어린 관계로 정희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계청하였다.
이때 정희왕후는 “나는 문자를 알지 못하지만 수빈(粹嬪)은 문자도 알고 사리에도 통달하니, 국사를 다스릴 것이다.” 라고 하며 며느리인 소혜왕후에게 정사를 들을 것을 권유하였다.
이후에도 정희왕후는 “국가의 기무를 내가 부득이하여 임시로 함께 청단하는데, … 인수왕비(소혜왕후)가 총명하고 사리에 밝아서 사체를 아니, 내가 큰일을 전하여 맡기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라고 하며 소혜왕후에게 수렴청정을 맡길 뜻을 전하기도 하였다. 소혜왕후는 정희왕후가 수차례 수렴청정을 양보하려 할 만큼 정치적 감각과 지식을 갖춘 당찬 여성이었다.
왕후가 되다 : 둘째 아들이 왕으로 즉위하자 소혜왕후는 남편이 죽고 사가로 물러난 뒤 13년 만에 다시 궁궐로 들어왔다.
이때 소혜왕후의 나이 32살이었다. 성종이 창덕궁으로 옮겨 거처하자 세조비 대왕대비와 소혜왕후도 따라갔으며, 예종비 왕대비는 경복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왕위에 오른 성종이 먼저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는 아버지 의경세자의 위호를 높이는 것과 어머니의 칭호와 위차를 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궁궐에는 최고의 어른으로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소혜왕후의 아랫동서이자 예종의 부인인 왕대비 안순왕후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어머니 소혜왕후의 위차를 어디에 둘 것인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성종은 즉위 직후 아버지 의경세자를 추숭하는 일과 어머니 수빈의 칭호에 대한 일을 논의한 결과 의경세자의 시호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仁粹王妃)로 하였다. 그러나 성종 3년 2월에는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인수왕비의 위차를 예종비인 왕대비 위에 두도록 하였고, 성종 6년 1월에 의경왕의 시호를 선숙공현온문의경대왕(宣肅恭顯溫文懿敬大王)이라 하고, 인수왕비의 존호를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라 하였다.
인수왕대비는 성종6년 2월에 선정전에서 책봉을 받았고, 10월에 아버지 회간왕의 묘호를 덕종으로 올림에 따라 덕종비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성종 10년 10월에는 회간왕비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소혜왕후는 수빈에서 인수왕비, 인수대비, 인수왕대비, 덕종비, 회간왕비 등 다양한 이름으로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4. 여성 교훈서 내훈을 쓰다.
소혜왕후는 성종 6년(1475) 2월 38세의 나이로 왕대비에 책봉되고, 그해 초겨울에 내훈을 편찬하였다.
아마도 그녀의 생애에 있어 가장 역사적 의미가 있는 큰일은 이 책을 편찬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녀는 엄격한 유교적 부덕과 지식을 갖춘 왕실의 어른으로서 궁궐 내의 여성들을 교육시켜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유학에 조예가 깊어 자녀와 자신의 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면적으로는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일찍이 과부가 된 소혜왕후는 부처에 의지하여 남편의 명복과 자식들의 무고를 빌며 자신의 마음을 달랬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재산을 내어 불경을 만들었다가 대간들의 비판이 커지자 이에 대해 불평을 하였고, 또 일찍이 불상을 만들어 정업원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성종이 도첩제를 실시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자 예종비와 함께 이를 폐지할 것을 간하는 언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종교적인 면에서는 불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소혜왕후는 생활적인 면에서는 유교적인 도덕을 강조하였다.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는 소혜왕후는 궁중의 비빈즉 내명부의 기강을 잡고, 또 부녀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내훈』을 편찬하였다. 소혜왕후가 세자빈이 되기 전에 조선 왕실에서는 여러 차례 세자빈이 폐해지는 일 즉 폐빈이 있었다. 세자빈은 국모인 왕비가 될 인물이자 또 다음 대의 왕이 될 아들을 낳아야 할 인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고도 높은 위상을 지닌 존재였다. 따라서 세자빈에 대해서는 다른 여타의 왕자 부인이나 사대부 여성보다도 더 엄격한 도덕적 잣대와 부덕(婦德)이 요구되었다.
태조는 세자 방석의 부인인 현빈 유씨를, 세종은 세자(훗날의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인 휘빈 김씨와 둘째 부인인 순빈 봉씨 등을 내쫓았다. 조선 건국 직후 3대에 걸친 40여년 사이에 세자빈 폐출 사건이 3차례나 발생하였다.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조선 왕조 최초의 세자인 방석(1382~ 1398)은 현빈 유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태조 2년(1393) 6월 19일(계사)에 내시 이만을 목 베고, 세자빈을 내쫓은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이 건국되자마자 발생한 첫 번째 세자빈 폐출 사건이었다. 태조는 세자빈 폐출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었으나 내시 이만이 참형을 당한 것으로 보아 현빈 유씨와의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소혜왕후는 시백부인 문종이 어린 나이에 세자에 책봉되고 일찍 혼인하였지만 두 번이나 세자빈을 쫓아냈던 불운을 당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문종은 세종 9년(1427)에 14살의 나이로 김오문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결혼한 지 불과 3년 만에 쫓겨났다. 문종이 자신을 가까이 하지 않고 궁녀들에게 눈을 돌리자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갖가지 압승술(壓勝術)을 썼다가 이런 일들이 시아버지 세종의 귀에 들어가서 친정으로 쫓겨난 것이다.
세종은 11년 7월 18일(임술)에 동궁의 시녀 호초를 의금부의 옥에 가두게 하고, 휘빈 김씨를 친정으로 내쫓았다. 세종은 세자빈 휘빈 김씨를 폐한 뒤 불과 3개월 만에 새로운 세자빈으로 종부소윤(宗簿少尹) 봉여의 딸을 뽑았다. 김씨를 내쫓은 뒤 고르고 골라 다시 결혼을 시킨 순빈 봉씨였다. 그런데 세종 18년 10월 세자빈 봉씨는 책봉된 지 불과 7년 만에 폐출되었다. 봉씨 역시 여러 해 동안 세자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종이 봉씨를 폐한 원인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많았다. 그 내용들을 정리해 보면 첫째는 투기와 시기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것이고, 셋째는 동성애를 비롯하여 性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행동들이었다.
세자빈 봉씨는 세자의 후궁 승휘 권씨(단종의 어머니)가 임신을 하게 되자, 더욱 투기를 하여 거짓 임신을 꾸미기도 하였다.
또 궁중에서 쓰는 물건을 몰래 친정으로 보내거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여 술에 취해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또 세종의 훈육을 거역하여 읽으라고 한 열녀전을 뜰에 던지기도 하였다.
특히 궁녀와 동성애를 비롯하여 성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행동들을 하였다. 이와 같이 소혜왕후가 궁중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세자빈들은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내쫓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당시에는 궁중에 왕의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 예종의 후궁 숙의 최씨, 남편 덕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와 윤씨, 특히 성종의 후궁 등 많은 여성들이 있었다.
따라서 소혜왕후는 궁중 여성들에게 부덕을 교육시킬 필요성을 느꼈고, 정희왕후가 철렴한 뒤 성종이 친정을 할 것에 대비하여 궁중여성들의 기강을 잡을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성종의 후궁들 즉 자신의 며느리들을 훈육하고 기강을 잡고자 하였다. 또한 왕실의 종친 수와 의빈(儀賓) 수가 점점 늘어나면 서 자연히 그들의 부인과 첩의 수도 늘어나자 이들에게 유교적 부덕을 쌓게 할 교육서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내훈>은 열녀, 여교, 소학, 명감 등에서 부녀자의 교육에 중요하다고 파악되는 내용을 뽑아 3권 4책으로 엮은 책이다.
제 1권은 언행(言行), 효친(孝親), 혼례(婚禮)의 3장으로 하였고,
제 2권은 부부 1장을 상ㆍ하로 나누었으며,
제 3권은 모의(母儀), 돈목(敦睦), 염겸(廉儉)의 3장으로 하여 모두 7장으로 이루어졌다.
내훈에는 부인들의 모범적인 행적을 실례로 들어 제시하고 있다.
언행의 규범을 가르치고 효친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고 있으며, 혼인의 중요성과 부부의 도리를 강조하고 어머니의 자식 가르치는 의무를 환기시키며, 형제와 친척의 화목을 역설하고 있다. 특히 부부의 도리에 관한 내용이 한 권으로 되어 있다. 소혜왕후는 한나라 정치의 치란과 흥망은 비록 남자 대장부의 어질고 우매함에 달려 있다고는 하지만 부인의 선악에도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녀는 왕실의 안녕과 왕권의 안정을 위해 자신의 아들 성종이 거느릴 많은 후궁들, 즉 자신의 며느리들을 엄격하게 훈육하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소혜왕후는 궁중 여성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 왕의 여자, 즉 비빈들에게 부덕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더 나아가 양반 부인에게 집안 다스리는 법을 알도록 교육시키고자 하였다. 소혜왕후가내훈을 만들면서열녀,여교,소학, 명감 같은 중국의 서적들을 쉽게 접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친정이 명과 매우 빈번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분위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아버지 한확, 그리고 오빠들이 고모가 있는 명나라 조정을 자주 다녀왔으며 이때 중국으로부터 많은 하사품을 얻어 왔는데 서적들도 가져왔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부인 소혜왕후는 이러한 책을 틈나는 대로 공부하며 조선에도 이러한 책이 있어야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내훈은 조선시대 여성 이념 성립에 큰 역할을 하게 되었고, 여성의 손에 의해서 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서가 되었다.
5.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 결국 며느리를 죽이다.
소혜왕후의 성품은 매우 곧고 엄했던 것 같다.
세자빈이 된 다음에 며느리의 도리에 힘써 더욱 조심스럽게 행하였고, 몸소 세조의 수라를 보살피며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세조는 항상 효부라 칭찬하였으며, 효부라는 인장까지 만들어 하사하여 그 효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타고난 자질이 엄격하고 발라서 자식들이 조금이라도 허물이 있거나 잘못을 하면 즉시 정색을 하여 훈계하고 경계하였으므로 세조 내외는 희롱삼아 그녀를 ‘폭빈(暴嬪)’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소혜왕후는 부모를 모실 때는 효부로서, 자식들에게는 엄격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엄하면 엄할수록 며느리들을 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던 것 같다.
궁중 여성들의 교훈서로 『내훈』을 편찬한 소혜왕후에게 가장 먼저 불행한 사건으로 다가온 것은 며느리이자 손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폐비시키고 결국 죽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궁중의 비빈들을 훈육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이 사건은 조선왕조 최초로 왕비가 남편에 의해, 또 시어머니에 의해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일이 되었다.
소혜왕후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폐출에 깊이 관여했고 이로 인해 그녀의 노후는 그다지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삶이 되었다. 성종은 첫 번째 부인인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가 성종 5년에 죽기 전부터 후궁인 함안 윤씨를 총애하였다. 숙의 함안 윤씨는 판봉상시사(判封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딸로 성종 4년에 후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3달 뒤에 중종의 어머니이자 정현왕후가 되는 병조참지 윤호(尹壕)의 딸 파평 윤씨가 숙의로 책봉 되었다.
공혜왕후의 상례를 마치고 또 내훈이 만들어진 이듬해인 성종 7년 성종은 대비의 뜻을 받들어 윤기견의 딸을 중전으로 삼았다. 윤씨는 성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또 아들 세자 융(연산군)을 낳은 상태였기 때문에 승격시켜 왕비로 책봉하였다.
숙의 함안 윤씨는 왕과 대비들의 총애를 받으며, 또 후궁들의 부러움을 사며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조선 초에는 왕비가 죽은 후 후궁이 왕비로 승격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 윤비는 왕비로 책봉된 지 겨우 8개월만인 성종 8년(1477) 3월에 성종에게 불순했다는 이유로 대비들에게 큰 죄를 얻게 되었다. 즉 칠거에 해당되는 질투로 인해 부덕을 잃었다는 이유로 미움을 받게 된 것이다.
또한 엄소용, 정소용 등 소혜왕후를 둘러싸고 윤씨를 비방하고 이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자 아버지도 없는 윤비가 위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3대비들의 시선과 새로이 성종의 총애를 받으며 질투하는 후궁들의 시샘을 견뎌 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어 왕과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되어 자수궁에 따로 거처하게 되었다. 또 성종이 후궁들의 방을 자주 출입하며 자신을 멀리한다는 이유로 다투던 끝에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이를 알게 된 소혜왕후는 크게 격분하여 성종을 부추겨 윤비를 폐하여 사가로 내치도록 하였다. 폐비 윤씨를 쫓아내는 데에도 소혜왕후의 역할이 컸지만 그녀를 사사하는 데에도 그 역할이 컸다. 소혜왕후는 자신의 뜻을 어긴 며느리를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 일을 통해 이후 왕비들과 후궁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본보기로 삼았다.
이후 조선 왕조에는 투기죄에 의해 폐비가 되거나 죽임을 당한 왕비는 숙종대 당쟁의 희생물이 되었던 후궁 출신의 희빈장씨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런데 성종 14년에 소혜왕후가 그토록 의지하고 뜻을 같이하던 시어머니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 18년에는 정치적으로 의지했던 한명회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듬해 19년에는 맏아들 월산대군이 35세로 죽고, 25년에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되었던 성종도 38세로 죽었다. 남편과 시부모, 두 아들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게 된 소혜왕후는 며느리 정현왕후와 그의 아들 진성대군이 있었으나, 새로 왕이 된 연산군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6. 손자 연산군과의 갈등, 불행한 노년
폐비 윤씨를 사사(賜死)시킨 소혜왕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불행한 노후를 보내야 했다.
성종은 세자가 자신의 생모의 죽음에 대해 알까 걱정이 되어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기고 죽었지만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이를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갔다. 소혜왕후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함이 심해지고 또한 광폭한 짓을 많이 하자 누차 타일렀다.
그러나 도리어 연산군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소혜왕후는 여러 차례 타일렀으나 연산군은 더욱 반발하며 듣지 않았다. 더욱이 연산군 10년 3월에는 어머니의 시호를 ‘제헌(齊獻)’이라 올리고, 무덤을 ‘회릉(懷陵)’이라 추숭하며 성종과 소혜왕후의 처사를 완전히 무시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얼굴에 처용가면(處容假面)을 쓰고 처용의 옷차림으로 칼을 휘두르며 처용무를 추면서 말리는 소혜왕후에게 대들기까지 하였다.
이에 소혜왕후는 놀라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고, 10년 4월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은 할머니 소혜왕후의 죽음에 슬퍼하는 빛이 없었다. 소혜왕후가 죽은 뒤 장례문제를 두고 좌의정 유순, 우의정 허침, 예조 판서 김감 및 육조 당상들은 안순왕후의 상례에 준하여 6일 만에 성복(成服)하자고 하였으나 연산군은 “대행대비께서 조정에 임하신 지 오래였지만, 나라에는 별로 이렇다 할 일이 없고, 다만 자친(慈親)으로 섬겼을 뿐이다. 안순왕후에 있어서는 곧 대통이니 이와 같이 할 수는 없다. 의경대왕보다는 좀 높게 하고, 안순왕후보다는 좀 낮추어 한다면 정리에 매우 합당할 것이다.”라 하며 그녀의 위상을 깎아 내렸다. 연산군은 소혜왕후의 상기를 단축하고 국기(國忌)를 행하지 않으며 3년 상까지 폐지하였다.
연산군은 그 상례기간을 단축하여 날을 달로 치는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로 거행하였다.
그리고 시신이 빈소에 있는 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대비나 왕비들의 죽음에 임해 이를 애도해서 올리는 애책(哀冊)도 마련하지 않았다. 지나치리만큼 엄격함을 지녔던 소혜왕후는 왕과 후궁과의 관계를 질투하던 며느리 폐비 윤씨의 행동이 자신이 강조하는 내훈의 내용에 어긋나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소혜왕후는 결국 윤씨를 부덕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폐비시키고 사사(賜死)시킴으로써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하나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간사 그러하듯 그 결과 불행한 노후를 보내야 했다. 자신의 손자 연산군은 폭군이 되었으며, 손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불행한 말년과 쓸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출처] http://blog.naver.com/joseon_500/220228858908한희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