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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학 야담 [파수록]의 웃음 유발 양상
이원걸(문학박사)
(목차)
1. 머리말
2. 성 해학
3. 인정세태와 주색잡기
4. 하층인의 도전 의식
5. 트릭의 수용
6. 마무리
1. 머리말
조선 시대의 웃음을 엿보기 위해 [파수록]을 검토하고자 한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의 야담집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작가와 편찬 연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임형택 교수에 의해 이 야담집의 편찬 연대가 1742년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파수록]의 저자는 조선 중기의 인물인 김연(金淵)이며, 편찬 연대가 1682년경으로 추정된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런 선행 연구를 통해서 [파수록]의 윤곽이 대강 드러나게 되었다. 이제 이러한 토대 위에서 [파수록]이 갖는 문학적인 면모를 추출하여 선행 연구와 연계하여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이런 작업의 축적을 거쳐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전체 구도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파수록]의 전반적인 내용은 조선 후기의 인정세태를 골계로 묘사한 것이다. 작중 인물은 이러한 행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각종 난관을 지혜롭게 헤쳐 간다. 트릭을 구사하거나 희작으로 임기응변한다. [파수록]에는 이런 경향이 다른 야담집에 비해 두드러진다.
이런 핵심 사항을 검토하기 위해 작품에 반영된 작가 의식을 검토하기로 한다. 아울러 거기에 따른 풍자와 해학의 의미 및 작품의 기교적 측면도 동시에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야담집에서 보여 지는 관련 사항도 함께 정리하여 이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일련 작업을 거쳐 [파수록]의 고유한 속성을 밝힐 것이다. 이는 곧 야담집이 지닌 저마다의 고유 특성 파악을 거쳐 조선 후기 야담 문학의 전체 조망을 위한 기초 작업이라 하겠다.
2. 성 해학
인간의 삶에 있어 해학 표현이나 그러한 발상은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에 긴장을 이완시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일찍이 [시경]에서도 이 점을 긍정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 비평집인 [파한집]․[보한집]에 이따금씩 보이는 해학적 표현은 조선조에 들어와 점차 발전된다. 그러한 전통이 [태평한화골계전]․[용재총화]․[어면순]․[패관잡기]의 편찬으로 이어졌으며, 마침내 소화집류(笑話集類)의 총체라 할 만한 [고금소총]의 결실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류를 일괄 음담패설로 간주하여 외면한다면, 이는 바람직한 처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물론 그 가운데는 외설적 내용도 없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대하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비록 이런 부류가 음담패설이기는 하지만 이 역시 당대 인간들이 이 땅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이들 작품 속에서 순수한 인간미도 발굴될 수 있으며, 문학적 가치를 확보한 작품 역시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작품 역시 연구 대상의 범위에 넣어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다룰 작품은 성 해학이 짙은 작품이다. 행동 묘사보다는 화술(話術)에서 그 해학이 돋보인다. 봄날 대낮에 주인 내외가 정사를 즐기는 가운데 여종이 창가에서 저녁밥 지을 쌀의 양을 묻는 풍경이다.
계집종이 창가에 와서 마님, 저녁밥을 지으려고 하온대, 쌀은 몇 되나 할까요?마님은 황홀 중에 답했다. 닷 되, 닷 되, 다다 되.그래서 여종은 서 말 다섯 되의 밥을 지었다. 마님이 이를 보고 너무 많이 지었음을 나무라자, 여종이 답했다. 저는 마님의 분부대로 했을 뿐입죠. 닷 되에 또 닷 되를 더하면, 한 말이구요, 거 기서 또 다다 되라고 하셨으니, 서 말 닷 되가 아니어요?마님은 킥킥거리며 변명했다. 에구, 이 년아, 짐작 해서 들을 것이지, 그 지경에서 내 어떻게 인사(人事)를 분별할 수 있었겠어?
상전 마님과 여종의 대화에서 여종이 마님을 억누르는 장면이다. 여종이 주인댁 부부가 대낮에 정사를 벌이는 주위에 기웃거리는 자체가 이미 도전적 행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 술 더 떠서 저녁 지을 쌀의 양을 묻는다. 여기서 우선 두 가지 사항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첫째 이 여종에게 재치가 있다는 점이다. 위 예문의 여종이 우직하게 위장되어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그녀는 위의 대화 과정에서 우위권을 잃지 않는다.
그녀는 시종 주인을 압도하는 전형으로 그려져 있다. 둘째 여성의 성애가 은근히 공개된다는 점이다. 당대 통념에 의하면, 성(性)은 남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러기에 부녀자들에 의해 이러한 성애가 표출되는 것을 극히 추하게 여겨졌다. 그런데 위의 글에 남성은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다만 두 여인의 대화 가운데 여성의 성애가 우회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마님이 여종에게 변론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구체적으로 보인다. 마님의 변론은 당대 남성 편향적 성문화에 우회 접근하여 그녀의 성애 묘사가 드러난다. 곧,황홀한 지경에서 어떻게 사리를 분별해 제대로 답했겠느냐에 대한 수긍을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마님이 황홀한 가운데 대답한 대로 서 말 닷 되의 밥을 지은 여종도 이 문제에 있어서는 적대의 주종 관계가 아니라, 공동 협력자이다. 그래서 둘의 공작은 별 무리 없이 성사되어 남성 위주로 구조된 성차별 문화에 대해 항변을 드러낸다. 이는 동일한 수법으로 여성 문제를 다룬 다음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옛날, 혼기를 놓쳤다가 뒤늦게 채단(采緞)을 받은 처녀가 기쁨을 가누지 못했다. 뒷간을 가면서 혼례 날을 손을 꼽고는 멍멍이에게 자랑했다.몇 일날, 나 시집간단다.때마침 멍멍이 놈 입을 크게 벌리고 하품을 했다. 그랬더니, 이 노처녀 맹세코 우겨댔다.정말, 그 날 시집 못 가면, 난 네놈 딸년이구만!
나이 많은 처녀가 혼례 전에 신랑 댁으로부터 채단을 받고, 혼례 날도 확정되어 더할 나위 없이 기뻐 뒷간 길에 만난 멍멍이에게 시집가는 자랑을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멍멍이가 하품을 토했고 이로 인해 노처녀의 히스테리가 터져 나온다. [태평한화골계전]에도 이와 유사한 처녀가 있다. 혼례를 사흘 앞둔 측간 길의 노처녀가 멍멍이에게육갑 중에 네 놈이 빠졌더라면, 혼례 날이 하루 당겨지겠다.며 탄식한다. 여기서 두 노처녀가 미물에게 내뱉은 말 이면에는 자신의 성애가 그만큼 강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다만 가탁 언어를 구사해 당사자의 속사정을 표현했을 뿐이다.
그런데 앞의 노처녀의 경우, 그냥 한 번 웃고 지나갈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을 자세히 보면 두 가지의 흥미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이 처녀가 왜 그토록 혼례를 열망했으며, 그것을 비웃는다고 여긴 미물에게 이렇게 격분했을까? 이에 대한 해명이 있은 뒤에 이 처녀의 아픔이 밝혀진다.
이는 위의 글에서 답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야담집에 등장하는 노처녀에게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다른 야담집의 노처녀는 본인에게 어떤 결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다. 다만 가정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혼례가 늦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의 주인공 처녀에게도 그러한 상황이 주어졌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녀는 본의 아니게 혼기를 놓친 것이다.
이어 그녀가 자기를 비웃는 것처럼 보여 지는 멍멍이에게 화를 내는 의미를 추적한다. 그녀는 가난하여 여태까지 신랑감을 구하지 못하다가 소원을 이루게 된 터이다. 그런데 멍멍이의 애꿎은 하품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처녀가 미물에게 시집가는 것을 자랑하는 짓이나 그에게 격분하는 행동에는 웃음이 묻어난다. 그러나 그 웃음 이면에 감춰진 그녀의 절박함 또한 지나칠 수 없다. 그 절박함은 한 인간으로서 본능 욕구를 이루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이 가난이라는 장애로 인해 봉쇄되었다가 급기야 이루어지려는 과정에서 이러한 희극이 연출된 것이다.
이 해학적 대화에서 노처녀의 성애에 대한 욕구가 우회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파수추(破睡椎)]에서 가난한 집의 노총각이 양근(陽根)을 움켜잡고 엎드려 울기에 부친이 그 이유를 물었더니, 부친께서 손자를 늦게 얻는 게 애석해서 그런다고 변명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노총각의 통곡은 집안에 손자가 늦게 태어남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본인의 혼기가 늦어지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결국 위 두 남녀의 성애에 대한 우회적 변명에서 인간의 기본 욕구 해소를 위한 갈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에 드러난 성애의 간접 표현이 반드시 추한 산물은 아니라고 본다. 도리어 가난과 궁핍이라는 장벽에서도 굴하지 않고 개인의 성애를 성취하려는 강한 인간 형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성애가 간접적으로만 표현되었느냐에 대한 해명은 이 [파수록]이 조선조 본격적인 성 해학 야담처럼 개방적 지면이 아니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인정세태와 주색잡기 풍경
인정세태와 주색잡기에 나타난 풍자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경제와 맞물린 이해 관계가 종래 도덕 관념을 짓누르는 세태 풍경이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은 우리 사회 구조의 재편은 물론 가치관의 변화도 가져왔다. 이제 작품으로 들어가 보자.
① 딸만 셋 둔 서울 부자 정생이 조카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했다.
② 세 딸은 사촌을 내쫓고, 정생을 모시는 조건으로 재산을 고르게 나누었다.
③ 이후 정생은 세 딸의 박대로 자살을 기도하다가 조카를 만나 의탁했다.
④ 주인댁 재상이 외직으로 나가면서 정생을 데려가는데, 정생은 소임을 다했다.
⑤ 조카는 숙부의 봉물을 잘 수장하고 관리하며 치산했다.
⑥ 딸이 토산물을 얻으러 왔으나 정생은 극구 거부했다.
재산을 둘러싼 가정불화의 단면이다. 홀아비 정생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오십이 넘은 그가 여생을 의지하고 가업을 이어갈 대상을 모색하면서 문제가 시작된다. 정생은 자신이 다시 부인을 얻어 가정을 어지럽게 할 수 없다고 하며 고아나 다름없는 조카를 양자로 맞아들이려 한다. 하지만 그의 견해는 세 딸의 반대와 모함으로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다. 세 딸이 굳이 양자 입적을 거부한 이유는 재산 소유권 때문이다.
결국 정생의 재산은 세 딸에게 고루 분산된다. 이로써 그는 아비로의 권위를 모두 잃는다. 세 딸은 애당초 아비를 모실 마음이 없었고 재물에 현혹된 인간이었기 때문에 홀아비를 모시는 것이 고통스럽기 그지없다. 첫딸이 몇 달 동안 아비를 모시고 다음처럼 고통을 호소한다.
아버님께서 저희 집에 계시는 게 나쁠 건 없지만, 위로는 시부모님, 아래로는 동서들 사이에 제가 불편하기 짝이 없어요, 그러니 우선 둘째네 집에 가시는 게 어떨까요? 라고 하자, 아비는 이미 딸의 심보를 알아채고 씁쓸하게 대꾸했다.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안 가고 배길 수 있겠어?
현대판 불효의 전형이다. 정생은 이즈음에 이르러 딸의 홀아비 봉양 계획이 애당초부터 간교에 의한 것임을 깨닫는다. 첫딸은 이미 정생의 재산을 세 명이 골고루 나누어 빼앗은 터에 아비는 경제적 효용 가치를 상실한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정생은 어쩔 도리 없이 둘째․셋째 딸에게로 전전하며 박대와 서러움으로 인해 급기야 자살까지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는 조카를 만나 새로운 삶을 이룬다. 조카 내외는 재상 댁의 행랑채에 빌붙어 나무를 해서 파는 저급 인생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순수하여 가련한 노인을 정성껏 모신다. 정생은 여기서 세 딸의 몰염치한 소행과 대조적인 조카 내외의 순수한 인간미에 감동되었으며, 재기를 도모한다. 즉, 주인댁 재상이 관서 지방의 수령으로 위임되면서 정생을 막객으로 데려가 제반 사무를 맡기는 데서 그는 직분을 다한다. 그래서 봉록과 토산물을 비축해서 서울 조카에게로 보냈고, 조카 내외는 이를 잘 간수하여 치산에 힘썼다.
그런데 세 딸은 아비가 평양 관아에 막객(幕客)으로 있음을 알고 나서 다시 몰인정한 행동을 감행한다. 아비에게 서찰을 올려 토산물을 보내 달라고 간청했으나, 정생은 반응은 냉소적이다. 이 대목이 딸의 배은망덕한 처사에 대한 정생의 최초 대응 양상이다. 정생의 묵언을 통한 거부, 이는 곧 못된 자식의 소행을 더 이상 포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이기도 하다.
이윽고 정생은 재상의 임기가 만료되어 상경했는데, 딸은 잽싸게 진수성찬을 준비해 그를 위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시종 거부한다. 반면에 그는 가난한 조카의 대접은 흔쾌히 수락한다. 상경한 정생이 딸에게 베푼 토산물은 이 작품의 주제가 함축된 부분이다.
정생이 세 딸에게 묶은 짐을 한 둥치씩 주면서 말했다. 아비가 너희들이 요구하던 토산물을 이 속에 가득 담아두었으니, 친척들을 불러서 자랑해 보여라!세 딸이 이를 받고 돌아가 풀어 보니, 등겨와 싸라기였다. 위에 는애지중지 기른 수고라고 적혀 있었으며, 끝에는네 년들은 개돼지와 다를 바 없으니, 이 등겨․싸라기나 처먹어라고 적혀 있었다.
홀아비가 자식에게 모든 재산을 헌납하고 박대를 받아 거리로 내몰린 참상이 역전된다. 등겨와 싸라기에 담긴 정생의 의도는 애지중지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망각한 딸의 심보를 호되게 탓하는 것이다. 아울러 딸을 개돼지와 동일시함으로써 그는 삼십년 간 받아 온 수모를 되돌려 준다. 이후 딸이 마음을 고치고 용서를 청하지만 정생은 더욱 노하여 끝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로써 혈육의 정은 완전히 단절된다.
세 딸이 정생을 환영하고 구박하는 차이는 정생의 빈부와 연관된다. 정생이 딸에게 아비로 인정된 것은 그에게 일정한 경제력이 확보되었을 때였다. 그것이 상실되자 그는 딸에게 버려진 것이다. 냉혹한 경제 원리가 한 가정에 침투되어 기존 가치관을 혼란시킨 경우다. 문제는 이 작품에서 딸만 비인간적일 뿐만 아니라 아비 역시 그들을 용납하지 않은 점에서 이들의 관계는 다를 바 없다.
종래의 도덕관념에서 볼 때, 세 딸은 홀아비를 극진히 모셔야 하며, 정생 역시 딸의 패륜도 용인하는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나 딸과 아비는 쌍방 타협과 양보를 모르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당대 상품 화폐 경제의 매력은 도의를 능가하는 추세였음을 보여준다. 이어 주색잡기와 연관된 작품을 보기로 한다. 친구들이 술주정뱅이를 골탕 먹인다.
옛날에 술주정을 잘 부리는 사람이 있었다. 쌀뜨물을 술이라고 속여 먹였더니 필경 또 술주정을 부렸다. 이튿날, 친구들이어제의 술주정은 진심이 아니고, 거짓이었구만. 쌀뜨물을 먹였는데 무슨 해괴한 짓인가? 라고 빈정댔다. 그 위인은 부끄러워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나 역시 술맛이 좀 텁텁했어.
술주정의 해학 속에 풍자가 담겨 있다. 친구들이 술만 마셨다 하면 주정을 부리는 위인에게 쌀뜨물을 술이라고 속여 먹였더니, 그는 어김없이 주정을 부린다. 이튿날, 친구들이 그에게 쌀뜨물을 속여 먹인 것을 실토하는 대목이 해학 부분이다. 그는 어쩐지 술맛이 텁텁해서 언짢았다며 겸연쩍어한다.
그래서 작가는 평어에서 [서경]을 인용해 이러한 병폐는 개인의 습관에 의한 것이라며 그를 나무란다. 술 대신 쌀뜨물을 먹여도 여전히 술주정을 부리는 그의 행각을 들어 술에 만취되어 발생되는 행각을 비난하며 풍자한다. 여기서는 이런 점을 한 개인에 국한해 조명했지만, 다음 작품에서 이는 더욱 확대된다.
① 서울 가난뱅이 주오(朱五)와 김삼(金三)이 무위도식했다.
② 술 한 병을 들고, 외상 술 안 먹기 시험을 했다.
③ 김삼이 엽전 셋을 주오에게 주고 술 한 잔을 사 먹고, 주오 역시 그렇게 했다.
④ 둘이 주고 받다보니, 술병은 바닥났고 엽전 석 냥뿐이어서 발끈해 술병을 깨고 하산했다.
이들이 가난하게 된 주원인이 본인의 게으름과 방탕 생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그들은 사십이 넘도록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부양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늘 술에 취해 사는 기생적 인간 유형이다. 이들이 늘 외상술을 마셔 온 까닭에 이 날은 단단히 결심을 하고 인적이 드문 북악산에 올라가 외상 술 안 먹는 시험을 한다. 그들의 이름처럼, 엽전 세 푼이오[金三]․한 잔 주오[朱五]하며 술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니, 술병의 술이 바닥났고, 돈이라고는 애당초의 엽전 석 냥뿐이어서 홧김에 술병을 깨고 하산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끝내 당사자의 무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에 작가는 이들의 몰지각한 행동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혹평한다. 이들은 곧 술로 인해 인생을 허비하는 저급 인생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생산적이며 소모적 인생을 따끔하게 훈계한 것이다. 다음은 엽색 행각의 풍자다.
옛날, 어떤 위인이 호남의 막객이 되어 춘랑에게 먼저 정을 주고 또 홍련에게 흑심을 두었다. 그런데 춘랑의 시샘이 두려워 밤중에 춘랑이 곤히 잠든 틈을 타 살며시 홍련에게 접근하다가 실수로 춘랑의 배를 짓밟아 이루 지 못했다. 잠자리로 재차 돌아와서는 ‘붉은 연꽃 따러 남포로 가는데, 동정호 봄 물결에 외로운 배는 놀라네’라 고 흥얼거렸다.
호방한 막객이 색향인 전라감영에서 두 기생을 차지하려는 음탕한 심보가 그려져 있다. 그가 야음을 타서 홍련에게 다가가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 그런데 공교롭게 춘랑의 배를 밟아 일을 이루지 못한다. 이 위인의 임기응변적 발상은 기가 넘친다. 붉은 연꽃을 딴다는 의미는 곧, 홍련의 육체를 소유하겠다는 음흉한 내심을 말해 준다. 그런데 잔잔히 있을 줄 알았던 봄 물결이 그의 흉계를 무산시킨다. 결국 작가는 엽색 위인의 곤경을 통해 엽색에 대해 경계의 의미를 보인 것이다. 이는 다음 작품에서 증폭된다.
어떤 중놈이 주막에 들어가 주막집 아낙이 미색임을 보고 욕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밤이 되어 그녀가 홀로 자는 것을 봐 두었지만, 무작정 뛰어 들어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복을 모두 벗어 바랑에 넣어 창밖에 걸어 두고는 내빼는 연습을 했다. 곧, 홀랑 벗은 알몸으로 그녀를 덮쳤다가 잽싸게 바랑을 나꿔 채기를 여러 차례 시도하여 숙달된 뒤에 그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깜짝 놀라 ‘웬 놈이냐?’하고 소리를 지르니, 중놈이 질겁하여 묶어 둔 짐을 들고 내달렸는데, 근 30리 정도 달아나 숨을 돌리고 들고 온 것을 자세 히 보니, 바랑이 아니라, 닭이 알 낳는 짚둥우리가 아닌가.
세련되지 못한 산간의 수도승이 미녀를 차지해 보려고 제 딴에 주도면밀하게 내빼는 예행 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행각은 수포로 돌아갔고, 바랑과 장삼을 잃고 알몸으로 빈 짚둥우리만 안고 서있는 몰골이 되고 말았다. 그의 형상을 상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중의 엽색 행각 풍자는 [용재총화]에 많이 실려 있다.
이러한 승도의 여색 탐닉 수용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한 웃음 제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수도승의 이중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중에게도 인간의 본성이 내재하고 있음을 보인 것이다. 즉, 해학 가운데 인간성 긍정의 작가 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작중의 중은 부단히 그녀를 덮쳤다가 내빼는 연습을 했으나, 뜻을 이룬 것도 아니고, 도리어 제 풀에 놀라 이런 희극을 발생시켰다. 작중 남녀 대립이 심각하지 않은 채 다만 중의 일방적 낭패로 귀결된다.
다음 작품은 「배비장전」 계열의 야담과 근친성을 갖는다. 어떤 한량이 관북 지방을 유람하다가 한 기생에게 정을 주었다. 기생과 이별할 즈음, 기생은 그에게 정표로 이빨을 뽑아 달라고 조른다. 그 위인은 감격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 이빨을 뽑아준다. 그런데 그가 철령을 넘으면서도 그녀를 잊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데, 그와 같은 신세를 당한 행인을 만난다. 그 행인도 그와 같이 그 기생에게 이빨을 뽑아준 것이다.
그제야 그는 기생의 간교한 놀음에 속은 것을 깨닫는다. 그는 발끈 화를 내며 하인을 시켜 자기 이빨을 회수해 오게 시키는데, 기생은 남성 이빨이 담긴 자루를 마당에 던지며,그 속에서 네 상전의 것을 찾아가라라며 비웃는다. 이 대목이 작품의 절정이다.
그리고 이는 기생 수청을 거부하며 거드름을 피우던 순안어사(巡按御使)가 수령들과 아전, 그리고 기생의 철저한 미인계에 말려 할미의 두룽다리를 덮어쓰고 망신을 당해 급기야 파직되는 지경에 이르는 것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즈음에 이르러 작가는 일련의 주색잡기는 본인의 성벽(性癖)에 기인된다며 결말짓는다.
이상에서 인정세태와 주색잡기 풍자 성향을 보았다. 작가는 당대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일어나는 몰인정한 경박 풍조에 대해 우려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주색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동시에 표현했다. 이 과정에서 교훈과 해학성이 구비된 고도의 풍자 수법이 동원되었다. 웃음을 통한 권계다.
4. 하층인의 도전 의식
조선 후기 야담에는 당대 신분 사회의 동요 양상이 충실히 반영되어 있다. 그 가운데 지배층과 피지배층인 대립 양상이 두드러진다. 말하자면 주인과 하인의 대립 양상이다. 이는 결국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간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몰락한 양반이 선대 노비를 추노(推奴)하러 갔다가 위험한 지경에 이르는 등의 사례에서 이런 세태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지방에 부임한 수령․감독관들과 지방에서 족세(族勢)를 형성한 아전․통인들 사이에 만만찮은 갈등이 빚어진다. 물론 이것이 당대 전반에 걸친 지배적 현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요소들이 도처에 팽배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득권을 확보한 지배 계층이 이러한 여러 요인에 의해 체제 붕괴의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민중의 의식이나 세력이 강력한 기반을 구축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우위권은 지배 계층의 몫이며, 거기에 반발 작용으로 이러한 갈등이 빚어진 것이라 하겠다. 이 야담집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극한 대립 형상을 절제하고 해학적 대립 양상이 보여 진다. 주인과 종이나 원님과 지방 하속의 대립 양상이 주를 이룬다. 잔칫날 음식 때문에 종놈이 상전에게 수작을 건다.
어떤 사람이 혼인 잔치에 가려고 종놈을 불러 말을 씻기고 안장을 준비하도록 시켰더니, 글쎄 종놈이 시큰둥 하게 투덜댔다.쇤네는 싫습니다요.상전이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상전의 명을 따르지 않겠다니, 허, 이런 법이 어디 있을꼬? 종놈이 해명을 했다.생원 나리께선 술과 고기를 실컷 잡수시는 게 좋아 늦게 돌아가도 상관이 없지만, 이 놈이야 주리고 떨리는 걸 참을 수 있어야지요.상전이 방법을 일러 주었다.그건 네놈이 변변치 못해서 그런 게야, 내가 음식 받는 걸 눈 여겨 봐 뒀다가 슬쩍 뒤에 와서 서있으면, 알아서 건네주지 않 을까? 종놈은 그렇게 하기로 약조하고는 상전을 모시고 잔칫집으로 갔다. 그럭저럭 술상이 오자, 종놈이 상전 뒤에 가서 기침을 해서 놈이 왔음을 알렸다. 상전은 음식을 한 접시씩 뒤로 빼돌렸는데, 놈이 기침하는 대로 내 주다 보니, 회 한 접시만 달랑 남았다. 그런데도 놈이 또 기침을 해대는 게 아닌가? 상전이 발끈해서 쏘아 부쳤 다. 이 놈아, 내 자리에 앉아! 내, 네놈 대신 말 몰고 배 한 번 채워 보련다.
상전과 하인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닫지는 않는다. 상전의 무지와 종놈의 맹랑한 소행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종이 상전에게 불이익을 당하거나 모멸을 받더라도 참는 것만이 미덕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상전은 잔칫집 행차에 종놈이 그 동안의 불만을 터뜨리자, 상전이 그 불만을 해소해 주리라고 단단히 협상을 하고 잔치 마당에 당도한다. 협상대로 음식을 뒤로 빼돌리다 보니, 당사자의 몫이 바닥난다.
그는 이 지경이 되자 상전의 체통을 내동댕이친다. 그는 하찮은 음식으로 인해 종놈과 자신의 역할을 바꾸자는 억지를 부린다. 이 대목에 이르러 종놈은 승세를 잡는다. 그는 상전 몫의 음식을 모조리 차지했으며, 그 동안 당했던 고충을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기쁨을 누린다. 주종의 심각한 충돌은 빚어지지 않았지만 무지한 주인에 대해 재치 있는 종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 이야기는 종이 주인을 완전히 압도하여 농락하는 전형이다. 작중 등장인물은 과부와 독자, 그리고 성품이 바르지 못한 종놈이다. 외아들은 과부의 과잉보호로 인해 제대로 훈육 받지 못한 탓에 아둔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과부는 추노(推奴)하러 가는 길에 독자만 보내는 것이 불안하여 종을 딸려 보낸다. 그런데 길을 가는 가운데 상전의 물음에 종 녀석은 동문서답의 욕을 퍼부어 상전 외아들의 약을 올린다. 그래서 그는 추노를 그만두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집안 형편이 기운 양반 형상을 엿볼 수 있다. 빈약한 가세의 연약한 모자가 노비에게 위축되어 있다. 그래서 모자가 이 종놈을 다스리려고 해도 득세한 그의 기를 꺾지 못한다. 도리어 종은 바지에 손을 쑤셔 넣은 채,그 이야기를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 입을 다물자는 일방적 제안을 한다. 주인 아이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사태는 진정된다.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아무도 모르게 묻혀 진다.
이는 협상이 아니라, 종의 일방적 무마책 제시에 주인이 동의한 것이다. 비록 그가 아둔한 아이지만, 신분상 엄연한 상전이다. 그러나 종놈은 시종 그를 곤경에 빠트린다. 그러나 그는 전혀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도리어 의기양양하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주인의 위상이 종에 비해 현저히 위축된 형상임을 보여준다. 이는 마음 나쁜 종이 주인댁을 파멸시키려는 것으로 진전된다.
① 김생이 과거 길에 산중에서 길을 잃고 소복한 여인의 집을 찾아 들었다.
② 그녀는 음식을 대접한 뒤, 혼자 이곳에 사는 연유를 말했다.
③ ․그녀는 원래 사족으로, 온 고을이 모두 그의 노비들이었다.
․완악한 종놈이 그녀의 미색을 탐내 식솔․노비를 차례로 없앴다.
․놈이 범하려 했으나 부모상을 빌미로 기간을 유예해 왔다.
․지금껏 연명하고 정조를 지키며 복수를 축원해 왔다.
④ 김생이 놈을 죽이자, 그녀는 놈의 간을 씹고 부모 장례를 치렀고, 김생은 표연히 떠났다.
⑤ 이후, 그녀는 재상의 첩실이 되었고, 재상은 늘 낯선 막객으로 하여금 경력을 이야기하게
했다.
⑥ 한편, 김생은 늘그막까지 불우하다가 우연히 이 재상 댁에 들러 그 기담을 말하여 그녀와
상봉했다.
⑦ 김생은 재상의 주선으로 현달했다.
작품 전반부는 종의 간악한 형상이 주를 이루고, 후반부는 소복녀의 보은 묘사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여기서 노비의 심각한 횡포가 드러난다. 노비들이 주인댁을 파멸시키려는 계획이 그녀의 재치와 김생의 의기가 합치되어 무산된다. 하지만 종의 도전은 강렬하다. 그가 한 가문을 전복시킬 만한 위세로 도전한 데서 주인에 대한 종의 반감이 드러난다.
이 외에도 추노에 나선 몰락 양반이 족세를 형성하고 부를 축적한 후대 노비에 의해 위기를 당하거나 생명을 위협 당하는 사태는 이러한 당대의 추세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편 지방 관아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행정 관료와 지방 아전 사이의 대립이 이따금 전개된다. 동헌의 한 풍경이다. 통인 놈이 원님을 우롱한다.
① 우둔한 원님은 부채로 뒤통수를 늘 부쳤다.
② 관아의 하속이 그 짓을 불쾌히 여겼다.
③ 통인은 원님의 부채를 안면으로 옮겨 주는 대가로 동료들에게 술대접을 받기로 했다.
④ 그는 원님에게 거동이 괴이한 사람을 봤는데, 어사 같다고 일러줬다.
⑤ 원님은 겁을 먹고 부채를 턱 밑에다 부쳐 댔다.
⑥ 통인은 술대접을 받고 재차 원님에게 가서 그는 과객이었다고 아뢰었다.
⑦ 원님이 다시 뒤통수에 부채를 부쳤다.
⑧ 통인은 약조대로 술대접을 받았다.
이 작품 역시 전체의 내용이 축약된 형태이다. 내용상 [어수신화(禦睡新話)] 소재의 작품이 충실한 편이다. 풍자 성향이 짙은 작품이다. 약삭빠른 아전들이 심심해하는 원님에게 암행어사가 출현했다고 속여 그를 혼내는 순간을 담았다.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 야담에서 어사 출현 소문에 쩔쩔매는 고을 원님은 민원 태만․행정 비리․행정 능력 부재자였다고 한다. 이러한 아전의 농간은 여기서 마무리되지 않는다. 원님을 우롱하는 차원을 넘어 원님의 실성에서 파직까지 몰아간다.
해당 이야기는 29화이다. 성깔이 급하고 독한 원님은 화를 자초한다. 장교와 부하는 그대로 머물러 있다가는 원님에게 죽을 판이고, 도망쳐도 법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원님을 축출할 방안을 모색한다. 이로써 그는 단합된 아전들에 의해 철저한 외톨이로 전락된다. 원님은 철저히 왕따를 당한다. 통인이 갑자기 원님의 뺨을 후려친 것이 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이후 아무도 그를 변호해 주지 않는다. 애당초 그 진실을 믿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급기야 원님의 울화는 실성했다는 것으로 이어지며, 이어 파직으로 인해 그는 실성하게 되어 인생 종지부를 찍는다. 더욱이 그가 숨을 죽이고 집안에 틀어 박혀 있는 동안 집안에서 그 일을 발설하기만 하면, 식구들은 광기가 재발한다고 단속한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원통함을 풀지 못한다. 원님은 아전들의 간사한 계교에 말려 좌절에서 좌절로 이어지는 슬픈 인생을 마감한다. 아전들의 철저한 원님 축출 트릭이 실현된 것이다. 원님에게 단 한 번도 벗어날 기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목민관의 횡포가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민중 의식이 드러난다. 아울러 하속의 단결된 저항 의지는 불의한 일개 원님 정도는 쉽게 축출할 수 있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이러한 하속의 역량은 중앙에서 지방 행정 업무를 감독하러 온 중앙 행정 관료의 이중성을 공개하고 축출하는 데서 더욱 구체적이다.
① 순안어사가 전주에 왔는데, 고고한 척하며 잠자리에 모시기 위해 찾아 온 기생을 물리쳤다.
② 감사와 부윤, 기생이 짜고 그의 절개를 무너뜨리고 골탕을 먹일 수작을 부렸다.
③ 과부로 가장한 기생이 통인과 짜고 날마다 그를 유혹하여 끝내 홀딱 빠지게 했다.
④ 어사는 그녀를 첩으로 삼겠다며 은밀히 만나 정의를 돈독히 해 두었다.
⑤ 기생이 그를 할미 복장을 시켜 연회로 유인해 군중들에게 망신을 시켰다.
⑥ 이튿날, 어사는 종적을 감췄고 파직되었다.
특이한 것은 작품 서두에 「어사가 머리 장식을 쓰고 잔치 자리에 나가다」란 제목이 붙여져 있다. 이 작품은 [천예록(天倪錄)] 소재의 내용보다는 다소 축약되었다. 이는 그가 순안 어사라는 직함을 빌미로 거만하고 고결한 척 한 데서 비롯된다. 이에 감사와 부윤이 그 거만을 잠재우고, 그의 이중적 면모를 전면 공개시키고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기녀, 통인도 동원된다. 1차로 그를 유혹하는 인물은 통인과 기녀이다. 그리고 어사가 기녀에게 완전히 반했을 무렵에 어사를 기생집으로 유인한 뒤, 감사와 부윤․도사가 고을 사람들을 기녀의 별당에 소집시켜 광대를 동원하는 등 성대한 놀이마당을 펼친다. 이어 숲에 숨어 구경하던 할미 복장의 어사를 잔치 자리에 불러내어 공개 망신을 시킨다. 이 대목이 이 작품의 절정이다. 허식을 부리던 어사의 위신이 와해된다.
그런데 일련 트릭을 주도함에 있어 기녀의 역할이 압도적이다. 때문에 작중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이 일을 성공시킨 주체는 전주 기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위 29화에서 철저하게 트릭에 빠진 원님과 동일한 수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6차에 걸친 트릭[감사․부윤 → 통인 → 기녀 → 부윤․감사 → 기녀 → 부윤․감사]에 의해 어사는 큰 망신을 당한 채 파직된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는 순안 어사가 본연의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미색에 빠져 쾌락을 추구하는데 대한 경계와 호색 행각을 폭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위에서 검토한 아래 사람들의 단합된 역량이 윗사람의 비리를 공략한다는 점에서 작품 성격상 비슷하다. 그 이면에는 민중 저항 의식을 담겨 있다. 이러한 인간 부류들을 대 사회적인 관계에서 개방적 인간 유형으로 규정지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기존의 지배층에 접근 방법에 있어 저돌적 자세로 접근하지 않는다. 경쾌한 웃음을 바탕으로 상대를 공격한다. 때문에 이는 민화에서 지배층을 상징하는 호랑이가 우직하게 묘사되고 피지배계층을 의미하는 까치나 토끼가 맹랑하게 묘사된 것과 비슷하다.
5. 트릭의 수용
야담이 당대 현실 문제를 다룬 서사 장르인 만큼 작품 서술 과정에서 신이적(神異的) 장치는 여과되고, 작중 인물이 현실의 난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속이고 속는 장치를 수용하고 있다. [파수록]에 이러한 내용이 일정한 부분을 차지한다. 작중 인물이 현실의 틀 안에서 위기를 벗어나거나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트릭을 이용한다.
이미 앞서 언급된 부분 가운데 작가 의식과 관련해서 정리한 부분은 다루지 않고, 트릭과 관련된 부분만 정리하기로 한다. 트릭의 구사 양상을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일방적으로 상대편에게 트릭을 거는 경우, 둘째, 한쪽에서 트릭을 걸자, 상대편이 이를 역이용한다.
먼저 일방적 트릭의 작품을 보기로 한다. 「한량이 총애하던 기생에게 이빨을 뽑아 주고 후회함」(25화)에서는 기생이 뭇 남성에게 철저한 트릭을 써서 이별의 정표로 이빨을 뽑아 달라고 조른다. 이 트릭 구사에 정인(情人)은 모두 넘어 간다. 이는 기생이 이빨을 찾으러 온 종에게 던져 준 한 자루의 이빨에서 증명된다. 여기서 기생은 트릭의 주도자이며, 뭇 남성은 거기에 일방적으로 말려든 전형이다. 여기에 한 차례 트릭이 구사된다.
다음은 「통인이 어사 출현 소문으로 원님의 거만한 부채를 턱 아래로 옮김(30화)」인데, 여기서는 두 차례의 트릭이 구사된다. 어사의 출현 소문에 거만한 원님은 곧 긴장한다. 약삭빠른 통인의 첫째 트릭은 어사의 출현 가능성을 원님에게 고한 것이다. 소문에 놀란 원님의 부채는 즉각 턱 밑으로 옮겨진다. 두 번 째 트릭은 통인 놈이 그가 행인이었다고 아뢰는 것이다. 이에 원님의 부채는 종전처럼 뒤통수로 다시 옮겨진다. 무지한 원님은 통인의 속임에 골탕 먹은 것도 모른 채 기분이 좋기만 하다.
이는 「통인이 원님을 속이고 꿩고기를 빼앗아 먹음(43화)」과 같은 구조이다. 여기에 한 차례 트릭이 나타난다. 통인은 짚으로 원님의 수염을 건드려 파리가 꿩고기를 시식한 것처럼 속여 마침내 고기를 빼앗는다. 이 세 가지 예에서 보듯이, 트릭 주도자와 상대 사이에 심각한 충돌은 없다. 단순한 웃음을 제공하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는 일방적 단선 트릭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복잡해진 일방 트릭 구조를 보기로 한다. 「통인과 아전이 짜고 포악한 원님을 몰아냄(29화)」은 못된 원님의 행동이 아전들과 충돌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여기서 통인이 최초 트릭 구사자이다. 이 사건은 그가 원님의 뺨을 후려갈기면서 시작된다. 이후, 이는 점차 상승되어 원님의 노기를 고조시킨다. 원님은 이 사실을 관아에 알려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아전이 짜고 추진했기 때문에 통인은 전혀 위기를 느끼지 않는다.
이에 비해 원님의 노기는 광기로 반전된다. 그래서 두 번째 트릭 구사자인 아전에게 그 바톤이 넘어간다. 이는 아전이 감사에게 원님이 실성했다고 보고하면서부터 구체적으로 실현된다. 이어 원님은 파직되어 귀가 조치되었지만, 그 트릭은 여전히 유효하다. 원님과 그 식구들 모두 이 트릭에 말려든다. 원님은 죽기 전에 그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식구들은 원님의 광기가 재발한다고 하며 그의 입을 철저히 막는다. 이로써 원님은 파경을 맞는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통인 → 아전으로 연결되는 점진적 상승 트릭 구조이다. 때문에 이는 트릭 전개상 위와 같은 위와 같은 일방 트릭 구조이다. 65화 「기생 수청을 거부하던 순안 어사를 부윤과 기생이 짜고 축출함」도 이런 유형이다.
어사가 잠자리를 함께 하자는 기생의 접대를 거부하는 이중성을 폭로하고 파직시키는 과정에서 여섯 차례의 트릭이 실현된다. 이를 순차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감사와 부윤이 기녀를 소복한 여인으로 꾸며 어사 처소에 빈번히 왕래케 한다.
② 통인은 그녀는 홀로 된 지 얼마 안 된 누이라고 알린다.
③ 기녀가 갖은 자태로 어사를 유혹한다.
④ 감사와 부윤이 기녀의 별당에 놀이마당을 펼친다.
⑤ 기녀가 수단을 써서 어사를 마당까지 유인한다.
⑥ 감사가 할미 복장한 사람을 공개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체 6차에 걸친 트릭이 실현된다. 여기서 어사 곤경 작전의 전체 구상과 지휘는 감사와 부윤이 했지만, 기녀가 가장 큰 역할을 감당했다. 여색을 탐내다가 추태를 당한 어사 역시 위의 원님과 마찬가지로 일방적 트릭 구사에 의한 희생자이다. 그러므로 이런 트릭 구조는 일방적 복합 트릭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주고받는 트릭 구조는 어떠한가? 「맹인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셔 천한 신분을 면한 과부(1화)」의 구조는 단선적이기는 하지만, 역습 구조이다. 문면에 이 과부의 신상 명세는 공개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친정에서 이 여인의 개가를 도모한 데서 트릭이 실현된다. 이를 차례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① 친정 모친이 위중하니, 급히 오라는 전갈이 오다.
② 과부는 시어머니에게 푸닥거리 구경 갔다 온다고 둘러대고 친정으로 달려가다.
→ (과부의 개가를 위한 흉계) ← 과부가 음식을 싸들고 인근 친척을 방문하고 온다고 둘러대며 몸을 빼서 시어머니에게 돌아오다.
여기서 3차 트릭이 드러나지만, 실제 상호 대응 방식은 친정 대 과부이다. 즉, 친정에서 1차 트릭을 구사했지만, 그 트릭 목적이 과부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그녀는 역습으로 트릭을 구사해 위기를 벗어난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가해 오는 트릭을 받아치는 구조를 역습 트릭 구조라고 할 수 있다. 40화인 「과부 보쌈 하려다가 노총각을 업고와 누이동생과 결연됨」 역시 이러한 서사 구조이다. 원주 고을에 초년 과부 이씨는 수절했다. 이씨는 이웃의 안씨 성을 가진 한량이 보쌈을 하려는 것을 미리 감지하고 대처해 위기를 모면했을 뿐 아니라, 노총각 동생을 장가들게 한다.
밤에 안씨네 장정 십여 명이 담을 넘어 와 이씨를 보쌈 하러 오다 → (이씨를 훼절시키기 위함) ← 이씨는 남동생을 자신처럼 꾸며 대신 보쌈 당하게 하다(안씨네 아가씨와 결연됨)
안씨 식구들이 누이 대신 보쌈 당해 온 노총각을 아가씨 방에 넣어 그녀와 하룻밤을 지내게 한 데서 이씨의 역습 트릭이 실현된다. 노총각과 미모 아가씨의 하룻밤 기연은 곧 부부 결연으로 이어진다. 이씨에게 흑심을 품었던 안씨는 급기야 역습 트릭에 걸려든다. 과부 이씨는 이미 이렇게 되리라는 계산으로 남동생을 대리 보쌈을 시켰을 것이다. 그래야만 앞뒤의 논리가 맞다.
여기서 이러한 역습 트릭 구사를 위해 당사자의 결단과 용기 있는 행동이 뒤따라야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위 일방적 구조에서는 트릭을 당하는 쪽이 트릭 구사 쪽의 흉계를 시종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데 비해, 여기서는 트릭을 당하는 쪽이 그 흉계를 미리 감지하거나 즉각 파악해서 역습한다는 데서 변별된다.
야담에서의 트릭 수용의 문제는 여전히 보완되어야 할 사항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우선 [파수록]에 반영된 트릭을 중점 검토해 보았다. 이 외에 다른 야담집에서 보여 지는 수많은 사례의 분석과 분류 작업도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6. 마무리
[파수록]이 지닌 문학성에 대해 정리했다. [파수록]은 우선 화술을 통한 성 해학 묘사가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이 [어면순]이나 [촌담해이]처럼 완전 개방적이지는 않지만, 우회 수법을 통해 남녀의 성정을 표현했다. 그리고 작가는 인정이 사라지는 세태를 주목하고 주색잡기로 인해 소모적 인생을 사는 못난이들에게 해학이 담긴 경계를 제시했다. 특히, 이 야담집에 등장하는 작중 인물의 신분은 대부분이 하층인이다. 작가는 그들의 진솔한 삶의 묘사에 초점을 두되, 그들이 지배층에게 경쾌한 웃음으로 접근해 공략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트릭의 수용 양상으로 일방 트릭 구사와 역습 트릭 구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일방적 구조는 트릭을 당하는 쪽이 트릭을 구사 쪽의 흉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반면에 역습 트릭 구조는 트릭을 당하는 쪽이 상대의 트릭 흉계를 미리 감지하거나 곧 파악해 역습한다는 데서 변별된다. 이는 기존 고대 소설의 신이적 요소가 극복된 부분이다. 이런 점이 야담에서 난제 극복의 서사 구조로 주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작가는 매 작품 말미에서 작중 인물의 행동 양상을 총평하면서, 자기의 목소리를 담아 두었다. 전체 작품 구도가 해학과 감계의 적절한 조화라 할 수 있다. 작중 인물은 우회적이고 유연한 해학으로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냈다. 결국 작가는 경쾌한 웃음을 바탕으로 해서 경계와 풍자를 제시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 이야기가 단순 유희로 마무리되지 않고 뚜렷한 작가 의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곧 편찬자는 견문하고 들은 원래 이야기에 유연한 해학을 가미해서 느긋한 풍자와 감계를 제시했다. 그런 과정에서 고도의 작가 의식이 작품에 스며들어 [파수록]의 문학성을 드높여 준 것이다.
출처 : 이원걸, '파수록의 문학성', [安東漢文學論集] 第6輯, 安東漢文學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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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걸, [조선후기 야담의 풍경, 도서출판 파미르, 2006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