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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O 40주년 특집 박진만 일러스트 / 출처=KBO
그가 서 있는 곳이 곧 수비의 중심
마운드에 선 투수, 캐처스박스에 앉은 포수와 달리 야수에게는 딱 정해진 자리가 없다. 상황과 상대 타자에 따라 수비 위치를 조금씩 이동한다. 특히 유격수는 100여 년 전 외야에서 내야로 이동한 포지션이다. 타구가 가장 많이 향하는 곳, 그 길목을 유격수가 지킨다. 그가 서있는 곳이 곧 수비의 중심이다. 이건 프로 20년 동안 유격수로 활약한 박진만의 이야기다.
‘수비의 신’도 두려웠던 순간
“유격수 위치에서 보면 야구가 정말 잘 보여요. 투수가 던지는 공, 타자의 스윙이 눈에 다 들어오죠. 정말 재미있어요. 물론 승부의 주인공은 투수죠. 그런데 공이 투수의 손을 떠나면, 그 다음은 바로 나, 유격수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어요. ‘어떤 공이든 와라. 내가 다 잡아줄게’하는 마음이었어요.” 박진만의 눈이 반짝였다. 선수 시절 그라운드에서 보였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서글서글하지만, 자신감과 안정감을 잔잔하게 내뿜었다.
인터뷰하는 동안 박진만은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았다. 외야수들을 등지고, 내야수들과 열을 맞추고, 무릎을 굽힌 채 타자와 맞서는 유격수로 돌아간 듯 했다.
박진만의 수비는 진공청소기 같았다. 근처로 오는 타구를 말끔히 흡수했다. 그라운드를 헤매던 공은 순식간에 박진만의 글러브로, 그리고 그의 오른손으로, 어느새 1루수 미트로 이동했다. 까다로운 타구를 어렵지 않게, 서두르지 않아도 재빠르게 수비했다. 박진만은 KBO리그 40년 역사상 가장 완성도가 높은 유격수였다.
그런 그도 놓친 공이 있었다. 시즌 평균 12개, 통산 240개의 실책을 저질렀다. 박진만은 이 실책들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 “잡지 못한 공은 머릿속에서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 공을 놓치지 않거든요. 그래도 그 공은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잊을 수 없는 단 하나의 공이 떠올랐다. 많은 야구팬 기억에도 남아 있는 ‘수중 경기’. 바로 2004년 11월 1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현대와 삼성의 한국시리즈 9차전 9회 말 2사 1·2루였다. 경기 중 내린 폭우로 그라운드가 범람했다. 플레이하기도 어려웠지만, 경기를 멈추기는 더 어려웠다. 2회 초 8점을 뽑은 현대가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대는 9회 말 8-7로 쫓겼다. 경기를 중단하려 했다면 현대든, 삼성이든 누군가의 편을 들었다고 오해를 샀을 것이다. 이미 세 차례나 무승부를 벌인 시리즈를 9차전에는 끝내야 했다. 그 경기장은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
삼성 신동주의 타구가 힘없이 떴다. 현대 마무리 투수 조용준이 손가락으로 3루수를 가리켰다. 공은 굵은 빗방울과 함께 내렸다. 모두들 다리가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러자 현대 유격수 박진만이 달려왔다. 빗속에서 얼핏 공을 본 것이다. 그러나.
“유격수, 유격수. 아! 놓쳤어요. 놓쳤어요. 놓쳤습니다!” 중계 캐스터가 소리쳤다. 마운드 앞까지 달려왔다가 공을 놓친 박진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비수인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의 냉철함이 흔들린 것이다. 2사 만루.
“빗속에서 공을 보긴 했는데, 잘 안 보였어요. 오히려 우승 세리머니를 하려고 더그아웃에서 뛰쳐나오는 현대 동료들이 보였죠. 그런데 투수와 3루수가 공을 못 쫓아가는 거예요. 멀리 있던 제가 막 뛰어갔죠. 시야가 더 흔들려서 결국…. 그런 좌절을 느낀 건 야구하면서 처음이었죠. 공을 놓친 뒤 다음 타구는 제발 나한테 오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 다음 타구(특히 땅볼이라면)가 다시 유격수 방향으로 갔다면 어땠을까? 그라운드는 이미 논과 같았다. 수비의 신이라도 아웃시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삼성 강동우의 타구는 1루 쪽으로 굴러갔다. 현대 1루수 이숭용은 조용준에게 공을 토스하기도 어려워 직접 베이스를 밟았다. 8-7로 승리한 현대가 4승 3무 2패로 시리즈를 제패했다.
“정말 짜릿했어요. ‘이게 야구다’ 싶었죠. 완벽히 준비했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었잖아요. 내가 잘못했어도 동료들 덕에 실수를 만회했어요. 이게 또 인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우승의 순간, 항상 그가 있었다
박진만이 타구를 두려워한 순간은 또 한 번 있었다. 2008년 8월 23일 중국 베이징 우커쑹 스포츠센터 메인구장에서 열린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결승전 9회 말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선발 류현진의 호투와 4번 타자 이승엽의 홈런으로 쿠바를 3-2로 앞섰다. 9회 말 류현진이 1사 만루에서 물러나고 정대현이 등판했다. 타석에는 쿠바를 대표하는 강타자 율리에스키 구리엘이 들어왔다.
한국 내야수들은 병살 플레이를 노리는 시프트를 했다. 특히 유격수 박진만과 2루수 고영민은 평소 병살 플레이 때보다 한 걸음 더 전진했다. 구리엘 발이 빠르기 때문에 최대한 앞으로 나와야 했다. 정면 타구가 아니라면 병살을 포기하고 3루 주자를 홈에서 잡자는 약속이 돼 있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치면 (팬들의 비난 때문에) 한국에 못 들어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번 타구는 내 앞으로 오지 않길 바랐죠. 혹시 실수할까봐….”
걱정이 박진만의 몸을 누르는 순간 ‘딱’ 소리가 들렸다. 공은 유격수 정면으로 향했다. 타구 스피드가 꽤 빨랐고, 박진만이 상당히 전진해 있었기에 그라운드 안의 긴장감은 더 커졌다. 세 번 바운드 된 공은 박진만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어느새 그는 2루 토스를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에서 나온 수비. “유격수, 떠블 플레이, 떠블 플레이! 고영민, 고영민!”
아직도 생생한 현장 중계진의 외침. 그건 차라리 비명이었다. 박진만이 정확히 올린 공은 고영민 품에 안겼다. 그리고 고영민이 몸을 틀어 2루로 러닝스로를 했다. 몸이 뒤로 가면서 팔은 앞으로 뻗는 ‘페이드어웨이슛’ 같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온 난이도 최상급 동작. 한국인들의 심장이 오그라든 순간이었다. 박진만도 숨죽이며 그 장면을 지켜봤다.
“어느새 내 앞으로 공이 오더라고요. 그땐 오히려 생각이나 감정이 없었어요. 훈련한 대로 본능적으로 공을 잡아 던졌죠. 고영민도 그 위치에서 잘한 수비였어요. 피봇 플레이가 빨랐죠. 대신 그 자세에서 송구는 강할 수 없었어요. 공에 힘이 없어서 떨어지는데, 승엽이가 딱 잡아냈죠. 아, 그 순간은 정말….”
박진만은 한국 대표팀이 9전 9승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마지막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자리에서였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 시절 박진만 / 사진 출처=KBO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9회와 2008년 베이징올림픽 9회를 제외하면 박진만은 모든 타구를 즐겼다. 어려운 타구를 쉽게 잡았고, 못 잡을 것 같은 공도 어떻게든 잡아냈다. 묘기 같은 동작을 보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 편안하게 수비했다. KBO리그 유격수 계보에 김재박-류중일-이종범에 이어 박진만이 꼭 들어간다.
박진만의 전성기는 한국 야구의 황금기와 일치한다. 특히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 신화의 배경에는 한국 대표팀의 탄탄한 수비가 있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박진만의 수비에 깜짝 놀랐다. 박진만은 ‘국민 유격수’로 불렸다.
‘수비 특훈’한 수비 천재
학창시절 박진만은 에이스 투수이자 4번 타자, 그리고 유격수였다. 인천고 3학년이 되던 해 청백전을 하다 왼 무릎 인대를 크게 다쳤다. 당시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운동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까까머리 박진만은 의사 몰래 재활훈련을 반복해 8개월 만에 돌아왔다. 그러나 3학년이 아닌 2학년으로 복학했다.
유급생이었어도 기량이 워낙 출중했다. 고려대 진학이 예정된 그를 현대가 ‘납치’하며 스카우트했다. 파격적인 투자를 이어가던 현대 구단이 ‘수비의 핵’으로 고졸 신인을 낙점한 것이다. 박진만은 1996년 당시 야수 최고 계약금(2억8000만원)을 받았다.
“김재박 감독님이 계신 팀으로 간다는 게 너무 좋았어요. 훌륭한 유격수 선배님들이 여럿 있지만, 어려서부터 제 우상은 김재박 감독님이셨거든요. 그 플레이를 너무 닮고 싶었습니다.” 고교 시절 수비 천재였다고 해도 프로에서는 애송이였다. 김재박 현대 감독은 정진호 수비코치가 박진만의 멘토가 되도록 했다. 타격은 못해도 좋으니 수비부터 완벽하게 만들라는 지시였다. 타고난 재능에 체계적인 훈련이 더해졌다.
“신인 때부터 스프링캠프에 가면 수비 훈련만 매일 3시간씩 했어요. 타격은 30분쯤 했나? 다른 선수들은 야간 특타(특별 타격훈련)를 하는데, 전 수비를 더 했으니까요.”
박진만은 신인 때 주전 유격수를 꿰찼다. 타율도 0.283으로 괜찮았다. 이듬해 타율은 0.185에 그쳤다.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KBO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낮은 타율(최저는 86년 권두조·0.162)이었다. 그래도 김재박 감독은 박진만을 주전으로 썼다. 98년 타율이 0.203이었어도 마찬가지였다. 프로 데뷔 첫 해부터 “수준급 수비를 한다”고 평가 받았던 박진만은 슬슬 타격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명 유격수 출신 김재박 감독 체제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었다. 데뷔 후 4년 동안은 수비에만 집중했다.
▲ ‘명품 유격수’로 빛나는 박진만. 2000년 골든글러브 수상 장면 / 사진 출처=KBO
쉬는 날에도 쉬지 않았다. 당시 현대는 플로리다에서 두 달 가까이 캠프를 치렀다. 휴일에 정진호 코치가 박진만을 차에 태우고 메이저리그 훈련장을 견학했다. 세계 최고의 유격수를 보고, 배우고, 꿈꾸라는 뜻이었다.
“메이저리그 유격수들의 탄력과 스피드는 제가 못 따라가죠. 대신 제가 잘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WBC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만났을 때 수비 위치를 잘 잡은 것도 그때 터득한 요령 덕분이었죠.”
‘명품 유격수’의 탄생
탄탄한 기본기 위에 신기와 묘기가 더해졌다. 박진만은 다른 유격수보다 1초쯤 먼저 사는 것 같았다. 타구가 올 곳을 미리 아는 것처럼 ‘첫 발’을 내디뎠다. 바쁘게 뛰지 않아도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공을 잡은 거 같은데 이미 던지고 있었다.
“상황에 따라 달라요. 타구가 깊지 않거나, 주자의 발이 느리면 정확성이 우선이죠. 확실하게 잡은 뒤 정확하게 던집니다. 그런데 빠른 주자를 잡아내는 동작은 하나여야 합니다. 공을 잡기 전에 던질 준비도 하는 거죠. 수비는 스피드가 아니라 연결이고 흐름입니다.”
다른 선수가 이렇게 말했다면 이상론자의 연설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모습을 수없이 보여줬다. 타임 리프(time leap)를 하는 것처럼 다음 장면을 내다보고 움직였다.
그건 초능력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과 지독한 노력의 결과였다. 수많은 타구를 받아보고, 타자의 스윙을 분석한 덕분이다. 스프레이 차트가 없던 시절, ‘시간을 달리는 유격수’는 머릿속에 있는 데이터로 1초 앞을 예측했다.
그렇게 박진만은 한 발을 먼저 내디딜 시간을 얻었다. 한 발 더 가서 못 잡을 것 같은 타구를 잡았다. 한 스텝을 더 밟아 얻은 추진력으로 더 강하게 송구했다. 한 땀 한 땀의 노력이 ‘명품 유격수’를 만들었다.
큰 경기서 더 빛난 ‘우승 청부사’
현대는 98년을 시작으로 2000년, 2003년, 2004년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올랐다. 현대에 여러 스타가 있었지만, ‘수비의 핵’ 박진만도 빼놓을 수 없는 주인공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 국가 대표팀에서도 그의 자리는 확고했다.
수비가 완성되자 타석에서도 실력이 나왔다. 2001년엔 타율 0.300(리그 19위), 홈런 22개(리그 1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2015년 은퇴할 때까지 프로 20년 통산 타율 0.261, 홈런 153개를 기록했다. 2000년 이후에는 공격에서도 그의 기여도가 작지 않았다.
‘현대 왕조’의 일등공신인 박진만은 2004년 한국시리즈를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어 삼성으로 이적했다. 4년 총액 39억원의 계약이었다. 홈런왕이나 에이스가 아닌 유격수가 당시 그만한 가치를 평가 받은 건 놀라운 일이었다.
삼성은 곧바로 2005년, 2006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박진만은 현대 시절을 포함해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챔피언 반지를 받았다. 큰 경기일수록 그의 안정적인 수비는 더 돋보였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 결승타를 포함해 25타수 7안타를 때려내며 MVP에 올랐다. 강렬한 타격보다는 수비력이 높은 평가를 받은 덕분이었다. 박진만이 낀 우승 반지는 6개나 된다.
▲ 2006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 박진만 / 사진 출처=KBO
간절함을 배운 김재박의 페르소나
박진만의 야구가 그의 수비처럼 매끈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교 시절과 프로 말년 무릎 부상으로 꽤 고생하기도 했다. 야구가 잘 될 즈음 방심하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그에겐 냉엄한 멘토가 있었다. 2004년 3월 28일. 마지막 시범경기가 끝난 뒤 김재박 현대 감독은 배트를 들고 직접 펑고(수비수를 향해 공을 때리는 훈련)를 치기 시작했다. 잡기 좋게 툭 때려주는 게 아니라 10m 앞에서 강하고 험한 타구를 100개쯤 날렸다. 선수는 포수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공을 요령으로 잡지 말고 몸으로 막아내라는 뜻이었다. 누가 봐도 포수의 블로킹 훈련이었다.
그 지독한, 어쩌면 체벌 같은 훈련을 마친 선수가 포수 마스크를 벗었다. 놀랍게도 박진만이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깊은 숨을 토해냈다. 당시 수원구장에는 현대 코칭스태프뿐 아니라 취재진도 있었다. 국내 최고의 유격수가 이런 가혹한 훈련을 받다니? 그것도 공개적으로? 처음 본 장면에 기자는 깜짝 놀랐다.
김재박 감독은 “곧 FA가 되는데 독하게 해야지”라고 말했다. 시범경기라고 느슨하게 수비하는 박진만을 나무란 것이다. 김재박 감독의 맨손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흘렀다.
김재박 감독은 말로 하지 않았다. 코치를 통하지도 않았다. 어느덧 스타가 된 박진만을 직접 다잡았다. 이 장면은 김재박과 박진만이 지도자와 선수 사이를 초월한, 감독과 페르소나 같은 관계라는 걸 보여줬다. 박진만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야구가 막 재미있을 때였어요. 그때 감독님이 절 잡아주신 거죠. 공 하나하나에 간절함을 담으라는 야구의 기본을 다시 일깨워주셨습니다.”
▲ 2000년대 중반 이후를 대표하는 유격수 2명, 박진만·손시헌 / 사진 출처=KBO
2010년 삼성을 떠나 SK에서 5시즌을 뛴 박진만은 선수 은퇴 후 지도자 과정을 착실히 밟고 있다. SK 코치를 거쳐 삼성 코치, 퓨처스 감독을 지내다 2022년 8월 삼성의 감독대행이 됐다. 야구를 가장 재미있게 보는 유격수 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야구가 가장 어려운 사령탑 자리에 오른 것이다. 박진만의 리더십은 그의 유격수 수비와 비슷하다. 기본에 충실하고, 팀을 위해 악착같이 함께 뛰는 것이다.
“선수 개인의 기량보다 팀을 위해 협력하고 희생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몸을 던지는 선수가 많아야 우승할 수 있다는 걸 오래전부터 봐왔거든요.” 박진만과 대화를 마칠 때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 팝플라이가 다시 떠올랐다. 꽤 먼 타구를 잡겠다며 진흙탕을 헤엄치듯 달린 건 유격수로서의 책임감이었다. 승리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유격수로 최고의 ‘첫 발’을 보여줬던 그는 사령탑으로서의 첫 걸음도 그렇게 뗐다.
김식 기자 / 일간스포츠
자료출처 : 네이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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