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민의 울분을 사실적寫實的으로 표출
-설의식의 <헐려짓는 광화문光化門> 조명
헐려짓는 광화문
설의식薛義植(1900-1954) 신문기자. 산문집《통일시대》 《화동시대》 등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廳舍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物件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怒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意識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回避도 기뻐도 서러워도 아니 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 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백년 동안 풍우風雨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어도 할 뿐이다.
석공石工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뚜닥닥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役軍의 든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잘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팔도강산의 석재石材와 목재木材와 인재人材의 정수精粹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億萬 방울의 피가 흐르고 개와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靑苔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있고 풍설風雪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풍우 오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守舊黨도 드나들고 개화당開化黨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使者도 지나고 살벌殺伐의 총검銃劍도 지나며 일로日露의 사절使節도 지나고 원청元淸의 국빈國賓도 지나든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天職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天命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지가 오래였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랴?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雄健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시 이인伊時伊人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理想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北岳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경복궁景福宮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數年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 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長安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1926년 《동아일보》에 발표
우리는 안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곳을 알고, 그 사람을 알고, 그 일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곳을, 그 사람을, 그 일을 정말로 알고 있을까?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암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수학 공식이나, 과학 법칙을 암기하고 활용하듯 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그곳에 가서, 그 사람과 만나서, 그 일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몸소 겪으며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한 뒤라야 그곳에 대하여, 그 사람에 대하여, 그 일에 대하여, 조금은 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에 대해 앎은 더욱 그러하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廳舍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헐려 짓는 광화문>의 서두이다. 일본제국주의가 신축하는 조선총독부 청사의 앞을 가린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 있는 건춘문建春文 뒤로 옮겨 짓기 위해 강제로 헐고 있다. '덕택'은 반어이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物件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怒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의식意識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回避도 기뻐도 서러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 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광화문은 조선의 권위와 위엄, 곧 우리 민족의 역사적 자존을 상징하지만 의식 없는 물건이다. 그래서 부당한 처사에 슬퍼하거나 분노할 줄도 강력한 억압에 반항하거나 회피할 줄도 모른다. 다만 조선의 역사를 함께 숨쉬어온 국민들이 헐리는 광화문을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조선의 역사를 광화문에 기탁하여 일제日帝가 강제로 그를 허는 것이 민족의 역사가 단절당하는 안타까움을 표출하고 있다.
오백년 동안 풍우風雨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어도 할 뿐이다.
석공石工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뚜닥닥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役軍의 든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잘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추상적인 앞 단락을 구체화하여 감각에 호소함으로써 광화문이 헐리는 광경을 선명하고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물건인 광화문이 느끼지 못하지만 ‘뚜닥닥’ ‘우지끈’과 같은 헐리면서 나는 소리를 듣는 이들의 괴로워하는 우리 민족의 마음을 감각적인 아픔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락에서부터 광화문을 본격적으로 의인화하여 우리 민족과 동체同體로 보고 있다.
팔도강산의 석재石材와 목재木材와 인재人材의 정수精粹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億萬 방울의 피가 흐르고 개와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靑苔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있고 풍설風雪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우리나라 최고의 자재資材와 인재를 뽑아 지은 광화문. 지으면서 흘렸던 피와 눈물. 그래서 광화문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고 우리 민족과 함께 살아온 정신적인 동질체이다. 오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고난을 함께 해왔기에 우리 민족의 일원이다. 그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고 강압에 의해 무너지는 데 대한 울분을 돈호법을 이용하여 강하게 토로吐露하고 있다.
풍우 오백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守舊黨도 드나들고 개화당開化黨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使者도 지나고 살벌殺伐의 총검銃劍도 지나며 일로日露의 사절使節도 지나고 원청元淸의 국빈國賓도 지나든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天職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天命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
조선말 격동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구당과 개화당의 대립에서 촉발된 청淸 • 일日• 러 외세의 유입으로 인한 다난多難한 역사. 종국에는 국권을 상실하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여 일본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헐리고 있는 광화문. 국내의 권신權臣들과 국외의 내빈來賓들을 맞이하고 내보내는 것이 천직이요, 국빈을 인도하여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 천명이었던 광화문. 이러한 광화문이 강압에 의하여 헐려 경복궁의 동쪽으로 옮긴다는 역사적 현실을 타고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사람에 의탁하여 애통해하고 있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지가 오래였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가 어떻게 지내랴?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래였거니와’에서 화자는 경술국치의 역사적 현실을 절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국권의 상징인 광화문이 ‘그 방향 그 터전’에 서 있어 위로를 받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는데 오랜 역사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광화문이 헐리고 옮겨지면 우리의 위로와 희망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절망에서 오는 애통을 표현한 것이지만 화자의 내면에는 절대로 희망은 꺾이지 않는다는 단호함이 숨겨져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만해의 <임의 침묵>의 한 구절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가 연상된다.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의 그 사람이 아니고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雄健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시 이인伊時 伊人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理想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北岳을 등진 옛날의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경복궁景福宮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본래 광화문은 정궁正宮인 경복궁의 정남쪽에 세운 궁의 정문이다. 궁의 정문을 정남쪽에 세우는 것은 남면지위南面之位 곧 임금님의 권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옮겨 짓는 곳은 궁의 동쪽에 있는 건춘문建春文 뒤이다. 건춘문은 차세대 왕인 세자가 거처하는 궁의 문이다. 경복궁을 다시 짓는다고는 하나 그 짓는 이들이 우리 민족이 아니며, 그 짓는 솜씨가 우리의 전통적인 건축술이 아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옮겨 짓는 것이 처음 지을 때 국가의 무궁한 융성을 기원하며 신명이 났던 우리 조상들이 짓던 것과 비슷할 수도 없다.
옮겨 짓은 광화문은 이미 광화문이 아니다.
서로 보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數年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長安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국권을 상실한 뒤 몇 년 동안 접근할 수조차 없이 된 우리나라의 대궐 경복궁은 일본제국주의의 통제를 받아 대궐의 기능, 곧 우리 민족의 주권이 상실되었다. 여기서 ‘서로 보도 못한’에는 경복궁과 화자 사이의 애틋한 친근감을, ‘장림에 남은 비가 오락가락한다.’에는 일제식민지 하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경복궁에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고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광화문 지붕을 부수는 망치 소리가 한성을 에워싼 북악산과 남산에 부딪고 우리 백의민족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함은, 비록 일제의 식민지치하에 들기는 하였지만 국권의 상징이요, 민족의 자존심으로 지키고 싶었던 광화문마저 강압에 의하여 헐리는 애통한 현실이 전민족의 울분을 자아낸다는 것으로 대유법과 과장법을 써 울림을 더하고 있다.
문학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성寫實性이다. 머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호소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도록, 귀에 들리도록, 피부에 와 닿도록 표현한다. 문학작품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가슴에 울림을 주어야 한다.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를 알아내는 일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사실을 설명하여 이해시키는 어떤 일에 대하여 필자의 주장을 펴는 글은 문학작품이 아니다. 이런 논리적인 글은 필자의 지식이나 견해만 있을 뿐 독자의 몫이 없기 때문이다.
<헐려짓는 광화문>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 26세의 기자 설의식이 써 발표한 글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事實을 적확히 전달한다거나 사실에 대한 필자의 주장을 형식논리에 의하여 직설한 기사문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제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의인법, 비유법, 의성법을 활용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사실성을 획득하고 있다.
영탄법, 돈호법, 반복법에 의한 격앙된 어조로 일관하여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점은 수필의 본령에서 벗어났다 하겠으나 읽는 이의 가슴에 호소하여 큰 울림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높이 살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