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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족은 강했다. 궁술도 기마술도 강하지만 무엇보다도 굽힐줄 모르는 투지가 무서울 정도였다. 삼십여 장 앞에 보이는 격전지를 바라보며 육척의 장창을 꼭 쥔 무정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떨고 있었다.
마백호는 일순 후회했다. 아직 이런 일을 겪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음을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본진의 우측에서 적의 복병이 나타났다. 기마를 타고 나타난 그들은 상당한 속도로 본진을 타격했다. 말과 사람. 그리고 적아(敵俄)의 구분 없는 난전(亂戰)이 시작되었다.
“크~~악!..”
“어흑,,이.. .. 이런..커흑!”
누구의 목소리인지도 모르는 알 수 없는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무정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두발이 땅에 붙어 버린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한 여진족병사가 만도를 치켜들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피해야 했다.
하지만 무정의 발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병사는 만도를 내리쳤다. 무정의 눈에 희뿌연 도의 잔상이 자신의 미간을 향해 떨이지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까!~강..”
청아한 한줄기 울림소리와 함께 만도가 무정의 머리 한자 앞에서 멈추었다. 마백호의 검이었다. 마백호는 검을 들어 올리며 오른발로 여진병사의 명치를 가격해 저만치 날렸다.
“정신차려라! 몸을 움직여!. 상현촌의 네 부모와 동생을 생각..”
마백호는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적장임을 짐작한 여진족들이 한꺼번에 덤빈 것이었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병사가 마백호를 둘러싸고 만도를 날리고 있었다.
무정을 퍼뜩 정신이 들었다. 복수..복수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합리화 시켜야만 했다. 그의 정면에 여진족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은 이미 얼어붙은 자신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한여진족 병사의 등이 보였다. 그 병사는 마백호를 향해 뒤에서 만도를 날리는 도중이었다. 무정은 반사적으로 창을 내질렀다.
“푸~욱..”
“캬아아악..”
등을 조준한 그의 창은 엉뚱하게 병사의 옆구리에 박혔다. 손아귀를 통해 기괴한 파육감(波肉感)이 전해졌다. 하마터면 그 이질적인 느낌에 창을 놓칠뻔 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배운 대로 창대를 힘껏 돌렸다.
“아아악..”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여진병사의 옆구리살이 한웅큼 뜯겨나갔다. 그의 몸에서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무정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창을 휘둘렀다. 마치 최면을 걸 듯이 그의 입은 끝없이 중얼거렸다.
“복수....복수....복수....복수....”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명군은 간신히 승리할 수 있었다. 마백호는 온몸에 피칠을 한 채 복수라는 단어만을 되뇌는 무정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손바닥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무정의 몸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은 철수했다.
주둔지에 돌아온 마백호는 간단한 상처치료를 마치고 무정의 막사에 들렸다. 무정은 없었다. 그는 막사를 나와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저쪽 막사 끝 어스름한 우물가에서 한 소년이 우물물을 몸에 끼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정이었다. 마백호는 무정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발걸음을 멈추었다.
소년은 더 이상 물을 뿌리지 않았다. 그는 우물가에 주저앉아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아마도 울고 있을 것이었다. 살인.. 열네 살의 어린소년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몸을 돌려야 했다. 그 누구도 소년을 도와줄 수 없었다. 스스로 헤쳐 나와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마백호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사년 후의 무정이 막 적의 궁수대 안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방패를 집어던지며 대형을 흐뜨러뜨린 그는 팔척의 미첨도(眉尖刀)를 휘둘렀다. 거의 일장에 가까운 공간 안의 모든 것이 풀을 베듯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그리고 그 뒤에 명군이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다. 무정은 곳곳에 그런 공간을 만들며 한 마리의 야차(夜叉)처럼 적 진영을 헤집고 다녔다.
마백호는 작은 한숨을 쉬었다. 무정은 이제 완전히 살인의 거부감을 떨쳐냈다. 그러나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 첫 출전 이후 꼬박 이틀을 앓아 누운 그는 자리를 털자마자 매일 같이 전장으로 나갔다. 교대도 없었다. 근 사년간을 전투가 없거나 정말 심하게 다치지 않은 이상 절대로 쉬는 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느새 적의 진형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무정의 신형이 본진의 적장근처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무정이 미첨도를 치켜들며 도약하는 모습이 보였다. 착각이었을까? 그의 미첨도에 검은 기운이 서린 듯 했다. 무정은 내려오면서 힘차게 도를 내리쳤다.
“ ! ”
마백호는 눈을 크게 떴다. 뒤로 물러서던 적장의 머리가 두 쪽이 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분명히 무정의 미첨도는 적장의 몸에 닿지도 않았었다.
“도기?…도기인가?…”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마백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없었다. 무정은 내공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황이 급변했다. 적장이 죽은 적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마백호는 총공격을 명했다. 이 전투도 명군의 승리가 될 것이다.
문득 마백호는 바람이 차게 느껴졌다. 어느새 10월이었다. 곧 눈이 내리는 겨울이 될 것이다. 그럼 자신들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에는 여진족도 전면전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약탈만은 간간히 계속되었던 것이 그간의 통례였다.
그렇게 또 다시 시간은 흘러갔다.
내륙의 겨울을 혹독했다. 두터운 솜옷으로 몇 겹이나 둘러싸도 한기는 계속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겨울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달랑 짐승가죽 한 장만 걸친 사람이 있었다.
그런 그의 주위에는 육칠십 명의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친구관계는 아닌 듯 그들의 눈에는 적의로 가득 차 있었다.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에 두 손에는 묵빛 수투를 끼고 있었고 긴 흑발을 차디찬 겨울바람에 날리며 한손에 미첨도를 든 그는 발목까지 파묻힌 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하이얀 눈의 색이 아닌 붉은 색의 눈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눈을 만든 것은 발밑의 명군복색을 한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피였다.
갑자기 사내의 전면에서 인마가 갈라지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이 무리의 인솔자인 듯 한 그는 두꺼운 양의 가죽을 서너겹 겹쳐 두르고 있었고 머리에는 짐승의 털모자에 양쪽으로 흰털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흐흐흐 .. 드디어 네놈도 이곳에서 죽는구나. 그동안 네놈의 손에 죽은 부족민을 생각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은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기필코 네놈은 나 마노토의 손에 죽는다.. 바로 지금!”
마노토라는 이름을 밝힌 중년인은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주위를 둘러싼 창병이 뒤로 십여 장 가까이 물러났다.
중앙에 포위된 인영은 그나마 쓰고 있던 짐승가죽마저 벗어던졌다. 체온유지도 좋지만 지금은 우선 목숨이 급했다. 걸리적거리는 것은 벗어야 했다. 드러난 그의 몸은 우람했다.
전신의 근육은 인간이 부풀리수 있는 최대한도로 부풀어 있었다. 왼팔 전체를 둘러싼 묵빛 갑주, 그리고 수투를 낀 손에 쥐어진 팔척의 미첨도.. 스무살의 건장한 청년이 된 무정이었다.
“말이....많은 놈이군.
한쪽 얼굴의 흉터를 일그러뜨리며 무정이 말을 뱉었다. 마노토의 눈이 역팔자로 곤두섰다.
“한족놈들....곧 죽어도 큰소리구나! 기마대 돌격!!”
피를 토하듯 외치는 소리에 땅가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장 마노토의 뒤쪽으로 하얀 안개가 피어올랐다. 무정의 눈이 좁혀졌다. 수십기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팔척의 미첨도를 어깨 뒤쪽으로 쳐들었다.
“두두두…”
만도를 치켜든 기마병들이 넉장정도의 간격으로 두줄로 갈라지며 적장을 스치듯 지나쳤다. 무정은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는 왼쪽으로 신형을 날리며 미첨도를 휘둘렀다.
“쩌~엉”
첫 번째 격돌이 시작되었다. 적병의 만도와 수급이 동시에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간발의 차이를 노린 일격이었다. 무정의 손에 끝없는 저림이 느껴졌다. 기마의 힘은 대단하다. 말의 속도와 그위의 병사가 휘두르는 칼은 정확히 맞으면 아름드리나무도 두쪽이 나는 힘이었다. 무정은 떨리는 손을 다잡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몇 마리의 기마가 그의 옆을 지나갔다. 그와 함께 오고 있는 기마의 전형이 변했다.
뒤쪽에 오는 말들이 방향을 틀어 일렬로 빽빽하게 늘어섰다. 그대로 무정을 깔아 짓밟으려는 의도로 전형적인 여진족의 전술이었다. 옆으로 피해 봤자 둘러싼 창병들과 드잡이질 하다가 되돌아온 기마병에게 죽을 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내달렸다.
무정이 말 앞에 이르는 순간 그는 공중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순식간에 그의 신형이 말위로 떠올랐다. 그의 미첨도가 벼락같이 아래에서 위로 긁듯이 쳐올려졌다.
“까강…”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말탄 병사는 땅위로 떨어졌다. 무정은 손의 감촉이 이상한 것은 느꼈다. 급히 착지하면서 미첨도를 바라본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미첨도가 부서진 것이었다. 이런 추위에 금속의 성질은 작은 충격에도 부러질 수 있게 얼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저들이야 검집에서 온도를 조절하고 있었겠지만 몇 시진 째 쫒기는 무정에게는 미첨도가 어는지 마는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낭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기마대는 계속 달려오고 있었다. 이미 일곱여 장 밖에 한기의 기마가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는 자루만 남은 미첨도를 힘껏 던졌다.
“끼~~히히힝”
공중에서 보이지도 않게 회전하며 날아간 미첨도자루는 달려오는 말의 앞다리 사이에 정확히 끼워졌다. 말다리가 꺽이면서 말의 목도 지면과 닿으며 부러졌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마병도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는 공중으로 내던져졌다. 몽롱한 정신에도 기마병은 전방을 주시했다 그의 눈에 무정의 오른다리가 휘둘려 지는 것이 보였다.
“빠각!”
강력한 무정의 각법에 기마병은 왼쪽으로 방향이 꺾여 날아갔다. 이미 생명은 꺼졌을 것이었다.
무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형이 또 바뀌었다. 이제 뒤쪽에서 돌아오는 기마병과 앞쪽에는 오는 기마병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
암담했다. 이젠 무기도 없이 싸워야 했다. 그는 허리춤으로 손을 넣어 투환침(投丸沈)을 꺼냈다. 오촌가량의 투환침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별 소용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는 앞뒤로 달려오는 말들을 향해 제자리에서 한바퀴 돌며 뿌리듯 날렸다.
“히히히힝~”
두필의 말에 몇 개의 투환침이 적중했지만 바로 튕겨나갔다. 독이라도 발랐으면 나았겠지만 무정은 왠지 독만큼은 사용하기 싫어했다. 어쨌든 투환침은 기대이상의 효과를 거두었다. 두필의 말이 투레질을 하며 엉뚱하게 방향이 틀어졌다. 뒤에 오던 말들도 연쇄적으로 방향이 엇갈리고 있었다.
무정은 눈을 빛내며 오른쪽으로 달렸다. 거기에는 아까 죽은 말이 쓰러져 있었다. 그옆에 떨어진 미첨도의 자루라도 쥐어야 했다.
“히힝~”
갑자기 무정의 옆에서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제어가 안 된 말이 폭주하며 날뛰고 있었다. 그는 신형을 날렸다.
“커흑..”
스치듯이 무정의 발끝에 말이 채였다. 그는 공중에서 중심을 잃고 회전했다.
“퍼~억”
무정은 자신의 등에 물컹한 물체가 부딫히는 것을 느꼈다. 급히 신형을 세운 그는 등쪽을 바라보았다. 아까 죽인 말이었다… 천운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부러진 미첨도의 자루를 잡으려했다. 그 순간 모로 누워있는 말밑에 무언가 천에 싸여진 길쭉한 것이 깔려 있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 끌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말 뒤로 신형을 날려 자루인 듯한 것을 잡아 당겼다.
“야..압!…”
무정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말의 무게가 엄청났다. 이윽고 말의 시체가 들석거리더니 무엇인가 긴 것이 딸려나왔다. 어디에선가 걸렸는지 더 이상 빠지지 않았다.
그는 힘을 가하는 와중에도 주위를 살폈다. 이미 기마대는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무정은 젖먹던 힘까지 모두 쏟았다.
“두둑....둑”
말에 매어져 있던 가죽 끈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함께 자루를 둘러싼 천도 찢어지기 시작했다. 무정의 팔에 핏줄이 터질듯이 부풀었다.
“쩌…어…엉…”
맑은소리와 함께 무정의 손이 하늘로 들려졌다. 그는 뒤로 넘어갈 듯한 신형을 겨우 멈추었다. 그의 눈이 손끝으로 향했다.
“!…”
거대한 도였다. 약 칠척 이십촌의 길이에 도신의 폭은 6촌이 약간 넘었고 도신의 길이만 사척이 넘을 것 같았다. 도신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살짝 휘어져 있는 것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벨 수 있을 것 같았다. 찌르는 용도로는 잘 사용하기 힘든 것 같았지만 한쪽의 날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서있었고 백철임에도 불구하고 은은한 묵광이 서려 있었다. 참마도(斬馬刀)였다. 언젠가 무정도 책에서만 본 무기였다. 그만큼 무겁고 사용하기가 난해하여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그 참마도를 거머쥐고 다시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이런....개 같은 경우가!....”
마노토는 귀밑에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저 참마도는 어제 습격한 마을 대장간에서 뺏은 것이었다. 은은한 묵광과 쩌렁쩌렁한 도명이 예사롭지가 않은 물건이었다. 그걸 한 기마병에게 주고 보관하게 했는데 하필 그놈이 죽으면서 저 괴물 같은 놈에게 뺏겨 버린 것이었다.
“뭣들 하나! 당장 저놈을 찢어죽여!”
마노토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젠 저놈을 반드시 죽여야만 할 이유가 또 늘었다.
무정은 참마도의 무게를 가늠했다. 근 삼십여근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그가 쓰던 미첨도는 사십여 근 정도였던 것이었다. 오히려 가벼워진 무기를 그는 한손으로 비를 쓸 듯 휘둘렀다.
“이 정도라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은 무기였다. 무정은 전신에 있는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서서의 참마도의 도신에 묵빛 기류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무정은 자신의 몸에서 몇 년 전부터 알 수 없는 힘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쓸 수는 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무기들이 부서져 나간 것이었다. 그래서 아까 미첨도에서도 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두두두두…”
다시금 기마부대의 돌격이 시작되었다. 어느새 삼장정도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무정은 참마도를 어깨 뒤로 힘껏 제꼈다가 허리를 틀며 묵빛 기류를 뿌렸다. 마치 모래를 뿌리듯 검은 기류들은 원형을 그리며 대기 중으로 사라져 갔다.
“파~아~앗~”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무정은 놀랐다. 아니 기마병 천체도, 둘러싼 장창병도, 적장 마노토도 놀랐다. 앞뒤로 달려오던 두필의 말은 그 기수들과 함께 무정의 어깨 높이에서 잘린 것이었다. 도는 닿지도 않았다. 이상한 기류에 양단된 것이었다.
무정은 참마도의 도신을 보았다. 멀쩡했다. 오리려 기분 좋은 듯 징징 울어대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이런 병기를 손에 넣어 본적은....
“나란 놈에게도.... 친구가 생긴 것 같구나...반갑다....초우(初友)....그래. 나의 첫 친구..초우. 평생을..함께할 수 있기를...초우!…”
미소를 띄우며 무정은 초우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눈앞의 적을 바라보았다. 수십이든, 수백이든, 수천이든 이젠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진하디 진한 살소(殺笑)였다.
묵빛 기류를 머금은 초우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잔혹한 풍경의 시작이었다. 한차례 눈이 오려는지 회색구름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헉…헉…”
털모자에 매달린 늘어진 흰 털뭉치가 마구 휘날렸다. 그가 탄 말은 온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죽어라고 채찍질해대는 기수는 마노토였다. 그 뒤로 십여 기의 기마가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마노토님!…진정하십시오,,그놈은 더 이상 오지 않습니다. 마노토님!”
뒤에서 소리치던 기마병사는 마노토가 반응이 없자 속력을 배가 했다. 그리곤 마노토가 탄 말의 고삐를 잡아챘다.
“워워…워…”
가까스로 말을 진정시키며 속도를 줄였다. 뒤따라오던 말들도 따라서 속도를 줄였다.
“이…이놈 뭐하는 짓이냐! 어서 가야…”
“마노토님!”
벽력 같은 병사의 고함에 마노토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두려웠다. 그놈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게 움직이는 놈을 본적이 없었다. 기마든, 창병이든, 그 망할 묵빛 기류가 닿을 때마다 두 동강이 되었다. 그런 그가 자신을 보고 목표를 바꾼 것을 알았을 때…마노토는 말 고삐를 당겨 바로 도망친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아군 보병들이 못 따라옵니다. 마노토님....부디 진정을…”
간절한 병사의 말에 마노토는 뒤를 돌아보았다, 저멀리 하얀 설원위로 까만 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남은 장창병들이었다. 창촐간에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말안장에 매어져 있는 궁(弓)이 보였다. 마노토는 눈을 감았다. 진작부터 궁을 사용해야 했었다. 허나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일단…보병을 기다린다. 쉴만한 곳을…찾아보도록”
“…옛”
병사하나가 높은 지형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멍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그 병사를 지켜보았다. 눈은 병사를 보지만 생각은 다른 것을 하고 있었다.
“그놈은…사람이 아니야,..피에 미친…혈귀(血鬼)..혈귀야..무정이란 놈은 … 혈귀야 혈귀!”
넋이 나간 듯 마노토는 중얼거렸다. 허나 혈귀라는 말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기마병들은 저마다 얼굴색이 변했다. 오늘 만났던 무정이라는 적의 인솔자는… 혈귀…그 말이 정말로 맞는 괴물 같은 놈이었던 것이었다.
무정은 신형을 비틀거렸다. 지금 그 주위에는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초우를 들고 휘두르기 시작할 때부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몸 안쪽 여기저기서 작은 폭발들이 일어났고 그렇게 폭발된 힘들은 전신의 근육과 핏줄을 통해 몇 배나 강하게 발출되었다. 몇 명이나 죽였는지도 몰랐다. 그저 초우가 움직이는 대로 그의 몸이 움직이는 대로 휘두르고 권을 날리고 각을 날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도 없었다.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설원의 삭풍도 이젠 그에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억지로 감기는 눈을 떴다. 저만치 새로운 인마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무정은 절망했다.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런 사이에도 인마는 점점 가까워 왔다.
마지막 힘을 내기 위해 무정은 신형을 꼿꼿이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눈에 맨 앞에 달려오는 인마에 매달려있는 깃발이 보였다. 무정의 눈이 커졌다.
‘明’
붉은 깃발안에 분명이‘명’이라는 글자가 흰색글씨로 쓰여 있다. 그는 긴장이풀어지는 것은 느꼈다. 서서히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하늘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온몸에 한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설원에 파묻혀 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의식을 잃어갔다.
그의 친구...초우를 꽉 잡은 채…
“정신이 드느냐?”
몽롱한 의식속에서 누군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무정은 억지로 눈을 떴다. 희뿌연 정경이 들어왔다. 초점이 잡히지를 않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마대인이었다. 그는 이제 강주백호소에서 용현천호소의 천호장으로 승급되어 있었다. 그와 함께 마천호의 칭호를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무정에게 대인이라 불리우길 원한 그였다. 무정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우…욱”
온몸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마대인은 손을 저었다.
“움직이지 마라,,네 상세는 엄중하다. 그냥 누워있거라”
굳은 얼굴로 그는 무정을 제지했다. 무정은 어젯밤 거의 시체이다시피 된 상태에서 구조되어 왔다. 마대인은 기절할 듯이 놀랐다. 그는 무정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무리인줄은 알지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나직한 마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마대인을 향했다.
“네 몸이 나은 순간부터 너는 백호장의 대우를 받게 될 것이다.”
무정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바로 잡았다. 불과 이 년 전에 받은 십호의 칭호였다. 이리 빨리 백호가 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존의 백호대는 소속되지 않는다. 너는 나의 직속으로 소속되어 대우만 백호장이 될 뿐이다.”
“그게…무슨…말씀이신지…”
쥐어짜듯 무정은 목소리를 냈다. 마대인이 다시 손을 들었다.
“궁굼한 것은 네가 일어난 후에 다시 말하자, 그냥 듣기만 해라. 이번에 새로운 부서를 창설하게 되었다.”
마대인은 손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무정에게 그냥 알려만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강호의 낭인들을 고용해 소수의 정예부대를 창설하기로 했다. 이름은 낭인대라 칭하기로 했다. 넌 그 낭인대의 대주가 될 것이다..”
“…”
무정은 생각했다. 강호인들이라…가끔 읍내에서나 강호에서 굴러먹던 군졸들이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하늘은 날고 땅을 뒤집는 힘을 가진 자들, 하지만 말뿐이지 그들의 무공을 본적은 없었다.
“낭인대는 나의 직속부대다, 따라서 앞으로는 나 이외의 사람이 내리는 명령에는 따를 필요가 없다..알겠느냐?”
무정은 눈을 감았다. 이것이었다. 마대인이 상처도 낫지 않은 자신에게 하려는 말이.....
자신의 몸이 다쳐서 돌아오는 것을 더는 못 보겠다는 뜻이었다. 직속부대휘하로 둠으로서 쓸데없는 전투에 참가를 막겠다는 의도인 것이었다. 무정의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마대인은......그에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그리 알고 일단은 쉬어라....이만....나가보마.
말을 마치고 마대인은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는 잠시 무정의 오른손을 일변하고 나갔다. 무정의 오른손에는 초우가 쥐어져 있었다. 병사들이 아무리 떼내려 해도 무정의 손이 높지 않았던 것이었다. 무정은 점차 깊은 수면으로 빠지고 있었다. 지금은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마대인은 찻잔에 손을 대고 이리저리 돌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할 때 나타나는 그만의 독특한 버릇이었다. 무정은 습격을 받은 마을을 수습하려는 목적으로 십여 명의 군졸과 함께 출병했었다. 그런 그가 돌아올 시간을 훨씬 넘긴 시간에도 돌아오지 않았을 때 좋지않은 직감을 느낀 마천호는 바로 추적대를 구성해 보낸 것이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함정이든 우연이든 여진족의 약탈자와 맞부딪힌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왜 부딪혔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추적대가 전해온 말들,,,그것이 더욱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두려웠습니다. 무십호를 제외하고는 말이든 사람이든 살아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설원을 붉게 물들인 피는 백장 밖에서도 보일만큼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상처는 비슷했습니다. 말이든 사람이든 깨끗하게 양단되었습니다. 분명히 단 한 사람의 짓입니다….”
“무십호가 한 일인지, 아니면 다른 무림의 고수가 그런 것인지는 모르지만 ,,,만일,,,무십호가 한 일이라면…전 너무도 두렵습니다. 중원의 고수라도 그렇게 잔인하게 출수(出手)하지 않습니다.”
마대인은 눈을 감았다. 무정은 자신에게 아들과 같은 존재였다. 진짜 아들은 본가에 잘 있지만 그보다 무정에게 더욱더 정을 느끼는 그였다. 그랬기에 무정에게는 마천호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다. 낮부끄럽게 대인이라는 칭호를 붙여지기는 했지만 딱딱한 천호보다는 나았다. 오십을 넘긴 그의 나이였다. 문득 그는 무정을 그렇게 만든 것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았다.
마대인은 눈을 떴다. 누가 뭐라 해도 그는 무정을 믿었다. 한명의 살귀(殺鬼)가 되는 일은…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문밖에 다시 한 번 폭설이 시작되었다. 마대인은 모든 것이 이대로 묻혀버렸으면 했다. 저 하얀 눈의 깨끗함이 오늘따라 미치도록 간절한 그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