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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주 이야기
-평강공주, 선화공주, 요석공주, 노국대장공주-
온달과 사랑한 평강공주, 마동이(薯童)와 사랑한 선화공주, 원효를 사랑한 요석공주 그리고 공민왕을 사랑한 노국대장공주... 우리 역사에서 이 만큼 가슴 짠한 공주님들의 러브스토리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신비롭다.
이 네 공주는 결코 잘생기고 힘 있는 남자를 얻기 위해 자신의 미모나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들은 소극적인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나름으로 격동의 역사와 연대하려 한 대단한 용기와 의식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들 공주들과 사랑한 사람은 대단히 미천하거나 괴이한 남성들이었고 이들은 자기 남자를 엄격하게 단련하거나 그들에게 힘이 되어 훌륭한 일에 나서게 했다.
그런데 네 공주의 가장 큰 공로는 아마도 지체가 낮거나 광적인 남성과의 연애를 통하여 신분제 사회의 경직성을 풀고 독점 사회의 일각을 무너뜨린 점이다. 실제로 네 공주는 모두 각 국의 독점적 귀족세력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며, 독점에 대한 반발의 당사자였다. 즉, 공주들은 소수의 지배부족과 그 소속 남성만이 모든 권력을 쥐고 죽어서도 극락을 독점하는 시대에 저항하고자 했다.
한국의 어린이들은 대부분 미국과 영국에서 창출한 제국주의적 여성관의 결정체인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이야기에 취해 산다.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도 결국은 노력보다는 씨나 혈통이 중요하다는 괘씸한 부르주아적 동화이다. 이 이야기들은 늘 공주는 착하고 예쁘고 마음씨도 곱다고, 백마를 타고 온 왕자님이 미운오리인 공주에게 백조의 날개를 달아 준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려울 때 구해 주는 흑기사로 ‘백마 탄 왕자’가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도대체 공주가 하는 일이라고는 독이 든 사과를 조심하거나 신발을 잘 벗거나 혹은 그저 왕자 꽁무니를 잘 따라다니는 일뿐이다. 이들과 우리의 공주님을 비교하는 것은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런 백설공주 덕분인지 오늘날에도 여성의 미모는 멋진 왕자를 유혹하는 최고의 무기이자 마치 하늘의 복인 것처럼 뵌다. 결혼 시기가 다가올수록 자신을 왕자인 양 착각하고 싶은 부르주아 청년들은 미친 듯이 미모를 향한 안테나를 높이 세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여성의 미모는 그녀의 남자만이 감상하고 아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가 다른 남성에게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 여자의 미모를 이용하고 있다는 측면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자고로 미인은 박복(薄福)한 것이다. 우리 속담에서 미인박명(美人薄命)이나 미인박복(美人薄福)이란 말은 대부분의 미인들이 신데렐라처럼 혹은 춘향이처럼 남자 덕분에 신분을 상승하기는 고사하고 이용만 당한 나머지 그 곱던 청춘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그 비참한 사정을 집약한 말이다.
그런데 역사를 위하여, 민중을 위하여 애쓴 우리의 네 공주들도 참으로 박복(薄福)하였다. 명작 동화에 나오는 백설공주와 달리 너무도 힘들었던 우리의 공주들... 하지만, 똑같이 박복해도 우리 공주님들은 역사와 나라를 위해 그러한 아픔을 이겼다는 점이 잡스런 공주들과는 다른 점이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아버지 평원왕의 만류에도 요즘 같으면 형편없는 날라리인 온달과 결혼하였다. 배타적이고 독점적이던 전통 5부족이 권력을 농단하던 고구려 조정에서 그녀의 행동은 참으로 기이했을 것이다. 바보 온달과 결혼함으로써 그녀는 전통적으로 가졌던 공주로서의 기득권들이 허공으로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어쩌면 한강유역 회복전쟁 당시 아차산성(지금의 워크힐 근처) 싸움에서 남편 온달이 신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은 일이다. 온달의 공주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는 그의 관이 공주가 오기 전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유명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노국공주의 비운도 평강공주 못지않다. 고려 말 공민왕은 100여 년에 가까운 몽골지배와 침략에서 벗어나고자 분연히 일어났다. 공민왕은 교묘한 공작으로 쌍성총관부를 공격하고(1356) 고구려 이후 처음으로 요동 땅에 진군하여 고려의 깃발을 꽂았다(1370).
당시 하찮은 서열의 몽골 꼭두각시였던 고려 국왕을 왕답게 만든 사람이 바로 노국공주였다. 비록 혈통은 몽골 여성이었지만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벌인 항몽전쟁을 묵인하고 오히려 배원정책을 지원함으로써 친정인 몽골을 배신했다. 아울러 남편이 제대로 고려의 왕이 될 수 있도록 그를 지원할 신흥개혁세력 신돈을 연결하여 국내의 모순을 개혁하도록 했다. 따라서 혈통이 다르더라도 우리 역사와 함께 한 노국공주는 우리의 조상인 것이다.
그녀의 요절은 개혁 군주 공민왕의 마음과 이상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기행과 폭음 그리고 온갖 음행을 저지르는 망나니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결국 공민왕은 그의 측근에 의해 암살당한다.
두 사람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것도 참으로 박복한 일이었다. 공민왕은 나중에 신돈의 몸종 출신인 반야(般若)에게서 우왕을 보게 되지만, 훗날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신돈의 자식으로 몰아 폐하고 조선왕조 개창을 합리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도 그러했다. 그녀는 서동이 지어 퍼뜨린 노래를 인연으로 그와 결혼하였다. 서동은 본래 전북 익산 마룡지 근처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던 백제 몰락 왕족의 후예로 보인다. 그런 서동이 어떻게 왕이 되고 선화공주까지 얻게 된 것일까.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신라 공주와 백제 왕자의 사랑이야기는 아니었다. 어쩌면 두 사람의 결혼은 중원 대륙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기류, 즉 수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과 그 파장에 대비하는 나제 동맹의 의미가 큰 것이다.
아울러 당시 온달 장군을 중심으로 다시 고구려가 남하하여 한강유역을 놓고 신라와 전투를 벌이던 위기 국면에서 익산 지역에 정치적 기반을 둔 무왕 그룹이 신라의 지원으로 백제 왕권을 회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선화공주는 조만간 다가올 중원의 거대한 홍수와 대륙에서 부는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공포를 이기기 위해 적국의 왕비자리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언니 선덕여왕이 중국을 칭송하고 진덕여왕이 당나라에 태평송을 바치는 등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런데 수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온갖 힘을 다 기울이면서 대외적 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자 오히려 백제 무왕(서동)은 공주의 친정인 신라를 수십 번 침략하였다. 선화공주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아픔을 달래기 위해 미륵사 창건을 무왕에게 요청하였다.
한편 태종무열왕의 누이 요석공주도 당시로선 스님인 원효와 결혼하여 설총을 낳는 등으로 진골 귀족과 화엄종계나 의상계열 승려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효가 어떤 여성이 준 생리대를 빤 물을 멋모르고 마셨다는 ‘낙산사 설화’는 그러한 원효와 요석공주의 파계에 대한 당대의 모진 손가락질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요석공주는 귀족에 의해 독점된 극락을 민중에게 해방한 원효대사를 사랑했다. 그와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원효의 아들인 설총을 낳았고, 그 설총은 이두를 만들어 백성들에게도 문자를 배포, 귀족의 문자 독점을 해방시켰다. 즉, 아버지 원효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로 귀족만의 극락 독점을 깨버린 것과 같이 아들 설총도 이두를 만들어 귀족의 문자 독점을 깨뜨리고자한 것이다.
평강공주, 선화공주, 요석공주, 노국대장공주... 우리 역사를 고운 사랑으로 수놓은 이 아름다운 공주들은 어떤 남자를 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같이 슬프고 힘든 인생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이 공주들은 결코 역사와 민중을 외면하거나 거역하지 않았다. 각 나라의 중요한 고비에서 중요한 선택을 거부하지 않았고, 그 선택은 대체로 신데렐라처럼 멋진 왕자를 뽑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 개혁과 사회적 모순의 타파를 위한 노력이었다.
극락을 민중에게 열게 한 요석공주, 썩은 5부족 독점체제에 반기를 든 평강공주, 나라꼴을 잃은 고려를 다시 재건한 노국공주, 대륙과 북풍 그리고 살육을 잠재운 선화공주 등 우리나라의 고운 공주님들은 비록 개인적으로 박복했지만 소중한 우리 역사의 동반자였다.
이들 공주님들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남성들의 싸구려 돈다발에 현혹되어 인생의 안일을 택하는 신데렐라 보다는 가치 있는 삶에 인생을 투자하는 그런 공주님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지는 못할지라도 박복하지나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래야 역사가 이기는 것 아니겠는가. 정의가 불의에 자꾸 패하니깐 누가 진실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모두들 편한 길로만 가서 편하게 살려고만 하지...
선화공주 [善花公主, ?~?]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의 공주이며,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비(妃).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는데, 이를 연모(戀慕)한 서동(薯童), 즉 후일의 백제 무왕(武王)이 《서동요(薯童謠)》를 지어 선화공주가 밤마다 남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소문을 신라의 서울인 금성(金城)에 퍼뜨렸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정배를 보냈는데, 정배 가는 도중에 서동을 만나 결혼하였다. 서동은 후에 무왕이 되고, 따라서 선화공주는 그의 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물론 정사(正史)는 아니고 하나의 전설인데, 이병도(李丙燾)에 의하면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고, 그의 왕비도 선화공주가 아니라 신라의 왕족인 이찬(伊湌) 비지(比智)의 딸이라고 하였다.
서동요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 가 두고
서동의 방을
밤에 몰래 품으려한다.
이것이 서동요 이고 님께서 원하시는 답변은 아무래도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라고 생각되는 데요
박영규 선생께서 지으신 '백제 왕조실록'에 나와 있습니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
서동에 얽힌 이야기는 『삼국유사』'기이' 무왕 편에 나온다. 일연은 이 이야기를 어디서 발췌했는지 정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주(註)를 통해 '고본'의 내용을 옮긴 점을 피력하고 있지만 고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일연이 밝힌 바에 따르면, 고본에는 서동이 장성하여 '무강왕'이 된 것으로 쓰여 있다. 그런데 일연은 '백제에는 무강왕은 없다.'라고 하면서 서동은 무왕이라고 단정했다. 허나 이것은 단지 일연의 판단인 셈이다.
다시 말해서 서동은 무왕이 아닌 다른 인물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무강왕을 무령왕이나 동성왕으로 보기도 한다. 무령과 무강은 그 발음과 뜻이 유사하다는 측면을 들 수 있고, 또한 동성왕이 신라 왕실의 여자를 부인으로 맞아드려 혼인동맹을 맺은 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무령왕과 동성왕을 서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동성왕은 어린 시절을 왜에서 보냈고, 무령왕은 홀어머니 밑에서 마를 캐며 연명할 상황에 처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료를 충분히 컴토한 일연의 판단을 존중하여 서동을 무왕으로 설정하고, 그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여기에 옮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 무왕편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경도(사비)의 남지란 못둑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다. 아명은 서동이니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섯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고 곱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경도(서라벌)로 들어와 동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가 친하게 잘 따랐다. 그래서 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이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노래는 이렇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 가 두고
서동의 방을
밤에 몰래 품으려고 간다.
이 동요가 경도 안에 잔뜩 퍼져 대궐까지 알려졌다. 백관이 이 일을 책잡는 바람에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는데, 떠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줬다.
공주가 귀양지를 향해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 뛰어나와 절을 하며 호위를 하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괜히 마음이 당기고 좋았기 때문에 따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남몰래 관계를 한 뒤에야 서동이라는 그의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함께 백제까지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놓고 장차 살림 꾸릴 일을 논의 하는데
서동이 웃으면서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입니다. 이것으로 한평생 부자로 살 수 있어요"
"내가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을 내버려 쌓인 것이 흙더미 같소이다."
공주가 그 소리에 크게 놀라며 말했다.
"이것은 세상에 다시없는 보물입니다. 당신이 지금 금 있는 곳을 알거든, 그 보물을 부모님이 계신 궁궐로 실어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서동이 좋다며 금을 끌어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 법사의 처소를 찾아갔다. 그리고 금을 실어나를 계책을 물으니 법사가 말했다.
"내가 신력으로 보낼 수 있느니, 금을 가져오시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동안 신라 궁중에 날라다 두었다. 진평왕이 이 신기한 일을 상서롭게 여겨 서동을 더욱 존경하면서 편지를 띄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 덕분에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이것이 무왕의 왕위 승계와 관련한 『삼국유사』의 기록 전부이다. 일연은 이 이야기를 미륵사 창건 설화를 덧붙여 놓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로 가고자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더니,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났다.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여기에다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이것이 진정 저의 소원입니다."
하니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 법사를 찾아가서 못 메울 일을 물었다. 지명 법사가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따로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진평왕이 여러 장인들을 보내 도와줬으니 그 절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때 지은 미륵사는 현재 절터만 남아 있는데,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소재하고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제11호로 높이가 14.24미터나 되는 우리 나라 최고 최대 석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