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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陶庵) 이재(李縡)선생 유허비(遺墟碑)
도암(陶庵) 이재(李縡) 선생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재(李縡)선생은 본관은 우봉(牛峰)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호는 도암(陶庵) 또는 한천(寒泉)이다. 숙종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한 노론(老論)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당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낙론(洛論)을 주창했다. 순조(純祖) 때에 와서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재(李縡)선생과 인현왕후(仁顯王后)
도암(陶庵) 이재(李縡) 선생과 인현왕후(仁顯王后)와의 관계는 족질(族姪)관계이다. 인현왕후의 부친은 민유중(閔維重)으로 그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 부인인 이씨는 아들 진후(鎭厚)를 낳고 일찍 작고하였으며, 둘째 부인은 송씨로 송준길(宋浚吉)의 여식인데, 두 아들 진원(鎭遠)과 진영(鎭永)을 두고, 그 밑으로 딸 셋을 두었는데, 큰 딸은 이만창(李晩昌)에게로 출가하였으니, 즉 이재(李縡)선생의 모친이 되었고, 셋째는 검열(檢閱) 신석화(申錫華)에게로 출가 하였으며, 둘째 딸은 숙종의 계비(繼妃)였던 바로 인현왕후(仁顯王后)시다. 선생의 부친 만창(晩昌)은 10세 이전에 경사(經史)를 통달할 만큼 총명하였으며, 숙종(肅宗) 1년(1675)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주자강목(朱子綱目)』을 즐겨 읽었는데, 아버지의 임지인 광주(光州)에 따라갔다가 31세로 요절하여, 홀로 선생을 양육할 수밖에 없었다.
경종(景宗) 1년(1721)에 선생께서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있었는데, 5월 28일 상소(上訴)가 있었다. 체직(遞職)해서 해면(解免)해 주기를 청하였는데, 본직은 지금 우선 체직을 허락하나, 사직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권하였다. 그 보다 앞서 계사(癸巳)년(1713)에는 많은 공경(公卿)들이 숙종에게 존호(尊號)를 올렸을 적에 선생은 “존호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북도(北道)의 평사(評事)가 되었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자 어머니 여흥(驪興)민씨는
“내 나이 이미 많아서 늙고 다른 자식도 없는데, 너는 왕사(王事)에 종사하니, 내가 밤낮으로 외롭게 집안에 있다. 너는 어찌하여 종양(終養)한다고 진정하지 않느냐?”
함으로, 종사(從士)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인제(麟蹄)로 하향 하였다. 처음에 자리를 풀은 곳은 인제읍 덕산리 한양동(漢陽洞) 이었으나, 얼마 안 있고 다시 물을 건너 복룡산(伏龍山)기슭으로 이전하였다.
조선 19대 왕 숙종(肅宗)의 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아버지는 노론(老論)인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유중(維重)과 어머니는 서인(西人)의 거두(巨頭) 송준길(宋俊吉)의 딸 사이에서 둘째 딸로, 현종(顯宗) 8년(1667)에 태어났으며, 숙종(肅宗) 6년(1680)에 김만기(金萬基)의 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죽고 5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西人)들이 다시 집권한 뒤, 1681년 15세가 되는 해에 가례(嘉禮)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繼妃)가 되었다. 덕이 높고 인자하며 아량이 넓으시어 모든 일을 초연한 마음으로 처리해 나감으로 희세(稀世)의 현비(賢妃)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후사(後嗣)가 없어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상감께서 항상 마음에 담아두시고 있던 궁녀 장희빈(張禧嬪)을 빈(嬪)으로 드릴 것을 권하였다. 숙종은 기꺼이 승낙하면서도,
“나로서야 이런 말을 어떻게 여러 어른들과 여러 신하들에게 전하겠소.”
하며 걱정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와 왕대비(王大妃)전에 사뢰어 보겠습니다.”
하고는 몸소 행하시어 허락을 받았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소의(昭儀)였던 희빈(禧嬪) 장씨가 왕자 윤(昀)을 출산하자, 희빈은 상감의 총애를 독차지 하면서 남인(南人)들과 결탁하여 간교한 모략과 흉악한 계교를 꾸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결초보은(結草報恩)해야 할 인현왕후를 폐하기 위하여 노력하며, 상감의 총명을 어지럽게 하면서 온갖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인현왕후는 정비(正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설움을 받아야 했다.
1689년 숙종은 왕자 윤(昀)을 세자로 책봉하였는데, 노론(老論)의 송시열(宋時烈)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진노를 사서 사사(賜死)되었다. 이것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이 사건에서 인현왕후(仁顯王后)도 왕의 미움을 사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폐출되었다. 그 후 안국동 본가에서 지내게 되었고, 희빈 장씨가 중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빈(嬪)으로 있을 당시만 해도 그의 세도가 하늘을 찌를 듯 했는데, 중전이 되고 난 이후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녀의 서릿발 같은 세도가 하도 어마어마하여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
라는 민요까지 나돌았다. 그 뒤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비(廢妃)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차에 1694년 소론파의 김춘택(金春澤)· 한중혁(韓重爀) 등의 폐비 복원운동으로 남인(南人) 세력이 실각하는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다시 복위(復位)되었다. 복위 후에도 인현왕후는 다시 빈(嬪)으로 강등된 희빈(禧嬪)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다가 병을 얻어 1701년 3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 궁녀(宮女)가 그녀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 『인현왕후전』이 전해지고 있다.
인현왕후는 결국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간의 권력 다툼 과정에서 희빈 장씨(禧嬪張氏)와 함께 희생양이 되어 요절했다. 존호는 효경숙성장순(孝敬淑聖莊純), 휘호는 의열정목(懿烈貞穆), 능호는 명릉(明陵)이다.
인제 도암(陶菴) 이재(李縡)선생 유허비
사대부(士大夫)시절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어렵게 면하였다. 비록 면했다 하더라도 또한 올바름을 지킨다는 것이 어려움이라 생각하여 도암(陶菴) 이 선생은 일찍이 정계에서 물러났다. 숙부(叔父) 충숙공(忠肅公)이 옥사(獄死)하자 모부인(母夫人)를 모시고 인제(麟蹄) 산협으로 피신하였다.
4대 사화(士禍)를 살펴보면 을사사화(乙巳士禍)로 다시 세상을 바꾸려하였으나, 선생들은 끝내 되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군무(君誣)를 분별하지 못하여 뒤이을 성군(聖君)이 나타나지 못하게 함으로, 시의(時議)에 따라 조정이 바뀌고 충신과 역적이 30여년이나 혼재(混在)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선생께서는 처지를 바르게 하여 신임(辛壬)사화에 빈틈이 없었음은 무릇 응하는 바가 변함없고 한가지로 의(義)를 따름에 화(禍)를 면할 수 있었으니 이는 시의(時義)에 따름이라 하겠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군자는 조짐을 보고 미리 대비한다.” 하였듯이, 이미 선생께서는 일찍 물러나시고, 『주역(周易)』문언전(文言傳)에 이르기를 “천지가 폐(閉)하면 현인(賢人)이 은(隱)한다.” 하였듯이, 멀리 은둔하신 것이다. 단사(彖辭)에 이르기를 “그 바른 것이 아니면 재앙이 있을 것이다. 갈 데가 있는 것이 이롭지 않다.”라 하였듯이 선생께선 끝내 나타내지 않으시고 몰래 증명하신 것이 신임사화(辛壬士禍)전후이니, 곧 부계(符契)를 본 것처럼 성찰(省察)하시어, 대응이 없어도 상(象)과 점(占)을 주역(周易)에 쓰듯이 준비하였음이라.
아! 슬프고 아름답도다!
지난 해 전 조기순(趙箕淳) 현감이 강원감사(江原監司)와 의론하여 단비(短碑)를 세웠다. 대총재(大冢宰) 이광정(李光正)은 선생의 증손(曾孫)이다. 동쪽에 터를 잡아 기초를 세우고, 다듬은 돌을 새기지 않은 채 일찍부터 기적(記蹟)을 나에게 부탁하였으나, 나 또한 덧없이 세월만 보낼 수 없어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오른쪽과 같이 삼가 적노라.
‘선생의 휘는 재(縡)이고, 자는 희경(熙卿)이며, 우봉(牛峰)인이다. 문과(文科)관리로 사재(四宰) 문형(文衡)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正公)이며, 용인(龍仁) 한천서원(寒泉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학문이 전도 되어 지식이나 경험이 깊은 경지에 도달하는 곳이 되기를 감히 바라는 바다.
이재(李縡) 선생은 서인(西人)의 거두(巨頭) 송준길(宋浚吉)을 외조부로 두기도 하였지만, 안동(安東)김씨 문중 김수흥(金壽興)의 여식과 혼인하였음으로 당쟁(黨爭)의 중추인물이 되었음에도 30여년이나 이어지며, 그야말로 충신과 역적이 혼재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큰 화를 입지 않고 버티어 온 것은 버릴 때 버릴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알아 물러나는 중도(中道)를 걸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선생은 성리학(性理學)에 몰두 하였으며, 공부에 힘쓰고, 실행하기에 게을리 하지 않아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사방의 학자들이 스승으로 존경하였으며, 도암(陶庵)선생이라 불렀다.
이재 선생 초상
선생의 유허비
처음 거주하시던 덕산촌 전경
뒤에 사시던 상도촌 일최암 터
첫댓글 유허비가 인제군청 안에 있죠?
그렇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복 많이 받으세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