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주년 장진호 전투기념 및 전투영웅 추모행사
때 : 2022.11.24(목) 14:00-15:00
곳 : 서울 올림픽공원내 핸드볼경기장.
참석: 울산광역시 김성남 지부장외 지부회원 70여명 참석(버스2대)
♤ 장진호전투(長津湖戰鬪)
전투시기 : 1950년 11월말 부터 12월초.
장진호전투는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 예하 미 제1해병사단이 서부전선부대와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장진호 북쪽으로 진출하던 중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망을 형성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작전이다.
중공군의 한반도 진입 목적과 병력규모를 11월 초까지도 경시했던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선제공격을 단행하기로 결심함에 따라 동부지역을 담당한 미 제10군단 알몬드(Edward M. Almond)소장은 국경선을 목표로 한 북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우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제1해병사단을 좌측으로 하여 국경선으로 진격하는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마오쩌둥의 유엔군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이 무렵 중공군은 11월 27일 유담리의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개시되었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장진호 지역의 전황이 급변하자 미 제10군단장은 11월 30일 하갈우리에서 작전회의를 열고 기존의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알몬드 소장은 장진호 부근의 모든 부대를 함흥∼흥남의 작전기지로 이동한다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유담리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에 미 제1해병사단의 제5연대와 제7연대가 각각 이를 격파하고 12월 4일 하갈우리에 진입함으로써 유담리 포위망 돌파작전은 일단락되었다.
한편 장진호 동쪽에서 고립된 미 제7사단은 구출이 지연되자 포위망을 돌파하려 하갈우리로 이동하였다.
하갈우리에 대한 공격은 중공군 제58사단이 주축이 되어 시작되었다.
또한 중공군 제60사단은 이미 고토리까지 남하하여 하갈우리에 이르는 보급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 제1해병사단의 분전으로 12월 7일 고토리로 모든 병력을 집결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어 진흥리를 통과한 미 제1해병사단은 12월 11일 함흥지역에 모두 진입하여 장진호전투를 마무리했다.
장진호전투는 여러 측면에서 전선에 영향을 주었다.
중공군은 장진호 부근 전투에서 전투손실 뿐 아니라 비전투손실도 상당히 입게 되었다.
이에 따라 더 이상의 군사작전 수행이 불가능하여 중공군 제9병단 지휘부는 3개월에 걸쳐 부대를
재편성하기 위해 후방으로 철수하였다.
반면에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 제9병단이 서부전선의 제13병단을 증원할 수 있는 역량을 소멸시킴으로써 서부지역 전선의 미 제8군이 위기를 모면하는데 일조하였다.
미해병대가 흥남 철수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예봉을 맡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컸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희생을 치르며 포로가 되는 동안, 서쪽의 해병대는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교전병력: 아군 3만명과 중공군12만명과 교전.
전투결과: UN군의 전술적 목표 달성 및 함흥교두보 방어작전 성공으로 흥남부두로 아군과 피란민을 철수시킬 수 있었음.
<피해>
아군 피해
1,029명 사망
4,894명 실종
4,582명 부상
비전투 손실 7,338명
총합 17,843명 손실
중공군 피해
전투손실
19,202명 사상
비전투손실
28,954명 (동사자 약 4,000명 포함, 대다수가 동상자)
총합 약 48,156명 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