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1894.12.27.~1982.07.12.
(88세로 영면, 유엔기념공원내 묘비위치 36-2-1, 묘지번호 미국 36구역 8363 묘역 안장)
ㅇ 1916.02.09. 입대 (군번 0164276 / 1955.02.01. 미육군 준장 으로 퇴역(39년간 근무).
ㅇ 1ㆍ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 참전
ㅇ 1953-1954 부산지역 미육군 제2군수기지사령관 역임
ㅇ 1953년 11월, 부산역전 대화재 시 즉각적인 이재민 구호
ㅇ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때 군수물자를 풀어 집을 잃은이재민 3만여명에게 잠을 잘 천막과 음식을 나눠주었고, 한국전쟁 직후 부산지역 미군 군수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부산을 돕는 데에 앞장섰습니다. 이후 도시 재건 프로그램 계획 수립 및 실행 주도
- 이재민 주택건설 지원, 현대화된 도로 건설
- 부산대학교 및 초중고등학교, 대규모 현대식 병원 건립 지원(메리놀병원, 성분도병원 등)
- 53개 고아원 직접 지원 조치 등
※ 위트컴 장군은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한묘숙 여사(1927년출생)와 1963년 결혼, 2017.01.01 89세로 영면, 2017.01.04 유엔기념공원 위트컴 장군과 합장.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장군의 유언에 따라 유엔기념공원에 안장. 그의 부인 한묘숙 여사는 장군의 유지 "장진호 전투 희생자를 찾아 고향에 송환요청"을 받들어 이를 위해 수 년간 활동하였습니다.
고 리차드 위트컴의 공적 설명.
ㅇ 특히, 2022년은 한미수교 140주년이자 위트컴 장군 서거 40주기가 되는 해로, 장군이 안장되어 있는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정부포상이 추서되어 더욱 의미가 크다.
□ 고(故) 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1953년부터 2년여간 부산지역 미 제2군수기지 사령관을 역임하며 한국을 도왔고, 전쟁 이후에도 폐허가 된 대한민국을 재건하는데 일생을 헌신했다.
ㅇ 특히 1953년 11월 미 제2군수기지 사령관 당시, 부산역전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상부의 승인 없이 군수창고를 개방, 2만 3천여 명분의 식량을 비롯해 의복 등 군수물자를 이재민들에게 긴급 지원했다.
- 이 일로 미국 의회 청문회에 소환된 위트컴 장군은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War is done by weapons and it remains undone, unless it is done for the people in the country)”라고 말해 의원들의 기립 박수를 받기도 했다.
ㅇ 이외에도 이재민 주택건설 지원과 도로 건설, 의료시설 건립을 지원하고, 부산대학교를 비롯한 초중고등학교 설립 지원 등을 통해 폐허가 된 대한민국과 부산을 재건하는데 힘을 썼다.
ㅇ 또한, 1954년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위해 함께 활동하던 한묘숙 여사와 결혼해 전쟁고아 돕기와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전쟁고아의 아버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등의 수식어가 생겼다.
ㅇ 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위트컴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첫댓글 위트컴 장군의 관련기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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