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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과 불타는 떨기 나무에서
연구 범위: 출 3:1~4:31
기억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요지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것들과 비천한 사람들을 사용하여 당신의 사업을 위한 놀라운 결과들을 이루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자의 생애마다 계획을 갖고 계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셨던 책임처럼 특별한 것이다.
개관: 출 3:1~4:31
3:1~10 | 3:11~4:17 | 4:18~31 |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부르심 | 모세가 뒤로 빼다 |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다 |
서론
대 관현악단의 지휘자가 음악을 지휘하는데, 점점 세게 나가다가 중간에서 갑자기 딱 멈췄다. “피콜로가 어디 갔지?” 가장 작은 악기인 피콜로를 희미하게 표해 놓은 것을 찾지 못하고 그가 외쳤다. 모든 악기는 관현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업에서도 각자 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들만이 하도록 따로 구별된 일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분부하시는 일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 더 큰 사업으로 부르실 때 그것을 완수하기위한 최선의 준비는, 이미 주어진 매일의 의무들을 충실히 계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일상 의무들에 전념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들에게 임한 예들을 생각해 보라.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 잡을 때 부르심을 받았고 사울은 잃어버린 가축을 찾고 있는 중에 부르심을 받았으며 다윗과 모세는 양을 치고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고 마태는 세금 걷으러 다니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일상 업무들이 그리스도를 위한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봉사가 되게 할 수 있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손에 들어갈 때는 세상의 지혜나 권능을 능히 압도할 수 있다. 극적이든 아니든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시는 그 특별한 임무는 이 마지막 시대에 세상을 구원하고자하시는 그분의 총체적인 목적에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것과, 그 부르심에 대한 모세의 응답이 어떠했는지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사업에 있어서 우리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요긴한 교훈들을 배우게 된다.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부르심(출 3:1~10)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의 기록상 모세 이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타나신 최근 사건은 야곱이 애굽에 들어가기 직전에 밤의 이상 중에 나타나신 것이다.(창 46:2~4 참조).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큰 민족을 이룰 것을 거듭 말씀하셨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재확인하시고 성취를 시작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나타나셨다.
1절. 호렙은 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의 별칭이다(출 19:11; 신 4:10; 출 3:12 참조).
2절. “여호와의 사자”는 신성의 제 2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26,408, 484 참조).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이한 모습으로 당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는가?(출 3:2) 타버리지 않는 불꽃의 떨기나무는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답:
“가시떨기나무는 세상에서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타고는 있으나 떨기나무를 사르지 않았던 그 불은 이스라엘 백성을 연단하는 노예 생활의 고통을 나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떨기나무가 사리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단련의 불꽃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죽도록 버려두지 않으신다”(본교 성경 주석 1권, 509). 그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불같은 시련에 처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다(시 91편; 사 43:1~3 참조).
<참고> 스코틀랜드 교회는 그 교회가 핍박 속에서 어떻게 보호되었는가를 기념하기 위해 불타는 떨기나무의 상징 마크를 넣고, 그것과 함께 “그러나 타 버리지 않았네”라는 글귀가 쓰인 깃발을 가지고 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가시떨기나무를 그렇게 희한하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당신께서 사용하실 수 있었다면 능히 모세도 그렇게 특별하게 사용하실 수 있으심을 모세로 깨닫게 하려 하신듯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큰 책임을 맡기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는 불가능이 없음을 모세에게 확신시켜 주시고자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도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일하도록 부르신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세가 한 변명을 생각하면, 이 확신은 정말 적절한 것이었다.
10절. 모세가 애굽을 떠난 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그때에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80세의 노
목자 모세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가 어떻게 책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
가?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우리에게 맡기신다.
모세가 뒤로 빼다 (출 3:11~4:17)
내가 누구관대? (11절)
답:
모세가 자신에 대해서 항상 그런 겸손한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40년 전에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 그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이 책임을 맡고 싶어 하였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앞서 달려가면서 그는 애굽인 감독을 쳐 죽였다. 그는 그때 히브리 인들이 자기를 중심으로 연합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모이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기를 주저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를 이 일에 부르신 때에도 그러하였다.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하던 모세가 주저하며 자신을 별 볼일 없이 생각하게 된 주요 원인은 다음 중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40년의 세월을 애굽의 궁정에서 멀리 떠나 양치기로 있는 동안 그는 자신과 자신의 책임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그는 이제 80세였다. 애굽의 사건들에서 멀리 떠나 있었고 광야의 호젓함과 목자로서 양을 돌보는 일에 심취해 있었다.
모세는 자신이 젊었을 때의 가능성이 죄다 없어졌다고 느꼈을 것이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리이까?”라는 모세의 말은, 자신이 정말 이 일에 부적합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늘 실패 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기도하다. 모세의 말은 아마 이런 뜻일 것이다. ‘여호와여 당신은 40년 전에 내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을 때의 일을 기억치 못하시나이까? 나는 실패하였나이다.’
우리는 때때로 과거에 실패한 경험과 현재의 좋지 못한 환경으로 인해 좌절하곤 한다. 이럴 때 우리는 모세처럼 “주여, 내가 누구관대 당신께서 시키시는 이 책임을 감당하겠습니까?”라고 부르짖는다.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신 것은 단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여기 오늘의 생활도 포함해서 하신 말씀인가?
만약 모세가 자신의 양과 함께 머물기를 고집했더라면 그가 잃어버렸을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애굽에서의 멋진 대결, 유월절과 출애굽, 홍해에서의 극적인 구원, 바위에서 솟은 물, 하늘에서 내린 만나, 하나님께서 친필로 써 주신 십계명 돌비, 성소 건축 등.
모세가 역경을 겪고 시련을 당하고 눈물을 많이 흘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결과로 얼마나 측량할 수 없이 더 부요하고 더 만족스럽게 되었는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40년의 세월을 양치기로 보낸 사람에게 그런 어려운 임무를 맡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처럼 보인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와 대면하여 그 나라의 대부분의 노동력과 부의 근원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방면하도록 요구해야 하였다. 모세가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1)라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모세의 첫 번째 변명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는가?(출 3;12)
답: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자기 평가와 씨름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모세야, 네가 연약하고 이 일에 무자격하고 부적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혼자 바로에게 가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 내가 누구관대 당신께서 시키시는 이 책임을 받아들이겠습니까?”라고 부르짖을 때, 우리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이다.
(알아봅시다) 다음 성경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보증의 말씀들을 연구해 보라. 이 보증의 말씀들이 당신에게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신의 말로 다시 써 보라(수 1:5; 사 41:10, 43:1~5)
당신은 누구십니까?(13절)
답:
모세의 다음 변명은 그의 첫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 후에 나온다. 아직도 그에게는 무엇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면이 있다.
모세는 왜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는가? 그는 정말 하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었는가? 하나님에 대해 알기 위해 물은 것인가?
답: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당면하게 될 어려움과, 그의 백성들 -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거의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잃어버린 의 무지몽매함과 불신 등을 염려하였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27). 아마도 여기서 모세는 하나님의 진심과 능력을 의심한 듯하다. “당신께서 정말 나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당신을 믿어도 되겠습니까?”라는 의문이 모세의 변명에 숨어 있다. 아마도 모세는 40년 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시도가 실패로 끝난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주여,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어디 계셨었습니까? 왜 당신은 날도와 주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당신께서 날 도우시리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는 자주 이와 유사한 질문을 하지 않는가?
(알아봅시다) 열왕기하 6장 8~18절을 보라. 여기 수록된 경험은 우리가 종종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엘리사의 사환은, 도단 주변을 둘러싸고 그와 선지자를 죽이려는 아람(시리아)군대를 보고 낙심하였다. 그 사환에게 있어서의 문제는 너무 많이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많이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그 젊은이의 눈을 열어 주실 것을 기도하였고 그 기도는 응답되었다. 그리하여, 그 사환은 엘리사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그것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의 군대가 선지자와 그의 종을 구하기 위해 그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생애 전반에 걸쳐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문제는 분명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여, 나의 눈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매일 그분의 섭리와 돌보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과 관심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의 둘째 변명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셨는가?(출 3:14~16)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대답하셨는가?
답:
모세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도 되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조상들을 당신께서 어떻게 취급하셨으며 그들이 당신을 신뢰하고 따랐을 때 그들을 위해 어떤 권능의 역사들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다.
“너는 내가 어떤 하나님인지 알고 싶으냐? 내가 정말 신뢰할 만한지 의심스러우냐? 나의 기록들을 보아라. 나는 아브라함을 그 고향 우르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인 그 하나님이다. 나는 그를 번성케 하고, 생물학적으로 잉태가 가능한 시기가 훨씬 넘어서 그에게 아들을 준 그 하나님이다. 나는 그의 약속의 아들이삭의 하나님이다. 내가 직접 지도하여 그에게 아내를 데려다 주었고 그의 생애를 내가 인도하였다. 너의 부조 야곱이 기만과 속임수를 잘 쓰긴 했지만, 나는 요셉을 통해 야곱과 그의 전 가족을 구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모세 너의 하나님도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위해서도 똑 같은 능력을 행할 것이다. 나의 이름은 야훼이다. 현재 나는 있다. 네가 있는 곳에도 나는 있다. 나는 진실로 있다.” 말씀하고 계신 분은 신성의 제2위이셨다. 오늘날 우리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 너의 필요가 무엇이든, 너의 환경이 어떠하든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고 말씀하시는 예수가 바로 그분이시다.
어려운 시간이 올 때, 주님께서는 옛날 믿음의 노독들을 위해 역사하신 것과 똑같이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위해서도 역사하실 것이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리이다(출 4:1)
모세의 세 번째 변명은, 자기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주의를 끌고 존경을 받을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간다 해도, 당신께서 나와 함께 가신다 해도 사람들은 나를 곧이듣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위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그들은 내 주위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지금 목자인 나의 말을 듣겠습니까? 나는 솔직히 당신이 요구하는 그 일을 위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세의 세번째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출 4:2~9)
답:
(생각해봅시다) 모세는, 그의 사명을 입증하기 위해 초자연적인 수단을 사용하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키신 기별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행하신 일을 통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과 결정들을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을 기대하게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한때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또는 당신의 뜻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기적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에 감명을 주시고, 당신의 섭리대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당신의 종들을 통해 권면하시고, 우리를 위해 기회들을 여시기도 하며, 우리 앞에 열린 듯 한 문들을 닫으시는 등 덜 극적인 방법들을 사용하시는 예가 더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비록 모세가 행한 기적들처럼 초자연적이지는 못하지만 똑같이 하나님께 로서 온 것이다.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께 욕 돌리는 일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자들은 저들의 실정을 하나님 앞에 아룀으로써 어떤 노선을 추구해야 할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저들은 지혜뿐만 아니라 능력도 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바와 같이 순종과 봉사에 필요한 능력이 저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바 될 것이다” (시대의 소망 3권, 158).
나는 말에 능치 못한 자라(10절)
변명을 그렇게 유창하게 늘어놓은 모세가, 자신이 말을 잘못하는 사람이라서 구원자가 되지 못하겠노라고 자꾸 발뺌하는 것은 좀 이상스럽게 느껴진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모세가 애굽을 떠나온 지 40년이나 되었으므로 더 이상 애굽 말을 잘 할 수 없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처럼 우리도 능력이 부족해서 큰 책임이나 도전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이전 변명들을 받아 주시지 않은 것처럼 이 변명도 받아 주지 않으셨다.
모세의 네번째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출 4;11,12)
답: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데 있어서 우리가 할 일은 그 계획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성공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앞으로 전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함으로써 그분과 협력한 후에, 영적인 일에서의 성공 여부는 그분의 책임이다. 우리가 할 일은 기꺼이 가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편에서 하실 일은, 우리에게 할 말을 주시는 것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말이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책임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책임은 우리가 다함으로써 큰 짐들을 덜 수 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13절)
모세의 마지막 변명은 좀 더 자포자기적이다. 영문 흠정역 성경에는, “오, 내 주여, 청컨대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 라고 되어 있으며, NIV성경에는 “오, 주여, 제발 그 일을 할 만한 다른 이를 보내소서”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반대할 때마다 잘 응수하셨다. 모세는 더 이상 변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가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포자기 하여 하나님께, 다른 데 가서 구원자를 찾아보시라고 요청하였다. 그의 마지막 변명은 단순히 아무라도 좋으니까 좀 더 자격 있고 영향력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라는 요청에 불과 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항상 누군가 다른 사람을 찾아 쓰실 수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기를 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일에 부르신다면, 그것은 그분께서 당신의 계획 속의 그 목적을 우리가 수행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보다 재능이 더 많은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도록 계획하신 그대로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모세의 마지막 변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출 4:14~17)
답: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형 아론을 보내기로 동의하셨다. 그러나 여전히 모세를 빼 주시지는 않았다. 모세도 역시 가야 했다. 아론이 도움을 주긴 할 것이었다. 그러나 책임은 역시 모세에게 지워져야 하였다.
(알아봅시다) 아론은 모세와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도움을 제공하였는가? 모세는 자신의 대변인으로서 어느 정도 아론을 의지하였는가?(출 4:30, 5:1, 6:9, 7:10, 8:9,26,29, 9:29, 10:9)
12장 후에는 모세가 중심 위치를 점유하게 되고, 아론은, 애굽에서 섬기던 금송아지를 만들어 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동의한 것이라든지, 모세의 지도권에 대항하여 불평하는 미리암과 합세한 것 등 간헐적으로 잠깐씩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주역의 위치에서 물러났다. 물론 나중에는 충실했지만, 모세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마다 지속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위해 일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도움 즉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람, 혹은 우리와 함께 일할 수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요청을 수락하시고 우리와 함께 할 누군가를 보내실 것이다. 예수께서는 후에 당신의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내보내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책임을 맡기셨을 경우, 그들은 인간의 도움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은 다른 사람들을 그 도움의 매체로 사용하실 수 있고 가끔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그분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옴(출 4:18~31)
하나님께서는 매 변명에 답하셨다. 모세는 더 이상 반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다음 행동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음을 보여 준다. 그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미디안을 떠나 애굽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24~26절. 이 이상한 사건은 긴 이야기의 끝부분인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전 사실들을 충분히 이해해야 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이 이야기 속에 담긴 뜻은,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작은 아들에게 할례 베풀기를 소홀히 했다는 점이다. 모세는 이제 이스라엘의 구원자 임무를 맡았고 죄로 부터의 구원자 예수를 상징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요구 조건들을 등한히 하는 한 그는 성공할 수 없었다. 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 마치 그의 생명을 취할 듯이 하였다. 이야기의 내용으로 보아 모세가 소홀히 한 것은 그의 부인이 반대한 결과인 듯하다. 천사가 그녀의 남편을 치려 하자 십보라는 그 이유를 금방 알아차렸다. 시키지도 않는데 그녀는 잔인한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이의 양피를 베어 던졌다. 그녀가 한 말을 보면, 그녀가 아이의 양피를 벤 것은 단지 모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또 히브리인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참고> “바로에게 행할 그의 사명에 있어서 모세는 크게 위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그의 생명은 거룩한 천사들의 보호를 통해서만 보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의무들을 등한히 하는 동안 그는 안전하지 못할 것이었는바, 이는 그가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환난의 때에도 의인들은 천사들의 봉사에 의해 보존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한 자들은 안전치 못할 것이다”(부조와 선지자 상권, 332).
29~31절.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전과는 다르게 그들의 사명에 대단히 호의적임을 알았다. 이제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 양편이 모두 필요한 교훈들을 취득한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보여야 할 시간이 이른 것이다.
보충학습: 부조와 선지자 상권 313~332쪽의 ‘모세’를 보라.
요약
하나님의 기존 운영 방법은 세상이 연약하고 미련하게 보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을, 세상이 지혜롭고 유력하게 보는 일들을 해내는 데 사용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을 취하셔서 그들을 특출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증거 하는 일에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각자를 부르신다.
적용
별 볼일 없는 환경에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려고 끝까지 발뺌만 할 것인가? 나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일에 그분께서 나에게 분부하신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내기 위해 필요한 수단들과 능력을 제공해 주실 것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