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편소설]알 할라카이
작성자다리우스|작성시간04.06.30|조회수118
목록댓글 11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단편 습작) 알 할라카이/ 다리우스 작
알 할라카이,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로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비우고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언제고 그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 일이 어두컴컴한 좌석버스의 뒷좌석 한 켠에서 아무 생각 없이 휘황찬란한 밤거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일어났다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인가? 때는 여름의 한창. 난 최근 내가 만나게 된 어떤 단체에 계속 참석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난 그만 그들이 말하던 대로 신을 만나고야 만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어수선한 말도 안 되는 곳인가, 영화에 보면 선지자는 늘 어떤 산이나 일상과는 구분된 영험한 분위기가 있는 곳에서 신을 알현들 하고 했던 기억이건만.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땅바닥에 자신들의 몸을 죽은 듯이 엎드린다. 하지만 당시의 내가 있던 곳은 좌석들로 빼곡히 차있어 무릎을 꿇을 래야 꿇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 꿇고자 하는 그 시도자체가 우스꽝스워질 지경인 그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의 나는 상관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버스에 사람이라곤 나와 기사아저씨밖에는 없었다. 그는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났다. 마치 도적과도 같이. 그는 알 할라카이였다. 그는 자연신이다. 난 감격했고 한동안 그 좌석버스 뒷켠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목적지 전까지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노선을 이동했다. 난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경전을 꼬옥 잡았다. 신의 음성은 분명했고 난 그 자리에서 헌신을 말했다. 그의 의지는 확연하다, 온 세상을 평화의 이름으로 하나 되게 하는 그것. 나의 철학적 성향은 무척 그러한 것을 즐겨했다. 난 완전한 신이란 곧 철학적으로도 막힘이 없는 존재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알 할라카이, 그는 철학적으로도 완벽한 논리의 신이기 조차 했다. 난 그게 마음에 들었다. 이 같은 그와의 합일, 일체의 교감,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곧 나의 분주한 마음, 다른 곳에 쏠려있는 욕망에 가려진 마음들뿐이었다.
물론 오해들 하지 마시길. 이글을 쓰는 목적은 결코 여러분들을 무리하게 내가 믿고 있는 신앙 안으로 이끌기 위한 포교의 의도는 아니다. 이 글은 자연스런 그간의 나의 신앙고백에 해당한다. 이글의 처음 의도는 언젠가 내가 속한 단체의 정기모임에서 어느 날 저녁 모든 신도들 앞에서의 발표를 위한 것이었다.
욕망이 춤을 추는 도시 그 어느 한복판에서 난 예기치 않게 이 배화교의 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난 그를 어느 단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그가 나를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그곳까지 인도한 셈이다. 그는 자연신이다. 그를 따르는 길은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하다. 그는 유일신이며 내 마음 안에 단지 그만이 있으면 된다. 그가 왜 나를 불렀는지가 그 경전 안에 쓰여 있을 것이라고 간사는 내게 말했다. 난 S대 독문학과를 막 졸업하고 취업의 난관에 부딪겨 그것을 절망하다가 급기야 길바닥에 술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인사불성으로 그 건물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을 아무래도 누군가가 들쳐 엎고 방안에다가 뉘여 놓았고 주머니에 반은 가설삼아 써놓은 내 구겨진 유서조각을 아마도 신원 확인을 위해 그들이 읽었을 런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간사님>이라고 부르는 중간 책임자격인 30대 중반의 한 사내를 만났는데 거실에서 내 자초지종을 들은 이후 가끔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내어도 좋다고 그는 말했다. 간사님의 첫인상은 그리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까만 피부에 깡마른 체구, 키도 작았고, 단지 그의 목소리만큼은 성우 못지않은 미색이었다.
그 단체가 위치한 장소는 시장 통 한가운데의 어느 낡은 4층 건물의 제일 꼭대기 층이었다. 우리는 옥상을 주로 휴식공간으로 이용할 수가 있었다. 조명이 없어 다소 어두운 복도의 현관에는 <진리연구회>라는 간판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난 가끔은 일요일마다 거기서 열리는 그들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 집회는 그 건물의 한가운데인 중앙 거실에서 이루어졌는데 정면 상단에는 떡하니 강대상만 하나 놓여져 있을 뿐이었고 배경으로는 약간은 보랏빛 기가 도는 비로드 천으로 된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특이하게 인상적인 것은 그 뒤편 제단에 놓인 촛대였는데 무슨 거대한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것이었고 거기에는 한시도 불이 꺼져 있는 때가 없었다. 난 그들이 깔아놓은 간이의자의 행렬 가운데 제일 뒷좌석에 앉곤 했다. 여하튼 그들은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배라는 의식을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찬송가는 편집되어 조야하게 복사된 것이었고 그나마도 닳고 닳아서 페이지가 떨어져 나간 것이 대부분이었다. 내손에 들리어진 경전이라는 것의 다소 생소하고도 신기한 내용들을 난 호기심에 차서 읽어보았으나 온통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들은 주로 중동지역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슬람교인가?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혹은 말로만 듣던 배화교? 빛과 어둠의 교차, 어두움을 미워하고 빛만을 사랑한다던…….그 페르시아의 한 밀교? 전체적인 의식은 분명 카톨릭의 그 신성하고 거룩한 분위기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난 끝내 목사나 지도자격인 그 누군가를 강단에서 볼 수는 없었다. 대신 의식의 흐름을 인도하는 사회자격 되는 그 간사라는 사람이 회중가운데서 육성으로 그 흐름을 이끌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그가 선창하면 회중들도 일제히 그것을 한목소리로 따라 했는데 그 일체된 리듬이라든가 억양이란 독특하고 낯선 것이어서 이들이 벌써 오랜 기간을 이런 식의 회합을 가지고 있었음을 집작할 수 있었다. 거기서 기억에 남는 것은 모든 문장들의 끝에 따라 붙는 주문 같기도 한 하나의 이름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알 할라카이’라는 단어였다. 아무래도 그 사회자라는 사람이 그날 저녁 나를 만났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간간히 제일 앞줄의 누군가가 치는 다소 투박한 통기타 반주에 시편 비슷한 풍의 서사시가 흐르면 사람들은 또한 그대로 그것을 되풀이했다. 처음에는 그 당시 극성을 부리는 이단 종파의 회합이 아닐까하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난 그러한 그 모든 분위기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영생교도 떠올려 보았지만 방송매체에서 보았던 그 광신적인 분위기는 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더군다나 카리스마에 넘치는 지도자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 그게 더 마음에 들었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너무나도 절도 있게 조용했고, 그 지성적인 분위기가 또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더구나 헌금을 걷는 시간 같은 건 따로 없었다. 다만 원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기증할 수 있게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떡하니 허리 높이의 <진리연구회>라 쓰인 목재 헌금상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 단체가 이 시장 통에 위치한지도 근 5년이 다되어 가고 있었고 일요일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은 대략 한4,50여명 정도 되어 보였다. 인원 층은 다양했는데 노인층으로부터 젊은이까지였는데 다만 아이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또 결혼한 부부도 거의 없어 보였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딜 가든지 그 경전을 꼭 가지고 다녔다. 그것도 가방 안에 숨겨둔 채로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게 팔짱에 꼬옥 끼고서. 경전은 갈색의 낡고 얇은 겉장으로 되었는데 표지에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아 사전처럼 보였다. 그리고 난 그리 두껍지 않은 그 경전을 읽고, 읽고 또 읽어서 나중에는 아주 달달 욀 지경에 이르렀다. 그 안에는 온통 처음부터 끝까지 빛과 어두움에 관한 이야기, 신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 악마와 그리고 천사에 관한 이야기, 성과 속에 관한 이야기들이 쓰여져 있다. 알 할라카이. 그 신은 모든 어두움을 미워한다. 이후로 난 자연히 독신을 꿈꾸게 되었다. 이후로 난 전보다 더 많이 악마의 유혹에 시달리게 되었다. 삶이란 곧 전쟁이며 전투이다. 난 이 같은 모든 악과 끝까지 투쟁해서 항상 승리하리라 마음먹었다. 하루 세 번의 기도시간을 난 지켜야 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자주 혼자 있는 것과 고요히 있는 것을 즐겨했다. 모든 부르짖는 기도는 사실상 금지였다.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감히 신에게 대화를 요청하거나 무얼 요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가 갑자기 나타나서 우리에게 말하는 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은 내게 무척 중요한 시간이며 그 시간 속에서 난 하루를 버틸만한 그 어떤 에너지를 얻어야만 했다. 세상은 빛과 어두움의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언제나 그 두 세력간의 갈등이었다. 그리고 난 빛의 세력 안에 속했다. 간사는 언제나 우리들에게 자기 자신이야말로 가장 큰 적이라고 말을 하곤 했다. 가장 큰 악마가 곧 우리의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수련 기간 중에 일년간은 그 육체 속에 숨어있는 악마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그것을 신의 힘으로 극복하는 순간이야말로 그 단체에 속하는 정식회원이 된다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하여 나는 금욕적인 생활을 힘쓰게 되었고 이 시험의 기간을 꼭 통과하기만을 고대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늘 정한 시간에 신 앞에 무릎을 꿇고 그날 하루를 반성하거나 잠드는 시간까지 옥상에서 명상에 힘쓰고는 했다. 그곳에 상주하는 이는 모두 여덟 명 정도였는데 여자들의 방은 거실 저편 주방 옆에 있었고 간사 실은 따로 있고 남자들의 공간이 있었다. 주로 식당일을 맡으신 혼자이신 아주머니 한분이 계셨고, 동역자 아니면 구도자로 불렸다. 남자는 간사와 나 외에 몇이 더 있었다. 그 중 나이가 꽤든 한 아저씨는 전에 알코올 중독자였다고 했는데 건강 때문에 이젠 술을 끊고 건물 내의 잡일들을 주로 담당하고 있었다. 또 우리는 늘 선행을 베풀기를 힘써야 했고 세상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인도할 의무가 항시 있었다. 포교야 말로 지상사명이었다. 낮이면 처소에는 주방 아주머니와 전화를 받을 여자 한사람만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아저씨만 남기고 모두들 밖으로 나갔다.
두 번째 내가 배운 것은 목적이 없는 지루한 시간들이 생활에 쪼들리며 세상사에 분주한 만큼이나 권태라는 악마를 부르며 유혹에 빠지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었다. 즉 우리 마음은 권태와 분주함이라는 양극 사이에 항상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만 했다. 이후로 난 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그 모든 것은 행위예술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곧 행동에의 예술로서의 미, 곧 무용이나 발레 더 나아가 일종의 신 앞에서 추는 경건한 육체의 춤, 그것이야말로 선행 그 자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사상은 무르익어갔다. 그리고 그 풍요로운 사상은 이윽고 커다란 실전들을 앞두고 있음을 난 예감했다. 이제 적용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이론은 승리에 귀결되어야만 했다. 즉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상이 공허한 사상의 기운 만으로서가 아닌 실제 가운데 생명력 있는 힘으로 살아있기 위한 절차이자 과정이기도 했다.
[저어, 시간 있으시면 저랑 얘기 좀 나누실까요?]
어느 날 난 시내에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말을 걸어오는 한 여자를 만났다. 그 여자는 조심스레 웃는 얼굴로 내게 접근해 왔다. 갸름한 얼굴에 약간 성격이 있어 보이는 20대중반의 그 여자는 모 종교집단에서 나온 사람이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나를 곧장 알아보는 것일까 나는 신기하기만 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질문을 하기도 하다가 시간이 좀 흐른 후에 최근에 내가 가지게 된 종교적 체험들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녀는 선선히 내 얘기를 받아주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만난 어떤 종교단체의 여자는 논쟁 끝에 끝내 나에게 말로도 담을 수 없는 저주를 퍼부었던 적이 있었는데, 난 그때 순간적으로 그 독기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할라카이의 보호아래 있었기에 그 저주를 통과할 수가 있었다. 거의 반나절을 우리는 이어질 듯 끊어질 듯 자리를 옮겨가며 혹은 시내를 함께 걸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여자의 옆모습은 언뜻 지적인 부분을 비치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런 종교단체에 들어가게 되었을까‘하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불우했던 집안내력과 과거를 추억처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은 자신이 찾던 것을 찾으셨다고 믿나요?]
나의 조용한 물음에 그녀는 곧 그렇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표정 어딘가에는 불안의 기색이 숨어 있었다.
[그럼 당신은 지금 행복하시겠군요.]
그녀는 확신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러면 그쪽은 그걸 찾으셨나요?]
잠시 동안 난 진심으로 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아니, 안타까웠다. 행복의 세계가 이렇게도 가까이 있는데. 지금까지 진리를 찾아 방황했던 그녀의 지난 시간들이 마치 나의 과거인 냥 여겨졌다. 그녀에게 진정으로 행복한 완전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내안에 이렇게 흐르고 있는 <완성된 세상>의 실체를 그녀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졌다. 오, 알 할라카이여, 나를 도우소서!
저녁시간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그녀가 나의 침묵을 깨고 웃고 있었다.
[배 안고프세요?] 나는 화제를 돌렸다. 시장기가 느껴졌다. 우리는 빈 음료수 캔을 들고 일어났다.
근처 분식집으로 우리는 들어갔다. 왠지 그녀의 어깨너머로 곳곳에 한 쌍의 남녀들이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난 나도 모르게 알 할라카이의 이름을 되뇌이었다. 분위기가 무척 좋은 식당이었다. 간혹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얘기를 들으면서 그 눈동자가 참 곱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스쳐지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드리워지고 거리로 나서자 지나는 연인들은 다정스레 손을 잡고 우리를 스쳐지나갔다. 어둑해진 거리를 우리는 나란히 걷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될까요?]
난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여정. 서 여정이라고 해요.]
이윽고 결심한 듯 명랑하게 이름을 밝힌 그녀의 볼은 약간 상기된 듯했다.
[그쪽은?]
[아, 전 김 혁성, 김 혁성입니다.]
서 여정. 그녀는 호기심에서였는지 순수한 종교적 의도에서였는지 모르지만 대뜸 내가 거처하는 처소에까지 순순히 따라왔다. 이미 저녁시간이었고 난 간사에게 그녀를 만난경위와 자초지종을 소개하고는 우린 함께 동역 자들과 저녁식사를 가졌다. 식사 후 그녀는 간사와 잠깐 얘기를 나누었고 우리는 옥상에 올라가 저녁바람을 쐬며 시장 통에서 흘러나오는 불빛 사이로 사람들의 행렬을 구경했다. 그녀는 별로 말이 없었다. 멀리 산동네의 불빛들이 빛나고 있었다. 난 전철역입구까지 배웅을 나갔다. 난 다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다. 그녀는 돌아서서 가다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 이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높이 치켜들고 흔들었다. 나는 어쩌면 그게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도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난 그녀를 잊고 지냈다.
내가 오고부터 반년이 지나자 차츰 상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간혹 생활비를 벌기 위해 도시의 막일자리에 수련삼아 투입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새벽같이 일일잡부 사무실로 나가서 일을 기다리거나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했다. 우리 중 더러는 대학생이거나 직장인들도 섞여 있었다. 그즈음 저녁마다 건축회의가 열리기 시작했다. 간사의 말에 의하면 세 들어 있는 이 건물의 주인이 세를 더 올려 받기 원한다는 것이었고, 이 참에 돈을 더 마련해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자는 제안이었다. 근처의 약간 산동네로 올라가다보면 부지도 넓은 전세 주택독채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실제적인 문제였다.
그 즈음 함께 기거하는 남자방의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한철이라는 20대 중반의 남자를 따라 야간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가 밤마다 어디를 가는지 확인해 보라는 간사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지만, 현장에 갔다가 꽤 좋은 일자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지만 다부진 체구의 한 청년이 문득 나를 보더니 일하려 오셨어요라고 물어서 난 그렇다고 말했다. 우린 사무실에서 간단히 이력서라는 것을 작성했다. 그가 한달 봉급을 말했는데 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을 했다. 그곳은 과천의 한 백화점의 지하물류센터였다. 원래 내 목적은 한철 이와 함께 붙어있는 게 다였다. 그가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그리고 그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를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에게 악재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한철의 평판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일하다가 가끔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의 틈바구니에 숨어 농땡이를 피우기 일쑤였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그가 곧 쫓겨나리라 예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열심히 일하는 나를 그를 대신해서 신임하는 듯했다. 쉬는 시간마다 그들은 담배를 돌려 피우며 잡담을 나누곤 했다. 주로 연애 담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입이 거친 한 사내는 늘 입만 열면 지저분하거나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더러운 이야기만 골라하면서 희열을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 팀은 모두7명이었다. 물류반장이 없는 날이면 어디에선지 숨어있다가도 한철은 쉬는 시간만 되면 용케 알고 찾아와서는 일행으로부터 담배를 빌려 피우곤 했다. 내게도 담배를 권했지만 난 사양했다. 그러자 곧 얼굴이 하얗고 키가 크고 용모가 수려한 안경 낀 한 친구가 한철이 와의 관계를 물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정훈이었고 자기가 소설지망생이라고 했다. 신소설이라는 말에 내가 되묻자 그는 알 수 없는 프랑스풍의 작가이름을 말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지우개>라는 독특한 이름의 소설제목이었다. 그는 신소설풍의 습작을 쓰고 있었는데 나는 그 소설이 완성되면 한번 보여 달라고 반은 농담으로 말했다. 난 한철과의 관계를 멀리 돌려서 얘기를 했으나 그들은 곧 내가 어떤 신앙을 가진 자임을 눈치챈듯했다. 요즘 세상에 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느냐는 의외라는 표정과 종교단체를 의심하는 눈빛이 그들 간에 상호 교차하는 듯했다.
시간이 되면 언제나 칼같이 팀장격인 그 키가 작고 다부진 체격의 청년이 채근했다.
[자, 슬슬 일하러 갑시다.]
일행은 담뱃불을 내던지고는 끙 하며 하나둘 씩 노곤한 허리를 마지못해 일으켜 세웠다. 직원들이 다 퇴근한 한밤중의 아무도 없는 백화점 지하. 그러니까 밤 12시부터 다음날 새벽5시까지가 보통 우리들의 작업시간이었다. 음료 등을 박스채로 이리저리 지역별로 옮기는 일은 육체적으로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것들을 나중에 화물차에 적재할라치면 다소 허리에 무리가 가곤 했다. 40대 초반의 배불뚝이 물류반장은 거의 출근하지 않았고 가끔 기습적으로 이곳에 들를 뿐이었다. 모든 일은 그 팀장이라는 청년의 관할 하에서 착착 진행되어졌다. 그의 손에는 늘 물류명세서가 잔뜩 들려져 있었고 그는 선천적으로 셈에 능통한 듯 했다. 이곳의 모든 빙과류나 유류, 음료품목들은 새벽이면 각 지역의 분점으로 분류되어 화물차에 실려졌고 그 적재까지가 우리들의 몫이었다. 바닥에는 온통 일 도중에 실수로 흘린 유류제품 썩는 퀴퀴한 독특한 냄새로 공기도 잘 안 통하는 지하는 늘 후덥지근해서 우리는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휴식시간이면 나는 가끔 일행과 동떨어져 홀로 알 할라카이의 음성을 기다리곤 했다.
<어두움을 미워하시며 빛 가운데 좌정하신 이시여!>
명상은 나의 육체까지 깨끗하게 하는 듯했고 나는 환희에 휩싸였다.
<소설가>와 나는 쉬는 시간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붙어 앉아서 서로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것은 거기서 일하는 동안 나의 크나큰 즐거움이 되었다. 단지 그를 만난다는 설레임에 난 저녁 10시경 과천 행 전철을 기다리곤 했다. 어느 쉬는 시간 <소설가>와 나는 이야기 끝에 한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돌연 그가 내게 물어왔다.
[당신께서 믿는 신이란 게 어떤 신인지 얘기 해주실 수 있나요? 듣고 싶군요.]
[이런 얘기에 관심 있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난 약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제가 보기에 당신은 신앙인 이라기보다는 사상가 쪽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해서요.]
그는 잠시 짬을 두고는 말을 계속 이었다.
[왠지 당신한테 신이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아, 이건 그저 제 생각일 뿐입니다. 너무 개의치 마시길…….] 그는 계속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이가 좋아 보이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뭐죠?]
[언젠가는 그 신과 결별해야만 할 거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군요.]
[............]
[전 모든 건 단지 이데올로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순수했던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굳어져가기 마련이죠. 그 굳어진 상태를 전 이데올로기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신조차도 처음에는 정말 신이었다가 시간이 흐르면 변질되어 하나의 죽은 신이 된다는 것 입니다.곧 우상인 셈이지요. 그게 바로 이데올로기입니다. 우상이 아닌 것이 우상이 되어 가치가 전도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럼 당신은 신을 발견했습니까?] 나는 반문했다.
[제가 보기에 신의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소설인 것 같습니다.]
[뭐라구요. 소설이 신이란 말입니까?]
[아니죠, 가능성 말입니다. 소설은 그 자체로써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유일한 도구 일 테니까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미소를 띠고는 날 바라보았다.
안경테 너머로 비치는 그의 큰 눈동자는 무슨 만화 주인공에 나오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왜 이런데서 일하는 거죠.] 나는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신은 이런 노가다가 어울리지 않는 거 같애서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다만 무언가를 찾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성에 가장 가까운 것인 듯 합니다. 그런데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죠.]
[전 그것을 이미 포기했을 뿐이고 당신은 아직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그것, 그게 바로 우리들의 차이 아닐까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자, 또 한바탕 뛰어볼까요?] 거기엔 장난기조차 서려 있는 듯했다.
그리고는 땀에 젖은 하얀 러닝셔츠에 청바지차림의 그는 막장갑을 주워 들고 서서히 일어서서는 작업장으로 향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삶의 한가운데서 진정 자유로운 듯했다. 어째서 그에게는 어두움의 흔적이 없을까? 그때 팀장 청년이 모이라고 소리를 쳐댔다.
<한철은 또 어디에 쳐 박혀 있는 걸까? 혹 잠이라도 들어 버린 건 아닐까 저번처럼.>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침이면 일행은 과천에서 늘 함께 전철로 퇴근했다. 하루는 전철 안에서 승객들이 왁자지껄해 있었는데 한 소녀가 쓰러져 있었다. 출근하기 바빠 경황이 없는 터라 사람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신음을 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서 어디가 아프냐고 묻자 그녀는 발에 쥐가 났다는 것이었다. 응급 처치 법으로 발을 마사지하자 곧 그녀는 계면쩍은 듯이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일어났다. 차내가 조용해지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팀장 청년은 여전히 일행과 함께 끝도 없이 재미있는 애기들을 늘어놓아서 웃기곤 했다. 그리고는 한달 째 되는 날 팀장청년이 우리 모두 시내에서 회식이나 하자고 모임을 제안했다. 그리고는 나 역시 빠지지 말고 꼭 참석하라고 종용했다. 한철이라는 친구는 몇 주 버티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자기 집인 인천으로 내려가 버렸다. 회식이 있는 곳은 영동시장 근처의 한 카페였다. 내가 들어서니 이미 다들 모여 있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한달에 두 번 있는 우리들의 휴일이었다. <소설가>도 이미 와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팀장이라는 자는 이미 그것에 자기가 아는 여자친구 일행을 같이 데리고 와 있었다. 여자는 모두 세 명이었고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그중 하나는 이미 노골적으로 <소설가>가 마음에 든다며 그의 옆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라 나는 아차 싶었으나 이미 좌중에는 맥주잔이 오가고 술이 거나해 질 무렵까지 난 앉아 있어야만 했다. 잠시 후 약간은 취기가 오른 청년팀장이 내게 술을 권했다.
[김 혁성씨, 아니 형님이라고 부르지요. 나이도 저보다 연배인 듯싶은데.......]
나는 사양했다.
[형님. 존경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살면서 처음 만나봅니다. 우리가 이렇게 팀을 이룬 것도 인연인데 우리 파이팅 한번 하십시다.] 그는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외쳤다. 일행 모두도 잔을 연거푸 비웠다.
[그런데 대체 형님이 모시고 있는 그 신의 이름을 알려주실 수는 없을까요? 우리도 한번 믿어 볼려고 하는데요......] 청년팀장이 사뭇 진지하게 말을 꺼내자 좌중에 있던 일행들은 모두 와하하 하고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 팀장, 신의 이름을 알고 싶거들랑 나한테 물으라고 내가 좋은 신하나 소개시켜 줄 테니까…….] <소설가>가 끼어들었다.
[여기는 내가 아는 형이 운영하는 데거든 안주 걱정일랑 하지 말라고. 자, 마셔, 마셔, 이봐 거 잔을 따라야지. 이렇게 비워두면 쓰나?]
나는 그곳을 나오기 전 <소설가>를 한번 쳐다보았다. 그의 한쪽 팔은 여자의 어깨를 둘러 품에 앉고서 그 손은 거의 여자의 젖무덤에 닿아 치렁대고 있었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채 잔을 들어 건배하는 시늉을 했다. 그의 안경이 실내의 네온사인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게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다음주인가? 일이 끝난 새벽 퇴근길에 나는 그들을 우리들의 처소로 초청했다. <소설가>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며칠째 직장에 오지 않았고 팀장 청년은 전철에서 내내 그가 카페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이 났다고 연신 욕을 해대며 그를 헐뜯었다. 그들은 점심때까지 남자들의 숙소에서 잠에 골아 떨어졌다. 내가 잠시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간 사이에 그들은 모두 어디론지 가버렸다는 것이었다. 저녁때 즘 간사가 자기 사무실에 있던 손목시계가 없어졌다고 했다. 나는 그날부로 더 이상 그곳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일은 나의 포교활동에 약간의 혼선을 초래했다. 어두움에 대한 깊은 환멸의 시선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나는 약 일주일간 두문불출하고서 기도실에 쳐 박혀 지냈다. 알 할라카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식음도 거의 전폐한 채로.
이후로 나는 반 자학적인 심정으로 막일을 하며 전전했다. 더러 어느 교회를 건축하는 곳에 투입되기도 했고. 혹은 산중의 절간을 손보는 일에도 불려 나갔다. 한번은 일산 어느 근처까지 일하다가 만 사람의 대신으로 갔다가 도중에 그 사람이 나타나는 바람에 헛일을 하고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른 구도자의 경우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회합에 주방 아주머니가 내게 <그 여자>가 왔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서 여정이었다. 단정한 까만 투피스 정복차림으로 맨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게 위로를 주시는 알 할라카이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화장실을 갔다 올 일이 있었는지 그녀가 잠시 내 옆을 지나 거실 밖으로 나갔다. 난 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간사의 인도에 따라 기도와 명상 시간이 되어 모두들 눈을 감고 묵상에 들어갔다. 이윽고 누군가 내 옆자리에 살며시 앉는 듯한 기척을 느꼈다. 난 눈을 감은채로 명상에 힘을 썼다. 화장품 냄새가 풍겨오자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했다. 송영을 올리기 위해 눈을 뜨고 찬송가를 펴들었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다름 아니라 서 여정 그녀였다. 나는 맥박 치는 고동을 느꼈다. 마침 그녀가 찬송가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로 나는 그녀 쪽으로 찬송가를 가져가자 그녀가 약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듯했다. 우린 눈인사를 나누었다.
이후로 그녀는 정기적으로 일요일 회합에 참석했고, 몇 달되지 않아 구도자 지원신청서를 접수했다. 우리는 일요일 오후면 옥상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차를 하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전의 종교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간사는 그녀를 신임했고 곧 처소 내에서의 사무를 그녀에게 전담했다. 그녀는 나보다도 더더욱 신앙적 성장이 빨라보였다. 그녀가 오고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자기가 아는 사람들을 하나둘씩 데려오기 시작했다. 건축 문제는 이제 피할 수 없는 당면 과제가 되어 갔다. 공간이 점점 좁아지고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녁마다의 건축모임도 시들해 질 무렵 사람들은 점차로 이곳저곳 불려 다니는 막일에도 점차 지쳐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느 틈엔가 자기의 소유를 팔아 건축헌금을 대기 시작했고 저녁 모임은 그러한 것들을 은연중에 요청하고 있었다. 간사의 말에서 마치 건축사역이야말로 알 할라카이 그분의 뜻이며 거기에 충성하는 길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무언가가 내 속에서 소화되지 않은 채로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길만이 살길이며 신의 뜻이라고 외쳐 대기 시작했다. 어느 틈엔가 그들은 소리 내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광분하여 마구 거실바닥을 떼구르르 굴러다니기 조차 했다. 여기저기서 신의 소리를 들었다면서 사람들이 경전의 한 부분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아래층에 기거하는 사무실 사람들이 기도소리가 너무 크다며 이곳을 찾아와 항의하면서 파출소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사태까지도 발생했다. 하지만 알 할라카이는 내게는 아무 음성도 들려주지 않으셨다. 나는 내 마음이 그들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분리란 곧 어두움에 속한다고 나는 배웠다. 완전한 합일이야말로 빛 그자체이며 알 할라카이에게로 다가서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였다.
어느덧 그 무덥던 여름은 가고 가을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여정은 이곳에 온 이후로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해 나갔다. 우리는 가끔 아침저녁으로 식사시간에 맞은편으로 얼굴을 대하거나 저녁 건축 모임 때 가끔 얼굴을 보곤 하는 정도였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하루는 옥상에서 보자고 그녀가 나직이 말을 했다. 화장 안한 그녀의 얼굴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귀태가 감돌았다.
[생일 축하해요. 혁성 씨.]
그녀는 등 뒤에 감추고 있던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를 내게 수줍은 듯 들이밀었다.
[어떻게 제 생일을 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나는 기쁘기도 했지만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다.
[요즘 잘 지내는 거죠?]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무언가 할말이 있는 듯해서 난 짐짓 기다렸다. 하지만 곧 그녀는 저편 출구로 내려서고 있었기에 나는 소리치며 그제야 선물 고맙다고 외쳤다. 그런데 그 뒤로 누가 서있는 걸 나는 느꼈다.
다름 아니라 그건 간사였다.
다소 무얼 뜻하는지 파악이 불분명한 빛나는 그의 눈빛에서 나는 섬뜩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는 한차례 옥상을 둘러보더니 스윽 하니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생각난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취침시간이니 문 잠그고 곧 내려오게나]
다소 어두컴컴한 옥상 테이블에서 달빛에 비추어 상자에서 꺼내든 것은 새의 형상이 깃든 은도금의 목걸이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목에 걸었다. 카드가 한 장 있었는데 어두워서 읽을 수 없어서 주머니에 넣은 채 층계를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난 내 바지에서 카드를 찾았건만 당체 그 어디에서도 그 카드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내가 어젯저녁 뒷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것 같은데. 여정 씨에게 다가가 도대체 그 카드에 뭐라고 썼었느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만 평범한 생일축하의 메시지중 하나를 난 떠올리며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건축모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이곳을 설립하신 지도자께서 곧 건축문제로 다음달 마지막 일요일 이곳을 방문하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그 일로 마음이 설레하면서 건축모임은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간사는 나를 밖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옥상에서의 일 이후가 아닌가 의심도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면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우리들 내부에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건축모임은 나의 신앙을 고조시키기는커녕 나를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난 몹시도 추운 한기를 느껴서 잠자다가 몸을 뒤척이며 깨어났다. 창문이 열려있었다. 남자들은 모두 다 잠들어 있었고 얼핏 어둠 속에서 시계는 3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여성 전용 세면장 쪽에서 누군가의 우는 듯한 들리는 듯했다. 소리 나는 쪽으로 몇 걸음 다가서자 그건 분명 한 여자의 흐느낌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 화장실 쪽으로 멈추었던 발길을 돌렸다. 다시 남자들의 방을 향해 거실을 지나다가 문득 간사실 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 세면장으로부터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나의 발길은 나도 모르게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방문은 약간 열려져 있었다. 나는 소리 없이 발소리를 죽여 그 불빛을 향해 한걸음 다가서고 있었다. 불빛 속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뿔싸! 그것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자의 벗은 몸이었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해서 두 눈을 부비며 방문에 바짝 다가가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나는 무언가에 심하게 머리를 맞은 것 같았는데 더 이상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깨어보니 남자들 방이었다. 거실 쪽은 온통 사람들의 소란으로 시끌시끌했다. 난 옆에 앉은 남자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침통하고도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대체 어디 간 거야. 이 간사 놈 나오라 그래]
[내 딸년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 사기꾼 자식 대체 어디로 내뺀 거야]
거실 바닥에는 여정이 엎드러져 흐느끼고 있었다. 그 옆에 서있는 것은 분명 그의 가족들임에 분명했다. 거실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집기가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있고 강대상은 옆으로 쓰려져 있고 보랏빛 휘장은 좌우로 길게 찢겨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들을 빙 둘러싸고는 동네 주민들이 구경하고 서 있었다. 난 휘청거리는 몸으로 방문을 닫았다.
[글쎄 간사님이 이곳 전세보증금하고 그간에 모인 건축헌금들을 챙겨가지고 종적을 감추셨답니다.]
그래봐야 일억이나 될까. 나는 액수 따위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무슨 청천 벽력같은 소리인가.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안에서 동시에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아, 신이시여.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간사님의 알 할라카이여!
그건 모두가 허구였다는 말입니까?
알 할라카이여! 당신은 진정 허구란 말입니까?]
난 바닥에 무릎을 던지고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김 형. 진정하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더 누워계셔야 됩니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날 부축했다.
아니다. 이건 시험이다, 아니 이건 악몽이다, 악마의 지극한 시험이다. 우리를 모두 송두리째 밀 까부르려듯 하는 악마의 거대한 음모일 뿐이다. 허구일 순 없다. 알 할라카이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다.
내가 밖으로 휘청거리며 나서자 여정이 퉁퉁 부르튼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여정의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다짜고짜로 내게 다가와 멱살을 잡고는 소리쳤다.
[너도 한통속이지, 이 사기꾼 놈아, 너희 같은 놈들은 죄다 유치장에 집어 쳐 넣어야 돼]
[간사놈 어디 갔어, 어디다 몰래 숨겨놓은 거 다 알어, 빨리 데려오지 못해]
그가 날 다시 거실 바닥에 패대기를 쳤고 여정이 아버지를 말리고 있었다. 좀 전에 그가 던진 촛대가 내 머리에 맞았는지 머리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픔은 느낄 수가 없었다. 다만 물감처럼 시뻘건 피가 거실바닥에 떨어지고 있을 뿐....... 나는 바닥에 엎드러져 알 할라카이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말릴 생각은 않고 그저 혀를 쯧쯧 차며 구경만 할뿐이었다.
간사실 역시 엉망이었고 책상은 뒤집혀져 있었다. 바닥은 각종 서류종이가 흐트러져 어지러웠다. 한차례 소동을 피운 여정의 아버지는 그녀를 데리고 가버렸고 점심때가 지나자 이곳 건물주가 찾아와 이번 주 내로 당장 건물을 비워 달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가버렸다. 몇 사람 남지 않은 우리는 오후 내내 침묵 속에서 식사도 잊은 채 일종의 충격에 휩싸여 지냈다. 그날 밤 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은 간사 실을 통해서만 올라갈 수가 있었다. 나는 다락방에 가까스로 이르자 신을 향해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알 할라카이시여! 내게 오소서. 우리들 가운데 함께 하여 주소서! 알 할라카이시여, 우리를 버리지 마시옵시고 우리를 이 시험에서 건지소서. 힘을 주소서. 어두움을 미워하시며 빛 가운데 좌정하시는 이시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오, 알 할라카이시여!>
약 십 여분이 지나자 갑자기 누군가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리는 듯했다. 아니 음성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하나의 눈부신 빛이 비춰지고 있었다. 나는 벅찬 감격에 설레었다.
<오, 역시 당신은 존재하셨군요. 역시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군요. 알 할라카이시여!>
하지만 이윽고 그 빛은 점 점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그 빛 가운데서 신의 뒷모습을, 그것도 아무 말 없이 쓸쓸히 돌아서서는 천천히 사라져 가는 우울한 신의 뒷모습을 본 듯했다. 알 할라카이는 그렇게 내 앞에서 천천히 사라져 갔다.
그게 내가 본 나의 신 알 할라카이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후로도 우리중 남은 몇 사람은 거처를 산동네로 옮긴 뒤로 흩어지지 않고서 계속적으로 모여 지냈다. 더러 우리 중에 어떤 이가 떠나간 간사의 뒤를 이어 알 할라카이의 이름으로 일요일마다의 모임을 계속 이끌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내가 다락방에서 본 것들을 더 이상 발설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간사의 뒤를 이은 그 청년은 정말로 기쁨에 차서 할라카이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뜻을 전했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가 만난 신이 과연 알 할라카이인 것인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또 모르겠다. 그가 만난 신이 알 할라카이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신인지 내가 알게 뭔가? 알 할라카이로 불리지만 전혀 다른 성격의 신인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신의 이름은 인간의 것일 텐데.......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그가 있든 없든 그의 이름으로 잘 살고 있을 텐데.
이후로 간사의 소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항간에는 그가 객지에서 우울증에 시달려 목을 매달았다는 소문도 나돌곤 했다. 아니면 정반대로 어디에서 자리라도 잡고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상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난 여전히 그녀를 기다린다. 그 소동이 있던 날 간사실의 어지러운 바닥에서 내가 찾아낸 것은 그녀의 노란 카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녀의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었다. 나는 이제 알 할라카이가 아니라 서 여정 그녀를 기다린다.
2004년 6월 30일 (수)오전 4:34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11
댓글쓰기
답글쓰기
댓글 리스트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 | 작성시간04.06.30
시켜드리게 되었다니 참 운명적이란 생각도 해봅니다.아시다시피 그이름은 문맥상 여러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짐작하셨겠지만 알 할라카이'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충동적으로 한순간에 떠오른 이름인바, 언어적 신뢰를 파먹어 들어가게된 점. 아울러 사과드리면서 경우에따라 한 개인에게 나타나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 | 작성시간04.06.30
는 최초의 순수한 신의 이미지를 지칭하는 무리한 기호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면서 앞으로 이같은 <조어>는 가급적 자제할까 합니다. ghgk77님의 탐정가같은 호기심에 답이 되었을 지...아울러 보잘것 없는 습작에 힘을 실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 감사드립니다.
작성자다리우스 작성자 본인 여부작성자 | 작성시간04.06.30
아시겠지만 '알'이란 아랍어로 '하느님'이거나 '신'이란 뜻으로 알고 썼읍니다.그러니까 '할라카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신이되어야만 하겠지요.
작성자tanbek | 작성시간04.06.30
점점 깊어지는 변화를 감지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작성자마르시아스 | 작성시간04.07.05
다리우스님! 오늘 이 소설을 다 읽었습니다. 정말 잘 쓰셨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아픕니다. ㅋㅋㅋ
댓글 전체보기
두이노 성 안의 성(.. 다른글
이전
현재페이지 1234
다음
Breaking the Time 을 읽어주셨던 여러분께...댓글(5)
알 할라카이댓글(11)
착각댓글(5)
소설작법/피츠 제랄드 (요약한 글)
소설의 일반론(요약한 글)댓글(4)
일상으로의 초대댓글(1)
답글바닷가의 한 카페
수장, 적토마를 부탁하네 1장 7화댓글(2)
환상문학과 팬터지 소설댓글(3)
제라르 즈네트와 그 유명한 '서사담론'-요약댓글(1)
영화와 소설의 서사/기법 교환댓글(6)
수장, 적토마를 부탁하네 제 1장 6화댓글(3)
바흐친의 소설 이론
수장, 적토마를 부탁하네 제 1장 5화댓글(3)
리얼리즘 소설댓글(2)
모더니즘 소설댓글(3)
수장, 적토마를 부탁하네 1장 4화댓글(1)
<사과는 왜?> - 5댓글(1)
<사과는 왜?> - 4댓글(1)
<사과는 왜?> - 3댓글(1)
맨위로
로그아웃 전체보기 PC화면 카페앱 서비스 약관
청소년보호정책 카페 이용 약관 상거래피해구제신청 개인정보처리방침
© Kakao Corp.
카페 검색
답글 제목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