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전남시조문학』 제12집 <특집3 집중조명 광주와 전남의 여성 작가들>
다시 읽는 2012년 광주와 전남의 여성시인들
-관조와 성찰, 사회성의 발언/ 서연정
지상의 숱한 사람들 가운데 시인으로 살다 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작품 가운데 오랜 세월을 두고 구전 회자되는 작품이 있다. 숱한 사람들의 가슴에 일렁이는 생각이나 느낌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미덕이다! 그러한 미덕을 가진 시인들, 우리 주변에 소질이든 인내력이든 그러한 점들을 많이 가진 시인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품에 수작이 있는 반면 태작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필자와 같은 보통 시인들에게 위로가 된다. 태작이 있는 반면 수작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지난해 《광주전남시조문학》(제12호)에 작품을 수록한 여성시인은 강경화, 박금희, 서연정, 이명희, 이보영, 이송희, 이수윤, 장경례, 정춘자, 정혜숙, 조민희, 최지형 시인 등 모두 12명이었다. 그들의 작품을 일독하며 먼저 눈에 띈 것은 다양한 식물 상상력이었다. ‘연꽃, 달맞이꽃, 나팔꽃, 개망초, 해당화, 사과꽃, 살구꽃, 복숭아꽃, 배꽃, 카네이션, 국화, 독말풀, 갈대꽃’이라는 각종 꽃이나 풀 이름이 등장하고, ‘꽃망울, 탱자나무, 댓잎, 미루나무, 삘기, 자작나무, 깻단, 가랑잎, 아기단풍, 양파, 자두, 꽃잎, 새순, 나무, 벼이삭, 나뭇잎, 풋감, 나뭇가지, 낙엽’ 등도 식물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시어들이다. 시에 배경색을 나타내는 어휘들도, ‘노을, 별, 지는 해, 별자리, 밤하늘, 달빛, 생의 모퉁이’ 또는 ‘가을, 늦가을, 언 땅, 봄 여름이 지나갔다, 눈보라, 함박눈, 금빛 들녘, 겨울, 메뚜기 마른 울음, 가을 꼬리, 첫눈, 쇠기러기 한창’에서 보이듯 가을이나 겨울의 저녁 또는 밤이 무대이다. 식물에게 가을이나 겨울은 결실을 맺고 그것을 갈무리하는 시점이다. 대체적으로 광주와 전남의 여성시인들은 현재 자신의 위치를 시적 역정의 결실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며 드리운 시의 음영 역시 고즈넉한 관조와 성찰의 자세를 보여 주었다.
이제 살피게 될 시인들은 등단년도에서 보이다시피 대부분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의 창립부터 참여하였다. 강경화(2002년 등단), 서연정(1997년 등단), 이명희(2005년 등단), 이보영(2002년 등단), 이송희(2003년 등단), 이수윤(2002년 등단), 장경례(2001년 등단), 정춘자, 정혜숙(2003년 등단), 최지형(1997년 등단) 시인, 이들은 협회의 크고작은 행사에 힘을 보태왔으며 협회의 위상을 높이기 위하여 노력한 숨은 일꾼들이다. 이들은 2012년 무엇을 어떻게 썼을까.
2012년 신입회원을 만나다
먼저 ‘신입회원 특집’에 실린 박금희, 조민희 시인의 작품을 읽는다. 박금희 시인은 2006년, 조민희 시인은 2005년 시로 등단하였으니 햇귀 같은 신인은 아니다. 박금희 시인의 꽃 연작을 읽는다. 「나팔꽃」, 「연꽃」, 「달맞이꽃」을 통하여 사람의 하루 또는 일생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울림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화자는 ‘탱자나무 울타리에 / 찔린 상처 감싸 쥐고/ 어쩌지 못한 한 생각/ 파란 하늘 춤사위로/ 눈부신/ 아침 햇살에/ 너를 향한 마음 하나’를 간절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한 마음은 ‘물 밑에 생을 안고/ 허공을 밀고 당겨/ 꽃망울 차오르면/ 한 숨결/ 멎은 자리에/ 소신공양’을 올리는 것도 불사한다. 꽃대를 밀어올려 허공에 피우는 연꽃을 보고, 자기의 몸을 불태워서라도 욕망하는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러한 열정적인 낮이 지나고 저녁이 돌아오면, 아침부터 낮까지의 처절한 현장을 벗어나 고요해진다. ‘노을 진 산머리에/ 별 총총 돋아나면/ 샛노란 소반 위에/ 수줍음 심지 열어/ 온종일/ 건너온 시간/ 저고리 벗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적요해져, 사투에 가깝던 일상을 정돈하는 것이다.
한 숨결
멎은 자리에
소신공양 올릴까
-박금희, 「연꽃」 종장
온종일
건너온 시간
저고리 벗는소리
-박금희, 「달맞이꽃」 종장
눈부신
아침 햇살에
너를 향한 마음 하나
-박금희, 「나팔꽃」 종장
꽃에 기대어 쓰는 작품을 읽다 보면, 반드시 그 꽃에 바치는 헌사라기보다는 어떤 꽃이름을 갖다 붙여도 무방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박금희 시인의 꽃을 소재로 한 작품은, 꽃의 고유한 변별성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조민희 시인은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자인데, 당시 고령임에도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젊은 감각을 보여 주었다. 흔히 종장에서 전변을 일으켜 작품의 주제를 살려야 한다고 시조창작법은 말하지만 작품 「12월 별자리」는 화법에 따라 얼마든지 의도를 싣는 장소는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경우 초장과 종장만 읽으면 종소리가 주는 위안에 머물고 만다. 그렇지만 중장의 애매성을 탐독하다 보면 작품의 무게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종소리 붉게 운다
굽은 등 감싸면서
멀리 뵈던
그 별자리
언 땅에 내려앉고
댕그랑!
시린 가슴에 베이스로 감겨든다.
-조민희, 「12월 별자리」 전문
종은 야멸차게 울지를 않는다. 종은 거푸 후려치는 게 아니라 미세한 떨림이 전달되기까지 기다리며 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소리는 종을 때리는 사람의 정신 파장까지를 안중에 두고 듣게 된다. 종이 울리고 있다. 그 종은 ‘붉게’ 울기에 ‘굽은 등’을 감싸주는 아늑함을 가지고 있다. ‘시린 가슴에 베이스로 감겨’ 드는 그 종소리는 ‘울림의 폭이’ 큰 음역이다. 감싸고 감겨드는 종소리는 어떤 이유에서든 가슴이 추운 이를 위로한다. 그런데 그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아니면 종소리는 무엇이 되어 오는가. ‘멀리 뵈던/ 그 별자리/ 언 땅에 내려앉’는다. 여기에서 의미의 열쇠는 ‘그 별자리’의 ‘그’가 쥐고 있다. ‘그’는 ‘그이’를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이고 ‘그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그런가하면 ‘이미 말하거나 서로 아는 것’ 또는 ‘확실하지 않거나 밝히고 싶지 않은 것’을 나타내는 관형사로 쓰일 때에는 좀더 여러 가지의 뜻을 내포한다. 그러니 독자의 감동은 ‘그’를 종소리로 듣느냐, 12월이면 더욱 따스하게 사랑을 전파하는 성자라고 증폭된 이미지로 읽느냐, 아니면 지극히 사적인 누군가의 생일 별자리에 관한 의미로 읽느냐에 따라 공감의 영역이 달라진다. 명료한 듯하지만 들어가면 웅숭깊어지는 이런 점이 시를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삶의 속성을 수용하다
이명희 시인의 작품 「굴렁쇠의 삶」과 최지형 시인의 「겨울이 왔다」는 삶의 이면을 성찰하는 계기를 준다.
멈추고 싶은
흔들림
덜컹이며 굴러간다
울퉁불퉁 자갈길
달리기 힘들어도
그 길을
달려야 살기에
멈출 수가 없어라.
-이명희, 「굴렁쇠의 삶」 전문
「굴렁쇠의 삶」의 ‘굴렁쇠’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화자의 모습이다. 굴렁쇠는 시지프스가 날마다 밀어올리는 ‘항상 꼭대기에 있어야 할 바위’처럼 항상 구르며 달려가야만 한다. ‘울퉁불퉁 자갈길’에서 그만 멈추고 싶다 해도 굴렁쇠는 ‘달려야 살’ 수 있기에 멈추지 못한다. 멈춤은 곧 삶의 반대 의미이기 때문이다. 벅찬 삶의 모습을 굴렁쇠의 운명에서 포착 형상화하였다. 최지형 시인의 「겨울이 왔다」의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사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추위를 예감하며 ‘나무는 사색이 되고/ 잎들은 기댈 곳이 없’어진다. 보내는 이도 떠나는 이도 애달프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이제 나무는 이별을 받아들이며 잎들도 잡은 손을 놓을 것이다. 겨울 나무가 무뚝뚝하고 근엄하게 보이던 것은 슬픔의 애도기간이어서였는가 보다. 이별의 인지상정을 요란한 수식 없이 보여주고 있다.
오늘밤 찬 바람이 모여
음모를 시작했다
나무는 사색이 되고
잎들은 기댈 곳이 없다
이런 날
올 줄 알았겠지만
이별이라니 슬프겠다.
-최지형, 「겨울이 왔다」 전문
풍성한 가을의 향기
이보영 시인의 「가을, 우체국」과 장경례 시인의 「금빛 들녘」은 어머니인 대지의 은혜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허리 굽은 할머니가 가을을 끌고 와서
우체국 창구에서 소포를 접수하자
물소리 깻단 터는 소리 우체국이 환해진다.
중년의 우체국은 빙그레 웃으시고
옹이진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신다
참기름 고춧가루와 깨소금 그리고 또…….
늦가을 햇살처럼 가난한 웃음 지으시며
가랑잎 같은 손으로 상자만 어루신다
어르신 그냥 어머니 마음 이렇게 적을까요.
-이보영, 「가을, 우체국」 전문
이보영 시인의 「가을, 우체국」은 ‘가랑잎 같은 손’을 가진 ‘늦가을 햇살처럼 가난한 웃음 지으시’는 우리네 어머니가, 가을걷이한 것들을 도회지의 자식들에게 부치는 장면이다. 참기름, 고춧가루, 깨소금 등을 만들기 위해서 어머니는 해토머리부터 쉬지 않고 움직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먹일 것에 해롭다는 농약을 몽땅 칠 수도 없었을 것이니 잡초와 벌레의 등살에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밭에 엎드려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모두를 거두는 위대한 대지다. 헌신과 희생의 모습에 절로 가슴이 저린다.
가을은 풍성하고
금빛인 들녘 노을
무거운 알갱이가
돗자리 깔아 폈네
시절엔
눈 줄 길 없어
탈곡기 목이 쉰다.
-장경례, 「금빛 들녘」 전문
장경례 시인의 「금빛 들녘」은 황금벌판의 활기를 독자에게 전해 준다. 우리나라 가을 풍경 중 벼가 익어가는 모습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광활한 황금벌판은 바라만보아도 흐뭇하고 권태에 빠진 무기력한 사람들에게 삶의 새로운 의욕을 북돋워준다. ‘시절엔/ 눈 줄 길 없어/ 탈곡기 목’쉬게 돌아가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흥겹지 아니한가. 지나가다가 말이라도 걸라치면 막걸리 한 사발과 칼칼하게 무친 홍어무침이라도 한 점,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 2012년 회지에서 모처럼 만나는 신명나는 작품이었다.
아련한 그리움의 장소, 역
강경화 시인의 「극락강역 인근」, 정혜숙 시인의 「구일역」은 ‘역’이라는 다른 세계로의 통로를 암시하는 제목에 먼저 이끌린다. 작품들은 독자의 시선을 그리움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리움은 삶의 원동력이며 치유의 과정이며 휴식의 처방전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그리움을 어떻게 체험하고 표현하였을까.
멈춘 듯 흐르는
놀 비친 강을 지나
뒷짐 지고 서성이는
할머니의 흰 등처럼
기차가 달리는 한 때
그리움도 둥글어진다
-강경화, 「극락강역 인근」 전문
강경화 시인의 「극락강역 인근」에 드리워진 그리움의 정서는 ‘뒷짐 지고 서성이는/ 할머니의 흰 등처럼’ 달리는 기차를 바라보며 둥글어진다. 모가 난 그리움이라면 아직 발효되지 않아서 대상도 본인도 고통스러울 것이지만 둥글어진 그리움이니 딸기맛처럼 오렌지향처럼 상큼달콤할 것이다. 씨잉씽 달려가는 KTX열차의 속도로 읽는다면 그리움의 뒤통수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푸른 지붕이 얹힌 아치형 다리를 건너
한 편의 그리운 시가 내 앞에 도착했다
비 긋는 어스름녘이어서
나무들도 수굿했다
일렬종대의 나무들 사이를 오래 걸었다
안양천 물줄기처럼 우린 말이 없었고
희미한 어린 날들이
간간이 이마를 때렸다
-정혜숙, 「구일역」 전문
정혜숙 시인의 「구일역」을 읽으며 ‘구일역’이 어딘지 몰라 인터넷을 찾아보니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있는 구로1동의 역이다. 대도시의 공단 인상이 떠오르면서 ‘희미한 어린 날들이/ 간간이 이마를 때렸다’라는 종장이 더욱 선명하게 이미지를 드러내었다. 아마 구일역을 가본 사람이라면 정취를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독자의 사고와 시인의 사고가 겹치는 지점에서 감상의 효과는 대폭발을 보이니 말이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아름다운가? 그렇다. 실제로 당시에 괴로웠다고 해도 우리는 대체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시절에 어렸기 때문이 아닐까. 어리다는 말은 아직 순수하다는 의미를 간직하고 있어서 ‘어린 날들’이 함축한 그리움이 아련하게 발치에 떨어진다. 추억 속으로 떠나게 하는 작품이다.
삶의 현장성에 포커스를 대고
이제 사적인 정서를 넘어서서 핍진하게 현대 사회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찾아본다. 서연정 시인의 「사족(蛇足)의 변천사」, 이송희 시인의 「노을의 귀가」, 이수윤 시인의 「가을, 빨간 카네이션-2012 현모양처」가 보인다.
그릴에서 가든으로 레스토랑에서 카페로
웰빙에서 힐링으로 혀를 빙빙 돌릴 때
그 빛깔, 삶의 포장지
현란한 사족이다
길거리의 간판이 이름을 바꾸는 사이
열다섯 소녀에서 쉰네 살 여인으로
아직도 멀고 먼 찰나,
그 거리,
사족이다
-서연정, 「사족(蛇足)의 변천사」 전문
유행 따라잡기에 급급한 사회상, 현대의 고질적 병폐인 실업문제, 허상의 상류사회를 향해 치닫는 물질만능주의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가치관 변화 등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연정 시인의 「사족(蛇足)의 변천사」는 변화하는 간판에서 시대의 유행을 보며, 그것이 진정한 생의 관점에서 볼 때 ‘사족’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다. 한때 양식점 간판은 그릴(grill)이라고 붙어 있었다. 대개 경양식이었는데 그런 외국어 간판 앞에서 주눅이 들던 일이 엊그제 같다. 이후 가든(garden)이 대유행이었다. 그러더니 레스토랑(restaurant), 카페(cafe) 등이 음식점 간판에 쓰였다. 우리 사회에 외국어가 혼용 남발되면서 너나없이 삶의 본질이 웰빙(wellbeing)에 있다고 얼마 전까지 떠들어대었다. 진정한 웰빙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의미를 사람들은 의식주에 치중하는 것 같았다.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음식을 먹고 비싼 집에서 사는 것을 웰빙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급기야 정신적 치료가 필요해졌다. 심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지금은 힐링(healing)이라는 말이 안 쓰이는 곳이 없을 지경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돌아보려는 이 노력이 다시 유행에 휩쓸려 언제 어떤 낱말로 대체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립대학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치통 같은 노을이
번져가는 저녁이면 매일 밤 이빨 악물고 알바를 뛰었다
몇 장의 이력서 간신히 밀어 넣고 터벅터벅 걷는 골목,
내 안의 어디에서 안 잠긴 수도꼭지처럼 그렁그렁 물이 샌다
원룸촌 추운 바람이 나를 자꾸 밀어낸다 좁고 빈 방 안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저마다 몸 웅크리며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고 학교로 가는 길도
보이지 않은 하루, 어둠의 거대한 식욕이 골목길을 삼킨다.
-이송희, 「노을의 귀가」 전문
이송희 시인의 「노을의 귀가」는 실업문제에 대하여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원룸촌은 시대의 산물이다. 공동체사회라는 의미가 퇴색하면서 우리는 모두 개인이 되었다. 고독한 젊은 개인들은 ‘어둠의 거대한 식욕’에 잡아먹히는 생활을 어떻게 헤쳐나갈지 아직 암담하기만 하다. ‘사립대학 등록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이 한마디를 날카롭게 받아들이는 이는 서민 이하 빈민층일 것이다. 무덤덤하게 받아넘길 수 있다면 그는 중산층이다. 중간에 산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이수윤 시인의 「가을, 빨간 카네이션-2012 현모양처」는 중산층을 건너뛰어 상류사회 진입을 노리는 여성 화자의 허세와 상실감을 그리고 있다. 할말이 많기 때문에 4수 연시조로 쓴 상당히 긴 작품이다. 화자가 꿈꾸는 ‘블링블링 상류사회’는 ‘다리를 건너야’ 닿을 수 있다. 화자는 ‘2012 현모양처’라고 자평하지만 ‘쇼핑이나 남자밖에/ 관심 없는 동창’이 사는 곳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이며 ‘잘 살기는 틀렸지만/ 평생을 해? 빚 친구랑?’이라고 자문하는 사람이다. 현대는 이 정도만 되어도 현모양처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변화하는 가치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아랫배가 뻐근한 채
봄, 여름이 지나갔다
바야흐로 결정할 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어
다리를 건너야 닿는 블링블링 상류사회
점심 먹고 차 마시며
매너 좋은 그 남자는
꺼낼 본론 잊었는지
고창 가서 장어 먹자?
아서라 학원 빼먹는 중1 딸이 기다린다
시아버지 상 치른 후
들이미는 사채 증서
진실해서 결혼해준
딸 부잣집 외아들아
아파트 달랑 한 채인 그 재산도 과하더냐
쇼핑이나 남자밖엔
관심 없는 동창보다
잘 살기는 틀렸지만
평생을 해? 빚 친구랑?
편두통 하얀 타일에 툭 터지는 생리혈
-이수윤, 「가을, 빨간 카네이션-2012 현모양처」 전문
시조는 언어예술이다
창에서 분리되어 읽는 시조로 변화한 현대시조에 이르러 시조의 언어예술성은 더욱 요구되었다. 그래서 시조쓰기가 어렵다고들 입을 모은다. 시조는 먼저 시가 되어야 하고 시는 시정신의 깊이에서 나온다. 깊어야 맑은 물이 솟는 우물처럼 시정신도 그러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진이의 시조는 시대를 뛰어넘어 읽는 고전이 되었다. 그렇다면 작품을 고루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어투나 어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버릇의
밑바닥이
그 얼마나 깊으간디
그 속 한 번
빠져들면
나오지를 못 하는가
도둑놈
감방 몇 번 가도
다른 길을 못 찾더라.
-정춘자, 「버릇」 전문
정춘자 시인의 작품은 고시조의 화법을 연상시킨다. 어릴 적, 고시조를 외우며 작품에 내장된 삶의 이치를 자연스레 배우기도 하였다. 그런데 작품 「버릇」 종장은 낙인찍힌 자의 고통에 일말의 연민을 가지지 않음은 물론, ‘도둑놈/ 감방 몇 번 가도/ 다른 길을 못 찾더라.’라고 가차없이 단언하고 있어서 한겨울 깊은 우물에서 퍼올린 김 나는 우물물처럼 좀더 따뜻한 시선이 요청된다. 작품 「일을 하라」 또한 읽어보면 하나도 틀린 곳이 없는 말이며 구구절절이 옳다. 특히 1수의 종장에서 ‘일이란/ 삶 속의 꽃이요 한 살이의 보람’이라는 해석에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럼에도 현대시조는 옳은 내용을 선전하고 계몽하는 잠언이라기보다 그것을 포괄하는 언어예술이며 예술이 주는 감동은 어떠한 경구 못지않은 진실을 안겨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34편의 작품중에서 몇 편을 살펴 보았다. 시인들마다 생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편견을 뛰어넘는 통찰을 보여 주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차분하고 안온하며 고요한 식물성 이미지의 창작이 주로 많았다. 서정성을 견지하되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닌 활달한 작품도 더 많이 창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악(善惡), 미추(美醜), 호오(好惡)가 공존하는 곳이 삶의 현장이 아닌가. 착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만 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은 감정도 생길 수밖에 없다면 이에 좀더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담대한 필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자유롭게 물결치는 신선한 생명체의 생동감을 기대해보는 것이다.
(끝)
첫댓글 위 글의 서연정, 「사족(蛇足)의 변천사」는, 시집 『인생』(고요아침, 2020)에 수록하면서
「화사첨족」으로 제목이 바뀌고, 내용도 아래와 같이 수정되었음.
********
그릴에서 가든으로 레스토랑에서 카페로
웰빙에서 힐링으로 혀를 빙빙 돌릴 때
그 빛깔, 삶의 포장지
현란한 화사첨족
길거리 간판들의 꽁무니를 쫓아서
공연히 애태우며 전신만신 그린 발
얼마나 많이 붙였나
떼어내도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