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미 명교회 카페에 실었던 글입니다(2022. 5.31).
독자 여러분들께서 '글이 너무 못났다'고 질책하지 않으시면, <<늘푸른 나무>> 13호에 투고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몇 군데 손을 보고 여기에 다시 등재합니다.
@ 편집을 책임지고 있는 저는 <<늘 푸른 나무>> 13호에 실을 여러분들의 옥고를 한편 한편 모셔서 이 카페에 올리는 일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못난 글이지만 제 글을 먼저 올렸습니다.
울릉도 할아버지와 내 친구의 소중한 행복
한 20년 전쯤,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가 경상북도의 지원을 받아 ‘울릉도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추진하였다. 그 때 나를 포함한 국문과의 몇몇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이 연구 프로젝트의 한 영역인 울릉도 방언연구를 위해 며칠씩 수차례 울릉도에 체류하면서 방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적절한 제보자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수소문하며 돌아다니다가 만난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에게 보기 드문 구경거리가 있다며 어떤 무덤 군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크지 않은 무덤들이 여럿 있는데, 하나같이 무덤의 정면에 사람이 하나 정도 겨우 들어가 앉을 만한 얕은 굴이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고, 그 앞에는 밥그릇 같은 식기들이 몇 개씩 나뒹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정말 대단한 문화유적을 소개한다는 듯이, 의기양양하게, 이게 바로 울릉도에만 있는 ‘고려장’의 흔적이라고 했다. 늙은 부모를 이 굴 속에 들여다 놓고는 간혹 밥을 갖다 주기도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 워낙 갑자기 그런 희한한 형상의 무덤과 얘기를 접한 나머지, 고려장이란 것이 일종의 전설에 불과한 것인데도, 지식인(?)답게 대처를 하지 못했다. ‘어 그 참 이상한데’ 하면서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할아버지에게 끌려 다녔다.
며칠 뒤 같은 연구 프로젝트의 한 영역인 울릉도 역사유적 조사를 위해 국사과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들어왔다. 같은 숙소에 묵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그 할아버지 얘기를 하니, 당시 민족문화연구소 소장이던 국사과 김윤곤 교수님이 박장대소하셨다. 그건 도굴의 흔적으로, 도굴꾼들이 무덤에 굴을 파서 돈 될 만한 것은 가져가고 나머지는 버리고 간 것인데, 주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시골 할아버지한테 휘둘렸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나는 농반진반으로 부탁 겸 제안을 드렸다. 울릉도의 노년층 주민들 대부분이 그렇게 믿으며, 울릉도에는 참 희한한 문화유적 같은 게 있다며, 그것을 외지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에 큰 자부심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굳이 진실을 말하여 그분들에게 큰 허망함을 안겨 줄 필요는 없을 터이니, 그냥 그렇게 알고 행복하게 살아가시도록 하는 것도 또 다른 진실이 될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백성들의 집단적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 모르는 어떤 대상에 대해 나름대로의 연원을 상상하여 붙인다. 말에도 이러한 현상이 있다. 보통 민간어원설이라고도 하는데, 하나의 말의 의미를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말의 의미를 끌어다 붙여 이해하는 방식이다. 주로 소리가 비슷한 말 사이에서 일어난다. 부엌에서 일할 때 두르는 행주치마가 있다. 이 말은 원래 ‘부엌에서 입는 짧은 앞치마’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행주대첩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데서 비롯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권율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 삼천여 명이 왜군 삼만 여명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그런데 당시 성 안의 부녀자들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고 화살이 떨어진 조선군들은 이 돌을 성 아래 왜군들한테 던져 승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런 연유로 부녀자들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라고 일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주치마’라는 말은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전부터 쓰이고 있던 말이니, 그러한 어원 풀이는 사람들이 상상하여 지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행주치마’의 의미를 그것과 전혀 관계가 없지만 소리가 비슷한 ‘행주대첩’의 의미를 끌어다 붙여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는 의미상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소리가 비슷한 말을 서로 연결시켜 생각하는 방식의 비유법이 많이 쓰인다. 이는 매우 단순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원초적인 방법이다. 초등학교 때, 이름이 ‘지영이’이면 예외 없이 ‘지렁이’라고 놀린 기억이 있을 것이다. 대구시 수성구의 황금동(黃金洞)은 원래 황청동(黃靑洞)이었는데, 사람들이 ‘황청’을 저승의 뜻인 ‘황천(黃泉)’과 연결시켜 생각하는 바람에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서울시 도봉구의 방학동(放鶴洞)은 학과 관련된 유래가 있는 곳인데, 어른들은 아이들이 늘 방학(放學)이라고 생각하여 공부를 게을리 할까 봐 걱정이라고 한다. 강서구 방화동(榜花洞)은 참 아름다운 이름이지만 ‘방화(放火)’가 연상되어 소방관들이 걱정이 크다고 한다는 식이다. '캐 내려하는 광물이 많이 묻혀있는 광맥'이란 뜻의 ‘노다지’가 영어의 ‘no touch'에서 왔다고 생각하는 것도 참 대단한 상상력이다. 이러한 민간어원은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 국어사전도 있을 정도이니, 참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기 때 우리나라에서 금 광산을 운영하던 미국인들이 우리나라 일꾼들이 금 광석을 훔쳐갈까 봐 손대지 말라고 ‘no touch’라고 말했고 그것으로부터 노다지란 말이 생겼다는 설이다. 설사 그렇다손 치더라도 'don't touch'라고 말했을 것이다. 광산에서 캔 금 광석은 엄청나게 큰 크기의 돌이어서(제련(製鍊)공장으로 실려가 1톤당 평균 5그램의 순금이 나온다고 함. 참고로 휴대폰 1톤을 해체하면 150그램의 순금이 나온다고 함), 훔쳐서 호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다지의 그러한 어원 해석은 언중들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 집안의 조상들이 누대로 산 지역은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인데(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경남 함안군 여항면 여양리였음), 우리나라에서 손꼽힐만한 두메산골이다. 독일인 외신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씨가, 1980년 광주사태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김사복씨라는 택시기사의 도움으로 광주에 잠입 취재하여 광주사태의 참상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 ‘택시 운전사’(2017년 개봉)에서, 힌츠페터씨가 김사복씨의 택시를 타고 지도에도 없는 험한 산골짜기 샛길을 통해 광주로 몰래 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촬영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강원도 정선군 출신의 영화감독(장훈)이 어떻게 경남 산골의 이 첩첩산중 샛길을 찾아냈는지 참 신기하다. 이 곳에 여항산이란는 산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여항산이란 이름은 잘 모르고 ‘각데미산’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참 재미있는 민간어원이 있다.
이 산은 6.25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다. 당시 북한의 인민군이 남한의 거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고, 마산과 부산 지역만 간신히 국군과 유엔군이 막아내고 있었는데, 각데미산은 이 지역을 지키고 뺐는 데 핵심적 요충지였다. 만일 이 곳을 적군한테 뺏기면 마산과 부산이 연이어 함락될 가능성이 커 아군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고 한다. 아군이 이 산을 지켜냈기에 적군이 마산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만일 마산이 함락되었다면, 마산과 부산 사이는 평야지대여서 지리적 장애물이 없었으므로, 부산까지 단숨에 적군에게 함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었다면 당시 부산에 피난 와 있던 남한 정부는 제주도로 쫓겨 가고 한반도는 공산화되어, 우리는 지금 김정은 위원장 치하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이 산에서 벌어진 엄청난 전투는 산 밑에 살던 지역 주민들이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당시 주민들은 아군 전투기의 공습을 피해(아군 전투기들이 주민들과 피란민들을 인민군으로 오인하여 공습하는 일이 있었다고 함) 에비소라는 이름의 광산굴(일제시대 때 크게 개발되었던 중석 광산의 굴) 속에서 피난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아군 전투기의 공습에 속수무책이었던 인민군들이 그 굴로 들어오는 바람에 한동안 함께 지냈고, 인민군들한테서 기름을 얻어 등잔불을 밝히는, 상상하기 힘든 일도 있었다고 한다. 내 어머니의 증언에 의하면, 인민군들은 아군 전투기의 공습 때문에 낮에는 굴속에서 자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모자에 풀을 꽂아 위장을 하고 질서정연하게 산 위로 공격해 올라갔다가, 밤새 공격에 실패하고는 새벽녘이 되면 산 아래로 내려와 굴속으로 들어오는데, 여러 들것에는 죽은 군인들이 실려 있고 중상을 입은 군인들이 온몸에 피와 흙이 범벅이 되어 “아주머니 물 좀 주세요.” 라며 비명을 질러대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고 한다. 인민군들은 이 산을 점령하기 위해 달포 넘게 집요한 공격을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아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퇴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아군의 피해도 막심했고, 특히 미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인민군의 집요한 공격에 진절머리 난 미군들이 이 산을 가리키며 ‘갓뎀(God demn)'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 산의 이름이 각데미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이 지역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고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산은 나의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부터(6.25전쟁 훨씬 이전부터) 각데미산이라고 했다고 하니, 언중들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민간어원이다. 사람들은 대개 이러한 민간어원을 진실이라고 믿는 있는 경우가 많다. 울릉도 할아버지가 도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무덤을 고려장의 흔적이라고 믿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래 전에 고등학교 친구들 몇몇과 같이한 술자리에서 생긴 일이다. 고교 동기라 해도 문과 이과 갈리고, 학년 규모도 비교적 컸으며, 졸업한 지도 꽤 되어, 서로 좀 서먹한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술이 얼큰하게 취한 한 친구가 “느그들 각데미 산이 와 각데미 산인 줄 아나?“라며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각데미 산은 비교적 높고, 경남 마산과 가까워, 옛 마산 지역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친구들이 눈길을 모아주며 관심을 표하니, 이 친구 신이 나서 설을 막 풀어내는데, 들어보니 바로 그 ‘갓뎀(God demn)' 설이 아닌가. 동석한 친구들이 모두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기막힌 내막을 알고 있는 친구를 부러워하며 존경하는 염을 아낌없이 표했다. 주위가 집중되니 좋았고, 얼큰한 술기운이 그러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친구는 그러한 분위기를 즐기며 큰 행복감에 젖어 있는 듯했다. 아 그런데, 나는 그만 지금은 후회하고 있는 짓을 하고 말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그만 진실을 말해 버린 것이다. “’각데미‘의 정확한 어원은 모른다, 그러나 ‘갓뎀(God demn)' 설은 거짓임이 분명하다, 6.25전쟁 훨씬 이전부터, 우리 할아버지 어린 시절부터 각데미산이라고 불러 왔다고 한다.” 등등. ’ 소리가 유사한 단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의 전이현상‘이라는 좀 고급스러워 보이는 듯한 설도 덧붙였다. 국문과 교수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 동석했던 친구들이 누구 말을 믿겠는가? 순간 그 친구한테 집중됐던 분위기는 나한테로 쏠렸고, 그렇게 기막힌 ‘갓뎀(God demn)' 설은 하나의 해프닝 같은 그럴 듯한 구라임이 드러나고 말았다. 주위의 친구들도 모두 좀 멋적고 민망해 했다. 당시의 그 친구는 많은 술자리에서 그런 설을 풀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감탄의 반응을 얻으면서 행복하게 살아왔고, 그날도 같은 기쁨을 누리게 된다는 예상을 하면서 설을 풀었는데, 우째 이런 일이 !!! 국문과 교수라는 친구가 어쭙잖은 학설로 분위기를 깨고, 친구의 행복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것이다. 친구는 내가 얼마나 원망스러웠겠는가. 친구의 붉으락푸르락 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 이후 지금껏 친구의 행복을 뺏은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다. 내가 그냥 있었으면, 그 친구는 지금도 같은 행복감을 느끼며 술잔을 기울일 것이다. 상대적으로 덜 젊었을 때의 나는 울릉도에서 고려장 설을 풀면서 살아가시는 할아버지의 행복을 지켜 드리고 싶어 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더 젊었을 때의 나는 또 다른 진실의 가치를 잘 몰랐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