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열차문학기행문
필자는 청량리역에서
동해행 무궁호에 2024.05.30. 184명과 함께 몸을 싣고, 영월을 향하여 문학기행을 떠나게 되었다.
현장에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세 가지로 요약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1. 영월군(寧越郡)의 소고(小考)
영월(寧越)은 2개읍과 7개면으로 형성된 강원도특별자치도에 속하였고, 현재 인구는 37,132명이다.
특별히 눈길이 끌리는 것은 자연 환경과 문화적 배경이었다.
폐광전 옛 탄광지역에 인구가 몰려 살았던 상동읍이 있었으나, 행정타운은 영월읍이었다.
영월읍은 서강(西江)과 동강(東江)이 합류하여 남한강(南漢江)을 이루어 충주호(忠州湖)로 흐른다.
그러나, 영월에는 특이한 이름들이 등장하는 것이 더 재밌다.
한반도면(韓半島面)이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면은 오대산 서남쪽 계방산에서 발원하여 평창과 영월땅에 흐르는
평창강(平昌江)이 영월에 와서 꼭 대한민국의 지형을 형상화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근거삼아 부른 이름이 곧 한반도면이다.
또한, 김삿갓 가정이 이주하여 살았다하여 김삿갓면도 있다.
영월의 공기는 파아란 하늘을 맑게 볼 수 있으며. 병풍(屛風)처럼 둘러 쌓인 파아란 산들이 찾아오는 나그네들에게 커다란 쉼터가 되어준다.
2. 단종의 눈물이 멈추지 않는 영월
우리는 단종(端宗) 이야기에 대하여 이미 익숙해졌다.
단종은 세종대왕의 맏손자 이셨다.
그러닌까 조선이 개국된 후 어린나이 12세에 제6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어머니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후 3일만에 죽게되었고, 12세 될 때 아버지 문종도 죽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왕은 되었으나, 세 명의 삼촌들(수양대군, 안평대군, 금성대군)
가운데 둘째 삼촌이었던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고 계유정란을 일으켜 단종은 즉위 2년만에 왕권을 수양대군(세조)에게 선위(왕의 자리를 물려줌, 현대판 대통령 탄핵)하였다.
이때 생겨난 충신들이 있었으니, 사육신과 생육신들이다.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하였으나, 폭군 세조는 신하들을 죽이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키고 창덕궁에서 끌어내어 유배시켰으니, 이곳이 영월 청령포이다.
필자는 청령포를 두 번째로 금번에 찾아갔다.
단종(端宗)이 살던 옛 집터를 향하여 청송 한 그루는 허리를 굽혀 생존하고 있다.
단종은 한양이 그립고,
아내였던 정순왕후가 보고 싶을 때 북쪽을 바라보면서 울었던 곳 노산대(魯山臺)와 망향탑(望鄕塔)에 오르며, 필자의 심정은 조선시대와 근현대사의 정치적 슬픔에 잠겨보았다.
한양(漢陽)에서는 세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복위운동이 일어나 결국은 세조(수양대군)는 정권에 눈이 어두워져 단종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청령포에 유배된지 4개월만에 독약(사약)을 마시게 하여 관풍헌에서 죽게 하였다 한다.
이 때의 단종의 나이는 17세 소년에 불과하였다.
그의 시체를 강가에 놓고 동강물에 떠나게 하였으나, 신하 엄흥도가 찾아서 발산(해발667m)기슭에 암매장하였다.
그 이후 조선왕조 후기인 숙종24년(1698년)에 이르러 숙종(肅宗)이 단종을 복위시켰으며, 그의 무덤을 한양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장릉(莊陵)이라 부르게 한 것이다.
지금도 해마다 영월군은 비운으로 쓰러져 간 단종(1441~1457)이 사약으로 죽음에 이름을 슬퍼하며 (10월24일 사망) 단종문화재 퍼스티발(festival)을 매년 4월에 개최하는 영월인의 선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오늘따라 단종이 유배 생활에서 즐겨 드셨다는 영월의 산나물비빔밥 "어수리 나물밥"으로 박가네 식당에서 시장했던 우리는 때늦은 점심식사를 일행 184명이 나누었다.
3. 시선(詩仙)김삿갓 유적지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이다.
아호(雅號)는 난고(蘭皐)이다.
그러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바는 방랑시인 김삿갓이다.
어느 고을에 들어갔을 때, 삿갓 쓰고 다니던 김병연 방랑시인에게 "당신의 이름이 무어뇨?" 고 물었을 때, 김삿갓은 "입(笠)"
입니다. 이때부터 "삿갓"으로 자신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필자는 사계절의 녹색나무인 청송(靑松)을 형상화 시켰다.
김삿갓의 대표시는 그를 기념하는 문학가 전시실 전후에 걸쳐 있는 시구가 아마도 대표시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난고(蘭皐)가 남긴 자신의 일평생을 되돌아보며 지은 평생시(平生詩)로써 1연만 인용하여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난고 평생시
"새는 둥지가 있고 짐승도 굴이 있어
모두가 제 보금자리가 있건만
내 평생을 돌아보니 나만 홀로 상처뿐이구나
짚신에 지팡이 짚고 천리 길 떠돌며
물처럼 구름처럼 방랑하며 사방을 내 집 삼았네"
김삿갓은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조선후기(순조7년) 1807년 3월13일 안동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후에는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로 농민들이 생활이 어려웠던 때. 소외계층들의 저항운동이었던 "홍경래 난"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때 김삿갓의 할아버지도 반란군에 투항하였으나, 민란이 평정된 이후에는 김삿갓의 할아버지는 대역죄로 몰려 참형을 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었고, 대역죄 가족은 죽음이 무서워 지금의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산골짜기로 김삿갓의 8세시에 이주하였다 한다.
김삿갓이 살았던 生
家는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기에 필자는 그곳까지 갈 시간이 없어 오르지는 못하였다.
이곳에서 성장하며 조선시대 관급에 오르는 장원급제에서
1등을 하였으나, 22세 관직에 회의감을 느끼고 가출(家出)하여 방방곡곡 유랑생활 떠돌이 인생으로 살아가면서 수 많은 詩를 읊었던 시선(詩仙)이 되었던 것이다.
아들들이 귀가(歸家)을 요청받을 때마다 "그러하마"해 놓고 단 한 번도 영월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다가 전남 화순군 동북면 구암리 정시룡 집에서 1863년 57세의 나이로 객사하였다.
훗날 김삿갓의 둘째 아들이 전남 화순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지금의 영월군 김삿갓면 와석리 노루목 기슭으로 이장하여 방랑시인 김삿갓 묘가 현존하고 있다.
김삿갓(1807~1863)은 조선후기의 방랑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영월군에서는 매년 10월에 김삿갓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하여 김삿갓 문화재를 개최하고 있다한다.
필자의 긴 글을 독자들이 읽어주심에 감사하며,행복한 날 되시길 소망합니다.
필자 - 靑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