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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원고는 2020년 3월 22일 팟빵 방송용 원고였습니다.
신약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구약이라고 말씀을 드렸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사백여 년 동안 일어난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렸습니다.
구약과 신약은 별개가 아니라 구약이 신약의 배경이고, 구약이 신약의 원인이라고 성경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내용으로 시작하겠습니까? 마가복음이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라는 내용으로 시작하겠습니까? 누가복음 3장에 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 올라가는 족보가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요한복음은 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는 내용으로 시작하겠습니까?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연결선상에 있고, 구약과 신약은 한 연결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구약과 신약은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구약 따로, 신약 따로가 아니라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따라서 구약을 모르면 신약을 알 수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모르면 신약의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고, 구약의 주제를 모르면 신약의 주제를 알 수 없습니다.
이제 신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두 번째 필수 조건, 즉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내용, 다시 말해 구약과 신약 사이의 사백여 년의 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반드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신약 성경을 조금만 치밀하게 읽다 보면 구약 성경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표현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표현은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같은 표현들로서 예수님의 입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이 구약에는 없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많이 하셨던 말씀은 ‘기억하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들어와서는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갑자기 사람들의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구약과 신약의 사람들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설명을 하곤 합니다. 신약의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인 요구를 하는 것이라고 설명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설명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는 십자가 사역이 있기 전까지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성도로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 이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의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든 사람들은 여전히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향해서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 그래서 회개할 수도 없고, 구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고, 두드릴 수도 없는 죄인들에게 예수님은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또 복음서를 읽다 보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 나옵니다. 각 복음서 후반부에 가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헤롯당원들, 장로들이 돌아가면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왜 찾아옵니까? 경배하려고 찾아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올무로 엮어 예수님을 죽이려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입니다.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 장로들은 모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모두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 사람들의 삶의 기반은 하나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상황이 쉽게 이해가 되십니까?
그래서 구약과 신약 사이 사백여 년의 기간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 사백여 년의 기간 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어야 예수님께서 느닷없이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말씀하셨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백여 년의 기간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기간 중 가장 큰일은 이스라엘에 유대교라는 이름의 종교가 태동을 해서 정착을 했고, 예수님께서 오시던 무렵에 유대교가 절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교의 종교적 전통이 가장 뿌리 깊게 확립되어있던 세상으로 오셨던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종교였지만 그 하나님은 구약의 하나님, 즉 구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스스로 소개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온 인류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 나라, 이스라엘 민족만의 배타적 하나님이었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잘 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상벌의 하나님, 보상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유대교가 이스라엘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5세기 무렵입니다.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패망한 이후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던 남유다 사람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기원전 5세기 무렵 이스라엘로 귀환합니다. 이때 귀환한 사람들 중에 에스라와 느헤미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바사 왕국의 한 도(道)로서의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원활히 통치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너진 민심을 수습해서 통합된 사회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통합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유대교입니다. 따라서 유대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이 되는 내용이 바로 선민사상과 율법주의입니다.
유대교의 선민사상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는 오직 이스라엘 나라뿐이라는 사상입니다. 유대교의 선민사상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은 오직 이스라엘 민족뿐이라는 사상입니다. 즉 유대교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 온 인류의 하나님을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으로 왜곡한 것에 불과합니다.
선민사상을 통해 유대교가 강조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 백성들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주는 자들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민사상의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원활히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한 기득권 계층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지배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 헤롯당원, 장로들이기에 그렇게도 예수님을 죽이지 못해 안달을 했던 것입니다.
선민사상과 더불어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유대교의 수단이 율법주의입니다. 유대교는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라고 백성들을 설득할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물론 이때의 율법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닙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율법입니다.
유대교는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해 주신 것이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해야만 하나님의 상,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백성들은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하나님께 전적으로 종속되게 됩니다. 또한 율법을 법제화 하는 사람들, 법제화 된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제사를 드려주는 사람들에게도 전적으로 종속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을 잘 지키면 상을 받고, 율법을 잘 지키지 못 하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즉 복을 받든 벌을 받든 스스로 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라는 개념을 가르치십니다. 바로 이때 하시는 말씀이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회개하고, 실제로 구하고, 실제로 찾고, 실제로 두드리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과 은혜라는 개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 오직 행위라는 것을 통해 어떤 결과가 나타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회개하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비싼 제물을 들고 성전에 나와 제사라는 행위를 드려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것 필요 없어. 그냥 저 회개합니다. 그냥 저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라고 말만 하면 된다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에 대해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은혜로 사람을 대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구약과 신약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고 있어야 신약 성경의 내용을 바르게 이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교 이외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 몇 가지만 간단하게 살펴보고 맺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정치적 상황으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 하에 놓여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패망하고,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한 이후 이스라엘은 결국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열강의 치열한 다툼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처절한 몸부림을 쳐야만 했습니다.
바벨론과 바사를 거쳐 헬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마카비왕조(하스모니안왕조)라는 이스라엘 왕조가 들어선 적이 있으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당시는 헬라를 정복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이 식민통치를 받는 시기였습니다.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이 가장 우월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주요 지역의 분봉왕들이 정치적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의 경제적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여러 제국을 거치면서 오랜 식민통치를 겪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더욱 더 황폐해졌습니다. 전통적인 기득권 계층은 나름대로 부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일반 백성들은 기본적인 의식주마저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글자 그대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을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신앙공동체 사회였지만, 이미 그 구조는 완전히 붕괴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남유다에 속했던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그리고 소수의 레위지파만이 그나마 열두 지파의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살았던 나머지 지파들은 이방민족과 다름없는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아무런 기대와 아무런 소망이 없는 가운데 그나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 ‘메시야 대망론’이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셨던 한 의로운 왕이 곧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티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식민통치로부터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사회적 불평등으로부터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메시야가 곧 오실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만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이고, 복음서가 시작되는 것이고, 신약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본격적으로 마태복음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