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8:19~21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
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20 어떤 이가 알리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운동선수들을 보면, 선수로 세워지기 까지 오랜 시간동안 훈련으로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경건이란 말과 체육관이라는 말은 같은 어원이라고 한다.
선수는 타고나는 것도 있지만 선수가 되고서도 계속 훈련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기술을 익히는데도, 때론 수 년에서 십수 년이 걸리기도 한다. 에베소서를 보면, 교회는 예수님의 신부이자, 군대인데,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알겠지만, 군대에서 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군대에서는 훈련을 강제로 받는다. 그런데 교회가 군대라고 한 것은 다만 교회는 자발적으로 훈련을 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군대나 교회나 똑같다. 그런데 훈련은 지식훈련도 있거니와, 실천훈련도 있다. 그래서 대체로 지정의의 순서로 훈련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이 비율이 맞지 않으면, 지식만 많고 실천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한 실천은 잘 하지만 지식이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독교의 훈련은 믿음의 훈련이다. 믿음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는 뿅이 아니다. 십자가는 인격적인 것이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믿음을 뿅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을 오해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하여간 믿음은 주머니이다. 주머니가 커야 한다. 아무튼 십자가는 예수 십자가는 나보다, 죄보다 크신 예수님, 율법보다 크신 예수님 곧 하나님이 지신 십자가를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아들을 버리실만큼 희생을 감당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런데 믿음에 진보가 있다.
빌2: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에서 큰 믿음, 작은 믿음이 있는데, 복음 곧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믿음이다. 누가 죄를 이기겠는가. 누가 죄를 해결하겠는가. 누가 죽음을 이기겠는가. 기적과 표적도 중요하지만 이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가 가져야 할 가장 믿음의 목적은 이것이라고 말한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그런데 지식이나 실천이 둘다 중요하지만, 지식은 교만에 이르고, 실천이 오히려 교정하기가 쉽다. 아무튼 죽은 믿음이 있다고 한다.
약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러므로 시늉이라도 하는 실천에 믿음의 진보가 있다. 그런데 성도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실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행위구원이 아니다. 복음은 완벽하다.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보여주셨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를 보면, 무엇을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훈련은 좀 다르다. 훈련도 믿음으로 한다. 그런데 믿음의 행위랑 행위구원적 행위랑 구별이 어렵다. 그런데 율법이 목적이 되면 좌절만 낳는다. 그러나 복음으로 충만할 때, 율법은 무겁지 않다. 이때 율법은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은 하나님의 뜻이다. 죄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생명을 건전케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서 율법을 연장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행위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예를 들면 최고 무술 사범의 도복이다. 또는 기차와 같이 마라톤을 하는 것이다. 누가 최고의 무술사범을 이기겠는가. 누가 기차와 마라톤을 하겠는가. 그만큼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간격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율법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사람과의 간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율법은 훈련의 도구가 된다. 어느 날은 90점, 어떤 날은 50점, 그날그날 다르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라면 변치 않는 기초가 있다. 그러므로 90점을 맞든, 50점을 맞든 감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건물의 기초는 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내가 시도만 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믿음의 기초는 행위가 아니다. 예수 십자가이다. 그런데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듣고 믿음이 생긴다. 말씀을 읽고 기도 중에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믿음은 초점이 사람에게가 아니다. 주를 기쁘시게 그리고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관점에 있다.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관점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내 어머니요 형제라고 하신 것은, 아이는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어른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아이에서 성장하여 믿음이 자라서 예수님의 형제요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개는 두려움 때문이다. 체면, 열등감,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감사를 잊기 때문일 것이다. 억지로 감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도 그러셨고, 바울도 사역의 핵심이 복음에 대한 감사였다. 그것은 복음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있는 감사와 확신이다. 그것은 전능자에 대한 감사와 믿음이다. 그것은 실패하였을 때도 마치 아이가 아빠 아버지를 믿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딤후1: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그리고 겸손이다.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인식이다.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것은 포도원에 들어간 일꾼의 자세이자, 동시에 자기 부인이다. 예를 들어 이등병은 사심이 없다. 만약 이등병이 사심이 있으면, 쫓겨나든지 미치던지 탈영하든지 할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은 별5개이신 분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최고 사령관이 별4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끌, 곧 우주에 있는 모든 천군천사를 다 끌어 모으실 수 있는 분이다.
마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그런데 창조주께서 이등병처럼 오셔서 인간을 섬기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건 정말 말이 안되는 일이다. 세상에 어느 부대에서 이런 일이 있겠나. 그러므로 바울이 이렇게 말한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군단장이 이등병으로 일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데, 창조주께서 12군단을 모으실 수 있는 천끌하실 수 있는 분이 이등병처럼 되셔서 자기를 비워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기 위하여 죽으신 것은 말이 안되는 사건이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도 무엇을 하더라도 무익한 종입니다. 그저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행함의 세 번째 요소는 성령의 임재와 충만이다. 예수 십자가의 전능을 믿음으로, 그리고 예수 십자가의 겸손함과 더불어 성령의 능력으로 덧입히는 것이다.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는데,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께 주께서 도와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곧 모두가 다 사도일 수 없다. 모두가 선지자일 수 없다. 모두가 다 병고치는 자가 될 수 없다. 각자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질서를 가지고 움직인다. 믿음의 분수를 갖되 확정된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옛날에 군대에서 축구를 아주 좋아하는 지휘관을 만났는데, 선임들에게 들은 바로는 전국 부대 축구대회에서 2등을 하였다고 한다. 1등은 선수부대였다고. 하여간 그분은 내가 초임병 때 이임하셨는데, 축구를 너무 좋아하여, 자주 아침 구보 대신 축구를 하였고,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고, 또한 한 여름에 탄약고 구보를 시켰는데, 훈련강도가 너무 쌔서 퍼지는 병사들이 간혹 있었다. 그럼에도 병사들을 잘 관리하였고 점점 부대가 전체적으로 체력이 증가하여, 나중에는 어느 부대를 만나도 축구에서 야구 스코어로 이기곤 하였다. 보통이 5대0. 나는 수준미달이라 구경만 했지만, 아무튼 기본기를 아주 충실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특별히 심장이 매우 튼튼해져서, 왠만한 만성질병이나 잔병은 다 사라졌고, 스스로 느끼기에도 건강해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분은 임무기간이 끝나고, 이임식을 할 때에 눈물바다가 되었을 때도 해맑게 웃는 모습으로 바람과 같이 사라졌다.
그런데 교회도 믿음의 기본기가 중요하다. 그리고 간혹 교회에서도 빡세게 훈련시키는 분들이 계셨는데, 교회는 자발적인 훈련이지만 그럼에도 성령충만하여 사랑과 열정이 있는 그런 분들이 리드하셨던 것이 인상에 남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신앙생활을 운동경기로 비유한 것이다. 구원받으면 땡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시작인 것이다.
딤후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실 성도들의 진정한 스승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낙심한 성도들을 다시 열심을 갖게 하신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사37:32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가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