卞 : 감투 변, 법 변
변씨(卞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
지명 卞
충청북도 보은군 마로면 변둔리(忠淸北道 報恩郡 馬老面 卞屯里)
밀양(密陽) 변씨(卞氏)
[정의]
변고적(卞高迪)을 시조로 하고 변계량(卞季良)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청도군의 세거 성씨.
[연원]
변씨(卞氏)는 중국에서 유래한 성씨로 주(周)나라 문왕의 여섯째 아들인 조숙진탁(曺叔振鐸)의 후손이 변(卞)이라는 땅을 하사받고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초계 변씨(草溪卞氏)는 당(唐)나라 천보(天寶) 연간에 예부 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원(卞源)이 743년(경덕왕 2)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효경(孝經)』 등을 가지고 신라에 정착한 것이 시초라고 전하나,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상계를 고증할 수 없다. 이후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팔계는 초계(草溪)의 옛 지명]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로 받들고 초계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변정실의 아들 대에 이르러 변광(卞光)을 파조로 하는 장파(長派), 변요(卞耀)을 파조로 하는 중파(仲派), 변휘(卞輝)을 파조로 하는 계파(季派)로 갈라졌다. 이후 장파는 연안공파(延安公派)·장흥공파(長興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제학공파(提學公派)·이조참판공파(吏曹參判公派)·우윤공파(右尹公派)로, 중파는 감무공파(監務公派)·춘헌공파(春軒公派)·춘당공파(春堂公派)·춘정공파(春亭公派)로, 계파는 찰방공파(察訪公派)·참봉공파(參奉公派)·중은공파(仲隱公派)·청사공파(靑蓑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로 각각 나뉘었다.
변요의 손자 변고적(卞高迪)이 밀양(密陽)에 세거하면서 밀양 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초계와 밀양 외에도 세거지에 따라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晉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로 분관되었으나 지금은 합보(合譜)하였다.
[입향 경위]
변계량[1369∼1430]이 밀양 초등면에서 풍각면 봉기리로 입향하였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입향 경위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초계 변씨 대동보에 따르면 13세손인 변좌(邊左)의 묘가 밀양 각남면 부곡산에 있는 것으로 보아 변계량의 증손 대에 청도로 이주하여 생활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황]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청도군 내에 140가구 37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012년 현재 풍각면 봉기리에 약 4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생활하고 있다. 이 외에도 흑석 1리·남산리·학산 2리·수야리·신촌리·신지리·두곡리 등이 대표적인 밀양 변씨 집성촌이다.
[관련 유적]
풍각면 봉기리에 변계량을 제향하기 위한 봉양 서원이 있다.
[참고문헌]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밀양 변씨(草溪, 密陽卞氏)
초계(草溪)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합천군(陜川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초팔혜현(草八兮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팔계(八溪)로 고쳐서 강양군(江陽郡:합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고려(高麗) 때 초계(草溪)로 개칭하였고, 1018 년(현종 9) 합주(陜州)에 속했다.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을 두었으며 1316년(충숙왕 3)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1913년 합천군(陜川郡)에 병합하여 지금은 합천군에 속한 초계면(草溪面)으로 남아있다.
변씨(卞氏)는 중국(中國) 천수(天水:지금의 감숙성 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여섯째 아들인 숙진탁(叔振鐸)이 조후(曹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변읍(卞邑)을 하사(下賜) 받아 지명을 따서 성(姓)으로 삼은 것이 시초가 된다. 우리나라 변씨(卞氏)는 당(唐)나라 천보년간(天寶年間:742∼755)에 예부 상서(禮部尙書)을 지낸 변 원(卞 源)이 743년(경덕왕 2) 왕명(王命)을 받들어 8학사의 한 사람으로「효경(孝經)」을 가지고 동래(東來), 신라(新羅)에 정착(定着)하여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고려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팔계군(八溪君)에 봉해진 변정실(卞庭實)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초계(草溪)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시조 정실의 아들 광(光:장파)·요(耀:중파)·휘(輝:계파) 3형제를 기점으로 크게 3갈래로 갈라졌다.
그후 시조의 둘째 아들인 요(耀)의 손자 고적(高迪)이 밀양(密陽)에 시거(始居)함으로써 밀양 변씨(密陽卞氏)로 분적되었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초계(草溪)·밀양(密陽) 외에도 원주(原州)·팔계(八溪)·진주(晋州)·청주(淸州)·경주(慶州)·장성(長城)·남원(南原) 등 44개 파(派)로 분관(分貫)되었으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종의(宗議)에 따라 합보(合譜)를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일찍이 영남내륙과 호남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의 집안으로 명성을 떨친 변씨(卞氏)는 시조의 맏아들 광(光)의 후손인 장파(長派)가 변씨일문의 6할을 차지하여 영남과 호남지방에 많이 살고,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 중파(仲派)는 경상도(慶尙道) 지방에, 막내 휘(輝)의 후손인 계파(季派)는 합천군(陜川郡)을 중심으로 집중 세거하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맥을 계통별로 살펴보면 첫째 장파(長派)에서는 시중(侍中) 광의 8세손 남룡(南龍)이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직산(稷山)에 은거(隱居)한 후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아들 7형제가 현달했다. 고려 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장남 혼( )은 사복시 주부(司僕시主簿)을 역임했고, 둘째 순(純)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을 거쳐 연안 부사
(延安府使)로 나가 장흥 부사(長興府使)였던 아우 타( ), 참판(參判) 굉(紘)과 함께 이름을 떨쳤으며, 다섯째 아들인 효문(孝文)은 태종(太宗)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오례의주(五禮儀注)」를 상정(詳定)했으며「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편찬했다. 한편 효문의 증손 형량(亨良:감의 아들)은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로 있다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무장(茂長)에 유배되었다가 효수(梟首) 당했으며, 승세(承世)의 아들 훈남(勳男)은 군수(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명종(明宗)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연안공(延安公) 순(純)의 증손 준(雋:훈련원 부정 옥곤의 아들)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사등공신( 靖國四等功臣)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라 초계군(草溪君)에 봉해졌으며, 참봉(參奉) 유청(惟淸)의 아들 시민(時敏)은 선조(先祖) 때 경흥부사(慶興府使)과 낙안 군수(樂安郡守)을 거쳐 남원 영장(南原營將)을 역임했고, 유명(惟明)의 아들 시환(時煥)은 수학(數學)에 정통하고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외 형량(亨良)의 둘째 아들로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을 떨쳐 정려(旌閭)가 내려졌던 경복(景福)과 <변충효(卞忠孝)>로 불리웠던 시익(時益:경복의 손자)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마동(麻洞) 창덕궁 부근에 살았던 변지사(卞知事)의 아들 원규(元圭)가 유명했다.원래 원규의 아버지는 북촌에서 민심이 후한 부자로 손꼽혔는데 어몽설하에 삼청동 뒷산지역을 순찰하던 순찰군사에게 쌀밥과 고음국과 용주박에 담은 술을 밤참으로 주었다는 일화가 전하며, 그의 아들 원규(元圭 : 한성부 판윤을 지냄)는 명판윤(名判尹)로 이름났다. 다시 인맥을 소급하여 시조 정실이 둘째 아들 요(耀)의 후손인 중파(仲派:밀양 변씨)에서는 공양왕(恭讓王) 때 호(戶)·병(兵)·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로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에 올랐던 옥란(玉蘭)의 아들 3형제가 대표적이다.
조선 초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한 맹량(孟良:옥란의 맏아들)의 아들 필상(必祥)은 좌승지(左承旨)를 지냈으며, 이원계(李元桂:이성계의 이복형)의 사위가 된 중량(仲良)은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王子)의 난에 정도전(鄭道傳)의 일파로 몰려 화(禍)을 입었다. 태종조(太宗朝)의 문형(文衡) 계량(季良)은 옥란의 막내아들로 20여 년 간 대제학(大提學)을 지내며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손꼽혔다. 특히 그는 역대 신하들의 말이나 행실로써 경계가 되고 본받을 만한 것을 모아서 정부상규설(政府相規設)을 저술했으며, 역사상 고집(固執)으로도 유명했다.
세종(世宗) 명조(明朝)에서 우리나라에 흰 꿩 한 마리를 보내오자 하례하는 표(表)를 계량이 쓰게 되었는데, 글 중에 흰 꿩을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특별히 행을 바꿔, 글자를 띄어서 따로 써야 한다고 하고 대신들은 윗 귀절에 붙이지 아니하고 어찌 띄어서 쓰느냐고 하였으나, 그는 그 존경의 표시로 띄어서 쓴다고 고집하였다.
http://sgj.kr/214
조조의 정비 변씨
감숙성 천수, 톈수이(천수, 중국어: 天水, 병음: Tiānshuǐ)는 중화인민공화국 간쑤 성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급시이다. 간쑤 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는 약 350만명이다.
톈수이 시는 고대 실크로드의 천산북로를 따라 자리하며, 이곳을 통해 중국과 서역은 많은 무역을 하였다. 근처의 마이지산 석굴(麦积山石窟)은 천불동이 있으며, 북위 초기의 작품들과 송나라 말기까지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변진섭(卞眞燮, 1966년 7월 30일 ~ )은 대한민국의 팝 발라드 가수이다. 발라드의 레전드라는 닉네임으로 1980년대 후반의 전성기를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