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호랑가시나무 / 이해리
(첫시집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中에서)
호랑가시나무, 꽃의 향기는 비단보다 부드럽고 재스민보다 향긋한데 잎의 가시는 호랑이 발톱을 닮았다 한 몸 안에 감미로운 향기와 날카로운 맹수의 발톱을 함께 키우는 나무, 그 애틋한 이중성 안엔 무슨 쓸쓸한 비밀을 숨겼는가, 초록 발톱 이파리들이 우우 옹립하고 있는 가지의 우듬지에 샛별보다 작고 하얀 꽃이 적막을 깨물고 피어 있다. 망국의 황녀가 자결을 결심할 때 독하게 알몸에 바르는 독약 같은 향기, 발톱은 그 향기를 사수하기 위해 외부로 뽑아 든 칼날인가, 그렇지만 향기란 것이 칼날로 지킬 수 있는 슬픔이던가 대항할 힘을 잃은 군졸들처럼 가을 잎 떨어지고 서늘히 쓰러져 뒹구는 것에 마음 끌려 찾아온 가을 포석정, 마지막 잔을 마시고 불콰한 왕이 슬픈 이사금 슬픈 이사금 탕진되지 않는 슬픔을 들고 내 가슴에 쓰러져 운다.
가을비 오는 밤엔/이해리
(2022년 10월 tv조선 앵커 방송 인용 작품)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이팝꽃 그늘 / 이해리(2003년 박경리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 작품)
고소한 뜸 냄새를 풍기며 변함없는 밥솥이
더운 김을 내뿜는 아침
동구 밖 이팝꽃 흐벅지게 피었다
고봉으로 밥 먹은 사람 드문 시대 고봉으로 피었다
구름이 퍼먹고 바람이 퍼먹고 못자리가 퍼먹고 나도
하얀 쌀밥꽃 남아돈다, 남아도는 쌀밥꽃 길가에 수북 떨어졌다가
자동차에 뭉개지고 수챗구멍으로 날아 들어간다
팅팅 불은 밥풀들, 쌀이 남아돈다
쌀라면을 만들까 쌀로 된 햄버거를 만들까 나도 남아
고민중인데
주체할 수 없는 잉여는 차라리 슬픔인지
아프칸의 그 어린 것 아프게 떠오른다
제 위장보다 훌쭉한 자루를 들고 포탄이 핥고 간 들판에
풀을 캐러 다니던 네 살배기,
남부 아프리카에서는 백만 명이 고스란히 굶어 죽는다는데
북한의 꽃제비들은 한 보시기 밥 때문에 오늘도 사선을 넘어온다
내 배부름으로 세상 어딘가에 배고파 야위는 슬픔이 즐비한데
새벽 별같이 하얀 쌀이
숭고하던 쌀밥이 길바닥에 고봉으로 넘쳐난다
두려운 무기처럼 온 마을에 그늘을 드리운다
철새는 그리움의 힘으로 날아간다/
이해리 (2005년 첫시집 표제시)
제 떠나왔던 도래지로 날아가려는 겨울 철새는 맹목적이다
공중에서 비행기를 만나도 피하지 않는다
한 마리 꼬까도요새가 비행기와 충돌 했다
새의 몸은 엔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엔진이
망가진 비행기는 허둥지둥 회항한다
조그만 새의 의지를 거대한 비행기가 꺽지 못 하는 이유, 무어
라 설명할까
조류 학자들은 *인상 받기라 명명했지만
차가운 동체에 묻힌 한 점 혈흔의 가엾음으로
그 맹목이 그리움이라 유추해 본다
총을 쏘고 경음기 폭음기 다 동원해도 청, 청, 청, 푸른 하늘
들이받으며 날아오르는 새,
그렇지 그리움이란 것,
제 떠나왔던 물가의 물소리 바람소리 사무친 기억 같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들리고 안 보이는 것, 안 보여서
지구의 반 바퀴나 되는 비행거리를 찬 날개 두 쪽과 가슴에 오
무려 붙인 가느다란 두 발이 전부인 행장(行裝)으로 날아가도
서럽지 않은 것
그 망망한 외로움을 위해 한목숨 분쇄되는 장애물도 두려워
않는 것,
펄럭펄럭 붉은 석양이 적시는 흰 가슴 날개로 제 몸
매질하여
구만리 장천을 후회 없이 날아가는 것,
그리움도 그쯤은 되어야 지상의 계절을 번갈을 수 있지,
한 세상 사랑해서 건너왔다 할 수 있지
*인상받기: 철새들은 한 곳에서 받은 인상을 잊지 못해 그 인상 받은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비행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감잎에 쓰다 / 이해리
(2010년 2 시집 『감잎에 쓰다』 표제 시)
물든 감잎을 시엽지(枾葉紙)라 부른
사람이 있었다
감잎이 종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적겠는가
외딴 뒤란 저녁연기
금빛 사장을 둥실 떠나는 나룻배
막차가 떠난 뒤
홀로 헤매는 바람도 좋겠지만
나는 적겠다
벌레 먹힌 잎이 왜 지극한지
상처 많은 단풍이 왜 마음 당기는지
그런 물음 적어
파란 하늘 아래 달아놓고 기다리겠다
수 만 잎의 답신이 돌아올 때까지
미니멀 라이프/이해리
(2016년 3시집 『미니멀 라이프』 표제 시)
이른 봄
진달래 가지에 달린 주먹만 한 새집이
눈을 당긴다
풀잎 총총 엮은 음팍한 둥지 안에
새는 보이지 않고 가랑잎 하나가 잠들어 있다
수없이 물어다 남았을 풀잎 틈틈
콩알만 한 돌멩이도 이따금 끼워 놓아
집 짓는다고 애먹었을 새의 작은 심장과
가엾은 날개를 생각게 한다
산 아래 사람의 마을에선
투기 열풍 한창인데
이렇게 공들여 지은 집 부동산에도 안 내고
새는 어디로 갔을까
미니멀 라이프!
지상의 어느 등불 어스레한 마을에선
소유하지 않으면 더
풍요로워진다는 걸 알아차린 이들 이 있어
가진 것을 미련 없이 버린다는데
버린 것을 서로 축복한다는데
새도 그 대열에 끼어 갔을까
푸른 잎 화사한 꽃 아직 안 피어도
빈 둥지 안 맑은 바람 살랑거린다
수성못 /이해리
(2020년 4시집 수성못 표제 시)
-눈물의 낭떠러지-
만날 수도 없는 곳에 너를 보내놓고
구절초 꽃잎 끝에 달린 한 방울 이슬을 본다
너 없음으로 이슬은
떨어질 듯 떨어질 듯 못 떨어지고 있다
꽃잎 미련 늘리고 늘리다가
길죽한 물자루가 되도록 못 떨어지고 있다
너를 향한 미련의 끝에는 늘 눈물이 있었고
눈물의 끝에는 눈물의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 낭떠러지에 서면
찬란한 파멸이 사정없는 가까움으로 다가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보였다
그것은 내 눈물의 낭떠러지를 너에게 들키는 것
들킨 채로 화려하게 깨어지는 것 이었다
깨진 자리에서 너도 없이 한 잎 구절초로 피어나
가을을 맞는 것이었다
입에는 못의 요소가 있다/
이해리(3시집 『미니멀 라이프』 中에서)
알을 입에 머금고 부화시키는 물고기도 있다
알을 머금고 있는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
새끼가 깨어나면 자신은 죽고 만다
새 아파트에 이사해 창문에 블라인드 다는데
시공하는 아주머니가 한 움큼 나사못을 입에 털어 넣는다
사다리에 올라가 입에서 꺼낸 못으로 천정 구멍을 죈다
까닭을 물으니 입 속이 가장 안전하단다
아무래도 그녀의 안전은 아닐 듯 하다
입에 못 박지 않으면 흔들리거나 분실되고 단절되는
삶이 도처에 있다 입에는 못의 요소가 있다
이응 가진 이는 사는 일이 위험하거나 아플 수 밖에 없다
탑/이해리(2020년 4시집 『수성못』 中에서)
이끼도 끼고 군데군데 금 갔다
꼭대기 층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곳을 푸른 하늘이 채우고 있다
도굴과 훼손과 유기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들고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겸딤으로 공을 들인 몸은 좀
깨지기도 해야 아름다웠다
고난의 상흔도 보여야 미더웠다
언제부턴가 온전한 것이 외려
미완이란 생각이 든다
깨진 곳을 문질러 가슴에 갖다 대면
온몸에서 수런거리는 상처들
이루어지는 것 드물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가슴 층층에 쌓여
바람 부는 폐사지에 낡아가고 있다면
당신도 나도 다 탑이다
향촌동 / 이해리(3시집 『미니멀 라이프』 中에서)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늙을 대로 늙어서 눈을 맞는다
구질구질 좁은 골목 허름한 건물들
시인 이상화가 중절모를 쓰고
목조건물 지붕 위에 올라가 있다
화가 이중섭이 커피 값 대신
은박지 그림을 그려주었다는 백록다방
피난 온 예술인들이 만남의 장소로 썼다는
아루스화방 감나무식당은 어디로 가고
늙은 바람기처럼 뒷골목에 서성거리는 성인텍, 우남여관,
동남아 노동자로 보이는 이방인들이 떼지어
이합집산할 뿐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눈을 맞는다
눈은 내려서 이 모든 것을 덮고
넝마가 된 대구의 근대도 덮지만
1970년대 중반 갓 스무 살 한 청춘의 방황은 덮지 못한다
그때도 지금 젊은 세대들처럼
발버둥 쳐도 주어지지 않던 기회와
선택조차 할 수 없었던 막힌 세상이 있었다
길이 없어 길을 잃으려고 흘러들었던 거기
유리구슬 주렴 아래 배꼽 깊은 무희가
베사메무쵸, 베사메무쵸, 스트립쇼 하던 곳
희망보다 향락을 먼저 가르치던 네온 불빛
노래하고 춤추면서도 마음이 슬프던,
마음의 아련한 슬픔 때문에
영영 절망하지만은 못했던,
한때 대구 최고의 번화가였던 이곳이
늙을 대로 늙어 눈을 맞는다
- 『미니멀 라이프』, 천년의시작,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