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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가 쓰시겠다 하라
2023.04.02 / 마가복음 11장 1~6절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마가복음 11장 1~6절)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인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죄와 절망, 질병, 저주를 다 짊어지고 돌아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간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오늘, 주일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월요일 날 성전에 가셔서 장사꾼을 내쫓으시고, 화요일 날에는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고 마지막 때 되어질 일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수요일 날은 종일 기도하시는 가운데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 주님의 장사를 예배했고, 목요일 날은 마지막 만찬과 함께 다락방에서 저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는 다락방 강화가 특별히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기록되어 있고, 금요일에는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자정쯤 붙잡히셔서 당시 대제사장의 장인인 전 대사장이었던 안나스에게 먼저 심문받으시고, 그다음에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그다음에 새벽에 빌라도에게 갔다가, 빌라도가 골치 아픈 문제를 갖고 오니까 헤롯에게 보냈고, 헤롯이 예수를 만나 본 다음에 예수님을 희롱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보내서 사형 언도를 받은 것이 금요일 아침 여섯 시쯤 되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에 올라서 오전 아홉 시에 못 박히시고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리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토요일 날 종일 무덤에 계시고 주일날 새벽에 부활하시는데, 전체 무덤에 계신 시간은 금요일 9시간, 토요일 24시간, 주일 새벽 4시쯤 부활하셨다고 보면 한 서른일곱 시간 정도를 무덤에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놓으시고 희생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1.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2000년 전 종려 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마가복음 11장 7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당시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온 백성들의 환호성과 함께 앞뒤로 군대가 행렬을 하고 또 나팔을 부는 기수들이 앞서가고 꽃을 뿌리면서 입성하는데 온 백성이 나와서 환호하면서 승리한 장군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오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는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십니다. 사람들은 종려 나뭇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펴서 그 앞에 깔았습니다. 나귀나 노새는 당시 평범한 사람들이 타는 짐승이었습니다.
어린 나귀 새끼는 겸손, 낮음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아진 모습으로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귀한 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예수님이 오실 것을 말씀했는데 마태복음에 이렇게 인용되어 있습니다. 21장 5절에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온유와 겸손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입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신 하나님의 종이었고 온유하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 마음이 불편하고 마음에 힘이 없는 것은 우리가 겸손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상처받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내가 내 마음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마음에 힘이 없는 것은 내가 아직 겸손하지 못하다고 하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 하실 때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것은 당시 하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발을 시키시고 난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 15절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사람은 태생이 교만한 존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교만 때문이었기 때문에 사람은 태어나면서 교만한 모습을 갖고 태어납니다. 늘 높아지려고 합니다.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하고, 어쩌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목에 힘을 주고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대부분이 그럽니다. 그리고 자기를 섬기라고 그럽니다. 섬김을 받는 자리에 가기 좋아하고 대접받는 자리에 가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낮아져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더해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우리가 잘 된다 해도 그 잘 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아져도 그 자리는 진정한 행복을 가져주는 자리가 아닙니다. 낮아질 때 우리는 행복한 것입니다. 섬김일 때 행복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교만한 사람과 함께 일하지 아니하십니다. 겸손한 사람, 낮아진 사람, 섬기는 사람과 함께 일하시고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님 앞에 엎드려 겸손히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스라엘 왕 첫 번째 왕 사울이 겸손해서 택함을 받았지만 교만할 때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주님 앞에서 겸손한 주의 종으로 세워주셔서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2. 주님의 명령
그런데 이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명령하는 이야기가 마가복음 11장 2절에 나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루살렘 입구에 있는 베다니와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을 보내서 말씀하십니다. “저기 마을로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을 테니까 나귀 새끼를 끌고 와라. 그리고 누가 왜 나귀의 새끼를 가져갔냐고 그러면 주님이 쓰겠다.”라고 말을 해라. 3절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남의 나귀 새끼를 갖고 오라는 것에서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마는 주님 말씀하시니까 순종한 것입니다.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라도 주님 말씀하시면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과 달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이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 때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100세 때 낳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이삭을 죽여 바쳐 번제로 드리려고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2절에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래서 그곳에까지 올라가서 칼을 들고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멈추게 하시고 숫양을 준비해서 대신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야훼 이레라는 말이 나왔는데 그러고 나서 그를 복 주십니다. 창제기 22장 16절에서 18절입니다.
이르시되 야훼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삭이 아닙니다. 이삭을 바쳐 번제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의 뜻이면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한 순종이 하나님의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3. 주인의 순종
제자들이 순종해서 가보니 나귀 새끼가 있어서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의 순종을 봅니다. 주인들의 순종입니다.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순종했지만, 주인은 자기 가진 것을 내놓는 희생적인 순종을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 33절, 34절입니다.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성경을 보니까 이 나귀 새끼에게 주인이 몇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인들이라고 하는 복수형을 썼습니다. 아주 가난한 동네에 이 나귀 새끼를 하나를 가지고 생계 수단으로 쓰려고 주인이 두어 명에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끌고 가니까 그들이 나와서 왜 우리 집 나귀 새끼를 함부로 끌고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때 말합니다.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말 한마디에 토를 달지 않고 그냥 나귀의 새끼를 내어놓았습니다. 중요한 생계 수단입니다. 나귀 새끼에게 무엇을 나르게도 하고 또 일을 시키기도 하는데 그걸 선뜻 내놓았던 것입니다.
순종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여러분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희생하지 않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그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희생할 때 그것이 참된 일이고 은혜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에게 누가 와서 말하기를 “목사님, 올해 목사님 말씀대로 열심히 순종해서 50명을 벌써 전도했습니다. 올해 100명을 채울 것입니다.” 근데 50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이분은 시간을 내서 사람들을 만나고 밥을 사주고 주일날 되면 아침에 일일이 전화해서 모시고 와서 예배드리고 또 가는데 그냥 보내면 안 되니까 또 점심까지 대접하고 보내고 자기 시간을 희생하고 자기 물질을 희생하고 그래서 섬겨서 그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섬김은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내 재능을 드리고 내 시간을 드리고 내 물질을 드리고 내 가진 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하늘에 문 여시고 더 큰 복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순종과 희생을 통해 큰 복을 받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그와 같은 순종이었고 희생과 섬김과 헌신의 순종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순종으로 인해서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입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할렐루야,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부르짖어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 나를 보내주옵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사 6:8) 이 종려 주일에 나귀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의 겸손을 우리가 본받아야 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같이 주인들과 같이 섬김과 희생을 통하여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순종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큰 복을 가져다줍니다. 제가 최근에 몽골에 선교사로 가 있는 박건태 교수의 글을 읽고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22년 동안 국제구호 및 의료지원 봉사의 공로를 인정받아서 올해 2월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습니다. 박 교수는 고등학교 4학년 때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본인이 원래 의사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는데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1990년에 고려대학교 의예과에 입학을 해서 신입생 환영회 자기소개에서 “나는 앞으로 의료 선교사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동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의료선교단체에서 6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그가 본과 과정에 들어가서 실습을 하고 또 진료하다 보니까 점점 신앙이 약해져 저녁이 되면 동료들과 어울려 술을 먹게 되고 주님이 멀어졌습니다. 그런데 자기랑 같이 의료 선교사가 되려고 했던 가장 가까운 친구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 친구가 자기 손을 꼭 붙잡고 부탁합니다. “나 대신 네가 몽골에 선교사로 가서 의료 선교 좀 하고 와줘.” 친구의 부탁을 받고 몽골에 가서 의료 선교를 하고 며칠 있다 돌아오는 밤에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캄캄한 하늘에 별들이 가득 찼는데 자기들이 진료한 사람들의 얼굴이 다 스쳐 지나가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저들을 위해서 누가 갈까 나도 저들을 위해 너를 사용하고 싶다.”
그 음성을 들으면서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 내 삶을 주님께 바칩니다.’ 자기를 부르셔서 주님의 일을 하신다는 그 하나님 은혜에 감사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그가 완전히 변화되어 몽골어를 공부하고 선교를 준비합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웠던 친구가 3개월 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손을 꼭 붙잡고 “미안해. 내가 함께 몽골에 가려고 그랬는데, 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니, 네가 가서 내 몫 가지 담당해줘.” 숨을 거두는 친구를 붙잡고 울면서 ‘내가 내 몫까지 가서 몽골에 가서 열심히 선교 사명을 감당하겠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을 본 친구 중에 네 명이나 의료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는데, 그가 한 알의 밀알 되어 여러 명의 선교사가 나온 것입니다.
레지던트를 마치자마자 네 살배기 딸과 첫돌을 맞은 둘째 그리고 아내와 함께 몽골로 가서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의료 사역을 펼칩니다. 의료 장비가 열약한 그곳에서 2년 반 동안 약 2,000건의 수술을 집도합니다. 2,000건이면 일반적인 외과 의사가 20년 동안 할 수술을 5년 만에 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주님 안에 감사했는지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 선교가 이렇게 재미있고 행복해도 돼요? 저는 죄 덩어리가 아니라 죄 장아찌인데, 저 같은 사람을 이렇게 쓰십니까!
박 교수는 국내로 들어와서 이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서울아산병원에서 외과 임상 조교수로 일하면서 혈관이식을 공부하고 2009년에 다시 모교인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고려대 의과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매년 여름마다 이 의료 선교를 후원하고 또 참여했으며 그가 한참 잘 나가던 2014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다시 몽골로 갑니다. 여러분, 의사이고, 의과대학 교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고 잘 나가는 직업입니다. 다 내려놓고 주님 부르시니까 몽골로 간 것입니다. 가서 몽골국립의과대학 교수로 후배를 양성하고 2016년에는 아가페 기독병원을 세워서 병원장으로 열악한 의료시설로 치료받지 못하는 몽골인들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모습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참 제가 이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감동 받았는지 모릅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존경받을 만한 분인 것을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선교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값있고 뜻있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그곳이 바로 예배의 현장입니다. 나의 직업과 노력과 사역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든 삶의 영역이 예배로 드려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차원으로 갚아주십니다. 이것이 가장 간단한 인생의 성공 방정식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부름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 학교에서, 사업장에서 여러분이 어디 있든지 그곳에서 선교사가 되어서 맡긴 삶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주부는 가정이 여러분 선교의 자리가 되어 믿지 않는 모든 가족을 주님께 인도하시길 바랍니다. 의료인은 병원에서, 예술인은 그 예술의 현장에서, 법조인은 법조인이 일하는 그 자리에서 선교사가 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몸부림에 피 흘려 모든 걸 다 주셨는데, 우리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이제 지금까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삶을 내려놓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헌신하며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부르신 음성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가 324장 (통 360): 예수 나를 오라 하네>
1절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후렴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내
2절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피땀 흘린 동산 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3절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심판하실 자리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4절 주가 크신 은혜 내려
나를 항상 돌보시고
크신 영광 보여 주며
나와 함께 함께 가시네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 우리를 부르실 때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아멘으로 응답하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 감당해 나가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어디로 나를 부르시든지 내게 주신 재능으로 주님을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