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
(전원발 선생에게 하사되었던 왕태, 달지, 오룡리 앞들)
가을이 성큼 다가선 10월 개천절에 문경의 인물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선생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영순면 달지리 원달지마을부터 찾았다. 여기가 국파 선생의 생가 터다. 삼강 다리가 세월의 흐름을 돌려놓은 곳이다.
문경시 동로면 황장산에서 발원한 금천이 100리길을 돌아 소백산 죽계계곡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만나고, 잠시 숨을 골라 낙동강 1,300리 허리 틈인 이곳에서 만나니 그 이름 삼강(三江)이라.
문경과 예천이 접경한 이곳. 어디가 문경이고, 어디가 예천인지 분간한다는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지 모른다. 특히 국파 선생의 흔적은 문경과 예천을 넘나들며 산재하고 있는데, 어느 곳에서나 금천과 내성천, 낙동강이 한 몸이고, 삼강에 삼각으로 마주 선 문경 예천의 산봉우리들이 하나다.
이곳이 조선시대 때는 용궁현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문경이 용궁이고, 용궁이 문경이고, 용궁이 예천이고, 예천이 문경으로 세월을 더하며 강역이 왔다 갔다 한 까닭이다.
(국파 선생이 경영하던 무이곡-금천)
국파 선생은 현재 영순면 달지리에서 고려시대 때 태어나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양 대에 입조한 인물이다. 그는 고려 충열왕 14년(1288~1358) 문경시 영순면 달지리, 옛 용주성 달지리에서 탄생했다.
선생은 용궁전씨 시조 용성부원군 전방숙 자손으로 전법총랑(典法摠郎) 충경(忠敬)의 증손이며, 판도총랑(判圖摠郎) 대년(大年)의 손자,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珒)의 아들이다.
국파 선생은 18세가 되던 해 충숙왕 2년 (1315년) 고려국에서 시행하는 문과에 합격했다. 과거에 합격할 당시 원나라에서 약소국인 우리 고려국에게 젊고 유능한 인재를 요청해 과거에 갓 합격한 국파 선생을 선발 파견했다.
선생은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다시 응시 장원급제해 불모 아닌 불모로 귀국하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봉직하면서 고려인의 긍지와 사명감으로 병부상서에까지 올랐다.
원나라에 재임 시 대국인 원나라가 고려국에 온갖 명분과 빌미로 세금을 과다하게 요청하자 국파 선생은 고려국의 피폐함을 원제(元帝)에게 직언하여 금(金), 은(銀), 견(絹명주), 마(馬) 등 조공을 절반 이상 감경케 하였다. 일신의 영달을 마다하고 원만한 외교적 가교 역할로 우리 겨레와 조국(고려국)을 위해 크게 기여한 것이다.
그 시절 당나라 등 대국에 파견된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16인의 명현들은 대부분 3년 정도 근무하고 조기에 귀국한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문경과 예천 용궁을 가르는 금천)
그러나 국파 전원발 선생은 귀국을 하지 못하고 평생 약소국인 조국의 국익을 위해 헌신했다. 조국을 떠난 지 38년 만에 태어난 고향으로 낙향하자 고려 공민왕이 국파 전원발 선생의 공로를 인정하여 당시의 용주성인 예천군 용궁면 소재 성화천(현재의 내성천)을 국파 선생이 나라를 소생시켰다는 뜻으로 소천강(蘇川江)으로 개명해 하사하자 선생은 국왕의 명을 따라 소천강변에 작은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만연을 보내셨다.
이퇴계 선생은 국파 전원발 선생에 대해 광풍제월을 지닌 군자(君子)요 고인(高人)으로 백대에 스승이 되는 선비였다고 말했고, 송나라 성리학의 창시자 무극옹 주돈의 생애에 비견하고 고려말의 유학자요 후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은덕을 베푼 명현(名賢)으로 표현했다.
선생은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 축산은 용궁의 옛 지명이다. 지명이 선생의 호를 따서 형성된 것이다.)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나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 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를 썼다. 용면 무이리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아들에 사복판사(司僕判事) 한(僩)이 있으며, 손자 강(强)·근(謹)·경(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으로서 현달(顯達)하였고, 그 후손들이 현재 용궁(혹은 축산) 전씨라는 관향을 쓰며 전국에 3만 여명이 살고 있다.
|
출처: 전씨(全氏) 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한강의 언덕(전과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