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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꿍' 님
종인이 사진이 너무 예뻐요ㅠㅠㅠㅠㅠㅠ그리고 누군가 쳐다보는 거 같아서 짝조에 나오는 종인이같이 아련함이 묻어있는 표지같아요 흑흑....감사합니다 진짜 애정해요ㅠㅠㅠㅠㅠㅠ
'벌레' 님
대박ㅠㅠㅠ 손그림에 손글씨라니요...제가 '손' 이 들어가는 표지 사랑하는 건 어떻게 아시고ㅠㅠㅠㅠㅠ표지가 되게 아기자기한게 꼭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예요! 너무 예쁘게 꾸며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해요ㅠㅠㅠㅠㅠㅠㅠ
여러분...오늘 사진과 글의 양이 다소 많은 관계로 슬프게도 사운드 클라우드 비지엠이 첨부가 도저히 안돼요....흑...죄송해요.
나인뮤지스- 몰라몰라
sereno- 찻잔과 도넛이 춤추는 가게
두 가지 비지엠 추천입니당....비지엠하고 같이 들어야 더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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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얘도 같이 영화 보고 싶대. "
" ……. "
" 나랑, 같이 가면 되겠네. "
할 수만 있다면 딱 시간을 5분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김종인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한 채, 하하 호호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끝으로 등을 보였어야 했다. 아니, 한참 전으로 돌리는 게 맞았다. 내가 모든 걸 내려놓고 김종인에게 마음을 고백하러 간 그 순간부터. 놈이 무슨 배려로 내게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 딴에도 내가 직접 고백한다고 말만 하고 뒤에서 울고 있는 꼴이 기가 막혔겠지. 그럼 놈은 짝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본 게 맞았다. 그러니 날 이해 못하는 게 분명했다.
변백현이 날 도와준답시고 하는 말에도 난 차오르는 민망함을 견딜 수 없어 고개부터 숙였다. 코끝이 시큰해져오는 느낌에 다시 한번 죄많은 사람처럼 진득한 숨을 토해냈다. 화부터 치밀어 올랐다. 날 더 비참하게 만들 셈인가 했다. 나를 도와주려는 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쓸데없는 오지랖은 아니었다. 끼지 못할 곳이 있고, 껴야 할 곳이 있다. 지금 변백현은 완벽히 그 선을 넘은 거다.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저에게는 답답하고 바보같이 느껴지겠지만, 막상 짝사랑을 하는 입장에선 답답한 행동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김종인과 둘이 있을 시간이 생겼으니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냐고? 내가 답답하다고? 아니, 놈이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옆에 있는데 내가 무슨 배짱으로 같이 영화를 보고, 웃고 떠드냐 이 말이었다. 그건 안 하는 것보다 더 초라한 모습이다.
" ……아, 뭐. "
"……. "
" 그래, 그럼 같이 가자. "
" 아니, 김종인 아니야. "
" ……. "
" 괜찮아, 너네 둘이 보러 가. "
혹여나 또다시 변백현이 쓸모없는 오지랖을 부릴까 손목을 빼고 다급하게 등을 돌렸다. 억지로 당겼던 입꼬리가 차게 식어갔다. 유난히 시린 바람을 핑계로 터지는 눈물을 애써 뱉어냈다. 변백현, 개새끼. 같은 말의 반복이었다. 종인이 입장에선 어이가 없고도 당황스러울 게 분명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와 단둘이 영화관람을 하는 기회를 하마터면 자신의 모든 걸 알고 있는 친구와, 친하지도 않는 여자와 다 같이 볼 법 했으니. 김종인이 날 눈치 없는 새끼라고 생각하지만 않아도 타고난 행운인 거다. 씁쓸해지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코를 훌쩍거렸다. 걸음을 재촉해 버스 정류장 앞에 멈춰 선 끝에 조금씩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종인이가 완벽히 오해하겠구나. 내가 좋아하는 게 저가 아니라 변백현이라고 생각할 게 뻔했고, 자기의 소중한 데이트 기회를 방해할 뻔한 여자라고 정의할 거였으며, 내 희미한 빛은 자취를 감출 세도 없이 빠르게 사라져버릴 것이다.
" 야, 그렇게 가면 어쩌라는 건데. "
" 그럼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영화를 보러 가겠냐? "
" 아, 왜 안 가? 좋아하면 가야지. "
" 아, 비켜. 집 가야 해. "
" 아니, 설마 화났어? "
" 아니, 존나 안 화났는데. "
" 너 존나 화나 보이는데? "
" 아니, 존나 아무렇지 않은데. "
" 왜 화가 나? 너 니 입으로 김종인한테 고백한다며, 근데 병신같이 뒤에서 울고 있는 거 안타까워서 도와줬건만 누구한테 삐진 건데. "
" 넌 이게 지금 도와준 거라고 생각해? 방해야, 방해. 괜히 끼어들어서 내 입장만 난처하게 만든 거라고. "
" 그러니까 왜 방해냐고, 도와줬잖아. "
" 그러니까 네가 왜 도와주냐니까? "
" 아니, 네가 생각해 봐. 의도치 않게 고백받은 건데도 존나 내가 죄진 거 같고 그렇다니까? 아, 그리고 아까 내가 장난쳐서 화난 거 같더만. 미안해서 기회를 딱 줬는데, 자기가 피해놓고 나한테 성질이야? "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뻔뻔함이 대서양 수준인 놈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 딴에는 날 도와주려고 그런 것임이 확실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한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 자존심에 거대한 스크래치를 낸 것과 다름없었다. 성질은 변백현 너 혼자 내는 거다. 난 철저하게 맞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런 쓸데없는 오지랖은 줘도 안 갖는다 이 말이었다. 내 마음을 들켜버리면 종인이가 나를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나 때문에 여태까지 고백도 못하고 쫓아만 다녔는데, 처음으로 용기 내어 전한 내 마음을 갑자기 튀어나 넙죽 받아먹지 않나, 이번엔 날 데이트 방해꾼으로 만들지 않나.
난 지금 그런 걸 필요로 하는 게 아니었다. 그냥 나서지 않고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거나, 아니면 종인이가 너를 안 싫어할 거라면서 가식적인 긍정의 대답을 원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몰락하고 있는 상황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절실했다. 김종인보다 네가 더 소중하다며, 그딴 애 짝사랑하는 거 네가 훨씬 아깝다며. 사실이 아닌 걸 알지만, 누가 봐도 김종인이 나보다 잘난 걸 알지만……그럼에도 내가 더 아깝다고 말해주는 가식적인 위로의 한 마디면 충분했다.
" 앞으로 대놓고 이런 짓 하지마, 짜증나. "
" 야, 시발. 나도 도와준 거라고. "
" 너 내 이름 알아? 아니, 너 나랑 친해? 아니, 그전에 너 내가 김종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기나 해? "
" ……. "
"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나서지 말아달라고, 제발……. "
" 야. "
" 김종인이 괜히 방해만 되는 여자애라고 생각하면 어떡할 거냐고. "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라도 할 줄 알았다. 아니, 하다못해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이라도 짓고 서 있을 줄 알았다. 오버를 한 것도 아니었다. 불쌍한 척이나, 혹은 일부러 화가 난 척을 한 것도 절대 아니었다. 순도 백 퍼센트 진심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뻔뻔함이 태평양인 이 새끼는 아예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입꼬리를 쭉 내려 띄꺼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니겠냐. 아니, 띄꺼운 건 나였다. 화나야 하는 것도 난데, 왜?
" 병신이네 이거 진짜. "
" 뭐? "
" 너 김종인 그 정도로 좋아하냐? "
" ……. "
" 와, 나는 이 정도일지는 몰랐는데. "
" ……. "
" 김종인도 1년 째 짝사랑만 하는 병신인데 너도 존나 마찬가지네, 투병신이네 그냥. "
서커스단에 속해있는 사자가 된 느낌이었다. 뒤이어 묘하게 올라간 놈의 입꼬리에 싸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정착역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함 심정을 그대로 대변했다. 사실 변백현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내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흥미롭게 변하는 저 얼굴 표정이 시리게 내 심장을 콕콕 찔러댔다. 뒤이어 피아노 건반을 쾅 하고 한 번에 내리치는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나 방금 내가 한 말에 열이라도 받아 김종인에게 이상한 말을 지껄이면 어떡하지, 라는 두려움이 내 온몸을 덮쳐왔다. 괜히 말했나 싶었다. 참 거지 같게도, 짝사랑하는 당사자는 언제나 약자가 돼버리곤 했다. 내가 잘못한 거 하나 없어도, 늘 사서 걱정을 하지를 않나. 또 어떤 경우는 내가 그 사람보다 한참이나 낮지, 한참이나 매력이 없지, 라는 전제를 깔고 들어가기도 했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주면 좋겠는데 놈은 죽었다 깨도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마 날 말라 죽일 작정인가 보다. 무의식적으로 까끌해진 목에 진득한 침이 넘어갔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야 했다. 놈이 종인이에게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걸 막기 위해선.
" 야, 야 나 근데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거든? "
" 아, 그래요? "
" 그래, 막 너가 생각하는 그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
"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데? "
" 뭐? "
"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가 알아? "
" 아……그. "
" 내가 원래 생각했던 건 그냥 단순히 얼굴만 보고, 그래서 김종인이 여친 생기면 깔끔하게 잊고 다른 잘생긴 남자를 좋아하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
" ……. "
짝사랑, 나는 짝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하고 싶어도 마음 편히 못 하는 것.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그 주변인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걔가 언제부터 좋았냐, 나는 진짜 몰랐다, 쟤가 너 쳐다보는 거 같다, 쟤도 너 좋아하는 거 같다, 걔 여친 생겼더라, 솔직히 너가 더 아까웠다 등등. 그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도 충분히 벅차고 애타는 내 심장에 독화살이 박힌 말풍선들이었다. 사실 짝사랑을 할 때, 남의 말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어쩌면 불가피한 일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부정적인 말로 나를 저 아래로 곤두박질치게 만들고, 또 때로는 허영심 가득한 말들로 그날 하루를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게도 만든다.
그중에서도 난 특히 더 그랬다. 주변인들에 말에 특히나 더 날을 세우곤 했었다. 이건 내 생각이기도 한데, 짝사랑을 하는 사람이 유독 남의 말에 더 잘 기울이고 많은 조언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말이라도 들어보는 게 낫지 않겠냐 이거다. 사실 부정적인 말은 언제나 듣기 싫지만, 조금이라도 호의적인 대답이 나오면 행복한 상상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그러니 변백현의 말도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 속마음 꿰뚫기에 성공한 놈이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턱을 위로 치켜드는 그 모습이 꽤나 건방져 자연스럽게 미간 사이가 좁혀졌다. 그럼에도 뭘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을 완벽하게 들켰다. 내가 김종인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말았다.
" 근데 확실이 아니네. "
" ……. "
" 그 수준을 넘었네, 그냥. "
" ……. "
" 와, 대박이다 너. "
짝사랑의 조건 세 번째 : 내가 좋아한다고 말하기전에, 그가 먼저 알아줬으면 좋겠고, 먼저 말해줬으면 좋겠다.
" 시발, 또라이새끼 아니야? "
" 그치, 진짜 짜증나지. 김종인이 뭐라고 생각하겠냐고. "
" 아니, 걔는 왜 쓸데없이 오지랖이야? 아, 꺼지라 그래 그냥. "
" 야, 종인이한테 이상한 말 하지 않겠지? "
" 무슨 이상한 말. 니가 죄졌냐? "
" 아, 그냥……. "
" 야, 한 번만 더 너 대놓고 엿먹이면 진짜 멱살잡아 그냥. "
" 아, 보미야 맞아. 김종인이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막 어깨도 토닥여줬어. "
" 어, 지랄 망상 꺼져. "
" 아, 시발 진짜라고. "
" ○○아, 변백현 걔는 진짜 너 도와주려고 그런 거 같은데? "
" 도와주는 건 맞는데, 그 방식이 잘못된 거지. ○○○만 혼자 개 될뻔 했잖아. "
" 그런가? 변백현이랑 김종인이랑 친구잖아. 그럼 걔가 그렇게 나서서 도와주는 게 잘 될 수도 있지. "
" 아, 배수지 괜히 얘한테 기대심어주지마. 얘 더 병신 돼. "
" 아, 윤보미 말 존나 심하네. "
비속어와 함께 하는 상쾌한 등굣길이었다. 한 쪽에선 하나뿐인 친구가 더 병신이 되기라도 할까 지독하게도 냉정한 현실을 딱딱 집어주는 친구가 있었고, 또 다른 한쪽은 하나뿐인 친구가 병신이 되든 말던 허영심을 심어주는 대사만 쏙쏙 골라서 잘도 내뱉는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는, 모든 답답함의 원인인 내가 있었다. 자욱한 한숨이 훅하고 튀어나왔다. 이 친구는 이 친구 나름대로 좋고, 또 저 친구는 저 친구 나름대로 좋은 유형이다. 사실 짝사랑할 때 보미 같은 성격이면, 늘 미움을 사곤 한다. 친구가 이성을 좋아하는데 응원은 못해 줄망정 이게 현실이라며 냉소적인 악담만 퍼부으니 누가 좋아하겠냐 이 말이다. 그러나 상처란 있는 대로 다 받고, 밤을 지새우며 울고 나서야 깨닫는 건 그때 그 친구 이야기 들을걸, 이거라는 게 문제다.
또 반대는 수지 같은 성격이다. 짝사랑하는 입장에서 '쟤가 너 좋아하는 거 같다, 쟤가 너 쳐다봤어, 쟤도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은데?' 와 같은 말을 들으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일 거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제일 비참한 꼴로 전략하고 나면, 그때 그 친구 이야기 절대로 듣지 말걸. 이거였다. 참, 지겹게도 모순적인 관계였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심보는 무엇이며, 결국 피멍만 남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나서야 깨닫는 건 무슨 법칙인가 싶었다.
" 어, ○○아. 저기 뒤에 김종인있다. "
" 응? "
" 쟤 왜 이쪽으로 오지? 원래 우리랑 맞은편에서 오지 않아? "
" 응, 원래 반대 방향인데……. "
반사적으로 두어 번 눈을 깜빡거렸다. 분명 원래대로라면 김종인과 변백현 둘 다 맞은편으로 등교를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등교하는 거 아니겠냐.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이사라도 간 건가? 아니,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는 반대편으로 왔겠지. 그럼 왜?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을 수차례 나열했다. 왜 이쪽으로 온 거지? 혹시 어제 변백현이 김종인한테 이상하게 말했나? 그래서 나한테 따지려고 이쪽으로 온 거 아니야? 아니지, 김종인은 내가 이쪽으로 등교하는지도 모르지. 아, 그럼 뭐지. 왜 갑자기 오지도 않던 길로 등교…….
" 야, 김종인이랑 변백현 사이에 여자 있는데? "
" 뭐? 여자? 누구? "
" ……쟤 어제 걔 아니냐? 김종인이 좋아한다던 그 효정이라는 애. "
" ……아, 맞다. 저 여자애랑 같이 오려고 이쪽 방향으로 등교하나보다. "
" 아, 김종인 저 씨발……답답해. "
" ……야, 윤보미 배수지 저쪽 쳐다보지마. 괜히 눈 마주치면 어떡해. "
" 아니 네가 뭐 죄졌냐니까? 그냥 쳐다보는 것도 맘대로 못 하면 어쩌냐고, 아 진짜 짜증나. "
" ……. "
" 아, ○○○ 고개 들으라니까? 네가 잘못한 거냐고. "
잘못한 건 없었다. 그냥 좋아하는 거뿐이다. 아무것도 바라는 건 없었다. 그저 놈이 나를 싫어하지만 않으면 된 거다. 나 정말 바라는 거 하나 없다. 그냥 그것뿐인데. 투명한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희비가 엇갈렸다. 어깨 부근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 진짜 비참하다. 이게 뭘까 싶었다. 좋아하는 남자를 옆에 두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꼴이라니.
가끔씩 상상하곤 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김종인이 내게 먼저 고백을 한다던지, 아니면 내 마음을 먼저 알아준다던지. 죽어도 내가 하지 못할 일이니까 그가 먼저 눈치 채주기를 바라곤 했었다. 헛된 바람인 걸 알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렇게 숨기만 하는 바보면서 뭐가 잘났다고 종인이가 날 먼저 좋아해 주기를 원하냐 이거였다. 턱 부분이 흉하게 꿈틀 꺼렸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한 내 배경이 더 음침하게 얼룩져갔다. 내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보다 더했다. 어차피 고백하지도 못 할 거면서 그냥 고백할 걸, 이라는 후회도 해봤다. 사실 놈이 좋아하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괜한 기대 때문에 지독한 짝사랑을 견딜 수 있었다. 혹시나 그 마음이 사그라 들지는 않을까, 나를 좋아해 주지는 않을까.
내가 먼저 다가가기 전에, 드라마처럼 그가 먼저 내게 다가오지는 않을까.
" 어, 투병신이다. "
" ……아, 시발! "
" 아, 시발? "
" ……뭐야? "
" 왜, 김종인이 아니라 별로야? "
" 뭐? "
미친 새끼가 제대로 미친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지금 누구 앞에서, 그것도 김종인이 바로 뒤에 있는 이 상황에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있느냐 이 말이었다. 원래 자리 잡고 있던 크기보다 두 배는 커진 눈이 오싹한 기분을 그대로 증명했다. 한 겨울에도 불구하고 등 뒤에 소름이 쫙 끼쳤다. 초조한 눈동자가 자꾸만 뒤로 향하려고 안달이었다. 혹시 들은 건 아니겠지? 표정 안 좋은 거 아니야? 핑계, 핑계가 필요했다. 뒤를 돌아볼 수 있는 핑계.
' 뒤에 사람 많이 오나? ' 혼잣말을 뱉으며 자연스럽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턱 끝까지 차오른 두려움과는 다르게 놈은 내 쪽을 쳐다도 안 보며 저가 좋아하는 여자와 나란히 이를 드러내며 웃어 젖히고 있는 거였다. 젠장, 뭘 바래. 알면서도 이러는 게 문제였다. 그 사람이 날 신경 안 쓴다는 걸 알면서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더 잘 보이고 싶어서, 혹은 나를 싫어할까 봐, 내가 싫어졌을까 봐. 심신이 지쳤다. 누가 짝사랑이 아름답고 깨끗한 거래, 세상에서 제일 악랄하고 힘든 게 짝사랑인데. 한참을 아련한 눈으로 한 곳만 응시하던 내 스토커 같은 눈빛을 자각한 건지,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마주하는 김종……헐, 김종인이다.
" 아, 아침이라 몸이 뻐근하네. "
" ……. "
" 안 그래? "
" 아, 존나 웃기네. 연기하는 거 봐라. "
" 아, 김종인 두고 왜 여기 와서 난리야? 내 친구들 뒤에 있는 거 안 보여? "
" 아, "
" ……. "
" 내가 아니라 김종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치? "
지랄, 지랄하소서. 제발 이 새끼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하소서. 모든 것이 불안정한 나와는 달리 꾹꾹 웃음까지 참으며 여유롭게 코를 훌쩍 거리는 개새끼의 말에 얼굴 근육에 미세한 경련이 일어났다. 할 수만 있다면 제 머리채를 잡고 사정없이 흔들어버리고 싶었다. 대체 무슨 놀부 심보로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어제 내가 저한테 화를 내서? 아니면 내가 김종인을 자기 예상보다 더 많이 좋아하고 있는 사실이 웃겨서? 아니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이 웃겨서?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놈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럼에도 느릿하게 다리는 움직였다. 나와 변백현의 대화 내용을 듣고 싶어 숨을 죽이고 따라오는 보미와 수지 뒤로, 희미하게 김종인과 서효정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니, 사실 김종인의 목소리만 너무 선명하게 들린다는 게 문제였다. 놈이 어떤 말을 하던, 그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오늘 하루 기분이 달려있다.
" 아니야, 다음 영화도 내가 살게. "
" ……. "
" 효정아, 너 돈 안 써도 돼. "
" 아……! "
" 야, 괜찮냐? "
" ……. "
" 다리 삐었어? "
" ……아, 아니. "
" ……. "
" 괜찮아. "
잔인했다. 고통 없는 살인과도 같았다. 코끝이 찡하게 아려오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한 번도 듣지 못 했던 놈의 다정한 목소리가 다른 여자에게는 술술 나오는 이 거지 같은 경우를 어떻게 설명할까. 단지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큰 죄인가 생각했다. 제정신 하나 못 챙기고 가슴께를 잘도 찔러오는 김종인 때문에 멀쩡히 움직이던 다리도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두서없이 뛰어와 이제는 자잘한 두통까지 왔다. 놈의 입에서 전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말에 한숨 섞인 잔웃음도 튀어나왔다. 가망 없구나, 진짜 나만 병신이고 스토커고 바보구나.
" 아, 내가 왜 여기 있어서. "
" ……. "
" 김종인이 잡아줬으면 더 좋을 텐데, 그치. "
내 이름을 안 지 하루밖에 안 지난 새끼한테도 이렇게 무시당하는 난, 그동안 나만 바보였고, 나만 병신이었고, 나만 가망 없는 짝사랑을 택했었구나. 원인 따위 알 수 없는 변백현의 만행을 애써 무시하고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래, 저 딴에는 제 친구를 좋아하는 여자를 알게 된 게 웃기겠지. 그냥 아직 철이 덜 든 남고생의 못된 심보라고 생각했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너무나도 많은데 변백현까지 겹친다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보상받을 방법은 거의 제로였다. 그보다 지금 놈을 신경 쓸 정신이 없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내가 너무 비참하고 원망스러웠다. 난 왜 서효정보다 안 예쁘고 서효정보다 날씬하지 않은 거지. 난 왜, 서효정이 아닌 거지. 난 왜 김종인을 좋아해야만 하는 거지.
누군가 말한다, 그런 가망 없고 너만 힘든 짝사랑은 접으면 그만 아니냐고. 난 대답 대신 애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나쁜 남자는 싫다고 하지만, 막상 그들에게 한 번 빠지면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하듯이ㅡ사람을 좋아하는 일도 그랬다. 특히 한 남자를 장기간 좋아하면 그걸 끊는 건 정말이지 고통이었다. 말하지 않았는가, 순환의 반복이라고. 더 이상 좋아하지 않기를 다짐하면서 그가 날 보고 웃어주기라도 한다면 또다시 착각의 늪에 빠져서 짝사랑에 구렁텅이로. 그렇게 또 나만 힘들어하고, 나만 앓는 게임의 시작인 것이다.
험한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전사처럼 구석구석 망가진 몸을 이끌고 교실로 들어갔다. 세상은 다 나보고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그렇게 힘든 짝사랑을 왜 포기 못하고 바보처럼 앓고만 있냐고, 솔직히 걔는 널 안 좋아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왜 그렇게 착각하고만 있냐고. 아니다, 우리 입장에선 세상이 미친 거였다.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것뿐인데, 사람들은 날 망상병자로 만들고, 상황은 나를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어버린다. 세상은 미쳤다, 고로 짝사랑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기도 했다.
" 아, 오늘 급식 개꿀맛. "
" ……. "
" 왜 안 먹어? 내가 먹어줘? "
" 야, 보미야. 변백현 그새끼가 아까 왜 그런걸까. "
" 아, 뭐가 왜그래. 미쳐서 그런가 보지. "
" 아, 진짜 진지하다니까? "
" 배수지한테 물어 봐, 난 니 고민상담 하도 많이 해줘서 이젠 진절머리 난다. "
" 야, 수지야. 왜 그런 거 같아? 응? "
" 너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닐까? "
" 시발, 말을 말자. 넌 무슨 남자가 말만 걸어도 다 좋아해서 그런다고 난리야. "
" 아니, 진짜 내 생각이라니까? "
한 친구는 너무 현실적이라, 또 한 친구는 너무 세상을 호의적으로 봐서 문제였다. 극과 극인 이것들에게 김종인에 대한 고민 상담을 하면 나오는 답은 딱 두 가지였다. 망상 따위 버리라는 한 마디와, 그래도 아까 김종인이 너 보고 간 거 같다는 말. 난 어느 말을 믿어야 할까, 수지 말? 그래야 마음이 좀 편해질까. 아니지, 여태까지 저 말만 믿고 괜한 기대했다가 8개월이 지났지. 그럼 윤보미 말? 아니지, 그랬다간 내 쿠크가 남아나질 않지. 죽었다 깨도 내가 김종인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 언제 올지는 나조차 모르니까.
이번에도 나만의 심각한 고민이었다. 나만의 걱정.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걸 어쩌냐 이 뜻이었다. 아니, 변백현이 나랑 친한 사이도 아닌데 왜 김종인으로 날 엿 먹이려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문제 아니냐. 근데 왜 나만 심각한 거야.
" 어, 투병신이네. "
" ……. "
익숙한 목소리에 들고 있던 겉절이 조각이 하얀 쌀밥 위로 빠르게 떨어졌다. 나사라도 박혀있는 목각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올리고 개새끼의 면상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랄 같은 데자뷰였다. 몇 시간 전, 아침 등교 시간에도 내게 했던 대사였다.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으며 저 끝으로 걸어가고 있는 김종인과 김종대를 크게 부르는 변백현의 행동에 다시금 심장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상한 헛기침도 새어 나왔다. 예정에 없던 상황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주먹이 날아갈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보미와, 어리숙한 표정으로 가만히 변백현을 응시하는 수지였다. 놈의 부름에 심드렁한 표정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김종인과 김종대를 보자 점점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었다. 꿈이 아니고서야 김종인이 이쪽으로 올 리가 없는데 현실이라는 게 문제였다. 시선을 어디다가 두어야 할지 몰라 엉덩이를 뗐다 붙였다, 고개를 위로 올렸다가 내렸다가, 숟가락을 쥐었다가 내려놓았다가 난리도 아니었다.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냐며 내 앞에 선 김종인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두 눈이 감겨졌다. 쌩쇼. 그래, 혼자 쌩쇼란 쌩쇼는 다하는 나였다.
" 여기 자리있는 거 아니야? "
" ……. "
" 자리 있어? 앉아도 돼? "
" ……. "
" ○○○? "
" 응, 응? "
" 여기 앉아도 돼? "
" 아, 앉아도 돼! 우리가 전세낸 것도 아니잖아! "
시발, 필요 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 그냥 밥만 먹는 거다, 밥만. 속은 몇 번이고 같은 말은 반복했지만, 정작 내 몸뚱어리는 그러지 못하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처절하게 떨려오는 손끝을 둥글게 말아 쥐고 있는 그대로 힘을 주었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흥건해진 손에 모든 게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당시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는 제일 끝에 전부 여섯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였는데, 보미가 제일 끝에, 그리고 보미의 옆에는 내가, 보미 앞에는 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럼 제일 먼저 이곳에 온 변백현은 당연하게 내 앞에 앉아야 하는 게 맞는 말 아니냐, 그런데 이 새끼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한 바퀴를 빙 돌아 내 옆자리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 거였다. 순간적으로 어이없는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뒤이어 김종인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김종대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 김종인, 뭐해. 거기 앉아. "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내 앞자리를 가리키며 앉기를 재촉하는 변백현의 음성에 머리가 핑 하고 돌았다. 나사는 풀릴 기미가 없었다. 애써 침착한 척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었다. 분명 눈은 겉절이를 향해있는데, 멍청한 손은 불고기 쪽으로 가있는 거였다. 시선은 급식판으로, 그렇지만 온 신경은 김종인을 향해서. 혹시나 놈이 내게 말을 걸어주지는 않을까, 내 얼굴이 벌게지지는 않았을까. 그것보다 눈 하나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는데 무슨 배짱으로 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한 가지 생각이 끝나면 또 한 가지가 겹쳐오고, 한 가지 생각이 끝나면 또 한 가지가 올라왔다. 눈을 내리깔고 있음에도 예쁘게 보이기 위한 노력은 계속이었다. 턱을 조금 뒤로도 빼보고, 눈은 거울을 보는 것처럼 크게, 그렇지만 안 떨리는 척, 난 지금 엄청 털털한 척, 너한테는 하나 관심 따위 없는 것처럼. 빠르게 결론이 났다. 확실히 오늘 배를 채우는 건 포기해야 할 듯 싶다. 생각보다 빠르게 내린 결론에 더듬거리며 감귤맛 오렌지 주스를 집었다. 감정없는 눈으로 빨대를 꽂고, 언제나 그렇듯이 주스곽을 들어올리고 마시는 게 아니라, 빨대를 향해 고개를 내리고 쪽쪽 주스를 들이키면.
" 너 마시는 거 진짜 특이하다. "
" ……. "
" 예전에 매점에서 한 번 본 적은 있는데. "
" ……응? "
" 아니, 보통 주스곽을 들고 빨대 빠는 거 아니야? 근데 주스는 그냥 밑에 놔두고 빨대쪽으로 고개를 숙이고 마시는 게 진짜 특이해서. "
" ……아, 어렸을 때부터 이게 버릇이라서. "
" 안 불편해? "
" 응? 아, 아니 진짜 안 불편해! 이렇게 마시면 손도 편하고……어, 주스 냄새 같이 맡으면서 마실 수 있는게 좋잖아. 달달하고. "
" ……. "
" ……. "
"그렇게 마시는 게 더 불편해 보여, 멍청아. "
아, 이게 바로 성공한 덕후구나 싶었다. 장난스럽게 내게 농담을 건네고 다시금 식판으로 손을 뻗는 김종인을 멍하니 응시하자니 침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 올라가는 입꼬리에 주스를 마시려는 핑계로 빠르게 고개부터 숙였다. 아, 진짜 떨린다. 그래서 숨도 못 쉬겠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놈에게 그렇게 상처를 받고, 그 멍청아 소리 하나가 좋아서 이렇게 바보처럼 실실거린다는 게 한심하고 어이없지만……그런 것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김종인이 나한테 말을 걸어줬다. 말을, 그것도 나를 처음 봤을 때도 언급하면서.
" 아, 뭐야 이거 불편한데. 너 진짜 이게 편해? "
" 응? "
" 목 아플 거 같은데. "
" 그, 그……손을 밑으로 내리지 말고 주스곽을 잡고서 먹어 봐. 그럼 조금 편할텐데……. "
" 진짜 특이하네, 음료수를 왜 이렇게 먹지? "
" 아, 그게……. "
" 푸흐. "
" 아, 존나 웃겨서 밥풀 튀었네. "
누군가 스위치를 누른 것처럼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변백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낯 뜨거운 시선에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살짝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놈이었다. 알고 있어도 모른 척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왜 너희들은 남이 누구를 좋아하면 필요 이상으로 티 내고, 또 필요 이상으로 엮는 거야. 그냥 조용히 좋아하고 싶다고. 남 좋아하는 것도 멋대로 못 해? 그것도 주변 사람들 눈치 보면서 해야 하는 거야?
짝사랑을 망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건 문제의 '주변인'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작 당사자는 가만히 있는데 너무 심하게 과장을 해서 오해를 만든다던가, 또는 너무 심하게 엮고 몰아가서 어색한 사이로 전략해버린다거나. 그놈의 관심이 문제다, 관심이. 다른 사람이 짝사랑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 저들은 뭐가 그렇게 할 이야기가 많으며, 뭐가 그렇게 웃길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뚫어져라 변백현을 응시했다. 제발 입 닥치고 가만히 밥이나 처먹어달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럼에도 놈은 눈치 따위 밥 말아먹은 건지 고개를 흔들어대며 나를 끝까지 자극하는 거였다.
" 앞이나 봐. "
" ……. "
" 투병신아. "
" 야, 윤보미 배수지 너네 먼저 반 올라가 있어, 나 변백현이랑 진짜 맞짱 좀 뜨고 오게. "
" 그새끼 아까 혼자서 웃을 때 쳐때릴 뻔. 그거 너 엿먹이려는 거 맞지. "
" 그런 거 같아서 지금 물어보고 오려고. "
" 우리 안 갈 테니까 저 새끼랑 말 안 통하면 불러, 일단은 네가 먼저 말해보고. 괜히 우리 꼈다가 상황 커져서 김종인 귀에까지 들어가면 어떡해. "
" 알겠어, 여기 있어. "
잘못된 게 분명하다. 분명 완벽히 어긋난 거다. 사실 놈이 내가 김종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부터 나로선 머리칼을 쥐어뜯고 싶은 민망함이 솟구쳤다. 남자한테 내 마음을 들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김종인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변백현에게. 놈이 이렇게 김종인을 빌미로 나를 엿 먹이려는 행동을 할 것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제대로 방심을 한 것이다. 뿜어져 올라오는 무안함이 섞인 후끈거림에 제 주먹으로 벽이라도 치고 싶었다. 고로 확신했다. 오늘 저녁에 적어도 다섯 번은 넘게 이불을 찰 거라고.
" 야, 변백현. "
" 응? "
" 너 진짜 왜 그래? 너 어제 내가 너한테 화내서 그래? "
" 뭐가? "
" 뭐가? 너 오늘 아침부터 계속 김종인으로 나 놀리고 장난치고 그랬잖아, 내가 너랑 친해? 아님 너 진짜 어제 내가 화내서 이러는 거야? "
항상 느끼고 있던 게 있는데 남자들은 위에 뭐가 들어서 저렇게 밥을 빨리 먹는 걸까였다. 분명 우리보다 한참이나 늦게 온 것 같은데 나오는 건 같이 나온다는 사실이 쓸데없이 궁금했지만,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그게 아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김종인을 대놓고 내 앞에 앉힌 것이며, 아침부터 지금까지 왜 그렇게 티는 많이 내는 건지, 내가 웃긴 건지, 아님 저 새끼 성격이 더러운 건지.
매점에 좀 가야겠다며 나란히 휴대폰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김종대와 김종인을 확인한 후에야 느긋하게 급식실 밖을 나온 개새끼의 팔목을 사정없이 잡아채고 참아왔던 감정을 한 번에 쏘아대기 시작했다. 네가 종인이에게 내 마음을 말할지도 몰랐고, 또 이렇게 티를 내면 놈이 언제 눈치를 챌지 모르는 건데. 난 이렇게 불안한데, 개새끼는 또다시 오묘한 미소를 띠며 건방지게 나를 내려다봤다.
" 하, 나 너가 화내서 그런 거 아닌데? "
" 뭐? "
" 아니, 너가 짝사랑하는 게 그 새끼랑 똑같……. "
" 너 내가 김종인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잖아, 근데 그렇게 티내고 싶어? 가뜩이나 걔는 내가 너 좋아하는 줄 알고있을텐데 그렇게 대놓고 엮으면 안 도와주는 것보다 더 못된 거라는 거 몰라? "
" 야, 잠깐만. "
" 김종인은……! "
" 야, 시발. "
" 뭐? "
" 아 진짜 성격 더럽네 이거, 내가 너한테 이런 말 들어야 겠냐? 아, 행동하는 거 귀여워서 착한애구나 했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화내고 지랄이야. "
" ……. "
" 무턱대고 지랄부터 하기 전에 네가 한 짓부터 생각하고 지랄해, 괜히 죄없는 사람 개새끼만들지말고. "
" 하, 야 너 뭐라……. "
" 야, 김종인 가자. "
바짝 좁혀있던 미간 사이가 눈 깜짝할 세 멀어졌다.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당사자의 이름이었다. 되자도 않는 이유로 내게 화를 내는 태도에 방금 먹었던 급식이 다 체할 지경이었다. 지금 화내야 할 건 누구고, 지랄이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 것도 누군데, 놈은 무슨 근거로 날 몰아붙이냐 답답해하며 삐딱하게 자세를 고쳐잡는데……놈의 입에서 나온 그 한 마디에 온 사고 회로가 정지되어버리는 나였다. 귀가 잘못된 건가, 아님 하도 김종인 생각을 너무 해서?
그것도 아니면……
" 가서 게임이나 하자, 시발. "
" …… "
" 별 말같지도 않는 지랄하고 있어. "
심장이 두서없이 빠르게 뛰었다. 하필이면 그 뒤에 김종인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한 거였다. 일단 되는 대로 욱하는 연기를 해봤는데 그걸 병신이 눈치챘을 리가 문제였다. 아까 보니까 놀라는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괜스레 일을 크게 만든 느낌이었다. 사실 별다른 건 없었다. 정말 ○○○이 말하는 것처럼 내가 화내서 그런 거라면 난 좀생이에 미친놈이겠지. 그저 웃겨서 그런 거다 웃겨서. 딱 봐도 저한테 관심 따위 하나 없고 어장 하려는 여자한테 1년씩이나 빌빌거리면서 따라다니던 김종인을, 무려 8개월씩이나 똑같이 빌빌거리면서 따라다니는 병신이 있댄다. 생각해보니 그게 그렇게 어이없을 수가 없는 거다. 김종인을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놈이 좋아하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짓던 그 표정과 말투를 그 여자애가 똑같이 짓는 거였다.
사실 처음에는 그랬다. 김종인과 정말이어주고 싶어서. 제3자의 시선으로 봐도 김종인 새끼가 그 여자한테 어장 당하고 있는 게 뻔한데 그걸 혼자만 모르고 헤롱거리는 꼴이 안쓰러워서 내 딴에는 정말이어주고 싶었다. 근데 그 방식이 화근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김종인이 서효정을 얼마나 많이 좋아하는지는 알지만, ○○○이 김종인을 얼마만큼 좋아하는지는 몰랐던 거다. 또 그게 묘하게 재밌지 않은가. 억지로 티 내려고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마 오늘 아침부터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았다. 되지도 않는 어색한 운동을 하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모습이 그렇게나 재밌는 거였다. 반응, 반응이 재밌었다. 딱 반응이.
놈이 내게 딱딱한 말투로 따지듯 몰아세웠을 때는 사실을 말할 계획이었다. 뭔지도 모르고 화부터 내는 꼴이 또 흥미로웠지만, 더 했다간 울지도 모르겠다. 김종인도 유난히 깝죽대는 내 성격에 적지 않게 화를 내곤 했으니까. 입을 떼고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낼 땐, 뒤에서 나란히 김종대와 걸어오고 있는 김종인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을 막아야겠다고 결론지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놈이 계획 없이 제 마음을 들키면, 걷잡을 수 없이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는 나 때문도 있을 것이다. 상황을 막기 위해, 내가 가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화부터 내고 신경질적으로 계단 위로 올랐다.
들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놈이 김종인에게 제 마음을 들키지만 않았으면. 놈이 김종인에게 들켜버리면 그 어이없고 웃긴 반응을 볼 수 없지않느냐.
' 어떡하지, 어떡하지. '
눈썹이 반사적으로 파르르 떨려왔다. 뻐근해진 눈에 비참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우스워 죽겠다는 깐족대는 표정과는 상반되는 얼굴로 익숙하지 않게 내게 등을 돌리는 변백현이었다. 놈이 뒷모습을 보이자 참고 있던 호흡도 팡하고 터졌다. 놈이 막아준 거다. 변백현이 막아준 거다. 내가 하는 말을 종인이가 들을까 봐, 그럼 내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저 뒤에 들려오는 지독하게 익숙한 발걸음 소리에 일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아, 다행이다. 김종인이 아직 모른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걸. 그건 죽을 만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놈이 다른 여자와 있는 순간부터, 수도 없이 고백할 걸이라고 후회하곤 했지만, 막상 기회가 눈앞에 닥치면 차라리 고백하고 놈이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것 다 이 편이 낫다고 정리한다.
뿌연 입김이 시야 앞을 그대로 차단해버린다. 숨고 싶다는 생각에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진다. 중심을 잃은 어깨가 일순간 힘을 잃고 쳐졌다. 김종인만 그냥 가면 되는 거다. 그럼 변백현의 의도도, 내 바람도 모두 다 이뤄지는 거다. 한없이 기도하고 또 소망했다. 제발 김종인이 그냥 지나가게 해주세요.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 ○○○. "
" ……엄마! "
" 아, 그……. "
" 아……. "
" 변백현 재가 워낙 성격이 더러워서 그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별로 크게 신경 쓰지마. "
" ……. "
" 나도 쟤한테 병신소리 매일 듣고 살거든. "
" ……. "
" ……그, 이거 너 먹어라. "
" ……. "
" 먹고 쟤랑 풀어, 변백현 성격에 절대 먼저 사과 안 하니까. "
저가 들고 있던 몽쉘 하나를 내 손에 쥐여준 채 묘하게 잔미소를 띠우는 김종인이었다. 넌 모른다.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혹시나 네가 변백현과 내 말을 들었을까 봐 얼마나 놀랐을지 모른다. 또 너는 모른다. 이런 의미 없는 호의에 내가 얼마나 크게 착각하는지, 또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오해를 할지. 짝사랑을 하는 이상 그와 하는 줄다리기에 패배는 없다. 죽었다 깨도 종인이가 반대편 줄을 잡아주지는 않으니까. 그러나 이길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줄을 당겨보는 건 이 때문이다. 이 작은 몽쉘하나가 지친 날 힘내게 만드니까. 거지 같은 오해라고 해도, 또 지겨운 순환의 반복이라고 해도, 결국에 상처받는 건 나라는 걸 알면서도 짝사랑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될 것 같고, 그래서 놈이 내게 호의를 베푼 것 같고, 놈도 나를 괜찮게 생각하는 것 같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고, 결국에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처럼 낚이고 마니까.
짝사랑의 조건 세 번째 : 그는 절대 알지 못한다, 내가 고백하는 게 아니라면. 그래서 결국 또 늪에 빠진다.
누군가에게 어장을 왜 당했냐며 채찍질하지 마세요. 알면서도 당하고, 의심하면서도 믿고싶은 게 짝사랑하는 사람들 마음이니. 왜 진작 내 충고를 듣지 않았냐면서 욕하지마세요. 내가 듣고싶은 것만 듣고, 보고싶은 것만 듣는 게 짝사랑이니. 그저 공감만 해주세요, 살짝 편도 들어주고요. 네가 더 소중하고, 네가 더 예쁘다는 말로 자신감을 복돋아주세요. 지금 우리에겐 자신감과 내 편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
하...우선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중간에 글이 두 번이나 날아가고...거기에 멘붕와서 멍때리다가 이제야 글을 완성하네요. 와...진짜 정말 거짓말없이 제가 1년동안 글을 쓰면서 짝사랑의조건3화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몇 번이고 수정하고 고심한 게 없는 거 같아요...그만큼 만족해주셨으면 좋으련만.......아 짝조에서 댓글 유형이 주로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 글에 있는 여주에 미친 듯이 공감을 하시는 분들, 또 다른 분들은 짝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보셔서 여주입장이 답답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래서 마지막에 저렇게 적은겁니다. 짝사랑 하는..그 제가 예전에 했던 입장에서 적어봤어요. 아! 짝조 부족한테 많이 좋아해주시고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너무 행복해요. 아, 그리고 댓글에 직접 겪으셨던 짝사랑 일화 많이 적어주시는데 저도 그거보면서 글에 영감 많이 받고 공감하고 그러고있어요...흑흑...짝사랑 다 힘내...다 이뤄질거예요. 화이팅ㅠㅠㅠㅠㅠㅠ
아 진짜 짝사랑이란게...참......ㅠㅠㅠㅠㅜ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30 17:4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12.31 01:02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의 종인이는 저렇게나 착합니다....그러니 여주가 어떻게 8개월 동안 안 좋아하고 배겨?ㅠㅠ마음아파..
백현이 고맙네여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1.16 10:29
으허어어엉 완전공감가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1.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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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대박 ㅠㅠㅠ
아아ㅠㅠㅠㅠ몽쉘은 무슨 의미져ㅠㅠ 백현이 그래도 착하네여 초반엔 조금조오오오금 화나려했는데..!
너무공감가요 ㅠㅠㅠ아 슬퍼진다 ㅠ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16 00:44
종인이는 몽쉘 그냥 준거일텐데 또 의미부여하면 어쩌죠..안타깝고만..백현이는 여주구해주려고 화냈는데 여주랑 백현이랑 잘풀었으면 좋겠어요!마지막문장 읽고 마음이 찡 했어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17 19:51
백현이 진짜 화내는건 줄 알고 완전 깜짝 놀람...
아우...조니니 여주 둘다 아련보스쩌러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25 18:33
대바규ㅠㅠㅠㅠ몽쉐루ㅡㅜㅜㅜㅜㅠㅠㅠ
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련해 ㅠㅠㅠㅠㅠㅠㅠ
헐 ㅂㄱ현이 착해ㅠㅠㅠㅠㅠㅠㅠㅠㅠ근데 여주보면 막 내가 짝사랑하는것같구ㅠㅠㅠㅠ
아오 ㅠ 둘다애잔 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5.24 04:22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너무 아련해ㅠㅠㅠ여주야유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16 00:41
짝사랑 해본 1인이여서 여주마음 진짜 이해 잘가요ㅠㅠㅠㅠㅠㅠ여주야 힘내....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20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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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주맘 이해 너무 잘간다ㅠㅜㅜㅜ 짝사랑 들킬지 말지 걱정하는거 백현이가 점점 여주쪽으로 마음가는것같은데.ㅜㅜㅜ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11.04 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