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11) 생각과 편견: 여성, 픽션과 맞닿음. 편견과 격정을 불러일으키는 주제(12) 사실보다 허구가 더 많은 진실을 내포
12) 강둑에는 버드나무들이 어깨에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끊임없이 비탄을 토하고 있었다.
13) 치솟았다가 가라앉고, 여기저기서 번뜩이며 물밀듯 요동치는 그 사고의 격정 때문에 더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지요.
15) 거칠게 번뜩이는 상상력과 사이사이로 번개치듯 빛나는 천재성이 그 수필들에 결함을 제고항고 또 불완전한 형식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의 수필에 점점이 시를 뿌려놓기 때문
16)여성의 도서관 출입이 자유롭지 못한 옥스퍼드
19) 신앙의 시대 -> 이성의 시대
33) 내 마음 속에 떠오른 그림을 공중에 노출시키기
35) 비난 받아 마땅할 여성의 가난에 경멸. 여가 시간의 낭비 즐기기-> 그녀의 얼굴에 즐거움의 흔적은 없다.
36) 시턴 부인과 그녀의 부류들이 열다섯 살의 나이에 실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더라면 메리는 태어나지 못했겠지요.
68) 여성이라는 존재
그리하여 아주 기묘하고 복합적인 존재가 생겨납니다. 시에서는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여성의 존재가 고루 퍼져 있지만, 역사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픽션에서 그녀는 왕과 정복자의 삶을 지배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손가락에 강제로 반지를 끼워준 어느 부모의 아들에 딸린 노예였습니다. 현실에서 그녀는 거의 읽을 줄 모르고 철자법도 모르며 남편의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독수리 날개가 달린 벌레, 또는 부엌에서 양의 비계를 떼어내는 생명과 미의 요정이라고나 할까요.
70) 서가에 없는 책: 여성의 역사, 현대 사회에서 서가에 없는 책이 있을까?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없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살았던 평범한 여성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 어딘가에 산재할 것이므로, 누군가 그것을 모아서 책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나는 서가에 없는 책을 찾으며 생각했지요.
70) 역사란
비록 역사라는 것이 사실 약간 기묘하고 비현실적이며 한쪽으로 기운 듯이 보인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위인전에서 여성은 배경으로 재빨리 물러나거나 윙크나 웃음, 혹은 눈물을 감추고 있는 것을 흘끗 보게 되니까요.
-남성의 자서전 격 에세이 혹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어머니, 애인, 지나간 애인 정도다. 어머니는 나에게 절대적 헌신자, 빈곤 속에서도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인물로써 내게 살과 피를 나눠준 대상, 역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아직도 자라지 못한 상처받은 어린 아이를 내 안에 가둬놓게 만든 존재로 묘사된다.
71) 기록으로 남지 않은 여성의 삶
18세기 이전의 여성들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굴려볼 만한 모델이 없는 것이지요. 여기서 나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여성들이 왜 시를 쓰지 않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바았는지, 글 쓴느 법을 배웠는지, 자기만의 방이 있었는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아이를 낳은 여자는 얼마나 되었는지, 간단히 말해 그들이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 무엇을 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81)
처음에 구상되었던 대로 온전하게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태어나는 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81) 여성의 물질적 빈곤과 비물질적 빈곤
조용한 방이나 방음장치가 된 방은 말할 것도 없고, 여성이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은 그녀의 부모가 보기 드문 부자이거나 대단한 귀족이 아니라면 19세기 초까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아버지의 아량에 달려 있던 용돈은 옷을 사 입는 데나 족할 정도였으므로 그녀는 키츠나 테니슨, 칼라일처럼 가난한 남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 도보 여행이나 짧은 프랑스 여행, 누추한 곳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가족의 압제와 권리 주장으로부터 보호해 줄 독립된 숙소 등 그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 물질적 곤경도 만만치 않았지만 비물질적 시련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천재적인 남서들조차 몹시 견디기 힘들어했던 세상의 무관심이 그녀에게는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적대감이었습니다. 지금은 용기와 좌절과 낙담이 예술가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측정해야 할 때입니다.
85)
19세기에도 여성은 예술가가 되도록 고무되지 않았음이 명백하다고요. 오히려 여성은 냉대받고 얻어맞으며 설교와 훈계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은 이런 사실에 항의하고 저런 사실에 논박할 필요성 때문에 지나치게 긴장되었고 생명력은 위축되었을 겁니다. 아주 흥미롭고도 불명료한 남성의 복합적인 심리에 근접하게 됩니다. 그것은 여성이 열등하기보다는 남성이 우월하기를 바라는 뿌리 깊은 욕망으로서, 남성을 예술의 전면뿐 아니라 도처에 서 있게 함으로써 여성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도록 합니다.
86) 예술가의 심리 상태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 과도하게 신경 쓰는 것이 예술가의 본성이라는, 아주 불행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자꾸 예시할 필요는 없겠지요. 문학은 사리 분별을 넘어설 정도로 타인의 의견에 신경 쓴 사람들이 파멸한 잔해로 온통 뒤덮여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어떤 마음 상태가 가장 적합한가 하는 나의 본래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볼 때, 이처럼 민감한 그들의 감수성은 이중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추측컨대 예술가으 마음은 자기 속에 내재한 작품을 흠 없이 완전하게 풀어놓으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셰익스피어의 마음처럼 작열해야 합니다. 그 안에 어떤 방해물이 있어서도 안 되고 태워지지 않는 이물질이 끼어서도 안 됩니다.
86) 온전히 타오를 수 있는 셰익스피어의 마음
셰익스피어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원한이나 악의, 반감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가를 상기시키는 어떤 '계시'에 의해 방해받지 않습니다.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그에게서는 불타올라 소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방해받지 않고 자유로이 흐르는 것입니다. 만일 방해받지 않고 눈부시게 타오를 수 잇는 마음이 잇었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마음이었겠지요.
101) 걸작은 혼자서 외톨이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일단의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수의 경험이 하나의 목소리 이면에 존재하는 것이지요.
108) 기혼의 남자와 함께 사는 죄를 짓고 있었으니, 그녀를 만남으로써 스미스 부인이나 그 밖의 우연한 방문객들의 정조가 손상돼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은 사회적 관습에 복종해야 하므로 그녀는 '소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야 합니다.
109) 소설이란
소설이란 삶에 대한 어떤 거울 같은 유사성을 가진 창조물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물론 소설이 삶을 단순화하고 왜곡하는 측면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요. 어쨌든 그것은 마음의 눈에 어떤 형체를 남기는 구조물인데, 그것은 때로 사각형 모양으로 형성되고, 때로 탑의 형태로 구성되며, 양옆으로 뻗어 나가 주랑이 생기고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처럼 굳건한 구조에 둥근 지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설은 우리 내면의 적대적이고 상반된 감정을 이야기합니다.
115) 착한 여성
당시 소설을 썼던 수천 명의 여성들 가운데 그들만이 영원한 현학자들의 끊임없는 충고-이렇게 써라, 저렇게 생각하라-를 완전히 무시했지요. 그들만이 그 지속적인 목소리, 때로 불평하고 때로는 선심쓰는 척하며 때로 권력을 휘두르고 때로는 상심하고 때로 충격을 받고 때로는 분노하며 때로는 숙부처럼 친절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성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며 지나치게 양심적인 가정교사처럼 항상 그들에게 달라붙어서 에거턴 브리지스 경처럼 여성에게 세련된 몸가짐을 가질 것을 엄명하거나, 심지어 시 비평에 성의 비평을 끌어들이기도 합니다. 또한 여성들이 착해지고 싶고 빛나는 상을 받고 싶다면 문제의 그 신사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한계 내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고합니다.
90)레이디 원칠시의 시(1661)
우리는 얼마나 영락한 것일까! 그릇된 지배에 영락한,
자연이 빚어낸 바보라기보다 교육이 빚어낸 어릿광대.
어떠한 마음의 진보도 저지된,
우둔하리라 예상되고 설계된 생물,
누군가 더 열렬한 상상력으로 열망에 이끌려
남들 위로 솟아오르려 하면
강력한 반대 당파 끊임없이 나타나,
번영의 희망은 그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그녀가 넘성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 즉 글쓰기를 가로박을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
슬프게도! 펜을 드는 여성은
주제넘은 동물이라 간주되어
어떤 미덕으로도 그 결함은 구제될 수 없다네.
그들은 말하지, 우리가 우리의 성과 방식을 착각하고 있다고
교양, 유행, 춤, 옷치장, 유희,
이것이 우리가 바라야 할 소양이라고.
쓰고, 읽ㄱ,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움을 흐리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며,
한창때의 남성 정복을 방해한다고.
반면 지루하고 굴욕적인 집안 살림이
우리의 최고 기술이자 쓰임새라고 누군가는 주장하지.
슬픈 노래로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몇몇 친구들에게 그대의 슬픔을 노래하라.
그대, 월계관을 쓰도록 태어나지 않았으니
그대의 그늘을 어둡게 드리우고 그곳에서 자족하라.
92)
비록 그녀의 남편이 더없이 친절한 사람이었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완벽했더라도, 그녀의 글을 쓰기 위해서 틀림없이 스스로를 시골의 한 방에 감금했을 것이고, 어쩌면 쓰라림과 망설임으로 갈가리 찢겼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