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매의 정 깊어, 언니의 은혜 갚을 길 없네
유소운劉素雲 선생
『과주科註』학습반 마음체험 11 무량수경과주無量壽經科註 제4회 학습반(제101집)
유소청 보살 유소운 거사 극락정사 기념사진
올해 11월 21일은 저의 언니인 유소청劉素靑 보살 왕생 2주년 기념일입니다.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습니다. 찰나, 눈 깜짝할 새라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렀습니다. 이는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언니가 왕생한지 2주년이 지났습니다. 2년이나 흘렀어도 언니의 왕생 장면은 마치 어제 일처럼 여전히 그렇게 생생하고 그렇게 눈에 선합니다. 어제는 물건을 정리하다 뜻밖에도 나와 언니의 20여 년 전 사진 한 장을 발견하였습니다. 정말로 대단히 귀중한 것으로 저는 정말 기뻤습니다. 이 사진은 20 여 년 전 나와 언니가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浴佛節) 법회에 극락정사極樂精舍에 가서 찍은 것입니다. 두 노부인 중 한 사람은 재래식이고 한사람은 서양식입니다. 서양식 사람은 닭장 머리(제가 붙인 이름) 파마를 했기 때문에 당연히 언니입니다. 촌티 나는 사람은 자연히 저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일관되게 헤어스타일이 구식 그대로였습니다. 특히 겉옷은 저의 딸이 소학교 때 입었던 외투로, 딸이 성장하여 외투가 작아져서 입을 수 없게 되자 저의 겉옷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옷을 적어도 15년 이상 입어서 매우 편안했습니다. 1984년 성정부省政府 근무를 명령받았을 때도 이 옷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동료들은 저에게 “출토문물出土文物”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지금 보이는 이 한 장의 사진은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따뜻합니다. 저와 언니는 손을 맞잡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미소로 대하고서 불살 앞에서 함께 함께 사진을 찍어 정말로 너무나 기념하는 의의가 있었습니다.
언니께서 왕생하신지 2주년이 되었는데 그녀의 여동생으로 그녀의 동참도우同參道友로 저는 뭔가를 해야 합니까? 「자매의 정 깊어, 언니의 은혜 갚을 길 없네(姐妹情深,姐恩難報)」라는 제목이 생각나, 이렇게 이번 학습 심득체험(心得體會)의 주제로 언니의 왕생 2주년을 기념하겠습니다.
1. 자매의 정 깊어, 언니의 은혜 갚을 길 없네
언니는 1941년 태어나셨고, 저는 1945년에 태어났으므로 언니가 저보다 네 살 더 많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전부 네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언니 앞으로 또 오빠 한분과 언니 한분이 계셨지만, 불행히도 모두 한 살 무렵에 요절하였습니다. 태어난 순서대로 보면 언니는 셋째이고, 저는 넷째인 셈입니다. 어머니께서 젊으셨을 때 몸이 좋지 않아 혈맥병血脈病이라는 병이 있었는데 바로 기혈이 조화롭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앞의 두 아이가 요절하였습니다. 저와 언니는 비록 살아남았지만, 몸이 허약하여 우리 두 사람 다 온몸에 부스럼(長瘡)에 고름이 흘러나왔습니다.
언니는 저에 비해 장점이 많지 않았고, 저는 네 살 때까지 앉아 있을 수도 없어 누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니는 비록 자기 몸이 약했을지라도 그녀는 항상 나를 돌보는 것을 잊지 않아 어른스런 아이 같았습니다. 일이 하나 있었는데, 저의 인상으로는 저에게 앉는 연습을 시켰습니다. 언니는 어머니에게 저를 부축하여 일으켜 앉도록 한 다음 언니와 저는 서로 등을 맞대고, 그녀의 몸으로 저를 받쳐서 앉게 했습니다. 저는 이런 연습을 하면서 비로소 점차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언니는 또 제가 걷는 것을 배울 수 있도록 이끌었습니다. 언니는 천사처럼 나를 보호해주었습니다. 언니는 비록 저보다 네 살 더 많지만, 정말 언니의 아이인양 무엇이든 다 제가 하자는 대로 했고 제게 양보하였습니다.
유소청 보살 유소운 거사 가족사진
다시 예를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우리 집 가정환경은 비교적 청빈하였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또한 검소하게 생활하시는 분으로 무슨 물건이든 결코 낭비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언니와 제가 학교를 다닐 때 사용한 책과 연필도 결코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이러했습니다. 새로 산 노트는 제가 먼저 사용하였습니다. 저는 앞면을 사용하였는데, 앞면을 다 쓰고 나면 이 노트를 다시 언니에게 주어서 언니는 노트의 뒷면을 사용하였습니다. 새로 산 연필도 제가 먼저 사용하였고, 사용하다 몽당연필이 되면 다시 언니에게 사용하라고 주었습니다. 너무 짧아서 손으로 쥘 수 없을 때 언니는 붓두껍을 연필 위에 씌우고서 늘어난 길이만큼 계속 더 사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이전에 언니가 있을 때에는 이런 일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현재 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이런 생각들이 다 추억으로 기쁨과 위안이 됩니다. 추억은 일종의 행복이지요!
며칠 전에 저는 오랜 동료에게 굵은 실로 뜬 바지 세 개를 수선하여 주고서 저 자신에게는 양말 다섯 켤레를 수선하여 주었는데, 기술은 실재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모양을 수선하든, 가장자리가 헤어지든 끝이 말리든, 어차피 구멍을 덮고 나면 저 자신은 그런대로 매우 성취감이 있어 빙그레 좋아라,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스스로 마음 들어 했습니다. 당시 제 생각으로는 이것도 언니가 있었다면 꼭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소은아, 너 이것은 또 어느 나라 지도냐?” 그런 후에 기꺼이 저에게 다 뜯고서 거듭 수선하여 주셨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언니께서 계시지는 앉지만, 저는 그것을 수선하여 지도를 만들 수 있고, 이미 매우 좋아서 지도가 바로 지도일겁니다.
기억하기로는 2000년 전후에 막 저는 홍반낭창병(紅斑狼瘡病 ; 루푸스)에 갑자기 걸렸을 때 이름있는 2개 병원에서 저에게 언제든지 임종을 맞이할 것이라 선포하였고, 바로 일년지나 이사를 가야만 했는데, 혁신가革新街를 따라 한수로漢水路를 향해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는 매우 번거롭고 매우 고달픈 일로 물건들을 잘 정리한 후에 다시 포장하고, 이삿짐센터에서 운반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 때 저는 병이 가장 심각한 때로 하루 종일 열이 나고, 전신이 힘이 없으며, 온몸의 관절에 아프지 않는 곳이 없어, 웅크리고 앉지도, 일어설 수도 없어 전체 이사 준비 작업을 모두 언니 한 사람이 다 해내었습니다. 물건을 한수로漢水路로 운반한 후에 응접실에 다 쌓아두어 엉망으로 어지러워져 있었습니다.
언니는 제가 깨끗하고 깔끔한 것을 좋아하고, 아마 조급해져 화낼 수도 있음을 알고서 제게 말했습니다. “소운아, 조급해 하지 말거라. 내가 이삼일 깔끔하게 정리하마.” 과연, 언니는 밤낮으로 계속 맡아서 일했고 이틀 낮 이틀 밤에 정리를 마쳤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작업량이 많겠습니까? 그해는 언니는 벌써 여든 살 노인이었고, 더더구나 이때는 다리에 병이 났음을 발견하였고, 다만 골암骨癌임을 알지 못했을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하면 저의 마음은 살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언니여, 당신이 베푸신 크나큰 은덕, 여동생이 어떻게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자매의 정이 깊어, 언니의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여동생은 이번 생에 성불하여야 비로소 언니의 깊은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겁니다.
2.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니, 언니의 은혜 갚을 길이 없네.
언니는 부모님께 좋은 딸이었고, 착한 딸이었으며, 효성스런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효도는 원만하였습니다. 언니는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부모님께서 별세하실 때까지 줄곧 부모임과 함께 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1985년 별세하실 때 언니와 어머니는 44년을 생활하였고, 아버지께서 1986년 별세하실 때 언니는 아버지와 45년을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언니는 성격이 좋고, 부모님 앞에서 말 잘 듣는 딸이어서 부모님께서 어떻게 말해도 어떻게 하여도 지금까지 부모님께 말대꾸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저처럼 성격이 거칠고 급하지도 않았고 이따금 부모님께 억지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아버지께서는 성격이 좋아서 무엇을 말해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여태껏 아버지께서 성내고 화내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의 언니의 성격은 저의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성격이 좋지 못해 성급하고 잘 노하는 성미라 금방 화를 내셨습니다. 저의 성격은 저의 어머님을 닮아 화기가 꽤 많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닮지 않은 것은 저의 어머님은 화를 내실 때 사람에게 욕을 하셨지만, 저는 욕하지도 않았고, 상스런 말은 한마디도 않습니다.
부모님께서는 비교적 저를 편애하시고 이따금 저의 잘못이 분명한데도 야단맞는 것은 꼭 저의 언니였습니다. 이따금 제가 언니의 편을 들면 어머니께서는, “양심이란 조금도 없는 것이 네게 역성드는 것에 감사히 여기지도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언니에게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 할 때마다 언니는 언제나 “괜찮아, 너는 막내딸이라서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노년에 노인성치매에 걸리셨는데, 당시 우리들은 몰랐습니다. 이와 같은 이상상태(病態)를 몰라서 어머님께서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느꼈습니다. 언니와 형부의 얼굴을 보시면 욕을 하시고 이따금 막대기를 쥐고 그녀(그)를 때리곤 하셨는데, 언니와 형부를 아무리 피해도 피할 곳이 없고 아무리 숨어도 숨을 곳이 없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대략 삼여 년 동안 지속되다가, 어머니께서는 별세하셨습니다. 언니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도 못하고 아버지께서 병에 걸리셨는데, 폐암 말기이셨다. 언니는 정성들여 아버지를 보살폈지만 일 년 후 아버지께서도 별세하셨습니다. 언니의 효도는 원만하였고, 그래서 언니와 형부께서는 모두 극락세계에 부처가 되어 가셨습니다. 저는 그들이 정말 불보살님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 조금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니, 언니의 은혜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언니는 저가 학습하는 좋은 본보기이십니다.
첫댓글 至心歸命禮 관세음보살 !
"중생은 相에 집착하여 가짜를 진짜로 여기지만
보살은 相이 없이 티끌세상에 내려오셔서
53선지식을 뵙고 온갖 相을 배우니
누가 부처이고 누가 평범한 사람인지 어찌 알리요.
근기에 따라 중생을 제도하며 본분을 다하니
天地人 三才가 나와 본래 한 몸이로다."
(유소청 보살님께서 2012.11.12 왕생 9일 전에 쓰신 게송입니다.)
왕생하시기 전 일뿐만이 아니라 왕생한 이후의 일 또한
일일이 다 적어놓으셨습니다.
蓮友님들과 함께 법익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