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가을의 수인산의 모습입니다.

다음은 겨울 모습이고- 수인산 전경 홈골(북문)에서 병풍바위-남문에서 병풍바위-서문에서 불선봉 절벽 북문 주위 절벽 수인산 전경 서문-암각 남문 유적-수구 수인산 등산 안내도 해발561m 천연의 요새로 고려 때부터 왜구의 침입 시 보성, 장흥, 강진,영암의 백성들 피난 및 저항지 였다. 동국여지승람(1481년) 기록에 의하면 둘레3,756척 높이 9척, 많은 부속 건물과 동서 남북문과초소, 우물이 6개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산 정상에는 노적봉 봉수대가 있어 동-장흥억불산,서-영암 갈두산, 남-마량 남원포와 통하였다. 별장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고 원래 수인사절터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그 흔적-동, 서, 남, 북문과 방죽터, 우물, 맷돌, 확독, 비밀통로라고 전해오는 수로, 서문쪽 암벽의 명문등 여기 저기 찾아볼 수 있다. 억새 밭, 탁 트인 해안정경, 도시인들이 1일 가벼운 등반코스로 즐겨 찾는다. 수인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옛날 장흥군 억불산 골짜기에 금술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남편은 늘 농부로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과 상의한 끝에 산에 올라가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억불산의 서북쪽에 있는 수인산 중턱에 올랐다. 공부에 열중하던 남편은 옥녀봉에서 내려오는 선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선녀를 꾀여 수리봉 밑에 살림을 차리고 부인 몰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선녀가 임신을 하여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공부를 까맣게 잊은 채 수리봉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닭을 훔쳤다. 닭을 들고 산에 오르던 젊은이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벼락을 맞고 돌이 되어 버렸다. 이 돌은 이후 '부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훔쳤던 닭은 '게구암',젊은 남편과 선녀가 밀월을 즐기기 위해 둘러쳤던 병풍은 '병풍바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수인산 중턱에는 부암 .계구암.병풍바위.수리봉.옥녀봉등의 바위가 10리 안팎에 널려있다. 또 수인사 부근 '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 밑에 '쌀남바위'라 부르는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수인사 승려들은 그 쌀이 충분하지는 못할지언정 식생활은 근근히 이어갈 수 있었으므로 오로지 불경연구와 수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욕심이 많은 중이 더욱 많은 쌀이 탐났던지 쇠꼬챙이로 쌀바위의 쌀이 나오는 구멍을 크게 뚫어 놓았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이제까지 꼭 중들이 먹을 만큼의 쌀이 나오던 것이 한 톨도 나오지 않았고 완전히 빨간 피만이 흘러내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후 쌀바위를 비롯하여 부근의 모든 바위의 돌까지도 빨갛게 물들었으며, 따라서 이 근처는 적벽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벽의 절경은 타 지역에 그 예를 찾기 어려우며, 수인산에서도 으뜸가는 풍광으로 유명하다. 더자세한 수인산성에 대하여 수 인 산 성 ( 修 仁 山 城 ) (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59호) 서 1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어디한곳 지금 우리가 존재하게끔 끈질기게 살아온 조상의 발길 닫지 않는곳 없겠지만은 가끔 어디 특수한 위치에서 보다 많은 사건들이 있었음을 주목하게 한다. 이 땅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나 이는 요즘 같이 실물 제일주의에서는 좀 갑갑한 얘기 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오늘 이 시각 여기 존재해 있음을 과거와 조상이 있기에 내가 있음이 아니던가? 조상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하며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일이 일어났으며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고 조사하고 공부해 보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느끼며 알 수 있게 해 주기떼문에 뜻있는일이라 생각한다. 서 2 수인산성은 강진군에서 북쪽의 병영면의 장흥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병영소재지에서 약3㎞의 거리에 위치해있고 정상인 노적봉은 해발 561M이며 병영면 지로리에 위치한다. 이곳은 병영과 밀접한 관계가 많다. 현재 병영초등학교터인 병영면 성동리 138번지 주위에 태종17년 (1417년) 초대 병마절도사 마천목이 병영성을 축성, 동학 혁명으로 소실되고 (1894년)폐영되기까지 (500여년간) 호남, 제주까지 관할한 육군 최고 지휘부였을시 봉수대가 있어 수인별장이 주재하며 연락을 취하고 임진왜란 전란시에는 강진과 장흥, 영암, 보성 이고장주민들의 피난처이자 최후의 저항지였으며 동학혁명, 6.25등 전란시에는 이 고장 주민들의 땀, 눈물, 한으로 얼룩진 생과사의 갈림길이기도한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였음을 조사로 확인 할수 있었다. 또 평화시에는 수인산 자락 여기 저기 사찰과 암자가 있어 주민들의 신앙심을 다져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시 역사성을 무시한 행정편의대로 산성이 장흥군과 나뉘어지고 성곽 상당부분이 장흥군 유치면 대리에 위치 해 있음을 알수있었다. ●사료에서 찾아 본 수인산성 고려말 왜구들이 내륙 깊숙이까지 침입하여 노략질 함이잦자 주민들을 산성에 입보시킬 필요가 생겼고 1377년 (우왕)에 이르러서는 각도 요충지에 산성을 수축케함의 기록이 있으며 1378년에 이르러서는 농한기에 수축케 하였다는 기록을 확인할수있다. 그러나 그당시 수축하였는지 또 그이전에 축성되어 입보처로 이용되고있었는지는 확인할수없다. 다만 -고려사 절요등 기록에의하면 당시 고려말에 도강 탐진 보성 장흥 영암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은 수인산성이 전라도 남해안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입보처 였음을 알수 있다. 이후 왜구들이 조선 태종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회유책에도 불구하고 연해에 자주 준동 하였다.이에 따라 1408(태종8년), 해도찰방을 파견하였으며 읍성과 산성축성론이 대두하게 되었고 ,1410년(태종10년)에이르러서는 전라,충청 경상도 연해지역에 본격적으로 축성작업을 하기에이른다. 병영성 역시 이때 1417년(태종17년) 광산(광주-송정)에있던 성을 패쇄하고이곳에 축성하여 옮겨오게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수인산 석성은 1396보로서 안에 샘이 여섯인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수인산성의 규모가 최초로 기록되었고. 이후 동국여지승람(1481)에는-3756자길이,높이9자의기록과 시설로는 수인산 봉수대가 설치되어 억불산 봉수로부터의 적변을 병영성에 중계하였다는 기록을 확인 할수있다. 1555년(명종10년) 을유왜변시 한때 파손되었다가 1593년(선조26년) 임진왜란 와중에 논의 수축되었다는 사실을 당시 비변사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 후 1604(선조37) 병사 이영이 개축을 요청하였으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았고,1807년(고종4년)에 이승연이 개축을 요청한 사실이있고 그 이후에는 개축여부를 확인할수 없다. 0.조선말 의병투쟁 심남일 의병장은 한일 합방후인 1919년 면암 최익현선생의 항일의거대와 같이하여 지방의병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왜경에 항의했다. 심남일열사는 1871년함평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문을 수학하여 사서삼경에 능통, 서당에서 훈장으로 2세교육에 진력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이기지못하고 왜에 항거를할 것을 결심하고 장성, 영광, 남원, 보성등지에서 일병에 항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1907년 11월 강무경과 협의하고 격문을 각지에 전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심열사는 대장이 되어 각부서별로 배치하여, 전 진을 조직하였다. 1908년2월 13일 함평군 신광면에서 남평으로 행군하고 3월 7일에는 다시 옴천 오치동으로 행군하던중 일병 100여명과 충돌하여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교전하여 일병 수십명을 사살하고 격퇴 시켰다.이해 4월 15일에는 수인산성에 입성하여 성벽을 보수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기회를 노리던중 유치면 관동에서 일경이 습격하여 온다는 정보를 접하고 바위밑에 의병 1개 부대를 매복시켰다가 일병을 습격하여 3명을 사살하고 잔당을 격퇴시켰다. 같은해 6월19일에는 남평에 유진하면서 장계원에 복병시켰다가 밤을 타고 급습하여 오는일병 60명을 역습하여 그중 5명을 사살하고 작전상 남평의 칠천으로 퇴진하였다가 25일 판부로 가서 후군장 노병우로 하여금 일병 5명을 사살하고 군마 2필과 무기를 노획하여 개선하였다. 또 7월 말일 오정때쯤 왜장 금평산이 기병 20명을 이끄고 영산포에서 급습하여 옴을 미리알고 심열사는 우측석축사이사이에 복병하여두고 후군을 이끌고 나가 잠시응전하다 다시 산중으로 후퇴하니 왜병은 유도작전에 빠져 계속 추적하여 오므로 복병이 일제히 사격하여 왜장 금평산이하 1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올리고 다시 작전상 당산촌으로 후퇴 유진하였다. 9월20일에는 수인산성에 본진을 두고 대치에 일부병력을 대기시키던중이였는데 왜병 30여명이 유치면 삼풍리에 집결중이라는 정보를듣고 심열사는 선봉장 강현수로 하여금 장병 100여명으로 토벌하게 하였던바 그중20여명을 사살하고 격퇴 시켰다.그러나 전고의 누적으로 눕게되자 선봉장 강우경과 함께 수인산성을 빠져나와 영암의 분토등에서 신병치료를하던중 일병 300여명이 동북서 삼면에서 내습해와 왜병과 싸우다 후군장 최우평과 20여명이 전몰하였으나 도총장 김도숙이 의병을 이끌고 돌격하여 20여명을 사살하였다.이후 여러곳에서 일병을 무수히 사살사살하였고 5월 12일 보성의천동에 유진하면서 인규홍의소에 통보 합의하여 석산에서 합진 ,각지의 의병들과 연합하여 일거에 일본군을 섬멸할작전을 세우던중 불의의 의병 해산조칙이 내렸다. 이 규칙이 물론 일제의 강압과 매국노의 소행인줄알면서도 왕명을 거역할수없어 비통함을 참지못하면서도 의병을 해산하고 능주의 풍재바위굴 속에서 강무경과 신병을 치료하던중 8월26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9월2일 광주로 이감 되었으나 "내가 옥중에서 죽는다마는 죄가있어 죽는게아니라 일제의 강압에의해 죽는다"하였다 이렇게 심열사는 39세를 일기로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함평 월야면출신인 심남일(1871-1908) 의병장이 이렇게 일제와 활발한 항일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숨지기까지 수백여명을 사살한 한사실과 당시 장흥출신 이교민등 함께 활동하였음을 확인 할수있다. 그이후 6.25 전쟁때에는 공비들의 은거지 임에따라 소탕작전시 유치면과 함께 온 산을 비행기로 기름 뿌려가며 불을 질러 잿더미화 되었다는 사실을 알수있었다. 0.수인산성 보수하던 기록 옴천면 좌척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병영의 수인산성 보수하던 기록이 전해오고있다. 수인산성수보전분파절목(修仁山城修補錢分派節目)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의 어려운 생활을 엿볼수 있다. 여기에 병마절도사 직인이 찍혀있고,경오년 작성되고 크기는30cm에 32.3cm4장으로 되어있다. -수인산성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한곳임을 아주옛날에 피난하여 목숨을 구한 복받은땅이라는 것을 잘알고있다. 그러므로 위와 아래의 성을 고치는데 필요한 품삯으로는 수고비의 대가가 되지 못하여 첫새벽에 집을 떠나 한밤중에야 일을 마치고 돌아오게 되니 몸과 마음이 크게 지쳐 있는데 농사 짓기 전에 일을 마쳐야 된다고 재촉만 하니 이일이 어찌 재촉한다고 될일 이겠는가. 실제로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여야 기간 내에 마무리하였어도 성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하는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며 만약에 쌓아놓고 고치지 않고 내버려둔다면 옛날에 목숨을 구한일을 생각하면 어찌 아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떼문에 성을 고치는데 사용하기위하여 돈 일천냥을 성을 고치느데 동원된 인원수를 헤아려 각 마을에 나누어주고 그들에게 동계를 조직하게하여 허물어지거나 고치는데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도록하니 이 돈은 원금과 이자만을 늘리는 다른것과는 크게 다르다. 한번 병영에서 돈을 내어 준뒤에는 관청에서는 전혀 관섭하지 아니하고 각 마을의 실정에 맞게 쉬운 방법대로 돈을 늘려 해년마다 계산을 마치고 성을 고칠일이 있으면 그곳에 사용하고 고칠일이 없으면 마을의 경비로 사용하되 백성이 원하는데로 맡겨두고 모두가 바라는데로 하도록 내버려둔다. 만약에 힘을 내세워 모두의 의견을 따르지 않고 제 맘대로 하는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사는 면의 책임자는 아무도 모르게 잘 살피고 조사하여 병영에 고발하면 특별히 다스리고 사용한 돈을 거두어 되돌려 보낼것이니 정식으로 시행하되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지 말것, 또한 처음에는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이제부터 지정하니동문밖의 채성수문은영하면이 맡고,동문내의 채성수문은 옴천면이 맡고,북쪽문의 옹성은 열수면이 맡고,남쪽문의 옹성은 이지면이 맡는다.고쳐야 할곳이있으면 온 면민이나와서 고친다.좌척마을은 34호이며 접시봉 꼭대기의 치첩 100보와 자지첩30보를 책임맡는다. 돈은 9냥이며 경오년 9월8일날 책임자에게 나누어준다. 책임자 - 조상원, 김서홍 이것을 보면 얼마의돈을 나누어주고 그돈을 이자놀이하여 늘리도록 하고 성보수하는데 경비로 최소한(-간식비)사용토록되어있고, 그 당시 병영성 주변주민들의 생활의 어려움-농사도지어야지 적이 처들어오면 징병되어 싸워야지, 이렇게 산꼭대기 성도 쌓고 고쳐야지, 그리고 자기집 땔감도 마련 해야지, 이런 어렵고 고단한 생활을 살펴볼 수 있다 . 가. 동 문 ·장흥 대리에서의 등정로에 위치하고 ·내동문과 외동문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외동문주위는 산성 성터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수인산에서 하산 중 - 현 - 시누대밭에는 청련암이있던터를 확인할 수 있다 계곡에 내동문 옆 수구 (동문은 파손되고 수구는 확인할 수 있음) 청련암 밑 우물터 주위 석축이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건수 않드는 년중 일정한 수량의 물이 나온다한다, .외성벽높이가6m가 넘는곳이있으며 수문쪽의 쌓은돌은 큰 것 은3m*0.9m,작은 것은 0.3m*0.2m을 엇물려 샇은 결석식으로 한 개의 돌이 빠져나가도 무너지지않게 되어있으며 돌사이에는 조개껍대기를구워만들어 이것을 물을 혼합해 만든 접착제를 써서 정으로도 깰수없도록 견고하다. ⊙ 청련암 ·현재 수인사 진월(김희권(76)스님이) 승려생활 시작하던곳, ·6. 25 공비 소탕 작전시 불탔으며(당시 건물 산신각 (1간) -- 기와- 병영의 이진흠이 짛다 칠성각 (2간) -- 기와 대웅전 (법당) -- 기와, 별채 (3간 접집) -- 초가집이 있었다 한다. 6.25동란시에는 유치면 전체 산을 불태움 - 비행기로 기름 뿌리며 태웠다고 전해온다. 당시 어느 골짜기에 모여있는 이동못하는 환자 1백여명이 피할수없어 함께 불탔다 한다.그 당시 유치면에는 7개군 반란군(공비)사령부 집거해있었으며 그 잔당들이 이곳저곳 피해다니며 최후의 저항을 했었다함. ·불탄후 임시 처소를 지어 김 벽담 스님이 거주하다가 1951년경 도암 계라리 홍련암으로 가고 비워 있는 절에 현 진월 스님 거주 시작하였으며 당시 성문암에는 방종태 노스님이 거주하였다. 청련암 아랫 쪽에는 동백림이 있으며 현재도 잡목들과 어울려 있다. 나. 서 문 ·병영쪽에서 현제 수인사를 거쳐 수인산을 오르는 등정로에 위치한다. 병풍바위 틈 사이에 위치하며 현재 이곳으로 주로등정하고 있다. 서문 자리라고 전해오나 남문처럼 보존상태는 양호하지 않다. 성문암이란 암자가 이곳에 있었다.유물로 확독을 확인할수있다.절벽에 수인산성 있을시 몇 재임 병사들의 이름 글씨 새겨져 있음, 수인사 본 사찰 거주 스님 (청학) 대사 이름도 있음. ·성문암은 일제말 김갑두 스님이 목재 함석 4칸 접집 구조로 신축하였다 하며 6. 25때 공비 소탕을 목적으로 출동된 장흥쪽에서 차출된 의용군들이 당시에는 귀한 건축자재라 함석을 뜯어갔다한다. 해방전 한때 병영사는 김용규가 이곳에서 공부 했었다한다. 우물 - 병풍 바위쪽으로 1개소 있음. (현재 확인 가능) 다. 남 문 ·장흥 성불리와 병영쪽 출구 2개 있음. 병영쪽 통로로 옛 병사가 가마 타고 등정했었다 전하는것을 보면 과거에는 병정들이 병영성에서 주로 이 통로를 이용하였음을 알수있으나 현재는 잡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안쪽 연못 2개가있어 말들의 식수등으로 이용되었다 전해오나 물은 없고 자리만 확인 할수 있다. 당시 많은 사람 피난시 생활 용수로 사용 추정. 큰 절터 ( 수인사 본 사찰터) 확인 할 수 있고 이 절에서 표류기를 저술해 우리나라를 서양에 처음소개한 하멜일행이 7여년간 병영에 머물때 상당한 도움을 받은곳으로 추정 - 이 사실은 표류기에서 확인. 현재 강진군(병영)에서 관리하는 헬기장이 있다. 우물터 1개소가 있으며 수량이 이곳 산에 오르면 제일많아 등산객들이 언제나 식수 사용가능하다.- 년중 가믐에도 마르지 않음. 풀메 (멧돌) 밑짝 확인, ·건물터 (7-8)개소 확인 봉수대가 있던 불선봉과 육성으로 서로 확인 가능. 불선봉에는 봉수대 자리를 확인할수있으며 주위 경관과 전망이 깍아지른 절벽과 더불어 훌륭하다.·장흥쪽 통로와 병영쪽 통로사이 등으로 도룡리 뒷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등정로를 확인할수있으며 일부등산객들이 이용하고 있다. 성불리쪽 통로와 병영쪽 통로 다 석축으로 되어있고 이곳 보존상태가 가장 양호하여 과거 성문 구조를 가장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성불리에서 이곳으로 오르다 보면 아래 산자락 절터 확인할수있고, 헬기장 아래 별장터라 전해오는 건물지 확인가능하고, 100여평 평탄지와 5-6미터 높이의 석축과, 수구 -배수로라 전해오는 축조된 굴이 있음(45미터 길이) 이굴이 비밀통로로도 이용되었겠다 추정할수있다. 이곳에서 수인산성의 동, 서, 남, 북문이 정확하게 정방위에 위치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문의 동쪽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침입자들이 얼씬도 못하게 했다 전하며 지금도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0. 병영산성 수성진으로는 별장1인,(종9품의 무관)통인2인,장교 1인(참교이상의 무관) 봉수군2인,사령4인(심부름 하던사람), 급수인2인(물긷는사람), 부독군3인(땔나무를 하는사람),비자 1명등 18명이 배치되어있었다. 라. 북 문 ·병영에서 홈골을 통해 수인산 등정로이며 ·주위에 억세풀밭이 인상적이고 넓고 안전한 평평한 공간이있어 인근 학생들의 소풍시 놀이터로 이용되고 있다. ·북문에서 동문으로 통행로 주위 골짜기에 연 못 2개 (방죽)터를 확인 할 수 있으 나 물은 없다.·북문과 노적봉 사이 골짜기에 건물지를 확인, 우물터 확인 - 현 능수 버들나무 주위 ·홈골 - 쌀남 바위밑 지역에 평탄한 건물터 확인가능하고 이곳에있던 건물 재목으로 현재 수인사 터 건물지에 옮겨 지었다함.- 대흥사 허락 얻어 (최인태 스님 일제말) ·집터 밑 물통골에는 물맞는 곳 확인할 수 있으며 ·여름 등산로로 이용되고있으며 바위 그늘로 시원하기 때문이겠다. 산성을 쌓을때 ( 축조)시 제주도 사람들 까지 와서 작업하였다 전해 오며 제주돌 (화강함-폿돌이라고 부르기도 함)을 6.25때까지 성 축조 재료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전해오며 이 고장에서는 귀한돌이라 등산객들이 가져갔다함 ● 노적봉 ·수인산 최 정상 -해발 561미터이며 정상에는 ·헬기장이있으며 1990-건설부-삼각점 표석확인 ·상봉우리 정상 건물지를 확인할수있고 초소및 봉수대로 한때 이용되지않았을까 추정가능. 임진왜란시 산 노적봉 주위로 볏짚으로 둘러싸 노적으로 위장해서 왜군들을 도망가게 했었다 전해오며 노적봉이란 말을 이로해서 부르게 되었다 전해옴.·날이 쾌정시는 무등산과 제주도 한라산도 확인 할수있다고 전해옴. 0.축성에 대한전설 성을 빨리쌓기위하여 경쟁을 시켰다 전해온다. 마침 누에씨에서 누에가 나던 초여름이었던가. 베 잘짜는 여인 한사람을 골라 혼자누에를 길러서 생초한필을 혼자힘으로 짜내도록 하고 동원된 백성들은 산성샇기를하되 어느쪽이 먼저 끝내는가의 경쟁이었다. 성 쌓기에 동원된 백성들은 열심히 성을 쌓기시작했고 베짜는 여인은 씨누에에서 애기누에를 털어 뽕잎을 먹여 한잠, 두잠, 석잠, 넉잠을 재워 누에가익어 누에몸이 투명하게되자 섶에올리고 고치짓기를 마치자 고치를따서 실을 쓰고 베매기를하여 베틀에 올리고 불철주야 베를짜서 생초 한필을을 자로 재어 끊으니 다수가 동원된 성쌓기는 몇일전에 이미 축성을 끝낸뒤였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세류보통학교에 훈도로 근무한 강효섭선생이 수집한바있으며 1946년 삼인리 김흥연선생이 고-김필선에게 옛적부터 이 전설이 있었다고 확인한바있다. □ 본 기록물을 작성키 위해 ·1996. 4. 20. - 1차 답사, 탐진향토문화연구회원 - 이용희, 김동신, 김승환, 문희원,최재남, 윤철, 최정식, 김성우 ·1996. 5. 10 - 2차 답사 - 최정식, 김성우 ·1996. 5. 20 - 3차 답사 -김성우, 강임수 ·1996. 6, 29. - 4차 답사 (수인사 김희권 (진월, 76)-김성우 ·1996. - 5차 답사하였으며 □ 참고 문헌 ·강진군의 문화유적 ·강진 향토지 . 장흥 문화 □ 조사와 기록을 마치고 조사자료 모음집이 된 것 같다. 전문인이 아닌 본인으로서 미흡한점이 너무 많아 부끄럽다.더욱 주요사항이 메모식으로 기록되어 안타깝다. 그러나 조사하며 너무나 많은 조상들의 땀과, 눈물, 한, 피로 얼룩져있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부담없이 등산할 수 있는 곳, 부근 학생들의 소풍 터로만 알고 있는 이곳을 이 작은 기록물을 읽고 찾아와 한발자국씩 옮기며 공감하며 되 새겨 볼 수 있다면 다행이라 하겠다.그리고 간절히 바래본다. 이를 기초로 하여 더 좋은 기록물이 나올수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