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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교회를 어머니라 부를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다.”
(존 칼빈,)
누구든지 참으로 거듭난 신자로서 성경을 성실히 일독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두 번째 성경을 읽기위해 창세기를 펼치는 순간 처음에 발견하지 못한 감춰진 구절을 읽게 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가슴에는 교회가 있었다!’
참된 중생자의 가슴에는 언제나 참된 교회를 향한 열정과 사랑이 있습니다. 회심과 중생의 경험이란 옛사람이 영혼의 탯줄을 끊고 자아(自我)라는 태반으로부터 떨어지는 순간 교회아(敎會我)로서 그리스도의 몸에 접 붙여지는 중생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묘사하건데 거룩하신 하나님을 직면한 죄인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아래서 눈을 감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젖가슴인 교회에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된 관심은 ‘참된 교회’에 대한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정당한 개념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의 목적과 결과임을 증언합니다.
복음으로서의 전 그리스도의 생애가 거름이 되고 마침내 그 위에 심겨져 꽃과 열매를 토해놓는 구속받은 성도의 자태가 곧 교회인 것입니다. 실로 교회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 (엡01:23)으로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는 영광의 거울입니다.
때문에 교회와 구원받은 성도의 관계는 마치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듯”(창44:30)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개혁자 칼빈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그 믿음의 요람으로서의 교회의 관계를 마치 혼인관계 안에 결속된 부부관계처럼 묘사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가슴에 있는 교회에 대한 지고한 사랑을 이해하는데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저 완전하고 흠 없으며 영광의 단계에 들어선 하늘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찰라 같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동안 신앙의 요람으로 영혼의 탯줄을 묻은 이 불완전하고 위태롭기 짝이 없는 지역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조금도 과장됨 없이 지역교회의 신적인 정체성에 관하여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항상 충분한 증언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영광에 관한 우리들의 찬송이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으로 인해서 초월적이고 우주적이며 승리적인 저 하늘의 교회만을 고대하는 신자들의 궁상스러운(?) 사모가(思慕歌)로 전락해 버린 것은 전적으로 개혁자들의 그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으로부터 단절된 우리 시대의 무지로 인한 결과라고 믿습니다. 연일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기독교계의 부패와 부조리문제나 유력한 교회지도자들의 각종 추문들로 인하여 그리고 진리 안에 행하지 않고 있는 우리들의 세속성을 인해 기독교가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사소한(?) 문제들이 지역교회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과 충성심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지역교회의 정체성 확인하기!
개혁파 정통 안에서 참된 지역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는 벨직신경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공회가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요, 그 외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으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태나 조건 속에 있든지 간에 이 거룩한 모임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며 그 스스로 이 모임의 구성원이 되어야만 한 다는 사실과,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이 공회에 모여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는 바이다”(벨직신경 28항)
본래 초기 기독교회는 교회에 관한 가장 이상적인 개념들을 표명했고 그것으로 충분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니케아신경은 교회의 본질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나는 하나(one)의 거룩한(holy) 보편적(catholic)이며, 사도적인(Apostolic) 교회를 믿습니다”(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그러나 중세 로마 카톨릭교회는 이 신실한 신앙고백을 지상의 정치적이며 제도적인 로마교회를 정의하는 개념으로 변질 시켜버렸습니다. 니케아 신조안의 교회의 본질개념은 중세 1000년 동안 배도한 로마 카톨릭교회에 의하여 오용되었고 이로 인해 개혁자들은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형태의 참된 교회를 변별하기 위한 표지를 선언해야했던 것입니다.
“참 교회임을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복음의 순수한 교리가 전파되고,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성례가 순수하게 이행되며, 교회의 가르침으로 인해 죄를 징벌(권징)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참 교회에 속하는 것이다” (벨직신경 29항)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래된 기독교회의 신앙고백서라고 할 수 있는 사도신경안에서 참된 교회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모두 4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의 사역과 관련된 삼위일체 하나님신앙에 대한 세부분의 고백(신앙의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곧바로 “거룩한 공교회”에 대한 믿음이 이끄는 4번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거룩한 공교회에 대한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실존적 내용을 이끌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새 번역 사도신경)
교회는 참된 성도의 교통과 사죄의 언약, 부활과 영생의 언약을 보증하는 성령의 인과 보증이 있는 곳입니다. 성령하나님의 인과 보증은 신자 개인에게 주어질 뿐 아니라 참된 지역교회를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는 교회가 참된 구원의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복음) 그 구원받은 성도들을 보존하며 강화시키는 하나님의 신실한 목양이 있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지역교회의 목회자 상(像) 회복하기!
이 부분에서 가장 불합리해 보이는 진실 한 가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역교회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한 사람, 목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교회의 참된 표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책임과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는 참된 말씀 맡은 자요, 순수한 성례의 집행자요 그리스도의 정당한 치리의 대리자입니다. 이것은 배도한 교회의 중심에는 언제나 배도한 목사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의 이면에는 언제나 타락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토록 불완전한 사람의 봉사와 섬김을 우리는 전적으로 의지하며 신뢰해야할까요?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지역교회의 운명을 그와 함께 지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입니다.(엡4:8-12)
불완전한 지역교회의 실존은 불완전한 지역교회의 목사의 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역교회의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고스란히 지역교회의 목회자를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이것은 지상의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에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소명이며 동시에 가능하면 피하고 싶은 막중한 책임이겠습니까?
이 거룩한 복음의 상속자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나님의 교회 앞에 서야합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진 만나가 그 말씀대로 취해질 때만이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처럼 참된 말씀을 가르치고 증언할 때만 그 신적인 은혜의 통로요 매개로 인정받을 것입니다. 만일 그의 모든 목회적 행위들이 말씀을 벗어난 그 어떤 것이라면 신속히 부패하여 벌레가 생기는 먹지 못할 만나와 같이 교회의 치명적인 흉물로 전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목회자는 참된 교회가 낳는 믿음의 장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를 기대하는 세속적인 관심사에 의해 목회자상의 심각한 왜곡이 일어납니다. 영혼을 회계해야하는 책임감은 교회성장을 위한 리더십으로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고 한 영혼을 향한 준엄한 책임은 더 많은 신자를 얻기 위한 천박한 성장주의와 업적주의 철학으로 둔갑해 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조국교회의 대형교회화 현상은 매우 불길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형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분명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중의 그늘 안에 익명의 신자들에게 영혼의 회심과 거룩한 성화의 삶을 도전하는 날선 말씀은 거부당하기 일쑤이고 언제나 편안하고 쉬운 예배와 안녕과 성공을 약속하는 위조된 긍정의 복음만이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참된 말씀의 선포는 넓은 예배당 안에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그들은 함께 성찬을 나눌 수 없으며 목사와 교인간의 피상적인 목양관계는 권징불가론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참다운 교회의 표지가 사라지고 있다는 불안함이 점점 심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개혁신앙과 지역교회, 그 심장은 예배에 있다!
지역교회의 정체성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시간은 예배입니다. 우리시대의 개신교진영안에 중세 카톨릭교회의 변형된 형태의 예배가 대형교회 중심으로 유포되어 매우 변질된 예배의 요소들이 중심부를 지배하고 있음을 봅니다. 이렇게 이상한 예배에 중독되어 버린 이면에는 예배에 있어서 말씀의 수위성이 거절되어버린 현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토록 자극적이고 충동적인 음악과 악기들에 의해 지배되어 감정에 몰입된 자아중심의 예배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진리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시대의 감각의 문화가 교회를 지배한 결과 우리는 감미로운 음악과 격정적인 악기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설교자를 대면하기가 힘들어 지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성령에 의해 지식에 까지 거듭난 신자의 지성(골3:10)이 고작 40분이상의 설교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이상한 일입니다. 쓸데없는(?) 찬양단의 봉사는 잠시 후에 시작될 설교를 견디기 위한 예비단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교리적이고 성경적인 설교를 듣기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천착하는 착하고 좋은 마음(눅8:15)과 함께 단단하고 거친 음식을 먹을 수 있는(히5:14) 훈련 곧 교리공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지역교회에서 선포되는 바른 말씀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다운 영적임재와 복음 안에서의 은혜의 교통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 정서에 호소하는 찬양음악과 선동적인 멘트들로 조악하게 기획된 예배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체험을 격려하는 낯선 예배인도자들의 도움 없이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과 사랑이 넘치는 중생한 신자들의 경건함이 지배하는 예배, 그 안에서 중생치 못한 사람들은 참되게 그들의 영혼의 소외를 경험하게 되는 예배가 경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도의 교통이 있는 성찬을 누리기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찬은 첫째, 지역교회의 지체들의 연합이라는 측면에서 애찬(愛餐)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체들과의 불화, 갈등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상징하는 ‘그 떡’의 나눔을 통해 회복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참된 성찬은 참된 지역교회, 특히 공동체간의 인격적인 관계가 일어날 수 있는 규모의 교회 안에서 가장 효과적인 은혜의 방편이 됩니다. 도데체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익명의 신자들과 함께 나누는 요식적인 성찬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둘째, 성찬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심판을 경험하는 ‘심판대’로서 직면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찢겨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확고한 언약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누구든지 이 은혜의 식탁을 경멸하거나 부주의하게(지식 없이) 참여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이며 필연적으로 자기의 죄(심판)를 먹고 마시는 행위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는 이로 인한 하나님의 가시적인 징계가 있었습니다.(고전11:29-30) 이처럼 참된 성찬은 우리들의 신앙의 진정성을 가름하는 중요한 표지가 되며 참된 복음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찬은 복음을 선포하고 확증하는 강력한 전도행위입니다. 성찬은 세례 받은 지역교회의 지체들만이 참여합니다. 세례는 성령의 인침의 가시적인 확증으로 거듭난 신자의 표징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성찬을 행하는 것으로 저 세상을 정죄하고 교회 안에 있는 불신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강력한 전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고전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나는 주님의 지상교회의 영광을 믿사오며...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된 여러분, 세상이 한없이 커 보이는 것은 교회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메뚜기같이 작게 보이기 때문에 가나안 사람들은 거인처럼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지역교회가 불완전하고 미약하여 유혹과 시험 앞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그 곳에 있습니다.(마16:18)
홍수로 세상이 물로 범람하기 시작할 때도 방주는 물위에 있었고 가장 높은 산까지 덮을 만큼 온 세상이 물에 잠길 때에도 방주는 물위에 있었습니다. 파도에 요동하면 멀미가 심해지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의 방주가 침몰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참된 지역교회의 이상을 포기하거나 그 표지들을 상실하여 그리스도께서 촛대를 옮기시기 전까지는 이 불완전한 지역교회는 여전히 나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방주 밖에 살인적인 폭우가 있고 심판의 홍수가 넘치고 있기에 노아는 냄새나는 방주를 떠날 수 없었다’고 누군가 묘사했듯이 저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외에 다른 분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는 여기 불완전하기 짝이 없는 지상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는 것을 기꺼이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아01:05)
참다운 개혁교회의 건설이라는 SFC 신앙강령은 지역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들의 확고한 신앙 안에서만 의미 있는 구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첫댓글 I got it. - 20150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