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 이야기
전 의 수
세 노인이 앉아 있다. 얼핏 보기에 여든 살 가까이 들어 보인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바람을 쐬러 나왔나 싶었다. 마침 그 옆을 지날 때다. 막걸리병을 앞에다 놓고 있는 노인에게 다른 노인이 건네는 말. ‘술 즐기는 사람 술 때문에 고생하다 죽더라.’며 ‘운동이나 다른 일을 찾아 즐기라’고 권고하는 말이 들린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엿듣는 듯한 마음에 걷던 걸음을 계속했다.
왕복 6차선에 제법 너른 다리 아래 가정에서 버려진 듯 보이는 쇼파 등을 모아 놓아 쉼터가 되었다. 무더운 여름에는 장애인과 보행이 불편한 노인들이 전동차를 타고 모여 더위를 식히는 곳이다. 나는 매일 저녁 시간에 한 시간 남짓 하천 둔칫길을 걸으며 이곳을 지난다.
걸어가며 “술 즐기는.....”하는 대목이 귓속을 맴도는 건 내가 술을 즐겨 마셔왔기 때문이리라. 근래 들어 기력이 부치는 탓에 마시는 횟수도, 양도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애주가 편에 있다.
장마로 하천물이 제법 불었다. 둔칫길을 걸어가면서 죽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인다. 내가 자란 시골 마을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를 믿으면 죽어 천당에 간다는 가르침을 따르며 교회를 다녔다. 내가 천당과 지옥을 안 건 그때 같다. 나는 종손이라는 굴레를 쓰고 태어났다. 때문에, 조상님 제사를 모셔야 하니 천당에 갈 수 없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등 잔치가 있을 때면 교회에 가 과자부스러기를 받아먹었다. 목사는 종손인 내가 교회에 나타나면 무척 반겼었던 기억이 있다.
나는 열 살 초반에 사람의 시신을 처음으로 보았다. 집안 재종조부의 염습 때였다. 아이들은 염습하는 곳에 들여놓지 않았다. 다만 종손이라는 이름 덕분(?)에 그곳에 있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입었던 옷을 벗기고 복잡한 과정으로 삼베옷을 입혔다. 그러고 비단 도포를 입힌 후 삼베로 된 천으로 일곱 번에 걸쳐 꽁꽁 묶은 후 관에 넣는 과정이 지금도 생생하다. 존엄하던 할아버지의 사후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늦은 나이에 유튜브를 통한 마음공부 강의에 들었던 내용을 되새겨 본다. 평소 상식으로 부처님을 믿으면 역시 죽은 영혼이 극락에 간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마음공부 시간에는 내 상식 속의 가르침은 없었다. 극락과 지옥은 불교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열심히 수행하라고 이르는 한 방편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의 가르침은 수행을 통해 석가모니 붓다를 닮아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사고(四苦)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거라고 가르친다. 배움이 부족한 나로서는 아리송할 따름이다.
나이테가 늘어가면서 육신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쿵쿵하며 들려 온다. 지금의 나는 그 재종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나이보다 더 들었다. 마음공부에서 배운 생노병사의 고통을 짚어 본다. 세상에 나온 고통(生苦;생고)은 기억할 수 없다. 세상에 나온 것 자체를 고통이라 여기는 이도 있지만 그건 또 다른 측면에서의 내용으로 여긴다. 늙어지는 고통(老苦;노고) 또한 나이 들면서 시나브로 주름지고 머리칼 하얘지고 근력이 떨어질 뿐이다. 그러니 큰 고통을 체감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죽는 고통(死苦;사고) 역시 숨이 끊기면 그뿐 아닐까 생각된다. 죽음이라는 게 두렵지 않고 고통스럽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평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네 가지 고통 중에 병고(病苦)야말로 가장 괴로운 고통이 아닐까. 많은 노인은 한결같이 아프지 않다가 죽기를 노래처럼 부른다. 잠자리에 들었다가 자는 듯 죽고 싶다고 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다 병고라는 놈이 오면 반갑지 않더라도 투정 부리지 말고 함께 걸어가라고 하지 않던가.
사람은 태어난 이래 숱한 병마와 겨루며 죽음이라는 종점을 향해 밤낮없이 걸어가고 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이룩했다는 ‘진시황제’도 그토록 피하고 싶은 죽음은 어찌하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죽음이 필연적이라는 걸 잊고 지내기 마련이다. 해를 더해가며 자주 듣게 되는 몸뚱이 무너지는 소리를 북망산천의 메아리 소리로 새겨듣기로 마음먹는다.
막걸리를 즐기던 그 노인의 대꾸는 어땠을까. 먹고 싶은 것 먹으며 즐겁게 살고 싶다 했을지, 술을 끊고 건강을 지키며 살기로 했을지가 궁금하다. 물론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웃어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문득 나이가 많아지면 암에 걸려도 수술하지 말라던 말이 떠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노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엊그제 문학기행 후 마시던 달콤한 막걸리 생각에 입안에 침이 고인다 (23.7.)
첫댓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밖을 봅니다.
어줍잔은 글이지만 비 오는 날 문학기행과 막걸리가 생각나기에
올려 봅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니 그날 문학 기행의 비가 다시 그리워집니다. 비 오던 날을 추억하며 오랜만에 글 한번 써봐야겠어요. ㅎㅎ
술은 참 좋은 거지요. 지나치면 문제가 되지만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하 시인님 한테는 술 이야기가 쬐금 미안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