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보리심(菩提心)을 닦는 차제(次第), 인과칠결(因果七決)
보리심(菩提心)을 닦는 차제(次第)에 인과칠결(因果七決)이라는 것이 있다. 인과칠결(因果七決)이란 정등각심(正等覺心)은 증상의요(增上意樂)에서 오고, 증상의요(增上意樂)는 자비심(慈悲心)에서 오고, 자비심(慈悲心)은 사랑(慈)에서 오고, 사랑(慈)은 보은(報恩)에서 오고, 보은(報恩)은 염은(念恩)에서 오고, 염은(念恩)은 지모(知母)에서 오는 것을 말한다.
[참고] 지모(知母)는 어떤 것인가.
지모(知母)는 어머님의 은혜(恩惠)에 대한 신념(信念), 확신(確信)을 말하는데, 이는 모든 불보살지(佛菩薩智)를 생기게 하는 모(母)가 되기 때문에 이와 같이 표현(表現)한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의 항목(項目)이 있다. 하나는 이러한 차제(次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일깨우고, 다음은 차제(次第)에 따른 실질적인 수행이다. 차제(次第)에 대한 바른 이해(理解)를 일깨우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대승도(大乘道)의 뿌리는 결국 대자비(大慈悲)라는 것과 모든 중생들의 생사(生死)가 대자비(大慈悲)의 원인(原因)과 결과(結果)라는 도리이다.
대승도(大乘道)의 뿌리는 자비심(慈悲心)이다. 모든 중생들을 윤회(輪廻)에서 구하기 위하여 먼저 서원(誓願)을 세우게 되는데, 모든 중생들을 구제(救濟)하려는 자비심(慈悲心)이 없다면 대승(大乘)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자비심(慈悲心)이 대승도(大乘道)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서원(誓願)은 자량(資糧)을 광대(廣大)하게 수행(修行)하지 않으면 안된다. 난행(難行)의 광대(廣大)한 자량(資糧)에 들어갔다면, 정행(正行)의 근거(根據)에 들어간 것이다. 비록 정행(正行)에 들어섰다 하더라도, 무수한 저열(低劣)한 이들을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움을 보고 위축(萎縮)되어 소승(小乘)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대승도(大乘道)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자비심(慈悲心)을 광대(廣大)하게 증장(增長)하여, 스스로의 고락(苦樂)을 돌보지 않고, 타인(他人)의 이익을 위하여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는 모든 자량(資糧)을 원만(圓滿)하여야 한다.
이처럼 모든 보살(菩薩)들은 대자비(大慈悲)로 자기를 돌보지 않고, 타인(他人)을 구하기 위한 자량(資糧)을 쌓고, 지극히 어려운 행(行)과 오랜 겁에도 모든 중생들을 완전히 성숙(成熟)시키기 위하여 고(苦)를 싫다고 하여 버리지 않고, 낙(樂)을 즐겁다고 하여 취하지 않아야 한다.
이처럼 난행(難行)에 들어간다면, 오래지 않아 모든 자량(資糧)을 원만(圓滿)하게 구족(具足)하고, 조금도 의지할 바 없이. 모든 것을 아는 통지(通知)의 지위(地位)를 얻게 된다. 따라서 모든 불법(佛法)의 뿌리는 자비(慈悲)이다.
모든 부처님께서 과위(果位)를 얻을 때, 소승(小乘)과 같이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고, 허공(虛空)과 같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직 대자비(大慈悲)의 힘에 연유(緣由)한 것이다.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완전히 섭수(攝受)하였기에 모든 불세존은 일체(一體) 원만(圓滿)의 자리(自利)를 얻었더라도, 중생계(衆生界)의 구경(究竟)까지 안주(安住)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불세존(佛世尊)이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인(因)은 바로 대자비(大慈悲)이다. 비유하자면, 곡식은 처음에는 씨앗(種子), 중간에는 물(水分), 마지막에는 성숙(成熟)이 중요한 것과 같이, 부처의 곡식은 처음부터, 중간,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자비(慈悲)가 가장 중요한 인(因)이 된다.
불보살(佛菩薩)은 법을 아주 많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불보살(佛菩薩)이 한 법에 정통(精通)하다면, 모든 불법(佛法)이 그 손바닥 안에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법(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른바 대자비(大慈悲)이다. 세존(世尊)은 대자비(大慈悲)이시니, 모든 불법(佛法)은 보살의 수중(手中)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지모(知母)가 사랑(慈), 자비심(慈悲心)의 인(因)이 되는 도리는 무었인가. 이고(離苦)를 일으킨 이가 중생고(衆生苦)를 생각한다면, 그러한 도리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이 도리를 강렬(强烈)하고 견고(堅固)하게 일으키자면, 먼저 중생들의 즐거움과 가련함에 대한 상(相)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一般的)으로 내가 미워하는 원수(怨讐)에게 고통(苦痛)이 닥쳤다면, 구제(救濟)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좋지 않은 상(相)의 사례이다.
친(親) 원(怨) 중용(中庸)의 모든 고(苦)에 불문(不問)하고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듯 여기는 것은 구제(救濟)의 상(相)을 일으키기 위함을 알아야 한다. 어머니처럼 지모(知母)를 닦고, 그 은혜(恩惠)를 알고, 그 은혜(恩惠)를 갚아야 한다. 중생들을 외아들처럼 생각하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비심(慈悲心)을 일깨울 수 있다.
낙(樂)을 주고자 하는 자비(慈悲)에 있어서 인과(因果)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모(知母) 등의 소연(所緣)은 낙(樂)을 주고자 하는 사랑과 고(苦)를 여의고자 하는 자비의 근본이기에, 이것을 애써 닦아 익혀야 한다.
증상의요(增上意樂)와 발심(發心)이 과(果)가 되는 도리는, 이와 같이 점차 닦아 익혀서 자비심(慈悲心)을 일으키면 곧 중생들을 위하여 성불(成佛)하려는 바람이 생기므로, 이것으로 족할진대 왜 여기에 증상의요(增上意樂)를 첨가(添加)하는 것인가.
중생들에게 안락(安樂)을 주고, 고(苦)를 여의게 하려는 무량(無量)한 자비심(慈悲心)은 성문과 연각에게도 있지만, 모든 중생들의 짐을 대신 짊어짐은 대승인(大乘人)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므로, 큰 용기로 빼어난 증상의요(增上意樂)를 일깨워야 한다. 그러나 생각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므로, 진심(眞心)으로 중생들의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하는 차이(差異)를 분별(分別)하여야 한다.
한량없는 중생들의 모든 이익을 구경(究竟)까지 원만(圓滿)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사유(思惟)하여 보면, 오직 부처님 만이 이러한 모든 능력을 구족하였음을 알게 된다. 이로써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성불하고자 하는 마음을 크게 일깨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