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10
초등학생 때였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란 그림을 보고 단숨에 반했다. 나폴레옹이 백마를 타고 경사진 언덕을 올라가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우수에 찬 눈빛의 나폴레옹은 고급스러운 질감의 망토를 걸치고 특유의 모자를 쓴 채 고개를 돌려 화면 밖의 나를 쳐다본다. 왼손은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저 높은 곳을 가리킴으로써 알프스를 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드러낸다. 세련되고 우아한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전쟁터의 비참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면 뒤쪽에 실루엣처럼 등장한 병사들의 지친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이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알프스를 넘어야 했던 고육지책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 속의 나폴레옹은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하다. 실제와는 다른 이상화된 초상화다.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의외로 많다. 그림만으로도 나폴레옹의 생애를 짚어볼 수 있을 정도로 각 상황에 맞는 인물화가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와 왕비 조세핀의 대관식’(1808)과 앵그르가 그린 ‘옥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1806)는 크기나 예술성이나 나폴레옹의 족적을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단연 압권이다. 코르시카의 촌뜨기였던 나폴레옹이 황제를 넘어 신이 되고 싶었던 야망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 작자미상. ‘무신년진찬도병(戊申年進饌圖屛)’ 부분. 1848. 비단에 색. 각 136.1×47.6㎝. / 국립중앙박물관
헌종이 연회를 펼치다
프랑스에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짐이 곧 국가다”라고 선언했던 루이 14세의 초상화, 마리 앙투아네트의 남편 루이 16세의 초상화, 앙리 1세, 2세 등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초상화가 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서구 유럽의 황제나 여왕, 공주, 공작 등등의 초상화와 그들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는 그림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그림들을 통해 황제의 일상뿐만 아니라 당시의 의상, 공예, 건축, 도자기, 헤어스타일, 장갑, 신발 등등을 고증할 수 있다. 과거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최고의 ‘아카이브’가 구축되어 있는 셈이다.
서두가 길어졌다. 구구절절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칭찬한 이유는 부럽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처럼 역사의 한 장면 속에 실재하는 듯한 왕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무신년진찬도병(戊申年進饌圖屛)’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이 작품은 무신년인 1848년에 창덕궁 인정전과 창경궁 통명전에서 거행된 진찬을 8폭 병풍으로 그린 것이다. 헌종(1827~1849)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순조 비)의 육순과 왕대비인 신정왕후(효명세자 비)가 41세가 된 것(망오)을 기념하기 위해 진찬을 베풀었다. 진찬은 잔치다. 조선의 24대왕 헌종(재위 1834~1849)은 순조의 손자이며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숭)의 아들이다. 아버지 효명세자의 요절로 헌종은 조선 역사상 가장 이른 나이(8세)에 왕위에 올랐다. 때문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고, 15세에 비로소 친정을 했다. 무신년진찬은 할아버지인 순조와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나고 여인들만 남은 상황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였다. 잔치는 3일에 걸쳐 네 차례나 계속되었다.
헌종은 3월 15일에 먼저 순조와 익종(효명세자)의 존호(尊號)를 태묘에 올렸다. 존호는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올리던 칭호를 뜻한다. 다음날인 16일에는 왕이 직접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통명전에서 치렀고, 인정전에서 신하들의 진하례를 받았다. 17일에는 대왕대비전인 통명전에서 연회를 베풀었고(내진찬), 저녁에는 등과 촛불을 켜고 다시 연회가 열렸다(야진찬). 이틀 뒤인 19일에는 통명전에서 왕이 주최하는 익일회작이 열렸다. 익일회작은 본 행사가 끝난 다음날에 다시 베푸는 잔치다. 익일회작 역시 밤에도 다시 열렸다. 연회를 밤에도 여는 이유는 왕실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모두 네 차례의 잔치가 열린 셈이다.
▲ ‘무신년진찬도병’의 1·2폭 ‘인정전 진하도’ 세부
왕이 없는 잔치 그림의 아쉬움
‘무신년진찬도병’은 그 전체 과정을 압축해서 그렸다. 먼저 우측에서부터 좌측으로 1·2폭에는 헌종이 인정전에서 진하례를 받는 모습을 그렸다. 3·4폭에는 통명전에서 낮에 연회를 베푼 장면을, 5·6폭에는 통명전에서 밤에 열린 연회를 그렸다. 7폭에는 통명전의 익일회작을, 8폭에는 진찬에 참여한 당상과 낭청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렇다면 왜 연회를 펼치는 것일까.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세운 나라다. 국시는 국민 전체가 지지하는 국가의 이념이나 국정의 근본 방침을 뜻한다. 유교는 국가의 정치, 문화, 도덕, 법률 등이 모두 예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천명한다. 유교를 국시로 한 조선에서는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뿐만 아니라 민간 행사가 모두 철저하게 예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의례하에서 운영되었다. 궁중에서 거행된 의식이나 행사도 마찬가지였다. 원자의 탄생, 왕세자 책봉, 가례, 국왕의 즉위식이나 회갑 등의 기념일에 축하행사를 펼쳤다. 외국 사신을 맞이하거나 군신들을 위로할 때도 연회를 베풀었다. 이런 크고 작은 행사는 모두 의례에 맞춰서 진행했다. 나라에서는 이런 연향(宴享), 즉 국가적 잔치를 행함으로써 왕실의 위엄을 드러내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동시에 정치안정과 만민화친을 도모하였다.
헌종이 무신년 진찬례를 행한 목적도 다르지 않았다. 형식은 대왕대비의 육순과 왕대비의 망오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근본 목적은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고 왕실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가 더 컸다. 헌종의 재위 기간에는 이양선의 출몰, 천주교의 전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 자연재해의 발생, 역병의 유행, 삼정문란, 민란의 발생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질 대로 흉흉해져 있었다. 헌종은 이런 상황을 뚫고 나가는 방법으로 진찬례를 선택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의 자리에 왕이 보이지 않는다. 1·2폭을 보면 헌종이 인정전에서 만조백관의 축하를 받는데 정작 왕이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 왕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용평상과 의자가 일월오봉도 병풍을 배경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으로만 보면 평상 아래에서 금관조복을 입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대신들은 사람도 없는 빈 의자를 향해 절하고 있는 모양새다. 실재로는 헌종이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지엄하신 왕의 모습을 함부로 그릴 수 없어서 빈 의자로 남겨놓은 것이다. 일월오봉도와 용상이 왕의 상징인 셈이다. 이것은 과장해서라도 황제의 모습을 과시하고자 했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과 완전히 다르다. 그 때문에 왕의 권위가 얼마나 더 높아졌는지는 모르지만 1848년을 살던 당대 왕의 모습은 직접 볼 수 없고 상상으로만 그려봐야 한다는 점이 상당히 아쉽다.
▲ ‘무신년진찬도병’의 3·4폭 ‘통명전 내진찬’ 세부
왕실 여인들의 얼굴은 어디에도…
지엄하신 분을 직접 그리지 않는 관습은 왕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왕비와 왕세자, 대비와 공주 등 왕실 가족 전체에 해당한다. 그나마 왕들의 초상화는 어진으로 그려진 작품이라도 몇 점 전하지만 왕비나 공주 등 조선 여인들의 초상화는 전무하다. 통명전에서 낮에 연회를 베푼 장면을 그린 3·4폭도 마찬가지다. 십장생 병풍이 앞에 놓인 빈 의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앉아 있던 자리다. 역시 빈 의자다. 순원왕후의 빈자리를 중심으로 그 동편은 왕비인 효정왕후의 자리이고, 왼편은 순화궁의 주인인 경빈 김씨의 자리다.
역시 두 사람의 자리도 돗자리로만 남아 있고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헌종의 자리는 덧댄 마루 서쪽에서 동향하여 설치되었고 왕대비의 자리는 우측에 붉은 발로 가려진 곳이다. 모두 다 인물은 빠지고 자리만 있다. 왕실 여인들을 제외한 시녀들의 단아한 모습과 찬안상과 화병에 꽂힌 채화, 화문석의 문양까지 섬세하게 그린 모습을 볼 때마다 아쉬움은 더욱 커진다. 만약 대왕대비와 대비와 왕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더라면 당시의 궁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저 자리에 있던 왕실 여인 중에서 얼굴이 가장 궁금한 사람은 경빈 김씨다. 헌종의 첫 번째 비는 효현왕후 김씨였는데 가례를 올린 지 2년 만에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헌종은 1844년에 효정왕후 홍씨(1831~1904)를 계비로 맞이했으나 후사가 없었다.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대왕대비는 1847년 10월 20일에 후궁이었던 김씨(1932~1907)를 경빈으로 책봉하였다. 진찬례가 있기 몇 달 전이었다. 헌종은 경빈을 매우 사랑하였다. 창덕궁에 있는 낙선재(樂善齋)는 헌종이 경빈 김씨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무정한 세월은 애틋한 사랑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헌종은 1849년 6월 6일에 세상을 떠난다. 진찬례를 행한 지 1년 후였다. 효정왕후는 헌종과 9년, 경빈 김씨는 불과 2년 부부로 살았을 뿐이다. 헌종은 후사가 없었고 결국 왕위는 강화도령 철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니까 ‘무신년진찬도병’은 자리는 있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헌종과 그의 두 아내와 할머니와 어머니가 한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아주 귀한 그림이다. 또한 왕은 있되 없는 사람처럼 유명무실한 자리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그림이다. ‘무신년진찬도병’의 빈 의자는 주인공이 보이지 않는 지금의 대선판을 떠올리게도 한다.
조정육 / 미술평론가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