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를 줍는 즐거움

[총알택시]

오디를 줍는 즐거움

부천누나에게 간간히 전화가 온 것은 순전히 오디 때문이었다. 지금 진들에 오디가 까맣게 익고 있다고 하니 주말쯤 내려와 따가라는 전화였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는 날짜가 달라졌다. 주말쯤 내려오라는 전화는 며칠 앞당겨 금요일로 맞춰졌고 내가 시간이 안 나면 아내라도 보내라고 채근을 했다. 그것은 오디가 익는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까닭이었다. 주말이면 오디가 흐드러지게 익어 전부 떨어질 것 같고 금요일이면 알맞게 익어 오디 따기가 딱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일은 직장 때문에 맘대로 시간을 낼 수 없어 여하튼 시골로 내려갈 날짜를 주말로 맞춰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급한 쪽은 부천 누나였다. 진들에 사는 사돈이 전해주는 연락만 마냥 기다리기가 급했던지 부천에서 고속도로를 타고 상촌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었다. 

낡고 오래된 함석지붕이 덧없이 흘러간 세월을 말해준다 

담쟁이 덩쿨로 둘러싸인 담장

  “얘. 내려왔더니 오디가 하나도 없어, 비바람 때문에 모조리 다 떨어졌어, 비가 상당히 많이 온 모양이야. 오돌개는 기대하지 말고 놀다가려면 그냥 내려와 ”

 누나의 전화를 받고 나서 아쉬움에 입맛을 쩍쩍 다셨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런가 보다고 했다. 주말 저녁  아내와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진들에 도착했을 때는 막 어둠이 깔릴 무렵이었다. 그러나 몰려오는 어둠보다는 먼저 쌀쌀한 날씨가 피부에 와락 달려들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외딴집이라 날씨부터 달랐다. 확 트인 마당에 저녁밥상을 차리고 몰려오는 허기를 채울 즈음, 아내의 팔엔 오돌토돌 닭살이 돋았다.

연두빛 숲속에 둗힌 진들 풍경

붉은토끼풀

 밥상엔 텃밭에서 뜯은 상추와 집 앞 냇가에서 잡았다는 올갱이를 끓인 국이 올라왔다. 거기에다 냉장고에 넣어둔 막걸리까지 몇 순배 돌기시작하자 기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누나 네도 이 맛에 이곳으로 내려와 전원생활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 거주지를 옮기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틈을 내어 며칠씩 이 외딴집에서 꿈같은 생활에 젖다 가곤 했다. 주변 풍광을 보면 남이 한 번 와 봐도 탐을 낼만 했다. 집을 두른 돌담을 뒤덮은 야생화들이나 돌담 뒤로 울창하게 그늘을 내린 감나무와 호두나무들, 그리고 시원스레 펼쳐진 밭이 그랬다.

낡은 울타리 밑에서 노랗게 꽃망울을 터뜨린 황화코스모스

소각장과 양양귀비

이 모든 것들은 계절이 바뀌고 흘러갈수록 유혹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그 유혹은 먼저 누나의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다. 봄에 야콘을 심거나 수확할 때, 감을 딸 때, 호두를 털 때는 부천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그러면 나와 아내는 만사를 제쳐두고 시골로 달려갔다. 봄날에 흐드러져가는 주변 풍경도 한번 볼 겸해서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즉석에서 수확한 농작물이 잔뜩 승용차에 실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주말 내려간 것도 바로 누나의 유혹 때문이었다. 오디는 기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곳에서 하루를 묵고 오는 기분은 도회생활에서 찌든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꺼번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잠자리에 들 무렵, 상황이 돌변하고 말았다. 양철 지붕위로 무엇인가 둔탁하게 떨어지는 소리에 신경이 곤두선 탓이었다.

뽕나무 아래서 부천 매형이 오디를 줍고 있다

올갱이를 줍는 사람들

 매형의 말을 들어보니 양철지붕위로 오디가 떨어지는 소리라고 했다. 그러면 누나가 잘못 알고 전해준 것일까. 비바람이 몰아쳐 오디가 모조리 떨어졌다는 누나의 말에 쩝쩝 입맛을 다셨던 아쉬움이 이제는 한껏 기대로 부풀어올랐다. 내일이면 오디를 원 없이 주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흐드러지게 익어 나뭇가지에 매달리기가 힘겹다는 듯 양철지붕위로 둔탁하게 몸을 던지는 오디들이 빨리 따가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도로옆 밭가에 조롱조롱 매달린 앵두

뒤란에서 오디를 줍고 있는 사람들

오디 떨어지는 소리에 어둠은 점점 더 깊어갔다. 개구리 울음 소리에 맞춰 구슬프게 들려오는 산새소리마저 애간장을 녹였다. 흐느끼는 소쩍새소리도 그렇지만 구슬픈 목청으로 산을 휘젓는 휘파람새의 울음소리는 밤의 적막을 깨고도 남았다. 저 휘파람새는 분명 누구를 유혹하려고 휘파람을 부는 것만 같았다. 맑은 소리를 들어보면 대뜸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 여인을 짝사랑하다 죽은 사내가 휘파람새로 환생한 듯 풀피리처럼 맑고 고운 소리가 잠이 들 무렵까지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차라리 불면증이라도 걸렸으면, 저 휘파람새 울음소리를 밤새도록 들을 수 있을텐데,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었던 그 옛날 시인처럼 나도 그렇게 오락가락 잠을 설쳤다.

함석지붕위로 가지를 뻗어내린 뽕나무

저녁 내내 퍼마셨던 막걸리 때문일까. 자주 마려운 오줌 때문에 바깥을 들락이다  들어오니 매형은 이내 코를 골며 곯아 떨어졌고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어느샌가 문살이 환히 밝아오고 있었다. 해가 동편 능선에서 불덩이처럼 올라올수록 날씨는 뜨거워졌다. 매형이 오디를 턴다고 서두를 때에 난 양철지붕을 뒤덮은 뽕나무를 눈여겨보았다. 정말 크고 우람했다. 내가 왜 여태까지 저 뽕나무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담장위로 솟아오른 늙은 감나무와 호두나무가 너무 가지를 늘어뜨린 탓에 그 사이에 서있는 뽕나무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매형이 뽕나무 밑동을 타고 오르더니 젖먹던 힘을 다해 나뭇기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디들이 흐두둑 지붕위로 떨어져 내렸다. 한바탕 양철지붕을 휘젓고 지나가는 소리가 꼭 소나기 소리처럼 들렸다. 얼마나 나뭇가지를 흔들었을까. 바닥에 깔아놓은 마사포위로 떨어진 오디들이 수북이 뒹굴고 있었다. 오디를 줍는 맛은 쏠쏠했다. 전원생활의 즐거움은 아마 이런 데서 오는 기분이 아닐까. 갈수록 여러 개의 빈 통에 오디가 가득 채워졌다. 따지고 보면 오디만큼 좋은 웰빙 열매도 없다. 어린 시절에야 달콤한 맛에 반해 밭가에 아무렇게나 열린 오디를 따 먹었지만 건강을 생각하는 요즘엔 오디가 없어서 못 딸 지경이 되었다.

도랑에서 올갱이를 잡는 사람들이 보인다

담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아내

 대전에서 큰 통 몇 개 챙겨 오라고 했던 누나의 말을 깜박 잊고 빈 손으로 온 것이 실수였다. 아내는 통을 챙겨 오지 않는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그 통 하나면 오디주 몇 병을 담가 지인들에게 나눠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쳤다. 매형이 있는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흔들었지만 아직도 빨간 오디들이 가지 끝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었다.  하룻밤사이에 금방 익어버린다는 오디, 그 오디들도 아마 내일쯤이면 다른 사람들의 손을 탈 운명에 처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농사꾼인 인식이 형님에 의해, 사돈에 의해, 방금 매형이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었던 것처럼 그렇게 뽕나무가 잠깐 동안이나마 수난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