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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정에 흐르는 가슴 아픈 사랑
진걸 마을을 향해 달리다가 문득 차를 세웠다. 차 한 대 빠져 나갈 수 있는 조붓한 길가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 한 채에 눈이 멎었기 때문이다. 반짝이는 대청호 푸른 물살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놓여있는 정자는 한 폭의 풍경화 속에 들어앉은 느낌이다. 호숫가엔 연두빛 물기를 머금은 버들개지가 실눈을 뜨고 뻣뻣한 대궁을 치켜세운 억새가 잔바람에 허리 굽혀 구걸하는 풍경에 내 마음도 별안간 소슬해진다. 누군들 이런 곳에 멋진 풍경이 있으리라곤 짐작이나 했을까. 바다가 없는 충북의 내륙에 들어앉은 지형이다 보니 이렇게 깊고 깊은 산속에 절경이 있으리라고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대청호가 빚어낸 절경
청풍정, 김옥균과 기생 명월과의 가슴아픈 사랑이 전해져 오고 있다.
아, 청풍정이여, 가슴 아픈 사랑이여
내 눈길은 벌써 청풍정에 머물러 있다. 산길에서 호반을 끼고 도는 청풍정까지의 길은 질척이는 흙길이다. 흙길을 밟고 가는 일행들은 대청호가 빚어 만든 절경에 감탄을 하면서도 눈길은 가끔씩 흙길 주변의 풀밭을 향해 머물러있다. 포실한 흙을 뚫고 살포시 고개를 내민 나물에 취한 것일까. 쪼그려 앉아 쑥과 냉이를 뜯는 여자들의 그림자가 쏟아지는 햇살아래 아련한 추억을 만든다. 청풍정에 다가갈수록 바람결에 떠 밀려온 물결이 철썩철썩 제 가슴을 마구 때린다. 한시도 쉬지 않고 물결이 제 가슴을 때리는 것은 필시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숨어있을 거다.
알고 보니 청풍정에는 남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절절히 녹아있다. 어쩌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과 명월이 속삭였던 사랑은 세월이 몇 구비를 굽이쳐 흘러왔는데도 더욱더 애절함만 더한다.
갑신정변이 청군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김옥균은 돌연 옥천의 오지 마을로 낙향을 한다. 울분을 달래기 위해 함께 내려온 명월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명월의 가슴에 허전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웬일일까. 김옥균이 야망을 꺾고 방황을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 같아 명월은 청풍정 옆 아스라한 바위에 올라 꽃잎처럼 몸을 날린다. 나중에 그 소식을 알게 된 김옥균은 절망한 채 명월의 장례를 치룬다. 얼마나 가슴 아픈 사랑이었으면 청풍정 옆 바위에 명월암이란 글씨를 새겼을까. 비운을 않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마음인들 오죽하랴.
진걸 마을, 오지 마을치고는 집들이 산뜻하고 밝은 기분이 흘러넘친다
대청호반, 가장자리엔 버들강아지가 연두빛 물이 올라 술렁거리고 있다
흰젖제비꽃
그런데 두 남녀의 사랑 행각 이면에 더 가슴 아픈 사연을 않고 살다간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김옥균이 명월과 사랑 에 빠져 세월을 보내는 동안 김옥균의 본처 유 씨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갑신정변이 끝난 후 자결에 실패한 유 씨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옥천에서 일곱살 된 딸과 노비가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는 옥균과 명월의 사랑 행각만큼 못지 않게 가슴을 저리게 한다.
잠시 청풍정에 올라 다시 한번 호수를 굽어본다. 바람결에 밀려와 철썩철썩 제 몸을 부수는 물결과 산뜻하게 연두빛 옷을 갈아입은 호수가의 낮은 산들, 그리고 바위가 빚어 만든 벼랑들은 이 청풍정을 더 없는 절경으로 수놓고 있다.
수몰 전에는 청풍정 옆 벼랑 아래로 진걸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이 있었다고 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금강 줄기를 보며 걷는 맛은 벼랑이 던져 주는 짜릿함과 어울려 환상적인 매력을 더했을 것이다.
꿈결처럼 펼쳐진 대청호의 푸른 호반
청풍정을 빠져 나와 굽이 도는 산길을 타고 내려오자 선착장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실비단처럼 넘실거리는 호수가 앞을 막아서고 그 옆으로 몇 채 집들이 옹기종기 비탈에 걸쳐있는 마을, 쏟아지는 햇살에 형형색색의 지붕이 그림 한 폭을 선사해주는 마을은 영락없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외형 속에 감춰진 마을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 삶이 빈한하기 이를 데 없다. 주변이 산이고 호수다 보니 생계의 근원은 밭농사나 물고기 잡는 일이다. 처음에는 60호나 되는 큰마을이었지만 수몰된 후에는 10호로 줄어들었다. 생계의 근원을 잃은 사람들이 삶을 찾아 인근의 도시로 뿔뿔히 흩어진 탓이다.
잔잔한 물결를 가르며 달려가는 통통배
바위 틈에서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봄맞이꽃
진걸 마을을 뒤로 하고 파랗게 물오른 버들개지가 물가를 가득 채운 호반 길을 타고 일렬로 묘지가 누워있는 야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에도 야생화들이 앞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렸다. 제비꽃, 현호색, 봄맞이꽃, 생강나무꽃이 철없는 어린애들처럼 누구 옷이 더 예쁜지 내기를 하는 것만 같다.
하늘빛을 닮은 현호색은 요란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종달새의 깃을 닮아 닮아 그 이름이 유래되엇다고 하는데 꽃의 모양이 보물주머니 속에 비밀을 가득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꽃말에 “보물주머니”나 “비밀”을 붙인 것도 금방 이해가 간다.
바위틈에도 봄맞이꽃들이 안개같은 꽃을 활짝 펼치고 있다. 보춘화라고도 하는데 봄의 전령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봄맞이꽃 앞서 피어나는 꽃들이 많지만 이 꽃이 피고 난 후에 짙어지는 완연한 봄기운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바위 틈에서 연약한 줄기를 뽑아 올려 눈곱같은 꽃을 피운 봄맞이꽃의 생명력이 놀랍다.
여자들이 풀밭에서 나물을 뜯고 있다
댓잎현호색
쑥과 냉이도 야생화들과 어울려 봄 축제를 연다. 여자들은 맘편히 쪼그려 앉아 쑥과 냉이를 뜯는다. 집안에서 조근조근 살림을 하던 부지런한 손들이 풀냄새 짙은 풀밭에서 맘껏 힘을 발한다. 바쁘게 손놀림을 하다보면 농약에 노출되지 않는 나물들을 얼마든지 뜯을 수 있다. 시장에서 비싼 든 들여 사먹을 수 있는 값어치 이상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나물을 뜯으면서, 꽃 사진에 빠지면서 걷는 발걸음은 이내 묘지들이 일렬로 누워있는 야산에 닿는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의 눈으로 봐도 이 묘지들은 하나같이 명당이다. 여기서도 절경에 취해 누워 있으니 저 묘지의 주인은 죽어서도 호강을 누린다.
솔밭에서 점심을 해치우고 묘지를 돌아 나와 진걸 마을의 속살을 훑는다. 위험스레 비탈에 터를 마련한 집들, 가풀막진 언덕길을 타고 올라 발길 닿은 곳이 부부가 한참 일에 파묻혀있는 집 마당 텃밭이다. 삽으로 골을 파는 남편 뒤에서 씨를 뿌리는 부인, 그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이 부럽다.
사연을 들으니 그들은 이 마을의 토박이가 아니다. 대전에 터전을 마련하고 주말이면 내려와 소일삼아 텃밭을 가꾸는 도시 농부다. 호수 건너편 산자락에서 뿌연 황사에 쌓여있는 장고개 마을이 희미하게 손짓을 한다. 장고개 마을은 막지리 옆 산속에 같은 마을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에 찾아갔던 장고개 마을이 눈앞에 아련하게 손짓을 하고 있으니 친한 친구를 만난 것 이상으로 반갑다. 손나팔을 하고 부르면 그리움의 물결로 되살아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저 편에 닿을 것만 같다.
나물을 캐는 여인네들이 동심으로 돌아간 듯하다
나물 캐러 가는 여자들
올괴불나무꽃
그러나 마음으로만 그리움을 삭일 뿐, 두 마을은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한다. 선착장은 있지만 뱃길이 끊긴지 오래다. 수몰된 마을이 대청 호반의 절경을 빚어냈지만 오지 사람들은 도리어 마음과 정을 통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 절경의 이면에는 문명에 소외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삶이 있다. 그래도 오지마을이 살아있다는 듯 모터를 단 통통배 한척이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달음질 치고 있다.
진걸 마을을 미리 빠져 나온 것이 아쉬웠을까. 일행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에 차를 받쳐 놓고 잠시 꽃산행을 떠났다. 조용한 산에도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들 제 삶을 구가하느라 여념이 없다. 포클레인으로 밭을 갈아엎고 감나무 묘목을 뽑아내는 사람도 있고 산을 휘저으며 약초를 캐는 사람도 있다.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날개를 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꿩들도 있고 솔숲 그늘에 숨어 키 낮추고 시끄럽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올괴불나무꽃은 매혹적이다. 다른 꽃들보다 ‘올되게 피어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주색 꽃 밥을 달고 꽃잎 속에서 쏙 삐져나온 수술이 인조눈썹처럼 보인다.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는 단아한 여인 같은 꽃, 올괴불나무꽃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서 진한 향기로 출렁거린다.
정지용 생가에도 벌써 꽃이 만발했구나
차는 정지용 생가로 향한다. 작년 겨울 눈발과 고드름에 꽁꽁 얼어붙었던 생가는 마당 한쪽에 명자꽃을 활짝 터뜨려 손님들을 맞고 있다. 싸립문 입구의 아그배나무꽃은 아직 붉은 망울을 달고 있지만 돌담 바깥의 백목련이 백열등 같은 꽃잎을 너울너울 흔들어 생가의 내력을 환히 밝혀준다.
봄꽃이 활짝 피어 있는 정지용 생가
그 당시만 해도 정지용의 이름은 불온으로 낙인 찍혔다. 정지용의 이름을 들먹일 때마다 당국은 그의 이름자 밑에 붉은 밑줄을 그었다. 6.25전쟁 때 실종이 돼 월북설이란 소문이 끓임 없이 나돌았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정지용이 해금된 지금 옥천은 정지용의 감성에 취해 시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생가 앞을 휘돌아 흐르는 보청천을 따라 형성된 구읍에는 하나같이 상점 간판마다 정지용의 시 몇 구절을 달고 있다. 마트나 잡화점, 미용실, 식당은 감성어린 싯구절에 취해 손님들의 가슴에 나른한 봄볕을 당기고 있다. 감성에 젖어 미친 듯 시를 토해내던 정지용이 팝콘처럼 터지는 꽃에 취해 봄볕 환한 마당에 고개를 내밀 것 같다. 완연한 봄을 맞아 꽃들은 저리 피는데 정지용의 싯구절에 취한 사람들은 벌처럼 나비처럼 날아와 생가를 기웃대고 있다.
대청호가 빚어낸 절경
청풍정, 김옥균과 기생 명월과의 가슴아픈 사랑이 전해져 오고 있다.
아, 청풍정이여, 가슴 아픈 사랑이여
내 눈길은 벌써 청풍정에 머물러 있다. 산길에서 호반을 끼고 도는 청풍정까지의 길은 질척이는 흙길이다. 흙길을 밟고 가는 일행들은 대청호가 빚어 만든 절경에 감탄을 하면서도 눈길은 가끔씩 흙길 주변의 풀밭을 향해 머물러있다. 포실한 흙을 뚫고 살포시 고개를 내민 나물에 취한 것일까. 쪼그려 앉아 쑥과 냉이를 뜯는 여자들의 그림자가 쏟아지는 햇살아래 아련한 추억을 만든다. 청풍정에 다가갈수록 바람결에 떠 밀려온 물결이 철썩철썩 제 가슴을 마구 때린다. 한시도 쉬지 않고 물결이 제 가슴을 때리는 것은 필시 말 못할 무슨 사연이 숨어있을 거다.
알고 보니 청풍정에는 남녀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가 절절히 녹아있다. 어쩌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과 명월이 속삭였던 사랑은 세월이 몇 구비를 굽이쳐 흘러왔는데도 더욱더 애절함만 더한다.
갑신정변이 청군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자 김옥균은 돌연 옥천의 오지 마을로 낙향을 한다. 울분을 달래기 위해 함께 내려온 명월과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명월의 가슴에 허전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웬일일까. 김옥균이 야망을 꺾고 방황을 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 같아 명월은 청풍정 옆 아스라한 바위에 올라 꽃잎처럼 몸을 날린다. 나중에 그 소식을 알게 된 김옥균은 절망한 채 명월의 장례를 치룬다. 얼마나 가슴 아픈 사랑이었으면 청풍정 옆 바위에 명월암이란 글씨를 새겼을까. 비운을 않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마음인들 오죽하랴.
진걸 마을, 오지 마을치고는 집들이 산뜻하고 밝은 기분이 흘러넘친다
대청호반, 가장자리엔 버들강아지가 연두빛 물이 올라 술렁거리고 있다
흰젖제비꽃
그런데 두 남녀의 사랑 행각 이면에 더 가슴 아픈 사연을 않고 살다간 여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 몇이나 될까. 김옥균이 명월과 사랑 에 빠져 세월을 보내는 동안 김옥균의 본처 유 씨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갑신정변이 끝난 후 자결에 실패한 유 씨는 조상의 묘소가 있는 옥천에서 일곱살 된 딸과 노비가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는 옥균과 명월의 사랑 행각만큼 못지 않게 가슴을 저리게 한다.
잠시 청풍정에 올라 다시 한번 호수를 굽어본다. 바람결에 밀려와 철썩철썩 제 몸을 부수는 물결과 산뜻하게 연두빛 옷을 갈아입은 호수가의 낮은 산들, 그리고 바위가 빚어 만든 벼랑들은 이 청풍정을 더 없는 절경으로 수놓고 있다.
수몰 전에는 청풍정 옆 벼랑 아래로 진걸 마을로 통하는 오솔길이 있었다고 한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금강 줄기를 보며 걷는 맛은 벼랑이 던져 주는 짜릿함과 어울려 환상적인 매력을 더했을 것이다.
꿈결처럼 펼쳐진 대청호의 푸른 호반
청풍정을 빠져 나와 굽이 도는 산길을 타고 내려오자 선착장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실비단처럼 넘실거리는 호수가 앞을 막아서고 그 옆으로 몇 채 집들이 옹기종기 비탈에 걸쳐있는 마을, 쏟아지는 햇살에 형형색색의 지붕이 그림 한 폭을 선사해주는 마을은 영락없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그러나 외형 속에 감춰진 마을의 속내를 들여다 보면 그 삶이 빈한하기 이를 데 없다. 주변이 산이고 호수다 보니 생계의 근원은 밭농사나 물고기 잡는 일이다. 처음에는 60호나 되는 큰마을이었지만 수몰된 후에는 10호로 줄어들었다. 생계의 근원을 잃은 사람들이 삶을 찾아 인근의 도시로 뿔뿔히 흩어진 탓이다.
잔잔한 물결를 가르며 달려가는 통통배
바위 틈에서도 꽃망울을 활짝 터뜨린 봄맞이꽃
진걸 마을을 뒤로 하고 파랗게 물오른 버들개지가 물가를 가득 채운 호반 길을 타고 일렬로 묘지가 누워있는 야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에도 야생화들이 앞 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렸다. 제비꽃, 현호색, 봄맞이꽃, 생강나무꽃이 철없는 어린애들처럼 누구 옷이 더 예쁜지 내기를 하는 것만 같다.
하늘빛을 닮은 현호색은 요란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종달새의 깃을 닮아 닮아 그 이름이 유래되엇다고 하는데 꽃의 모양이 보물주머니 속에 비밀을 가득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꽃말에 “보물주머니”나 “비밀”을 붙인 것도 금방 이해가 간다.
바위틈에도 봄맞이꽃들이 안개같은 꽃을 활짝 펼치고 있다. 보춘화라고도 하는데 봄의 전령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봄맞이꽃 앞서 피어나는 꽃들이 많지만 이 꽃이 피고 난 후에 짙어지는 완연한 봄기운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바위 틈에서 연약한 줄기를 뽑아 올려 눈곱같은 꽃을 피운 봄맞이꽃의 생명력이 놀랍다.
여자들이 풀밭에서 나물을 뜯고 있다
댓잎현호색
쑥과 냉이도 야생화들과 어울려 봄 축제를 연다. 여자들은 맘편히 쪼그려 앉아 쑥과 냉이를 뜯는다. 집안에서 조근조근 살림을 하던 부지런한 손들이 풀냄새 짙은 풀밭에서 맘껏 힘을 발한다. 바쁘게 손놀림을 하다보면 농약에 노출되지 않는 나물들을 얼마든지 뜯을 수 있다. 시장에서 비싼 든 들여 사먹을 수 있는 값어치 이상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나물을 뜯으면서, 꽃 사진에 빠지면서 걷는 발걸음은 이내 묘지들이 일렬로 누워있는 야산에 닿는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의 눈으로 봐도 이 묘지들은 하나같이 명당이다. 여기서도 절경에 취해 누워 있으니 저 묘지의 주인은 죽어서도 호강을 누린다.
솔밭에서 점심을 해치우고 묘지를 돌아 나와 진걸 마을의 속살을 훑는다. 위험스레 비탈에 터를 마련한 집들, 가풀막진 언덕길을 타고 올라 발길 닿은 곳이 부부가 한참 일에 파묻혀있는 집 마당 텃밭이다. 삽으로 골을 파는 남편 뒤에서 씨를 뿌리는 부인, 그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이 부럽다.
사연을 들으니 그들은 이 마을의 토박이가 아니다. 대전에 터전을 마련하고 주말이면 내려와 소일삼아 텃밭을 가꾸는 도시 농부다. 호수 건너편 산자락에서 뿌연 황사에 쌓여있는 장고개 마을이 희미하게 손짓을 한다. 장고개 마을은 막지리 옆 산속에 같은 마을의 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작년에 찾아갔던 장고개 마을이 눈앞에 아련하게 손짓을 하고 있으니 친한 친구를 만난 것 이상으로 반갑다. 손나팔을 하고 부르면 그리움의 물결로 되살아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저 편에 닿을 것만 같다.
나물을 캐는 여인네들이 동심으로 돌아간 듯하다
나물 캐러 가는 여자들
올괴불나무꽃
그러나 마음으로만 그리움을 삭일 뿐, 두 마을은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한다. 선착장은 있지만 뱃길이 끊긴지 오래다. 수몰된 마을이 대청 호반의 절경을 빚어냈지만 오지 사람들은 도리어 마음과 정을 통할 수 있는 길을 잃어버렸다. 그 절경의 이면에는 문명에 소외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편한 삶이 있다. 그래도 오지마을이 살아있다는 듯 모터를 단 통통배 한척이 잔잔한 물살을 가르며 달음질 치고 있다.
진걸 마을을 미리 빠져 나온 것이 아쉬웠을까. 일행들은 구불구불한 산길에 차를 받쳐 놓고 잠시 꽃산행을 떠났다. 조용한 산에도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들 제 삶을 구가하느라 여념이 없다. 포클레인으로 밭을 갈아엎고 감나무 묘목을 뽑아내는 사람도 있고 산을 휘저으며 약초를 캐는 사람도 있다. 인기척에 놀라 푸드득 날개를 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꿩들도 있고 솔숲 그늘에 숨어 키 낮추고 시끄럽게 꽃망울을 터뜨리는 들도 있다.
그 중에서도 올괴불나무꽃은 매혹적이다. 다른 꽃들보다 ‘올되게 피어난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주색 꽃 밥을 달고 꽃잎 속에서 쏙 삐져나온 수술이 인조눈썹처럼 보인다. 요염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속눈썹에 마스카라를 칠하는 단아한 여인 같은 꽃, 올괴불나무꽃이 오랫동안 내 가슴에서 진한 향기로 출렁거린다.
정지용 생가에도 벌써 꽃이 만발했구나
차는 정지용 생가로 향한다. 작년 겨울 눈발과 고드름에 꽁꽁 얼어붙었던 생가는 마당 한쪽에 명자꽃을 활짝 터뜨려 손님들을 맞고 있다. 싸립문 입구의 아그배나무꽃은 아직 붉은 망울을 달고 있지만 돌담 바깥의 백목련이 백열등 같은 꽃잎을 너울너울 흔들어 생가의 내력을 환히 밝혀준다.
봄꽃이 활짝 피어 있는 정지용 생가
그 당시만 해도 정지용의 이름은 불온으로 낙인 찍혔다. 정지용의 이름을 들먹일 때마다 당국은 그의 이름자 밑에 붉은 밑줄을 그었다. 6.25전쟁 때 실종이 돼 월북설이란 소문이 끓임 없이 나돌았던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정지용이 해금된 지금 옥천은 정지용의 감성에 취해 시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생가 앞을 휘돌아 흐르는 보청천을 따라 형성된 구읍에는 하나같이 상점 간판마다 정지용의 시 몇 구절을 달고 있다. 마트나 잡화점, 미용실, 식당은 감성어린 싯구절에 취해 손님들의 가슴에 나른한 봄볕을 당기고 있다. 감성에 젖어 미친 듯 시를 토해내던 정지용이 팝콘처럼 터지는 꽃에 취해 봄볕 환한 마당에 고개를 내밀 것 같다. 완연한 봄을 맞아 꽃들은 저리 피는데 정지용의 싯구절에 취한 사람들은 벌처럼 나비처럼 날아와 생가를 기웃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