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나 조등처럼 곱게 떠있는 하늘
풀벌레 소리에 취해 버렸습니다. 들풀 향기 가득한 뒷뜰 안 쪽, 허공을 휘감은 풀들이 순을 뻗은 풀밭 속에서 풀벌레 한 놈 , 가슴 찡한 소리를 냅니다. 풀벌레도 상을 당했을까요. 달하나 조등처럼 곱게 떠있는 하늘에선 수많은 꽃잎들이 흩날리며 내려옵니다. 별들이 근조(謹弔)라는 글씨를 쓴 리본을 달고 있듯이 꽃잎을 만지는 손에 눈물 촉촉히 묻어납니다.
잠자는 별
별들도 잠을 자는 걸까요.
사방이 고요합니다.
방금 피어난 꽃들이
별들을 그리워하며 쳐다보아도
별들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습니다.
그리움을 넣어 빚어 만든 열매
해가 넘어가는 산길을 따라 그림자 한 점 설핏 집니다.
눈물에 젖은 산꽃들이 서늘히 그림자를 가립니다.
산길을 가고 있는 그대의 모습 왜 그리 쓸쓸해 보일까요.
꼴짐을 내려놓고 그대 쉬어가는 산길 마다
흐드러진 산꽃들이 달콤한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합니다.
그리움을 넣어 빚어만든 열매는
빛깔조차 붉어 그대 얼굴마냥 싱싱합니다.
별빛 물든 밤
별빛 물든 밤엔 지상도 온통 꽃세상이 됩니다.
별들의 숫자많큼 늘어난 꽃들의 무리앞에 문득 마음이 아픕니다.
꽃들은 얼마나 오랜동안 고개를 쳐들고 있을까요.
별빛 한개씩 켜질 때마다
꽃 한송이씩 다투어 피는 저 약속이 너무나 소중합니다.
별빛 다 사라질 때 꽃들도 고개를 숙이겠지요.
그러면 그 약속 한꺼번에 사라지고 맙니다.
저물녘 어둠이 올 때까지
하늘만큼 높던 고향의 산이 문득 낮아졌음을 느낍니다.
철없던 시절에는 현기증 나도록 아스라히 높던 산이
그렇게 몸집이 줄어든걸 보면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법 합니다.
아마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요.
그대가 보고 싶어 견딘 서른 해의 세월이 산의 몸집을 마르게 한게 아닐까요.
산중턱에 불타는 꽃들의 분분한 열정으로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대를 향한 그리움의 손짓에 저물녘 어둠이 올 때까지 꽃들은 눈물만 뿌립니다
굳은 맹세가 헛된 봄날
붕붕거리는 벌떼의 분주함이 꽃망울을 떠뜨립니다.
죽어도 부끄러운 가슴 열어 보이지 않겠다던 굳은 맹세가 헛된 봄날입니다.
그 가슴 속에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간지러운 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던 꽃망울이 벌떼의 욕망 앞에 속수무책입니다.
한번 피면 쉽게 지는 진리를 알면서도 왜 꽃망울을 못 펴서 안달입니까.
오래도록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벌떼들 다음부터 늦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는 이별입니다
민들레 씨앗들이 뿌옇게 하늘 한켠을 타고 오르며 보금자리를 찾을 준비를 합니다.
이 땅에 한많은 잡초로 태어나서 하늘을 날으는 맛 일품입니다.
툭하면 엉겅퀴 억센 가시에 찔리고 자나깨나 비바람에 시달리던 민들레,
지금 이렇게 자라 하늘을 날아다니면 지상의 모든 것들 부러운 듯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이제는 이별입니다.
멀고먼 구름따라 날으다가 엉겅퀴 없는 세상에 맘껏 뿌리를 내려 살고 싶습니다.
푸르던 청솔 밭은 어딜가고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 무덤의 숫자 앞에 잠시 망연해집니다. 그 푸르던 청솔밭은 어딜가고 황폐한 날의 공허함만 마음 속에 남습니다. 마져 남은 청솔들은 황혼의 머리칼로 술렁이고 그 흔적 희미하게 남은 무덤앞에 누군가 들꽃 하나 꺾어 바칩니다. 아득한 시절, 머슴 하나 바람처럼 산 속으로 들어가 장승이 되었다는 전설처럼 아직도 그대 포근히 잠든 무덤입니다. 꽃이 피었다 지고 창창한 세월 썰물처럼 흘러갈 때 하얗게 소복하고 무덤 앞에 선 여인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흰구름 한 폭 돛단배처럼 넘어가는 서산 마루 위로 서서히 노을이 집니다. 아침일찍 그대를 묻고 돌아오는 만장의 긴 행렬이 바람결에 나부낍니다. 그 무덤하나 더 늘어나서 청솔 밭은 아예 죽음의 그늘밭입니다
불면의 밤
참나무에 쌓이는 달빛 소리에 잠들었던 부엉이가 문득 잠을 깹니다.
아직도 새벽은 멀었는데 달빛은 먼 하늘 길 밟으며 굴참나무로 내려옵니다.
한 번 깬 잠이 쉽게 들지 않아 불면의 밤이 이렇게 괴로운 줄을 몰랐습니다.
붉게 충혈된 부엉이의 눈속엔 여전히 가득한 잠 뿐입니다
은하수가 내린 별빛길로
은하수가 내린 별빛길로 별똥별 하나 지고 맙니다.
아득한 하늘 한 켠에 서 있는 듯 눈빛 깜박이다가
그만 별들끼리 마주 잡은 손 놓고 맙니다.
손목에 힘이 풀린 걸까요.
아니면 뜨겁게 맺은 인연 다 태워 버린 걸까요.
마져 남은 별들이여. 손목 꽉 잡고 놓지 마세요.
별똥별 우수수 떨어지면 이 세상 금방 암흑이 되고 맙니다.
서로 헤어진 혈육 찾으려고
별들은 밤새도록 깜빡깜빡 정신을 잃으며 혼절하겠지요
이별주 몇 잔에 취해
이별주 몇 잔에 취해 고갯길을 넘어갑니다.
진달래 향기에 취한 소쩍새,
산골에 적적한 울음을 뿌리면
그대 품 속처럼 정겨운 산 길 하나 어지럼을 탑니다.
허리춤에 책보 졸라메고 넘던 길,
이제는 뿌연 황토로 얼룩 져서
그대 상처난 가슴처럼 휑하니 산 길 뚫리고 그 길 끝,
아련한 학교는 지금 막 사랑의 아지랑이 한창 피워 올립니다.
그 옛날 생솔가지 연기에 눈물 찔끔거리던 어머니처럼
사랑의 진한 냄새에 눈물 짓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들고 산능선을 쳐다보면
이제 막 봉긋해진 꽃망울 몇 개
그대 젖몽오리처럼 붉게 피가 돕니다.
머리 위에 꽃관을 쓴 새
꽃송이들이 조등처럼 흔들리는데
이름모를 새 한마리 와서 웁니다.
머리위에 꽃관을 쓴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본 듯 합니다.
세상의 슬픔 혼자 짊어지고 하늘이 무너지랴, 땅이 꺼지랴,
울부짖는 그 새는 혹시라도 님이 아닐까요.
붉어진 꽃송이위에 떨어뜨린 눈물 한 줄기
슬픔으로 흥건히 허공에 퍼집니다.
달빛에 취해 잠든 밤새
고독에 취해 밤새도록 잠이 들지 않습니다.
여전히 상수리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스산하고
달빛에 취해 잠든 밤새 주위로 외로움이 싸늘하게 묻어납니다.
아, 세월도 빠르구나.
무성한 잎새 벌써 물들어
지상위에 한 폭 외로운 무덤을 만듭니다.
지리산이 움직이는 소리
지리산 입구에 촛불을 켜고 조용히 앉아 있으면
거대한 산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순간 밤새들도 후르륵 날아 산능선위로 날아갑니다.
산길잃은 짐승들이 흐느끼고
굴참나무 잎새들이 술렁이면
그제서야 동편 하늘이 훤히 밝아옵니다.
아마 새벽빛을 맞이하려고
지리산이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탐욕은 눈발속에 묻고
바람 한줄기 지나가는 소리 더욱 세차고
눈발은 소리없이 흔들립니다.
세상에 가득찬 탐욕을 묻고
찬란한 눈궁전을 지을려고 합니다.
집나간 새들이 돌아와 눈발위에 아련한 발자국을 찍을 때까지
지상이 눈에 쌓였으면 좋겠습니다.
산나리꽃도 아픈 가슴으로
문득 끊긴 길 위에 잊혀졌던 세월이 아지랑이처럼 흔들립니다.
누가 왔다 갔는지 신발자국 선명히 나있고
방금 웃음을 터뜨린 산나리꽃 아프게 꺾여 있습니다.
해맑은 별빛으로 빚어도 봐주는 이 없는 외로운 산골,
햇살을 친친감은 꽃잎마다 더 늘어난 깨점 몇 개,
밤을 지샌 낮달이 하얗게 아래를 내려다볼 때
산나리꽃도 아픈 가슴으로 아득히 낮달을 올려다봄니다.
사랑의 물결
산 너머 산길 양 편이 산꽃으로 붉게 타오릅니다.
벌써 사랑이 절정에 다다랐군요.
무성한 꽃잎 잔뜩 매달고 있던 산꽃들이
산자락에 사랑의 물결을 일으켰군요.
사랑의 노래에 감격을 했던 구름 한 조각이
눈물을 뿌리며 산을 촉촉히 적십니다.
궁전처럼 열린 꽃 속으로
궁전처럼 열린 꽃 속으로
아기벌이 소리도 없이 들어갑니다.
여왕벌을 만나러가는 아기벌의 얼굴이
분화장을 한 듯 뿌옇습니다.
그 때 바람 한 줄기 건듯 불어옵니다.
아기벌은 꽃향기에 감격하여 꽁무니 끄덕이고
마져 남은 꽃들은 더이상 못 참겠다는 듯
사랑 진한 향기를 뿌립니다.
향기로운 꽃향기로 오신 어머니
어머니가 떠나신 빈 방이 냉골이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어머니는 요단강 너머 천국으로 떠나셨다.
천국생활이 재미있는지
여태 소식 한 소절 없고
그 대신 까치만 주인 잃은 설픔에 목쉰 소리를 낸다.
쌀쌀한 초겨울 하늘을 버선발로 밟고 가시더니
꽃망울 붉게 물드는 초봄에 향기로운 꽃향기로 오셨나보다.
집이 그리운지 뜨락 앞이 온통 백목련으로 환하다.
겨울이 탄핵되고 물러간 날
내방쳐두었던 텃밭의 나무들이 내내 지쳐도 돌아오는
봄 앞에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겨울이 탄핵되고 물러간 날
분통터진 하늘이 100년만에 무섭도록 폭설 한 번 쏟아붓고
그래도 분통이 풀리지 않는지 꽃샘추위로 오는 봄을 막았습니다.
잔설이 쌓인 높은 산을 살며시 넘어온 봄은
텃밭의 나무에 아지랑이를 걸쳐놓고
나무껍질따라 알전구 같은 꽃봉오리들을 탁탁 틔웠습니다.
내년엔 일찍 오는 봄을 막지 않겠습니다.
일찌감치 겨울을 탄핵시키고 따스한 봄 날 원없이 꽃 좀 피게 하겠습니다.
그리움의 문패
초막앞에 그리움의 문패를 달겠습니다.
그러면 산새들 날아와 울고 풀벌레 또한 숨이 막힐 듯 울겠지요.
여름 밤 그렇게 많은 무리들이 우는 걸 보면
초막 앞에 그리움의 문패를 단 것이 틀림 없습니다.
중천에 떠도는 달 한덩이 누렇게 얼굴이 뜬 것을 보면 그리움에 목마른 것이 분명합니다.
밤이 몰래 도둑처럼 다가오면
이별의 술잔을 살짝 부딛혀 봅시다.
연한 꽃잎 몇 장 띄워 그대 사는 집까지 보냅시다.
밤이 몰래 도둑처럼 다가오면 내 마음 몽롱히 술에 취하고
그대 얼굴 술잔 위에 떠서 아련한 별처럼 향기롭지요.
그대 보고 싶은 날이면 이별의 술잔을 띄우겠습니다.
내 주위 모두 떠나가고 홀로 남아도 난 그대만을 위해 술을 들겠습니다.
달 그늘 길게 밤 손님처럼 지나가면
경칩이 벌써 지났어도 개구리들 눈 앞에 얼씬 거리지 않네.
달뜨는 봄 밤을 기다리나.
달 그늘 길게 밤 손님처럼 지나가면
늦게사 오는 봄 손님 인가하여 고개 쏙 내밀고 있다가
쉰 목소리 한번 크게 내지르겠네.
논두렁에 나가 보면
입 뗀 개구리들 팔짝팔짝 논두렁에서 뛰어놀다
밤이면 수면 위에 까만 왕방울 눈 내 놓고
별 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겠네
풀이여. 나무여. 친구하며 술 한 잔 할까,
소란스런 봄을 피해 먼 길을 떠나자니 아내가 울고
지친 육신 누우러 먼 산중 떠돌자니 자식이 운다.
먼 길, 먼 산중, 날 받아줄 이 바람 밖에 없는데,
말없는 풀이여. 나무여. 친구하며 술 한 잔 할까,
술기운에 젖어 활짝 핀 꽃 옆에 두고 그 향기 솔솔 맡고 싶구나.
차갑게 흐르는 산골물에 손 적시며
수백 번 절을 하는 물풀 앞에
나 하루종일 앉아 겸손을 배우고 싶구나.
로사리오 기도소리
로사리오 기도소리가 높아질수록 촛대는 눈물을 줄줄 흘러내립니다.
어둠을 걷어내고 밝은 빛을 주시는 하느님
내 마음 속 온전히 하느님 깃드시어 포근합니다.
낡은 집의 문틀이 꽃샘바람에 소란한 소리를 냅니다.
이승을 떠나기 아쉬워 하시던 어머니처럼
꽃샘바람은 하루종일 마당가를 서성입니다.
꽃샘바람이 물러나면 초목들은 곧장 꽃봉오리를 활짝 터뜨릴 기세입니다.
로사리오 기도소리를 들으며
초목들은 제 가슴 속에 촛불처럼 붉고 뜨거운 꽃망울을 맺을 준비를 합니다.
하늘로 부친 엽서
어머니, 천국의 생활이 어떠하신지요. 성서의 요한 묵시록에 나타난 천국은 우리들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고향입니다. 오랜 세월 고목처럼 만고풍상을 겪더니 여든여섯의 마지막 나이에 이승에 종지부 한 점 찍었습니다. 어머니의 그늘은 아직도 크고 넓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떠나신 빈 방을 밤낮으로 지켜주십니다.
어머니, 천국으로 떠나신 지 몇 달이 되어도 빈 방엔 어머니의 그림자 일렁입니다. 주름진 얼굴과 꼬부라진 허리, 삭정이같은 팔 다리가 눈에 선합니다. 텃밭을 거닐며 채소에 북을 주고 거름을 주시던 어머니, 지금 천국에서도 그렇게 혈기왕성한 삶을 사시겠지요.
차고 흰 별들
까마득한 하늘에 무수히 별이 빛나고 북두칠성이 금 바가지로 부지런히 별들을 퍼내어도 하늘은 별들로 무너질 것 같습니다. 차고 흰 별들이 깜박깜박 내 가슴을 찌릅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양심이 뜨끔거립니다. 저렇게 많은 별들이 오늘은 어느 소녀의 집 뜨락에 떨어질까요.
버드나무 새벽안개
새벽안개는 회색빛 물살처럼 가지런히 흐른다
지상에서 허공으로, 허공에서 지상으로
물 알갱이들이 서로 몸을 섞어 패거리로 흐르다가
버드나무 유연한 가지에 놀라 대오를 흐트리기도 한다
물 알갱이들은 그 때 안다
버드나무 가지에 놀라 흩어질 때
제 몸이 산산히 무서져 빈 허공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